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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있으면 20.
(재일 작가 朴慶南 1950년생)
五. "사랑의 매"라는 거짓말
1. 이것은 인권침해
"죽임을 당하고 싶지 않구나" 라고 통렬하게 생각한다. 살인의 으뜸인 전쟁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에 의해 목숨을 빼앗기거나 하면 죽기 전의 사생활이 발가벗겨진다는 것을 TV나 잡지 등을 보면서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1994년 10월 이바라키현 쓰쿠바시에서 어머니와 아이 둘이 살해돼 바다에 버려진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다. 남편이자 아버지인 의사가 곧 체포됐다. 재판이 거듭되면서 얼마 전 고등법원 판결에서는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던 만큼 사건 발생 직후부터 엄청난 기세로 TV 와이드 쇼에 방영되었 다. 그러나 나는 피해자에 대한 보도 방식이 너무 심한 것에 문제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일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범인은 누구인가, 또 그 동기는 무엇인가"라며각 방송국마다 와이드 쇼에서 취재경쟁을 다툰다. "엘리트 의사의 아내" "미인" "밤중에 알바이트" 등등 흥미(호기심)를 끄는 키워드가 여러 개 있어서인지, 톱으로 대대적으로 취급되고 있었다(피해자에게 있어서 운이 나쁘게도, 연예계에서 마침, 특별한 빅 뉴스가 없었던 것도 한몫한 것 같다).
물론 사건을 보도하는 것,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공적인 부분에서 필수적인 일이겠지만, 저렇게까지 사적인 부분에까지 샅샅이 파헤칠 필요가 있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남에게 (하물며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은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평소에는 그런 일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일은 좀처럼 없다. 그런데 일단 사건에 휘말리면 여러사람이 달려들어 발가벗기듯 "프라이버시" 가 너무 쉽게 침범당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사건이니까" 라는 전제하에, 그것을 계속 보도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측도(나도 그 중 한 사람이지만), 타인의 '사생활'이 제대로 들여다보이니까, 이만한 관심거리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피해 여성 A씨의 이혼 경력에 더해, 이혼한 전남편의 "행복하게 사는 줄 알았는데" 라는 인터뷰가 흘러나온다. A씨가 가업인 메밀국수집을 돕지 않고 유아 2명을 맡긴 채 밖으로 일하러 간 것이 와이드 쇼에서 거론되어 귀를 기우려 들으니 이혼 전의 이야기였다.
리포터가 이미 폐업해 버린 메밀국수 가게 근처의 주민에게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부부 사이는?" 등등 상투적인 탐문을 하고 있다. 나는 예전부터 이런게 너무 무서웠다. 인간의 삶은 한 치 앞이 어둠 속이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 세상사다. 절대로 자신만은 괜찮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한번 운 나쁘게 어떤 사건에 휘말리면 리포터들이 금세 자기 집 주변에 나타날 수도 있다. "그래, 귀가는 항상 밤늦은 것 같어요" "빨래를 오후 3시 정도에 널어서 걷지 않는 일도 있었던 것 같아요." 등등 동네 아줌마들, 여러 가지 말을 하겠지요. 어쨌던 남의 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언제 자신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것이다(정말 여러분도 예외가 이닐 겁니다).
A씨가 재봉틀을 대출로 구입하려 했다는 것까지 와이드쇼에서 화제가 됐다. 재봉틀 세일즈맨 인터뷰에서 "아이 옷을 만들어 주고 싶어 대출을 받아 사려고 했으나 결국 대출을 못 받더라고요" 라는 대목이 있었다.
다음은 거기에 대한 게스트 여성의 코멘트이다. "요즘 아이 옷을 직접 만드는 사람은 없잖아요. 사는 게 더 싸니까.” 나는 이 세상에 없는 A 씨를 대신해 “그런 건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어요." 하며 TV 화면을 향해 중얼거렸다.
A씨가 일하던 란제리 펍의 영상이 보도되었을 때도 대단했다. "의사의 사모님"인 그녀가 이런 어울리지 않는 차림으로 손님을 상대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겨 주고 싶었는지, 가게에서의 아슬아슬한 속옷 차림의 여성들을 로앵글에서 찍거나 어느 부분만을 클로즈업한 화면을 몇번이나 끈질기게 비추고 있었다.
사건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데 자극적인 화면으로 보다 센세이셔널하게 시청자를 끌어당기고 싶은 속셈이 역력하다. 이렇게 찍으면 분명 보는 사람이 좋아할 것이라고 제작자가 생각하는(믿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사진사(분명 남성일 것입니다)의 취향의 문제일까.
남성의 시점이라고 하면, 왜, 항상 "미인..."이라는 형용사가 붙는지도, 잘 모르겠다("미인"인지 아닌지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도 궁금하다). 이것도 사건내용과는 관계없다. 남자들의 경우에 "미남 직장인", "미남 교사"... 이런 식으로 표현되는 일은 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땅에서는 역시 "남성 위주 사회" 임을 절감한다. 그런 잣대로 재면 이상한 게 많다. 그런데, "보는 쪽이 기뻐할 것이 틀림없다" 라고 생각하는 제작자 쪽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예전에 모 방송사의 와이드쇼 대담코너를 구성작가로 맡은 적이 있다. 방송국은 보도, 드라마, 정보 등으로 각 분야로 나뉘어 있는데 사회정보국에 소속된 "와이드 쇼"를 가볍게 보는 듯한 분위기가 있었다.
사실 다큐멘터리를 하고 싶은 담당 프로듀서는 자신이 기획하면서도 “자부심도 느끼지 못하는 이런 와이드 쇼는 별로여서 나는 보지도 않는다." 라며 자주 투덜거렸다. 하청 제작사 디렉터도 나를 향해 이렇게 조언(?) 해주었다.
