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정말 지켜야 할 것과 버릴 수 있는 것을 혼동하며 살아갑니다. 올해 한국프로야구의 수위타자가 된 선수는 LG트윈스의 박용택선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선수를 수위타자를 만들기 위해 동료들이 경쟁자였던 다른 팀의 선수를 고의사구로 4연타석을 내보냈고 그렇게 해서 박선수는 수위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할 때 가장 정정당당하다는 스포츠마저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과연 무엇이 더 가치있는 것이었을까요? 정당한 승부를 통해서 2등을 하는 것보다 수위타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더 가치있었을까요? 미국프로야구 유일의 4할타자인 테드 윌리엄스는 2게임을 남기고 꼭 4할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굳이 그가 그 2경기에 나서지 않아도 되었지요.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약 내가 경기에 나가서 안타를 치지 못해 4할 타자가 되지 못한다면 내가 4할 타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말이 아닌가?' 그는 그 두경기에 출전해서 8타수 6안타를 쳤고 미 프로야구 역사에 남은 타자가 되었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할 때입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는 그런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그 어느때보다 그리스도인들의 가치관이 빛날 때인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나오미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기근이 들어 모압땅으로 이사를 갔지만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소망없이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의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 우리 신앙에 부어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함께 들으면 은혜와 결단의 시간 되기 바랍니다.
먼저 성도는 결코 하나님과 그의 약속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성경에 기업이란 떠날 수 없는 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는 말은 아브라함은 그 땅을 떠나면 안되는 사람이란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아브라함도 기근때에 애굽으로 갔다가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 겨우 목숨을 보전했지만 아내를 바로에게 빼앗길뻔하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옵니다. 그것이 교훈이 되어 아들 이삭을 위한 며느리를 맞이할 때 절대로 하란 땅으로 이삭을 데리고 가지 말라고 하인에게 신신당부를 합니다. 혹여라도 이삭이 하란땅이 좋다고 가나안을 떠날까봐 염려했던 것입니다.
엘리멜렉 가족에게 주신 베들레헴이란 지역도 이 가족이 결코 떠나서는 안되는 기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기족에게 땅을 주시고 그곳에서 살도록 정하여 주신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족은 기근 때문에 고민없이 베들레헴을 떠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그러면 아무 곡식도 없는 그 땅에 남아 굶어죽으라는 말인가? 여러분이 아시는 하나님이 그렇게 잔인하신 분이던가요?
그런데 여러분! 1절을 보면 베들레헴에 살던 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모압땅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베들레헴에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남은거죠. 그들은 바보처럼 그 기근이 든 땅에 남은 것입니다. 이 엘리멜렉 가족만 약삭빠르게 베들레헴을 떠났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인간적으로 너무 그곳에서의 삶이 힘들어 떠난 것을 갖고 비난할 수 있는가? 아니 하나님은 그 가족을 남편도 자식들도 다 죽일만큼 그들이 잘못한 일인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요 이 가족이 그렇게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잔인한 분이 아니셨어요.
