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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go41 자유 게시 스크랩 아부지, 일찍 잘 돌아가셨어요.
정진백 추천 0 조회 29 06.05.03 14:27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나의 고향은    영종의  구읍선착장을 지나   20여리를 들어가면 백운산골짜기에 있는  자연 마을 이다.

이름 그대로 봄이면 넓은 들판에 노란 꽃들과 아지랑이가 너울거리고

여름이면 푸르름으로 들판이 가득하고

가을이면 온 동네가 누런 곡식으로 넘쳐나고

겨울이면 매서운 북서쪽 바다바람이 허허벌판을 쓸고 가곤 하는    동네이다.

띄엄띄엄 온 벌판에 십 수호가 살고 있었지만,   생일이나 제사 때면  서로가  내 집 처 럼 아침이다  저녁이다   서로 불러 먹고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동네였다.


나는 거기서 어린시절과 직장생활의  시작을    그리고 신혼시절까지를 보냈다.

아버지는 나의 신혼이 시작될 무렵 세상을 뜨셨고  홀로된 어머니만 남아 나와 사셨다.

그렇게 좁은 구석에서 오물대며  함께 살아가던  7형제가   모두 날개를 달고 하나둘 시내로 떨어져 나갔고  명절이나  휴일 때래야 어머니를 보러 찾아오곤 하였다.


우리도 그랬지만 동네 모든 사람들이 다 선조로부터 이어온 가대로 생계를 이어왔으며  그들의 가족도 우리와 다를 바 없이  노인들만을 남겨둔 채   외부세계로 떠나갔다.

나는 수년전까지 그곳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지금도 가끔   고향생각에  일부러   그 마을을 들르곤 한다.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서고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지금은 철도공사도 한창이고-

이로 인한 보상이다,   이사다,   갈 때 마다 점점 더 먼 이방인으로 보여지는 나를 바라보곤 한다.

옛날의 노인 분 들은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고,  보상을 받은 이 는 이사하고,  경제기반이 없는 모든 원주민들은 외지인들에게  모든 토지를 넘겨주고  그 땅에서 소작으로 생활하고....

그러나 그런저런 것으로 만든 땀과 돈은,  알고 보면 결국은 자식들에 대한    태질이었고 학비에,  새살림에,  사업 뒷바라지로 허비한 것 일뿐    당신들에게 쓰여진 것은  살아오며 내집안 대소사에 받아쓴  경조사비에,  누추한 옷 몇 벌에,   보건소 약값 얼마에,  싸구려 담배 값,   소주값 들뿐이었다.

말 그대로 남아있는 현재의 모습이란 피둥피둥 젊은 있는자 의 희망 있는 모습이 아닌,    노쇠하고 말라빠진 그야말로 찌들은 모습들 뿐이다.

그렇게 변해간 지금은  달밤에 쌓아둔 벼 낟가리 의 볏짐을  몰래 서로 형네로, 동생네로 갖다 쌓아 주는 모습이 아니라   형제간에도,  부자간에도,  이웃 간에도    밤잠도 자지 않고 눈이 벌개서 서로의 것을 빼앗으려,   빼앗기지 않으려 야단들인 모습뿐이다.

그 얼마 전 까지 그랬지만  생일날 아침 서로 불러 함께하고  누구네 집 할아버지 생일이 오늘이지  하며 부르지 않아도 소주 두 세병 들고 찾아가서  종일을 얼굴이 벌개가지고   떠들고 놀다  휘청대며 집에 돌아오던 그날 들은 지금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다.

 


 
 

무진 네 는 한때는 내노라 하며 동내 대통령 소리를 들어가며 살아가다  누구 보증선 것이 잘못 되, 결국 있는 가대 다 날리고 처분하고  남은 우수리로 인근 동네로 짜투리터밭 이나마 장만해 이사 가더니 이제는 그나마 남아있던것도 큰애 성화에 자식에게 이기는 부모없다고 장사밑천으로 다 팔아 디밀고 또 옆동네 빈집으로 소작농사를 겸해 이사갔고 땅팔어간 자식은 일 핑게로  명절에나 찾아오는 한두번 성묘겸 인사가 고작이고,


현구네도 대농으로 동네에 세가 대단했으나 이제는 현구만 남아 농사를 짓고 있으나 상속받은 농토1500평도 계속된 농사실패와 자녀교육으로 반은 날리고 소작중으로, 최근까지 부모님을 봉양하며 어려운 농사수입으로 집안을 어렵게 꾸리고 있다.