"적당히 하면 돼요. 이런 거 보는 사람은 어차피 한가하고 수준이 낮은 주부들이니까 거기에 맞춰야 해요(그런 당신의 머리에 맞추면 훌륭하겠네요)." (어디까지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얘기니까 혹시나 해서). 와이드 쇼가 흥미를 부추기는 데만 주력하는 듯한 두 사람의 불성실한 말투가 서로 겹쳐 떠오른다.
A씨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A씨의 기구한 31년" 이라는 이름의 프로그램까지 있었는데, A씨의 외모에서 시작해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약력, 일상생활의 소소한 일까지,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 A씨에게는 인권이라는 것이 없는가? A씨가 이세상 사람이 아니니까, 어떻게 다루어도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가해자에게는 인권이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A씨는 어디까지나 피해자인 것이다. 피해자를 다시 한 번 피해자로 만들어버리는 잔혹함, 무신경함, 오만함을 우리(자신과 사회)가 갖고 있음을 생각해봐야 한다.
노골적이고 극단적인 인권유린은 말할 것도 없지만 잘 보이지 않는 인권침해에 대해서도 판단할 수 있는 예리함을 몸에 익혀두고 싶다. 자신의 인권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분명하게 침해받고 나서야 깨닫는 것은 너무 늦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 자신이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도 모두가 조심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건을 통해 와이드쇼를 만드는 제작자 측의 그 엄청난 인권 무시와 자질부족, 무책임함에 강한 의구심을 느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엉뚱한 곳에서 사건이 야기되고 있었다. TBS 와이드쇼 스태프는, 사카모토 변호사의 인터뷰 비디오를, 방영 전 옴 진리교 간부들에게 보여줬고, 그것이 발단이 돼 사카모토 변호사 일가가 살해됐다.
더구나 사건이 보도된 뒤에도 이 사건에 대해 계속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정말로, 인간으로서의 양심이라는 것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것일까. 사카모토 씨 일가의 고귀한 인명을 잃게 했을 뿐만 아니라(빠른 신고로 옴 진리교의 범행을 입증했다면 그 후의 사린 사건 등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 외에도 매스컴은 큰 인권침해를 저지르고 말았다.
마쓰모토 사린 사건의 제1신고자 고노 요시유키 씨에 대한 용의자 취급이다. 옴진리교의 새로운 범죄(지하철 사린 사건)로 오명은 겨우 벗었지만 만약 사태가 밝혀지지 않았다면 계속 인권은 짓밟힌 채였을 것이다.
만약 내가 고노 씨였다면, 억지 범인으로 몰려 사실도 아닌 것을 마구 써대는 억측 기사나 무심한 주위의 시선 등을 견딜 수 있었을지 자신이 없다. TBS는 자숙했는지 일단 와이드 쇼는 중단을 결정하고(중단과 함께 사건의 본질도 흐지부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다른 방송국에서도 노골적인 인권침해가 될 수 있는 보도방식은 꼬리를 숨기고 있다(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청률이 오른다면 또 언제 재발할지 모르는 위태로움을 안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와이드쇼가 위낙 눈에 띄기때문에 이를 중심으로 얘기하여 보았지만 신문 잡지 등 모든 매스미디어 역시 인권침해의 위험성을 늘 갖고 있음에는 변함이 없다.
(최근 일어난 도쿄전력의 여직원 교살 사건의 매스미디어에 의한 사망자를 매질하는 듯한 사생활 폭로 보도는 A 씨 때와 전혀 다르지 않다. 인권 감각의 결여는 끝이 없다. 그래도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질타하는 목소리를 계속 높여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 처지에 놓이면 어떨까." 그 생각을 항상 마음 속에 간직하고 싶다. 그리고 "당해서 싫은 일은 하지 않는다, 해서는 않된다". 마치 표어 같지만, 확실히 머릿속에 새겨 두고 싶은 말이다.
●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있으면 21
(재일 작가 朴慶南 1950년생)
五. "사랑의 매"라는 거짓말
2 "사랑의 매"라는 거짓말
아,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현장에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교사의 체벌 때문에 도치기현의 중학교 3학년이 항의 자살을 했다는 소식에 침통한 기분에 휩싸인다.
마음에 쌓인 깊은 상처를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밖에 드러내지 못했던 그 중학생의 심정이 안쓰럽다. 힘 있는 쪽이 일방적으로 하는 체벌은 "교육적 지도" 라는 명목이든 아니든 폭력임이 분명하다.
아들이 중학교 3학년이었을 때의 일로, 평소 말을 잘 하지 않는 그가 드물게 흥분한 듯 말을 걸어왔다. "아니, 선생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만약 죽거나 다쳤다면 어쩔번했는지 몰라요" 심상치 않은 내용이라 "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야" 라고 관심을 보이며 물어 보았다.
복도에서 선생님이 한 학생에게 주의를 주던 중 지나가던 남학생이 "어, 당하고 있구나" 하는 정도의 가벼운 야유를 한 모양이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 야유를 한 학생에게 다가 가서 심하게 따귀를 때리더니 계단 위에 있던 그를 계단 아랫쪽으로 밀쳐버렸다고 한다.