요즘 생계형 범죄라는 말이 있죠? 먹고 살자고 법을 어긴 것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처벌하자는 것입니다. 먹고 살자고 하다보니까 어쩌다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관용을 베풀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엘리멜렉 가족에게도 하나님이 이렇게 다루시면 안되었을까?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오미의 고백입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아니 기근이 들어서 모압땅으로 나간 사람들이 풍족하게 나갔다니? 이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죽지 못해 살려고 나간 사람들이 풍족하게 나가다니요? 결국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기근이 들었지만 여전히 많은 것들 소유한 풍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기근의 때에 풍족한 사람들의 의무가 무엇입니까? 그렇죠? 굶주린 사람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풍족함을 그 가족에게 허락하신 이유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엘리멜렉은 자신이 가진 풍족함을 나누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압땅으로 가서 자신의 풍족함을 지키고 그땅에서의 소출을 통해서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자신보다 더 큰 공동체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되야 합니다. 기근을 맞아 허덕이는 사람들과 나누라고 허락하신 풍족함을 잃게 될까봐 얼른 베들레헴을 떠난 것이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정과 직장과 교회가 바로 이 기업에 해당되어집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서 천국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가정은 천국의 모형이 되는 기업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직장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직장을 하나님의 기업으로 바꾸어 나가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직장을 위해서, 직업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직장이 하나님의 복을 내 삶에 가져오는 통로가 되도록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직장을 바꾸고자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분들은 새로 갖게 될 직업이나 직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로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직장을 구하는 청년들은 당연히 직장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쉽게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나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나누어 받게 됩니다. 어렵고 힘들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붙들고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도 엘리멜렉 가족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풍족함을 나누기 싫어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욕심껏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업을 지키며 우리의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랑의 삶을 실천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기근은 엘리멜렉 가족을 시험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가진 풍족함을 나누었다면 이 가족의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과 그분이 주신 약속의 말씀(기업)을 떠나지 않는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무조건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 얼마나 자신만만 했었을까요? 내가 보란 듯이 성공해서 아버지에게 다시 돌아오리라. 그러나 생각과 달리 그는 죽게 되었을 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존심도 버려야 했습니다. 참새도 죽을 때 `짹'하고 죽는다고 하는 것처럼, 사람도 자존심 하나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자존감 즉 자신을 귀하여 여기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야 하지만, 자존심은 버리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탕자의 마음 한 구석에는 자신이 벌인 재산을 탕진한 일에 대한 나름대로의 책임을 지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나를 아들로 여기지 말고 하인으로 여기소서' 하인으로 살며 내가 탕진한 재산을 갚아 나가겠오. 그런데 아버지는 그가 자존심을 세우지 않도록 했습니다. 네 모든 행위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내 아들로 삼는다. 세상에 부모 자식간에 무슨 자존심이 필요합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돌아오는데 무슨 자존심이 필요합니까? 나오미의 귀향은 우리가 하나님앞에 돌아올때 아무런 조건이 없음을, 심지어 자존심도 하나 중요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녀가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한가지였습니다. 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는 이 한마디의 소문아니 그녀에겐 믿음이 되어진 이 말이 그녀의 발걸음을 고향으로 돌아오게 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모압땅에서의 삶은 고통과 슬픔의 연속이었습니다. 남편을 잃고, 생떼 같은 두 자식을 잃었습니다. 풍족했던 그녀의 삶은 지옥과 같은 궁핍함으로 겨우 겨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 처절한 상처와 아픔을 모두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남편을 잃은 여인이란 소리도 듣기 싫은데 두 아들마저 잃어버린 자신을 고향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의 권고하심을 듣고 고향으로 향하여 가기를 결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엘리멜렉 가족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이야기해주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의 실패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따나가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극심한 고통과 역경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떠난 채로 그 문제로부터 그 아픔으로부터 헤어나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란에서 고향으로 돌아왔던 야곱은 벧엘의 약속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화장실 갈때하고 나올때하고 다르다고들 합니다. 야곱도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서는 흥분해서 이 돌기둥이 하나님의 전의 기둥이 될거라고 소리쳤지만 막상 고향에 돌아와 많은 가축과 자녀들을 돌아보고서는 `세겜'으로 가서 그곳에서 장막을 쳤습니다. 그곳이 목축을 하기에 더 없이 좋은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랑하는 딸 디나가 세겜 족장의 아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한 후에 비로서 그는 자신이 가야할 곳, 하나님과의 약속이 있었던 땅, 벧엘로 나아갑니다. 창35:1절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그리스도인은 삶의 환경을 쫓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삶의 환경을 바꾸어 나가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림을 그려 보십시오. 두 며느라 가운데 하나는 그녀의 곁을 떠나 자기의 족속에게로 돌아가고, 아무 것도 없는 빈손으로 베들레헴을 향해 걸아가고 있는 노인과 젊은 며느리, 그 어디에도 소망의 그림자가 보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오직 한가지 `하나님의 권고하심'만 바라고 돌아오는 그 발걸음이 결코 헛되지 않아서 하나님은 나오미의 노년의 삶을 회복시키시고 축복하신 줄을 믿습니다. 요한복음에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15:5절의 말씀은 그냥 빈말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우리의 삶이 그렇게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무조건 돌아와야 합니다. 성도는 모든 상처와 힘듬과 슬픔을 예배 가운데서 회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돌아오십시오.
