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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들을 근 40여년 만에 만나고 보니 그 반갑고 또 고마운 마음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그 와중에도, 선생님은 우리를 열정적으로 가르치셨다 다른 선생님들과 달리 편애하지 않고 고루 사랑하셨다 학급의 모든 일을 선생님 주관대로 하지 않고 모든 주권을 우리에게 주시고 자율적으로 학급을 운영하셨다고 하면서도 의외로 학창시절에 채벌한 것에 대해 굼굼해 하며 영문도 모르고 농구부에서 쫓겨났다 나는 미워하고 누구누구만 좋아 하더라 내가 왜 맞아야했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의아해 하는 친구들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 많이 혼란스럽고 엉뚱한 질문에 당황하기도 하였기에 샘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하여 내가 살아온 내력이나 이야기하려 한다.
선생님은 6.25전쟁세대로 전쟁 중에 학교를 다녀서 학교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결국 전쟁으로 인해 길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을 모아 보호하고 돌보기 위해 미국감리교회계통에서 운영하는 성경구락부라는 보호시설에서 한글과 덧,뺄셈만 겨우 익혀 2학년 학기말 시험만 보고(전 학년에서 3등을 함) 학성초교 3학년에 편입하게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초등생도 매월 월사금(지금의 육성회비의 전신)을 내고 학교를 다녀야 했기에 신체적 장애가 있는 아버지 때문에 보따리상을 하는 어머니에 의지해 일곱 식구가 생계를 유지해야했던 당시의 우리형편으로는 학교는 고사하고 생계를 꾸려나가기 조차 어려운 상황이어서 내가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래도 공부를 하고 싶었던 나는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이스케이크 통을 메고 다니며 얼음과자를 팔았고 열차가 역에 닿으면 부채를 팔며 틈틈이 구두 닦기도 해야했다. 그렇게 육학년이 되어 공부를 잘한 덕에 전교 어린이회장을 했지만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아 몸 저 누운 어머니 병구완을 하면서 중학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나는 일 년간 남의 가게 점원을 하며 돈을 모아 이듬해 중학에 갈 생각을 하고 담임선생님과 의논을 마쳤는데 초등학교에서 교장 선생님과 동문선배들이 찾아와 해마다 원중 수석합격은 학성초등이 해서 학생 수가 늘었는데(당시에는 학구제 없이 이름 있는 초등학교로 편입학이 가능했다) 금년에 기대했던 네가 안가면 낭패이니 시험만이라도 보아 달라고 간청했다
결국 수석 합격(한 해에 원중과 학중, 수석합격자가 둘이나 나와 이듬해에 학성초교는 학년 당 5학급에서 12학급으로 급격히 늘어났다)하여 입학금 면제로 원중에 입학을 하고 중1년부터 가정교사를 하며 학교를 다녔으나 등록금미납과 출석일수미달로 중학졸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러 은사님들의 도움으로 중학졸업장을 받고 장학제도가 없던 시절에 특별장학생으로 원고를 다니게 되었지만 집에는 때 거리가 없는데 공부만 하면 뭐하냐며 고3 어느 날 내 교복과 책가방을 아궁이에 불사르시며 학교를 그만 두고 돈이나 벌어오라 시던... 아! 비정한 내 아버지...
자식의 앞날을 걱정하며 격려하고 도와주지는 못할지언정 스스로 일어서려는 어린 싹을 잘라버린 비정한 아비를 한탄하며 나는 그 슬픔을 견딜 수 없어 죽기로 마음먹고 뒷산으로 올라가 울다 지쳐 잠든 새벽... 귓전을 울리던 청아한 새소리에 눈을 뜨니... 아아 싱그러운 나뭇잎에 맺혀 찬란하게 반짝이던 저 해맑은 이슬의 속삭임... 벌떡 일어나 앉으니 시야로 들어오는 황홀한 광경... 숲이 우거진 고묘 저 아래 쟁기를 들고 논물을 보는 평화로운 농부의 모습과 화사하게 피어 있는 하얀 과꽃의 아름다운 물결... 그렇다 내가 죽어 이 자리에 누워있대도 나의 죽음을 슬퍼해줄 사람은 하나도 없고 세상은 여전히 평화로운 아침을 저렇게 펼쳐 보였으리라. 순간 나는 이처럼 아름다운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 죽을 각오로 살아야 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마음먹기 나름 아닌가? 생각을 바꾸니 비로써 보이는 아름다운 세상... 우여곡절 끝에 여러 은사님들의 도움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으니 내가 그 은공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어쩌면 그 은혜에 조금이나마 부응하기 위해 나는 남다른 열정으로 교육에 열을 올렸는지 모른다.