다행히 부상 없이 끝났다고 하지만, 자칫 잘못했더라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행위이다(후쿠오카현의 여고생이 선생님에게 맞아 사망하는 용서하기 어려운 사건도 있었다). 부상 유무와 관계 없이 밀쳐진 학생으로서는 이런 일을 당할 정도로 내가 잘못했을까 하고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아들 말에 따르면, 그 선생님은 평소에도 기분에따라, 수시로 그러한 체벌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맙소사). 30대 중반 정도의 그 교사는 항상 학생의 마음을 아는 긴파치(金八) 선생님
(武田鉄矢주연의 "3한년 B반 金八先生"은1979년~2011년까지 32년간 일본 TBS에서 단속적으로 방영된, 중3생들과 동고동락 하는 내용의 TV드라마)과 같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말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 행동은 그렇지 못한 것을 보고 학생은 아무도 그 말을 믿지 못하고 불신감만 품게 되었던 것 같다.
교과만 담담하게 가르치고 학생에게 깊이 관여하지 않으려는 직업성 선생님도 별로지만 자존심만을 앞세우는 자아도취(착각)된 선생님도 학생들의 말을 빌리자면 "짜증나는" 존재일 것이다.
이 선생님의 경우는 다소 정신적인 불안정함이 가미된다. 학교에서 만났을 때도 쉴 새 없이 눈을 깜빡이며 상내의 눈을 결코 보려 하지 않는 그 선생님의 태도에는 "괜찮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기도 했다.
학교, 그리고 교실이라는,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에서 벗어난 특수한 공간에서 절대적 권력을 가진 교사는 좀처럼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문제가 있는 선생님을 주변에서 체크하는 것도 현실에서는 어렵다. 전가의 보도처럼 "이게 안 보여요!"하고 내신서를 들먹거리면 부모도 자식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전에 중학생 몇 명을 체벌에 대해 인터뷰한 적이 있다. 체벌을 받았을 때의 기분을 각자 솔직하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짜증 나요. 입으로는 네하고 말해도 내심으론 욕하지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도 맞으면 더 울컥해져요." “선생님과 대적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지만 맞으면 화가 날 뿐이지요.”
체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해봤다. "선생님의 그때 기분에 따라 다르니까 그냥 선생님의 울분풀이지요." "입으로 말하면 알겠는데 엉뚱한 분풀이를 당한 느낌이지요" "바보짓 아닌가 싶어요. 안 때려도 반복해서 말하면 알아 들을 텐데. 군대도 아니고."
중학생들의 속마음을 들어봐도 체벌이 교육적 효과가 없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체벌을 받은 쪽은 겉으로는 수긍하는 듯 하지만 속으로는 반감을 느낄 때가 많다. 일방적이고 완력적인 태도에 몸도 통증을 느끼지만 마음도 분명 자존심을 상하게 할 것이다. 어쩌다 다행히 나는 교사로부터 체벌을 받은 경험은 없지만 상상만 해도 몸이 움츠러든다.
나쁜 짓을 했으니까 교육적 지도(?)로 체벌을 가한다면서, 학생들의 말에도 있듯이 감정을 앞세우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체벌을 당하는 쪽은 그걸 예민하게 느끼신다. 학교에서의 괴롭힘이 심해져 사건이 되었을 때 원인을 찾아가다 보면 가해자의 자녀가 부모나 교사로부터 불합리한 체벌을 받은 경우가 많다.
자신이 받은 스트레스는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나의 경우 아이가 어렸을 때의 일로, 나쁜 일을 했을 때, 여러 번 체벌을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짜증을 내거나, 그때의 자신의 기분에따라 화를 내기도 하는 일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식으로 체벌을 해버렸을 때였을 것이다. 큰아들로부터 "맞을 정도의 나쁜 짓을 한 것 같지 않다구 생각한다." 며 따끔한 항의를 받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말 그렇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반성했다.
인간은 선생님도 부모도 신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을 범할 수 있다. 때릴 일이 아닌 일에 손이 먼저 올라가 버려, 잘못되었다고 내심 후회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물론 난처하고 위신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역시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사과하는 편이 양쪽 모두에게 정신위생상으로도 훨씬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생각나는 여자아이가 있다. 익명으로 Y양으로 하겠다. Y양은 배려심이 있고 순박하고 누군가에게도 사랑받는 타입인데도 거식증, 폭식증, 등교 거부를 반복하고 있었다. "착한 아이"가 되라는 심한 강요로 인한, 피로가 쌓이면서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마음 속에 응어리져 있는 것 같았다.
중학교는 간신히 졸업했지만 모처럼 들어간 고등학교에는 다니지 못하고 집에 틀어박히거나 가출을 반복했다. 편지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가끔 그녀와 만나게 되었다. 어느 날 계속 가슴에 쌓여있던 응어리를 토해내듯 Y양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입 밖에 내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고 했다.
교육 관련 일을 하는 아버지로부터 어릴 때부터 체벌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많이 당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단지 아버지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이거나 교육자로서 사회적인 체면때문이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버지의 이중적인 인격이 그녀를 괴롭혀 온 셈이다.
아버지가 입으로는 딸을 사랑하는 듯한 말을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고 기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불신감을 드러냈다. 마음씨 좋은 그녀는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보다(직설적으로 미워하는 것이 정신적으로는 편한데) 자기 자신 안에 모든 것을 봉쇄해 버렸다. 그 때문에 심신의 균형이 가끔 잡히지 않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자책하는 다음 말이 뼈아팠다.
"아직 어렸을 때 여동생이 잉크를 다다미에 쏟았어요. 그걸 발견한 아빠가 동생을 엄청 때리고 벽장에 가두어버린 거여요. 나는 무섭고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다행이다, 내가 아니라서' 라고 생각하면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던,
그런 내 자신이 용서할 수 없이 싫었어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계속 떠안아온 아픔을 밖으로 쏟아냄으로써 무거운 짐에서 다소 해방된 듯했다.