하늘의 소망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적과 같은 일은 룻이 나오미를 떠나지 않은 일입니다. 만약 오늘날 우리 시대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룻처럼 행동할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없겠지요. 그리고 아무도 룻을 욕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소망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토요토옙프스키는 지옥이란 모든 희망을 버리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열쇠 꾸러미로 자물쇠를 열다보면 종종 제일 마지막 열쇠가 맞을 때가 있습니다. 많은 열쇠가 맞지 않는다고 신경질을 내고 포기하면 결코 문을 열 수 없습니다. 전기를 발명해 인류에게 빛과 많은 편리함을 준 발명왕 에디슨은 성공적인 발명가입니다. 그러나 몇 번의 실험으로 전기를 발명한 것은 아닙니다. 하루에 4시간씩 잠을 자며 무려 1만 번의 전기 실험 끝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축전지를 발명할 때는 무려 5만 번의 실패를 거듭했고, 3천 4백 종의 엄청난 발명을 하는데 11만번 이상 실패를 하였다고 합니다. 라듐을 발견한 퀴리 부인은 그것을 발견하기 위하여 무려 4백번의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399번째 포기했다면 라듐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희망은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용기를 잃지 않도록 만드는 힘인 것입니다. 제가 1주일간의 특새를 하면서 룻의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이 많이 났던 것은 그녀가 고백한 하나님을 나도 고백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자기 시아버지를 앗아간 하나님, 자기 남편과 동서의 남편을 앗아간 하나님, 시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도록 만들었던 하나님, 그들이 가진 풍족함을 다 거두어가신 하나님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녀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요.' 여러분 같으면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고 슬픔만 남겨주시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 하나 좋은 것 주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섬기며 살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송명희 시인이 `나'라는 시에서 고백하듯이 건강도 없고, 물질도 없지만 자신에게 허락하신 은혜를 노래하며 하나님을 공평하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룻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고백의 근원이 바로 하늘의 소망입니다. 13절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나오미의 말은 나는 소망이 없으니 너희는 내게 소망을 두지 말고 재가하라는 말입니다.
소망이 없는 나를 따라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맞는 말입니다. 나오미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남아 있는 소망이 없습니다. 농사지을 힘도 없고, 나이 많아 늙어 자식을 둘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이런 노인을 따라오는 며느리가 어떻게 살겠습니까? 고생길이 환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외칩니다.
어머니가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가 죽는 곳에서 나도 죽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현실은 무엇하나 소망이 되지 않지만 내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만 둘것입니다. 아멘! 아멘!
네덜란드에 가면 꼭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의 집을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3층으로 된 그 집 꼭대기에 올라가면 책장이 있는데, 그것을 옆으로 살짝 밀면 비밀 통로가 나타납니다. 그 통로 아래에 있는 작은 공간이 바로 게슈타포를 피해 유대인 가족이 숨어 지내던 곳입니다. 그곳에서 열세 살의 어린 소녀 안네는 일기를 썼습니다. 그녀의 일기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의 세계가 어둠의 세력에 점점 포위되고 있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공포와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 공포와 학살과 죽음과 전쟁의 건너편에서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빛을 바라본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는 곧바로 평화의 이유다. 우리는 이 희망 때문에 작은 공간에서도 천국을 경험한다.”그들은 주위를 둘러싼 공포와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졌기에 천국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머리 위의 하늘이 아무리 어둡다고 해도 주님이 예비하신 빛나는 천국의 소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에 쌓아 둔 그 소망 때문에 지금도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가야할 본향을 향해 오늘도 이 땅의 순례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테드 윌리엄스는 유일의 4할 타자는 아닙니다. 마지막 4할 타자(1941)입니다. 설교시에는 이를 수정했는에 원고에서는 수정을 못했습니다.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