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21세기북스, 2015년.
프롤로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는 기원전 4세기 경 팔레스타인의 나사렛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떠돌이 목수로 살다가 30세가 되어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은 후 40일간 사막에서 신과 인류 그리고 자신에 대한 깊은 묵상을 통해 천명(天命)을 받았다. 카리스마 넘치는 수사와 설교로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게 되고, 인류 최고의 가치인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그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人子, 예수 자신.)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엘리아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레미아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묻는다.
예수는 ‘담화의 대상’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3년 동안 함께 경험한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누구인지 묻는 것이다. 미셀 푸코는 담화란 권력자들이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조작한 지식이나 진리를 정당화하고자 만든 상식이라고 정의했다. 예수의 참모습을 알려면 서양 세계에서 2000년 동안 만들어 놓은 도그마가 아닌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예수는 어떤 모습인지 살펴야 한다. 이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에 대한 답을 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신학자 하비 콕스는 기독교는 1~3세기 ‘신앙의 시대’, 4~20세기 ‘믿음의 시대’를 거쳐 21세기에 이르러서는 ‘영성(靈性)의 시대’에 접어들었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도그마의 교리를 무시하고 종교 간의 울타리를 걷어치우고 있다며 영성이 조직화된 종교를 대체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1929년 4월 랍비이자 유대인 지도자가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려는 아인슈타인에게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라고 전보를 보냈다. 이에 아인슈타인이 답했다. “나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습니다. 그 신은 우주의 규칙적인 조화 안에서 서서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스피노자는 신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조절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만물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만들고 유지하는 ‘내재적 신비’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스피노자처럼 전통적인 신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신(자연의 법칙)의 존재를 믿었다. 그에게 신은 정교하고 정확하고 심오해서 우리가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간에 대해 탐구할 수 있도록 하고, 우리를 신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 차게 만들어 자연스럽게 자신을 미약한 존재로 생각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그는 과학적 지식이 발전하면 할수록 우주에 있어서 신의 섭리를 조금씩 알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인슈타인은 인간 심리의 세 단계를 종교적 진화를 통해 추적했다.
첫 단계는 ‘공포의 종교’다. 이것은 원시인들이 이것은 원시인들이 기아, 야생 동물, 병, 죽음에 대해 갖게 되는 공포에 의존하는 사회의 종교 유형이다. 자연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음 달래기 위해,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희생 제사와 간절한 기도와 같은 의례에 의존하는 종교다.
두 번째 단계는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신에 대한 관념의 종교’다. 인간들은 신을 인간과 유사한 형태로 만들어 숭배한다. 인간처럼 감정을 지닌 신은 사제들을 통해 소통하고,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기준으로 인간에게 상을 주기도 하고 벌을 주기도 한다. 고통에 처한 인간을 위로 하고 죽은 자들의 영혼을 심판하고, 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영생을 허락한다. 아인슈타인은 두 번째 단계의 신도 미성숙 단계의 신으로 불렀다. 인간의 욕망을 투영시킨 신을 신봉하는 단계다.
세 번째는 인간이 자신이 처한 역사적인 순간 속에서 스스로 발견한 종교다. 이때 인간은 인간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우주와 자연을 통해 신을 탐구한다.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우주적인 종교 감정’이라 명했고, 이 종교 감정은 사제나 교리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도덕적 책임 있는 존재가 되고 삼라만상에 숨겨진 신비를 찾는 탐구를 멈추지 않을 때 비로소 발견된다고 했다.
독일의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는 신에 대한 경험을 ‘누미노제’라고 정의했다. 누미노제는 ‘성스러움, 거룩’이고 ‘신비(神祕)’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경지를 넘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강력하고 압도적인 경험이다. 인간은 이 경험을 통해 스스로 ‘절대타자(絶對他者)’가 된다.
오토는 이 신비감이 ‘전율(戰慄)’과 ‘매혹(魅惑)’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이 순간 인간은 세상의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자기 자신이 간직했던 세계가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오감으로 느끼는 모든 것들이 심오하고도 기쁨으로 충만한 경외심으로 가득 차 세상을 향해 닫아놓았던 몸의 출구가 열리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예수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은 스스로에 맡겨진 일을 찾도록 촉구하고 그것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통해 무엇을 배웠느냐는 물음이다. 우리는 예수의 위대한 질문과 삶을 통해 각자의 내면에 감춰진 위대함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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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이 말하고자 하는 세 번째 단계의 신을 도가(道家)에서는 ‘자연(自然)’이라고 불렀다. 도가에서 말하는 자연과 아인슈타인이 발견했던 우주의 질서는 같은 의미다.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질서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신을 경험한다고 했고, 도가에서는 깨달음과 실천으로 자연을 인식한다고 했다.
예수는 묻는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거기에 갈매가 답한다. “신비한 자연이여! 가물가물하고 또 가물가물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