‘애정’ '교육’ ‘훈육’이라는 말(경우)을 내세우는 "체벌"이 정말로 상대를 생각해서 이루어진 것인지는 금방 간파된다. 자신의 감정이 가득한 체벌임이 뻔한데도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체하는 것에 더욱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힌다.
부모나 교사(윗사람, 선배 등)도 보통의 사람이고 발전 도상에 있는 사람이다. 불완전한 삶을 살고 있다. 각각 다른 형태로 자신의 처해진 위치에서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도 많다. 그런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잠시 숨을 돌리고 솔직하게 인정하면 체벌을 받는 쪽도 의외로 너그럽게 웃으며 받아들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Y양의 아버지도 자신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결국 자신을 위해서도 Y양을 위해서도 좋은 일일 것이다. 체벌을 주제로 학생들을 인터뷰한 가운데 한 아이의 말이 인상 깊었다.
"체벌이 '사랑의 매'라니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왜냐하면 정말 사랑이 있으면 회초리 같은 건 들 리가 없는 거잖아요.” 교육이라거나 꼰대질 같은 이유나 미명으로 카무플라주되어 버리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복이 있었구나 하고 부모님께 감사하는 것이 있다. 그게 뭐냐 하면 체벌을 안 받고 자랐다는 것이다..
앞 장에서 썼지만 아버지는 매일같이 어머니에게 심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다(지금도 그 광경들을 떠올리면 가슴은 철렁 내려앉고 어두운 구멍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 든다). 또 폭력뿐 아니라 이기심, 무도함으로 어머니의 마음을 철저히 짓밟는 일상이기도 했다.
그 갈 곳 없는 억울함과 분노를 가까이 있는 나에게 화풀이를 해도 될 것 같은데도 어머니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어떤 경우라도 어머니로부터 화풀이를 당한 기억이 없다. 만약 크든 작든 어머니의 괴로움이 내게 부딪혀 오고 있었다면, 나는 어른이나 주변의 것들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어머니가 온화한 성격이었기 때운이기도 하였겠지만, 그렇게 되었을 경우에 내가 어떤 기분이 들지를 배려해 주었을 것이다. 한편 아버지도 나에게는 결코 손을 대지 않았다. 아버지는 제대로 스스로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정도의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아이에게 손을 대면 안 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어린 시절 때리거나 하면 마음이 위축되어 큰(심성이 고운)인간으로 자라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그럼 어머니는 어른이라서 그래도 되는가 하는 말은 사리에 맞지 않겠지만 폭력은 언제나 어머니에게만 향하니 딸인 내가 봐도 불공평했다).
폭력을 부리는 와중에는 감정도 격했을 텐데 아이에 대해서는 억제가 가능하다는 것은 냉정함을 항상 어딘가에 아버지는 가지고 있었다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체벌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바로잡아야 겠다는, 매우 다급한 상황에 임했을 때, 그 기분을 상대에게 아픔을 느끼게 함으로써 알게 하는 일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간절한 마음과 애정은 뭔가 전해진다. 정말 걱정해주고 있다는 것을 체벌받는 쪽이 실감하면 아픔도 자양분이 되어 뼈저리게 느낀다. 또 맞는 것에 "어쩔 수 없다, 그 정도의 나쁜 짓을 했으니까" 라고 납득할 수 있는 경우에도 체벌이 효과적으로 활용될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딱 한 번, 힘껏 (라고 해도 좀 부풀린 것 같은 표현) 뺨을 맞은 적이 있다.
대학시절 교토에 하숙하던 나는 부모님께는 말하지 않고 가나자와의 대학에 다니는 절친한 친구에게 놀러갔다. 그런데 부주의로 차에 치여 구급차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전신 타박상으로 오른발은 골절, 전치 2개월의 중상을 입었다.
친구로부터 연락을 받은 부모님은 다음날까지 기다렸다가 전철이나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고 바로 그대로 밤새 돗토리에서 가나자와까지 자동차를 몰고 달려왔다. 며칠 뒤 내 상태가 다소 안정돼 의사의 허락을 받자 차 뒷좌석에 이불을 깔고 그 위에 나를 눕혔고 아버지는 시속 3, 40km 정도의 속도로 돗토리로 천천히 차를 몰았다. 돗토리에서 재입원한 후 무사히 퇴원하고 잠시 집에서 요양하면서 나는 완전히 건강해졌다.
이제 슬슬 교토로 돌아갈까 생각하던 어느 날 아버지의 부름을 받은 나는 빰을 강하게 맞았다. 부모에게 잠자코 여행한 것, 부주의로 사고를 당해 몸을 다친 것(유교의 가르침인지 부모에게 받은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은 불효라고 어릴 때부터 자주 들었다), 그래서 큰 걱정을 끼친 것이 혼난 이유일 것이다. 맞아 마땅하다며 오른쪽 뺨의 얼얼한 감각을 손으로 누르며 그야말로 뼈저리게 느꼈다.