그러구러 그 무렵 나는 중3때부터 기독청년회관에서 음악 감상을 하며 성악에 매료되어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고 싶었지만 그 길을 인도 받지 못했고 육군사관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등록금 미납으로 매년 2~3개월씩 수업을 못하다보니 수학과 영어 등에 자신이 없어 결국 사관학교를 포기(그러나 결과는 학력이 나보다 처진 친구들이 모두 합격함)하고 고교졸업 후 1년간 외국인 한국어 교사를 하면서 생계를 위해 치악산에서 나무를 하며 영세민을 위한 취로사업(하루 종일 일하면 밀가루 3~5되를 줌)에 참석하여 봉산동하천 제방 둑 쌓는 일을 하면서 입영을 생각해야 했지만... 그래도 어머니를 도와 세 명의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며 집안을 일으키려면 내가 야간대학이라도 가야겠다는 생각에 무일푼으로 어머니 병구완을 하면서 남몰래 교육대학입시를 준비하게 되었다
입학시험을 보러 가서는 시비가 벌어져 싸움 끝에 춘천지방법원판사의 조카인 상대의 어금니 다섯대를 부러트린 끝에 형사의 추적을 피해 다니며 시험을 완료하고 파출소로 자진 출두하여 내 대신 구금된 원주출신 수험생을 풀어 귀가 시키고(학생의 신분이고 상대방의 잘못으로 벌어진 사건임으로 이빨만 해 주는 선에서 합의를 보고 1학기 여름방학에 해결 됨)... 시험에 합격하여 원주 일산감리교회의 도움으로(친구의 간청으로 일산감리교회에서 고3, 2학기 동안 찬양대를 도운 인연이 있음) 입학금을 마련하여 교육대학을 다니면서 춘천시립합창단 단원으로 미8군 교회합창단단원으로 학비를 마련하며 남의 집 상청에 올린 제사 밥을 3개월이나 먹기도 하고... 돈이 없어 보름씩 이십일씩 굶주리며 물배를 채워 멍한 상태에서 공부하던 대학생활... 그 고학의 어려움을 어찌 필설로 다 설파하랴...
그런 과정을 거쳐 군 신체검사를 미루고 영장을 연기하며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교사가 되었기에, 교대를 졸업하면 교대출신은 최소 시군단위로 발령하여 그곳에서 제일 큰 학교로 근무지를 편성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하던 시절이었음에도 나는 내가 살아 온 어려운 학창시절을 생각하고 또 나를 도와주신 많은 은인들을 생각하며 삶의 소망을 잃은 채 벽지에서 공부하는 어린이에게 꿈을 심어주어야겠다는 신념으로 남들이 그렇게 가기 싫어하던 벽지학교를 자원하여 (초임을 횡성군 갑천면 금성학교로 발령받아 원주야간대학의 꿈은 접어야 했다) 맨발로 찢어진 고무신을 신은 꾀 제제한 복장, 때가 덕지덕지 앉아 딱지 앉은 손, 발등에 딱지가 떨어지면 피고름을 흘리며 울던 저들에게 켜켜이 찌든 교실바닥의 때를 벗겨 아름다운 교실환경을 꾸며주며 새로운 학교환경에서 해맑은 영혼에 고운 꿈을 싹틔우길 바라며 열정으로 가르치던 초임지에서의 교사시절...