(엄마에게 맞은 적이 없다고 나는 최근까지 계속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한번 힘껏 때린 적이 있는 것을 기억하지 못해?' 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내 기억에서는 사라졌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 있을 때 나는 어머니를 향해 아버지를 꽤 심하게 욕했던 모양이다. 이에 어머니는 아버지가 엄하게 대하는 것은 나를 생각해서라고 설파하며 손찌검을 했다고 한다.새삼 체벌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학교 현장에서도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앞서 말했듯이 다급한 상황에서의 애정 어린 선택이었으면 좋겠다. 체벌로 인해 사건(왕따, 자살, 부상, 사망 등등)이 일어났을 때 당사자 주위의 반응으로 늘 내가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부모 쪽에서 체벌을 계속해 달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체벌이 없어지면 규율이나 질서가 문란해진다는 의견이 나온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를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이에 관해 내가 가까이에서 체험한 소중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있으면 22
(재일 작가 朴慶南 1950년생)
五. "사랑의 매"라는 거짓말
3. T선생님의 학생친화적 지도력
아들 중 한 명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30대 여교사가 담임을 맡았다. 입학식에서 처음 본 그 선생님은 입을 다물고 학생들을 노려보듯 둘러보고 있었다. 웃음이라곤 찿아볼 수 없는 얼굴이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이 적중하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체벌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그래서인지 선생님의 구령대로 움직이는 아이들이 됐지만 학생들의 얼굴은 겁에 질린 굳은 표정들이있었다. 수업 참관을 하러 가면 아이들은 작은 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긴장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팔을 뒤로 꼬고 책상 사이를 누비며 아이들을 위협하듯 걸어다닌다. 마치 군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이 끝난 뒤 아이들의 뒷정리가 시작됐다. 조금 시간이 걸리고 있는 한 여자 아이를 향해 선생님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항상 꾸물거려서 곤란하다니까, 어머님 오셨어요? 당신 아이가 꾸물거려서 민폐거든요. 나와서 같이 도와주세요!"
갑자기 부름을 받은 엄마는 학부모들이 서 있던 교실 뒤에서 얼굴을 붉히고 아이 자리까지 달려가자 도와주기 시작했다. 우리(부모)는 그 광경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첫 간담회가 열렸을 때 많은 학부모가 모였다. 아이들로부터 저마다 체벌의 끔찍함을 전해 듣고 있었기 때문인지 불안한 듯 불신에 찬 표정이 많았다.
한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의 머리는 때리지 말아 달라는 말에 그 선생님은 조금 쑥스러운 표정으로 "알겠습니다." 라고 답했다. 그러자 다른 아버지가 즉각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요, 자주 때려주세요. 맞아야 제대로 된 사람이 되니까요. 선생님, 앞으로도 가차없이...” 그 목소리에 격려를 받았는지 선생님의 체벌은 그 뒤로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동급생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드님, 괜찮으세요" 라고 물었다. 자기 아이에게 들은 이야기로, 우리집 아이에게 선생님이 따귀를 때리고, 머리를 눌러 이마를 책상에 세게 부딪히게 했다고 한다. 아들을 불러 살펴보니 확실히 혹이 나 있었다(무심한 어머니입니다). 아들말로는 자기가 떠들었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전화를 준 동급생 집에서는 아이가 밤에 자다가 가위에 눌리거나 경련을 일으킨다고 한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교실에서 다른 아이가 맞고 있는 광경에 공포심을 느끼고 있은 것 같다.
우리집 아이처럼 당사자가 납득할 수 있다면 모를까 이유도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당하는 게 많았다. 우연히 떠밀려 줄이 흐트러졌는데, 그 해명도 들어주지 않고 따귀를 맞은 아이는 크게 분개하고 있었다.
그런 화풀이는 자기보다 약한 쪽으로 향해 간다. 반에 한 명, 몸에 장애를 가진 남자 아이 M군이 있었다. 장애 이유는 분만 시 뇌에 산소공급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M군의 어머니는 말했다. 어떻게든 일반학급으로 보내겠다는 부모님의 희망이 결실을 맺어 같은 반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그 아이의 어눌한 말투를 웃거나 놀리거나 따돌리는 분위기가 교실에 가득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선생님이 심했던 것이다! 1학년이니까 무심코 오줌을 싸는 아이도 있을 수있었을 텐데, 급우들의 심한 눈총이 M군을 정서 불안정하게 만들었는지 자주 오줌을 싸고 있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M군을 모두 앞에서 욕하며 걷어 차기도 했다고 한다. 그 뒷처리를 반 아이를 지명해서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1학년은 천진난만하고 발랄할 때인데 살벌한 공기가 그 반을 덮고 있었다. 보통 2학년까지 반도 담임도 그대로 유지된다. 그렇게 되면 곤란하다 싶었는데 2학년이 되자 선생님이 바뀌었다.
전해진 이야기에 의하면, 이대로 2년간이나 그 선생님이 계속 담임을 맡는다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어떤 어머니가 교육위원회에 문제제기를 한 것 같다(그것이 효과를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학교에서 부임해 온 새 담임은 역시 30대 여선생님이었다.
지난번 담임과는 대조적으로 온화하고 부드러운 표정의 항상 웃는 얼굴의 선생님이었다. 이름은 T선생님이라고 한다. T선생님은 아이들의 목소리가 너무 작다는 사실에 먼저 놀랐다. 복도에 선생님이 나와 그곳까지 목소리가 들리도록 연습시키는 것부터 시작했다.
체벌은 사라졌다. 그러다 보니 몰라볼 정도로 아이들은 생기가 넘쳤고, 각각의 장점을 키워 화기애애한 교실이 됐다. 그래서 메데타시-메데타시(*잘됐다-잘됐다: 동화속의 해피엔딩 후에 하는말) 라고 계속 말하고 있었더니 동화속의 옛날 이야기처럼, 그 변화는 상품의 광고에 자주 사용되는, "사용 전"과 "사용 후" 와 같이 명쾌하고, 그야말로 동화속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훌륭한 반전인 이루어진 것이다.
수업 참관을 가보니 활기찬 수업도 그렇고 전시물에 깜짝 놀랐다. 붙어 있는 모든 그림이 구김살없고 색감도 컬러풀하며 구도도 독창적인 것뿐이다. 개개인의 개성이 그대로 도화지 위에 표현돼 있어 눈길을 사로잡는다.
글쓰기와 시도 행간마다 아이다운 감성이 넘친다. 우리집 아이도 그의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그림이나 작문이나 시의 재능이 가장 개화하고 있었던 것은, 아마 이 2학년 때였을 것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어느 작품이나 빛나고 있었다).
우리집 아이의 말로는, 그림수업 중에 선생님이 관심을 가지고 지도해 주셨다고 한다. "잘 그렸네. 여기를 조금 더 손질해 보면 어떨까. 그러면 더 좋아질 거야." 라고 격려하며 지도해주셨다고 한다.
수업시간에 깜짝 놀란(감동받은) 것은 힘차게 손을 드는 아이들 중에 그 M군이 있었다는 점이다. 손가락질을 받던 M군은 더듬거리지만 제대로 대답하고 있었다. 답의 옳고 그름은 잊어버렸지만 M군은 반 친구 중 한 명으로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M군의 얼굴도 다른 아이들의 얼굴도 모두 밝고 발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M군이 오줌을 전혀 싸지 않게 되었다는 것도 아들에게서 들었다. 더 감동적인 장면이 또 있었다. 학년 말에 아이들이 작별회라며 만든 연극을 보여주게 되었다. 제목은 잊었지만 민화를 재구성한 것이었던 것 같다. 대사를 잊어 우물쭈물하면서도 아이들은 서로를 사이좋게 도와가며 즐겁게 연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이날 주인공은 M군이었다. 머리에 종이 가발을 쓰고 유카타(*일본 전통옷의 일종) 차림으로 분장한 M군은 대사 표현도 능숙했고, 그 명연기 솜씨에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때의 M군에게 보내는 급우들의 친근한 시선과 M군의 자신감 넘치고 고양된 눈동자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또한 잊을 수 없는 것으로는, 마지막 학급 간담회 자리에서 M군의 어머니가 차분하게 한 말도 가슴에 새겨져 있다. “계속 어둠이었어요. 하지만 덕분에 이제야 긴 터널 너머로 빛이 보이는 것 같아요.” 손수건을 눈에 대며 만감이 교차하는 듯이 한 말이었다.
M군이 1학년이었을 때, 그 전의 선생님에게 어떻게든 장래에 M군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목표라고 어머니가 말했더니, 일언지하에, "그런 것은, 무리예요!" 라고 냉담하게 일축당했다고 한다. 필시 억울하게도 낙심해 버렸을 것이다. 그런 만큼 M군의 어머니에게는 T선생님과의 1년간이 보람있고 희망찬 시간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담임은 불과 일 년뿐이었지만 분명 아이들 마음 속에는 T선생님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실제로 그 후에도 다른 학년 담임을 한 T선생님의 평판은 훌륭했다. T선생님의 클래스 학생들은 개성 있게 자신을 표현하고 학급 행사에는 적극적으로 다 같이 임해 성과가 오른다고 한다.
종전의 아들 반의 담임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교실 분위기는 밝고 생기 있으며 왕따 같은 음습한 것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다. 고학년이 되면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의식하기 시작해 선이 그어지는데 T선생님의 반은 남여 학생들의 사이가 좋기로도 유명했다.
남학생들에게는 T선생님이 여자의 이상형이 되고, 여학생들에게는 커서 T선생님처럼 되고 싶다고 말한다. 개구쟁이부터 공부벌레까지, T선생님을 싫어하는 학생은 없었다(물론, 부모들도 그렇다). 그야말로 희귀한 선생님이다.
T선생님은 열혈하지도 않으며 학생들에게 자신을 과시하지도 않는다. 또한 냉담하여 한 걸음 물러서 있다는 느낌도 아니다.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극히 상식적이고 정상적으로 대응하는 선생님이다.
체벌 같은 건 물론 없다. 그래도 학생들은 선생님 말을 잘 듣는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교육이다. 왜 그럴까? 신기했다. 야구의 오기-마법(*仰木彬 おおぎあきら: 1935~2005 유명 야구감독) 못잖은 특별한 T식 마법이라도 구사하고 있는 것일까. 그 깊은 뜻을 알고 싶었다.
T선생님에게 작심하고 한번 그 비밀(비결)을 물어봤다. T선생님은 조금 수줍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것도 특별한 건 없어요." 그럴 리가 없다. 뭔가가 있을 거라고 다시 나는 물어 보았다. T선생님은 잠시 생각하고 나서 말을 덧붙였다. “그냥 어느 학생에게나 똑같이 대할 뿐이에요.” ‘T식 마법’의 근본은 의외로 단순했다. 그러나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는 오징어처럼 되새겨보면 이렇게 함축성이 있는 말은 없다.
어느 학생에게나 똑같이 대한다는 것은 쉬운 듯하면서도 어렵다. 학급 안에는 다양한 학생들이 있다. 활발하고 눈에 띄는 아이, 소극적이고 얌전한 아이. 공부 잘하는 아이, 못하는 아이, 스포츠 잘하는 아이, 다루기 힘든 아이 등등 다양한 아이들이 있다. 편애까지는 아니더라도, 선생님도 인간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취향이나 경우에 따라, 대응에 차이가 날 것이다.
아울러 평등하게 살피는 것도 상당한 주의력이 필요한 일이다. T선생님은 분명 학생에 대한 마음 씀씀이, 진솔한 배려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T식 마법의 가장 큰 비법이지 않을까.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받아들여지면 사람은 정신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 상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교육 현장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친구들 사이에 있어도 인간관계를 맺을 때의 기본이 아닐까 싶다.