그곳에서 보낸 교직생활 1년 만에 병약한 여인의 몸으로 가정의 생계를 꾸리며 숱한 고생을 하시던 내 사랑하는 어머니를 우환으로 여의자 나는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해 군에 자원입대하고 그 슬픔을 참을 수 없어 말년엔 파월을 자청하여(전쟁하러 가는 몸이므로 생사를 장담할 수 없어 죽기 전에 만분의 일이라도 은사를 비롯한 은인들에게 은혜를 갚는 심정으로 국가에서 지급 받은 일년치 군봉급 전액을 초임지 학교에 장학금으로 기부함)군복무를 마쳤지만 그 초임지에서 내가 마지막 수업을 마치던 날 가지 말라고 울며 매달리던 제자들이 샘을 위로한다며 책걸상을 둥글게 모아 가운데 앉히고 한 사람씩 나와 큰 절을 하며 노래하고 춤도 추고 옛날이야기도 하며 기념식수를 해서 선생님을 오래오래 기억하겠다며 운동장에 나가 미루나무를 심던 일... 학교를 떠나오던 날 전교생이 뛰어나와 매달리며 울고불고하던... 그리고 가여운 반 제자들은 가시는 길에 요기라도 하시라며 삶은 감자와 계란 옥수수와 십원 오십원 백원짜리 동전과 천원지폐를 때 묻은 신문지와 공책장에 꼬기 꼬기 싸서 쥐어주며 배웅하던... 그 아름다운 이별을 잊을 수 없어 또다시 벽지학교를 지망한 끝에 내 사랑하는 제자들이 다니는 산현초교로 복직하여 근무하게 되었으니...
산현에서 근무하는 6년 동안, 나는 초임지에서 보았던 내 제자들의 모습과 닮아 있는 여러분을 보면서 내 부모는 전쟁 중에 가진 것이 없고 무식하여 곤궁한 삶 속에서 다섯이나 되는 자녀 뒷바라지하기가 버거워 앞길을 열어주지 못했지만, 여러분의 부모님은 가진 것이 있고 건강하기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녀를 뒷바라지할 수 있는데도 미구에 닥치게 될 자녀의 미래를 외면한 채 삶의 의욕을 잃고 현실에 안주하며 나태한 삶을 사는 모습을 보면서 그 부모 밑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여러분은 나처럼 불행한 삶을 살아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여러분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오면 상상도 못할 만큼 발전된 문명세계에서 살게 되니 그 때를 대비하여 지금부터 그 준비를 해야 한다고 설득하며 그렇게 여러분과 부모님들에게 꿈을 안고 공부하고 가르쳐야 한다고 진학을 권면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이 스스로 주인 의식을 갖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태도로 열심히 공부하여 성취감을 얻게 되기를 바랐고 그 때문에 시험성적도 열린 공간에서 여러분 스스로 체크하여 공개하게 했으며 선행도 여러분이 추천하게 하여 생활기록부에 기재하며 우등상과 표창장을 수여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상벌은 교사 자신의 사견이 아닌 자타가 공인하고 인정하는 공명정대한 것일 때 그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나는 상벌에 관한한 어떤 면에선 냉혹하리만큼 엄격했는지 모른다. 학생을 선도해야 하는 교사가 여럿이 같이 잘못했는데 벌을 줄 때 누구는 부모님과 사적인 친분이 있고 공부를 잘하며 샘의 눈에 들었다하여 용서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가? 그것은 부조리한 것이고 스스로 불신을 초래하는 것이니 그래서야 어찌 제자들이 스승을 믿고 따르겠는가?