또한 수용한다는 것은 그 인간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인다는 것일 것이다. 못생겼든 불완전하든(인간은 누구나 그렇지만) 그대로 받아들이면 서로에게 안도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면 현재의 자신에게 만족하게 되고, 안도감이 생기면 자신을 외부로 노출시킬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다. 안정감 그리고 안심감이 사람과 사람의 교제의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자세는 상대 물론, 자기 자신부터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T선생님이 학생들을 그렇게 대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왕따를 비롯해 여러 문제가 일어나는 배경에는 마음의 불안정함, 불안감이 스트레스가 되어 소용돌이치는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꾸짖고 반성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밖으로도 안으로도 서로를 받아들이고 배려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방법이 아닐까. 나 자신도 아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대할 때 T선생님에게 배운 이 방법(자세)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있으면 23
(재일 작가 朴慶南 1950년생
에필로그 생명을 빛나게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언제 어떤 때라도 이 한 점만을 염두에 두고 있으면 어떤 난관도 뚫고 나갈 수 있다. 극한 상황에 쫓겨 어쩔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생명이(살아) 있으니까 괜찮아, '나중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식으로 모든 걸 내려 놓으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해진다.
또, "생명"을 소중히 여겨지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점을 기준으로 하면, 국가나 체제, 주의 주장, 여러가지 집단(회사, 학교, 병원 등)에서의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 끊임없이 그 기준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려한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있으면"이란 주제로 이야기를 진행해 왔지만, 그 중요한 생명은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바탕이 되고 있다. 그것이 있어야만 다른 생명의 중요함도 알 수 있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혹은 축복받은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소중하게 생각되지 않는다(느껴지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 생명을 자신의 힘으로 소중히 안아주야 할 것이다.
모처럼 태어난만큼 생명을 빛내고 싶다. 그것이 삶의 의미가 아닐까. 그리고 자신뿐만 아니라 인연을 맺고 더불어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빛날 수 있다면 그 빛은 더욱 값진 것이 되지 않을까.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에서 발행하는 "동붕(同朋)"이라는 작은 월간지에서 인터뷰를 했다. 타이틀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있으면'이었다. 효고 대학의 교수이자 승려이기도 한 나카무라 료곤(中村了権 1939~)씨와의 문답을 하고 그 내용을 정리하여 올려 주셨다.
아래는 '생명'에 관해 본문 중에서는 언급하지 못했던 부분도 포함하여 제 생각이 집약되어 있는 그 월간지에 실린 내용을 발췌를 한 것입니다.
스님(문): ‘생명’이라는 것은 ‘자연계의 하나의 물체이며, 자연에 싸여 있다’(‘두둥실 달이 솟아나오면’ 35관간행 박경남著)라고 언급했듯이 그 ‘자연 속의 생명들’에도 감응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답(나): 우리가 살아나가는 에너지의 공급원은 그 자연 속에서 얻고 있습니다. 그 다양한 자연의 '생명', 예를 들어 그것이 한 그루의 나무이거나 화초이거나 작은 벌레였다고 해도 그 '생명'에 위아래는 없지요. 즉, 자신의 생명과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사고입니다. 그건 학습한 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감각적으로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스님: '생명'이란 것을 민감하게 의식하고 계셨군요,
답: '생명'은 모두 같은데, 예를 들어 자신은 여러 생물의 '생명'을 먹는 것으로, 그것의 희생 위에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 감각으로는 이 사실에 죄책감이라고 할까,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내가 걷고 있을 때에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작은 벌레의 생명을 밟거나 풀의 생명을 짓밟거나 하고 있구나, 하는 감각 말입니다. 저는 불교도도 아니고 신앙하는 종교도 없지만, '살생'을 해 버리고 있다는 것과 같은, 특히 저 혼자의 생명이 산다는 것은 다른 많은 '생명' 위에 이루어져 있구나 하는 감각이 강했습니다. 그런 제가 너무 싫었을 때도 있었습니다.
스님: 그건 상당히 종교적인 지향성이군요.
답: 그때 스스로 결론지은 것은,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생물을 희생시킬 수 밖엔 없지만, 예를 들어 생선을 먹을 때는 고맙게 생각하고 맛있게 먹자. 먹게된 이상, 그 생선의 '생명'은 내 안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어 간다. 그래서 '생선을 위해서라도 제대로 살지 않으면 미안하다' 그런 생각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스님: 그렇군요, 희생되는 쪽에 용서를 구한다는 심정인가요?
답: 그리고 저는 역사의 흐름 속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요. 즉, 지금 자신들이 살 수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사회를 열심히 만들어 온 덕분이지요. 그 사이에는 비참한 전쟁도 있었고 돌아가신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역사 위에 서있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나도 그런 역사적 입장의 인간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제대로 자각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예를 들어 재일 조선·한국인이 일본에 살고 있는 것의 역사적 사실이나 배경 등도 포함하여 다양한 것을 전해 주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스님: 생명 하면 또 하나, 비인공적인 것이라는 실상이 보이네요.
답: 자연계에는 많은 '생명'이 서식하고 있고,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벌레들도 살고 있지요. 그 작은 벌레를 으깨는 것은 아주 간단해요. 하지만 엄청나게 정교한 과학으로도 그 작은 벌레의 생명조차 낳을 수는 없습니다. 그 일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까, 자연에 대한 겸손함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 '생명'에 대한 경외심 깊으신 것 같습니다.
답: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것 즉 사람의 육체적인 생명을 빼앗지. 말 것, 그리고 정신적인 생명을 짓밟지 말 것, 최소한 이 두 가지라만이라도 지켜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존엄이기도 하고 긍지이기도 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나 자신 최소한 이 두 가지를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외에는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삶을 살아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가치 기준을 내 안에 수용해 나가고 싶다는 것은, 즉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나가자', '있는 그대로의 정신적인 생명도 육체적인 생명도 사랑해 나가자'는 마음이 제 안에 기본적으로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러한 일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도 "당신은 존재만으로도 멋져, 태어나길 잘했어. 여러 가지 자연의 '생명'들의 희생 아래서 당신의 생명이 유지되고 있고, 모처럼 주신 고마운 '생명'이니까 감사하게 살아야 하고, 나도 그 멋진 '생명'을 빛낼 테니까 당신의 '생명'도 빛내주세요." 라는 것업니다.
스님: 지금 자연의 '생명' 자체와 솔직하게 마주할 수 있는 환경이 우리들 주변에서 점점 줄어들고 있지요.
답: '생명'이라는 개념이 자기 마음속에 없는 거죠.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일 수 있고, 괴롭히는 것이 아닐까요. 대지에서 자라는 풀 따위를 보거나 뽑을 때 문득 느끼는데, 그 한 포기의 풀은 여러 자연의 '생명'과 어우려져 있습니다. 즉 '생명'은 전부 연쇄반응적으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지금 그러한 것을 느끼고 깨닫을 수 있는 학습이 요구되는 시대라고 성각합니다.
스님: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그 사람들의 '생명'과 제대로 마주하고 살아가자는 식의, 즉 '공생'이라는 감각이 희박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답: 그 '공생'이라는 것은 여러 인간들이 함께 산다는 것도, 여러 가지 자연과도 함께 사는 것도, 성이 다른 남녀에게도, 신체에 여러 가지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모두 함께, 차별 없이 이 지구상에서 평온하게 살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종교라는 것은, 이것은 하면 안 된다, 이것은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하는 규범이라고 할까, 그런 것의 핵심을 제대로 자신의 안에 만드는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 마음속의 종교관입니다만, 사람들 중에는 '종교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겸손함이고, 자연의 '생명'에 대한 경외이며, 그러한 '생명'에 대한 경외의 감정 그 자체임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스님: 지금 말씀하시는 '종교성'이란?
답: 근원적으로 '생명' 속에서 느끼는 자연의 혜택에서 받은 '생명'은 얼마나 위대한가 하는 실감입니다. 그 '생명'의 고마움이나 겸손함, '생명'에 대한 경외의 심정이죠.
하나하나의 '생명'은 한없는 우주 속에 품어져 있어, 유구한 작용 속에서 생겨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그런 종교성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각각의 종교에는 나름대로의 진리는 있겠지만, 하나의 교단·종파가 되면 배타적이 되어 종교 전쟁마저 일으켜 서로 죽이기도 하잖아요. 이런 것의 해결도 우선 '생명'을 기본으로 두는 종교성만 있으면 모두 부드럽게 연결되고, 서로 인정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여러 가지 사고방식이나 종교가 있어서 좋다고 생각하지만 모두가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종교성'이고, '생명'을 근저로 이어가면 여러 가지 다툼은 일어나지 않지 않을까요?
나는 앞으로도 살아 있는 한 '생명의 소중함'을 계속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국적, 민족, 인종, 종교, 성별, 나이 등을 불문하고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공통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두 생명(육체와 정신)’을 주제로 이야기를 진행해 왔지만 마지막은 역시 이 말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있으면!"
●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있으면 24
(재일 작가 朴慶南 1950년생)
맺는 말
생명을 주제로 한 책을 내기로 약속한 것은 3년 전쯤이었다. 따로 진행하던 일이 드디어 일단락되고, '자!' 하고 연필을 움켜쥐던 그 무렵, 프롤로그에서 기술한 것처럼 정작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 실감나는 목숨을 건 체험담이 결과적으로 이 책의 도입부가 됐으니 앞뒤가 맞았다는 얘기가 되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로 목숨을 잃어버렸다면 이 책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내가 살아서 여기 있다는 증거 같은 것이라고 해도 좋다. 그야말로 감개무량하다.
원고지에 자신의 생각을 적고 있을 때 그 앞에 독자 여러분의 존재가 늘 있었다. 책을 들고 읽어주신 게 고맙고 기쁘다.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본편에는 잡지 "세계(世界)"(1993년 1월호~94년 12월호)에 연재한 "박경남의 수다 상자", 그리고 "주간 금요일"(1994년 7월 8일호~95년 8월 11일호)에 연재한 "박경남의 생명의 노래"의 일부에 가필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그렇기 때문에 시사적인 것은 현재를 다소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는데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잡지 "세계(世界)"의 연재 첫회에 미국에 사는 13세 일본인 소녀를 언급했다. 본문에서는 소개하지 못했지만, 저의 졸작 "꿈이여!"를 미국에서 읽고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일본과 한반도의 과거사를 바탕으로 미래를 개척해 나가려는 자세, 그리고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아픔과 공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 소녀 사카이 유리(酒井悠里)양이 재작년 귀국해 대학생이 됐다. 재일교포 학생이 주최하는 동아리에도 들어가 장래에는 저널리스트를 목표로 활발하게 노력하고 있다.
정말 감사하게도 글과 말로써 유리 양을 비롯한 젊은 사람들로부터 매우 많은 편지와 격려를 받고 있다.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샘솟는다. 동시에 자신이 던진 것에 대한 책임감으로 긴장감이 더해진다. 목숨을 소중히해야 한다고 절실히 생각한다.
'나는 남을 괴롭히지 않는다'라고 글속에서 공언해 놓고, 상당히 곤욕을 치르게 한 편집의 다카무라 고지(高村幸治)씨, 교정의 오쿠요코(奥様子)씨, 죄송합니다. 덕분에 책이 완성되었어요. 사과와 감사의 말로 끝맺음을 합니다.
1997년 5월 박경남(朴慶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