그래서 일요일에 농구연습을 하러 학교에 나오라고 했음에도 싸움을 하고 나오지 않아 농구연습을 못했음으로 샘이 불러 자초지종을 묻고 나무랐다하여 그 교사를 무시하고 멋대로 집으로 가버린 막되 먹은 몹쓸 녀석... 어떡하던 싸움을 말려 학교로 대려 와야 할 친구들이 합세하여 함께 연습을 못한 못난 친구들... 저들이 없어서는 안 될 팀의 에이스이면 뭐 하는가 그 인성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그래서 올바른 인간이 될 수 없다면... 그에겐 운동 보다 인간교육이 우선돼야하지 않는가? 운동도 일종의 교육이기에 페어플레이 정신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샘은 자식을 대신하여 용서를 구하니 애비를 보아서라도 아이가 시합에 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그 부모가 찾아와 간청했지만 교육상 그리할 수 없음을 이해시켜 정중히 돌려보내야 했다. 그것도 시합을 불과 5일 남겨 둔 시점에서 말이다. 그리고 사적인 감정에 의한 조치가 아니었기에 교육상 공정을 기하기 위해 그와 함께 훈련에 참석하지 않은 다른 선수들도 팀에서 함께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라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아비가 아닌 본인이 와서 용서를 구해야 옳지 않은가 혼자 올 용기가 없었다면 부모와 같이 와야 했다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고 그 아비가 대신 와서 용서를 구하며 아비를 보아 시합에 나가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이다 샘은 그 자녀를 올바르게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도 횡성군체육대회에서 우리는 횡성초교를 물리치고 당당히 우승하지 않았던가!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라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있는가? 자식 미워하는 부모가 누군가? 미워한다면 그건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기대하며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그런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자식이 야속하고 원망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론 야단치지 않을 일도 한 사람이 잘못하면 형제를 다 불러 놓고 함께 나무람은 형제간에 우애를 일깨우기 위해서이며 서로 책임을 공감하며 우애를 깊게 하여 삶의 어려움을 서로 도우며 헤쳐나가게 하기 위해서다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의 사랑도 그와 같은 것 아닌가! 지금도 나는 내 자식처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내 제자를 사랑 한다.
그래서 사회에서 인정받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하여 아름다운 모습으로 샘을 찾아준 여러분이 자랑스러워 나는 여러분 동문체육대회에 기쁜 마음으로 참석했으며 거액의 금전지출을 감수하면서도 여러분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200권이나 되는 방대한 양의 시집과 24편이나 되는 '산현 이야기' 시화를 준비해 여러분에게 기꺼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나처럼 제자의 사랑을 받는 행복한 교사가 얼마나 되겠는가? 여러분과의 만남을 다시한번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샘은 여러분을 사랑해요!’ 크게 외쳐 본다. 알라뷰! *^.^*
첫댓글 파월 당시 내어 놓은 장학금은 초임지에서 함께 근무하던 선생님을 통해 공부는 잘하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진학할 수 없는 아동 2명에게 지급하였는데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훌륭하게 성공하여 은인을 찾음으로 대행하신 선생님이 나에게 만나기를 권면했지만 내가 지금도 만나지 않고 비밀로 함은 그 돈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준 때문이며 그로인해 그에게도 내게 고마움을 느낀다면 나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도우라고 하였기에 그들 또한 그리하고 있다는 전갈을 듣고 고마워 하고 있음. 할렐루야 아멘!
제가 돌이 되던 해에 아버님이 돌아가셨으니 어머님의 고생은 지금도 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어머님이 홀로 살피는 가정형편에 저는 육성회비는 물론이고 과제물을 준비하지 못해 담임선생님에게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공부도 늘 꼴등에서 뱅뱅 돌았으니 회초리와 나머지 공부는 예사였지요.
이렇게 지나던 4~5학년 때이었는가 봅니다. 집에서 학교에서 편안한 생활이 없던 나는 장포 섶다리 중턱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곳에서 뛰어내리면 죽을 수 있을까? 어머님의 고생도 학교생활의 매도 피할 수 있으니 죽음이 편안하지 않을까? 물론 한겨울 감기 걸릴까 싶어 뛰어내리지는 않았지만, ^^
가정의 어려움을 참지 못해 조막만한 머리에서 고작 죽음을 생각하였다니 그때가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샘의 파란 만장한 삶에 마음이 숙연해 집니다.
또한 샘의 열정이 나팔꽃 목 줄기에서 발산하는 빛처럼 마음 깊숙이 밝혀 줍니다.
저도 크게 외쳐 봅니다. 샘! 미 투 유!
이승의 사랑이 세상의 어둠을 밝힐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두려움을 멀리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