자식들은 시내에 나가서 어디 일을 다닌다지만 자세히 말을 못하는걸보면 내노라 할 곳이 못되는 형편 인듯하다.

유철네는 그 많던 전답과 가축을 자식다섯의 학비충당에 출가에 야금야금 처분하고는 늙은 양주만 남의 논 꾸뻑이며 소작 쟁이 질 인데 명절때봐도 옆집에 다니며 세끼명절음식 챙기는것보면 올해도 새끼들은 안왔던듯 하다. 뭐라고 또 핑게를 대고는........

유종이네 는 조상에게 말로만 나눠 받은 논밭 떼기 몇 마지기 갖고 철 천지 원수로 한 뱃속 3형제가 재판질 시작한지 5년째고, 무길이 네는 조상에게 물려받은 재산으로 한때는 부럽게 잘 나가더니 돈이 독이 되어 방탕생활로 인한 알콜 중독으로 이혼한 후 형제들은 물론 자식들도 모두 흩어져 폐가이고 .......



 

 

오랫만에 

지난 토요일에는 이제는 모르는 이의 문표가 달려있는 내가 살았던 집에를 둘러보려 갔다가 옛날 젊을때 대농으로 온 동네를 내 땅 아니면 안 밟고 다닌다고 큰소리치던 집안의 아들이었던 현구 와 유철 네 아버지를 만났다.


현구네 는 9 형제 중 막내만   딸이고 모두 아들인 대가족이다.

그러나 지금은 수년전 아버지도 중풍으로 10년을 누워 사시다 돌아가시고  두달 전 까지 노망으로 똥 싸며 온갖 고생 시키시던 어머니마저 늦게나마 며누리 도와주려는듯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한참전 형제들간 싸움 안시키겠다며 그 많던 재산들 나가사는 자식들에게 분배하고 그나마 마나님를 생각해 750평의 텃밭을 어머니 이름으로 남겨놓았다.

받을 재산을 다 받아서일까 부모봉양에 온갖 고생을 여러 해 하는 동안 형제들은 나타나지도 않더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장례를 치르고 나자 어머니 앞으로 남긴 땅에 대해 술김 반, 농담 반 꺼내놓고 결국은 대판 형제간 개 싸움 만 벌이다 다신 안 본다며 가버렸다는 한풀이다

현구 는 아버지께서 돌아 가시기전 현구 내외 를 불러 이거는 에미 돌아간 다음 며늘아가 몫으로 남기니 그리 알아라 했다면서-

유독 시내로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않고 아버지를 따라 농사만 지은 그였기에 돌아가시기전 무엇을 대비해야 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흙밖에 몰랐기에 자신의 마음만을 믿고있었던 것이다.

생각했다. 

상속을 받으려면 형제들 도장이 필요하니 그나마도 현구네가 받기는 다 틀렸다고.

개쌈나게 생겼다고........ 개새끼들.....


유철아버지도 이제는 나이 80에 인생을 정리해야할 백발의 나이인데 아직도 지게에 비료 두 푸대를 지고 윗 동네 저수지 밑에있는 , 자식 학비 대느라 서울사람에게 팔아먹고 소작중인 콩밭에를 가신다고 했다.

소작으로 남의밭떼기와 1000여 평 의 집 앞 논을 맡아 농사를 짓고 계셨다.

유철이 안부를 물으니 와본지 열 달 하고 보름이 넘었다나?

듣고보니 이 노인네 자식생각에 하루하루 전화라도 오기를 세고 있었슴이 뻔하고 이 무심한 자식놈은 그 우라질 돈에 미쳤는지, 여행에 미쳤는지, 아니면 마누라 치마폭에 빠졌는지  구정명절에도 오지 않은 것이다.

명절에 다 문을 닫는데 처갓집에만 가서 백년손님으로 큰 대접을 받고 있었는지........

그럴 사정이 있었다면 지난 어버이날에라도 부모라면 다 받아보았을 3000원짜리 카네이션일망정 저는 새끼들에게 가슴벌리고 어흠대며 받았을텐데 핑게라도 대며 찾아올수는 없었는지,

양심에 캥기지는 않았는지..........

그나마 집터와 붙은 밭 250평이 있을때 까지는 유철이는 물론 그의 처와 그 외 4형제가 한달에 한 두번 은 전화라도 하더니 그것 팔아 셋째아들네 손자 급성백혈병 병원비에 팔아주고 났더니 이제는 그나마 전화들조차 끊어졌다는 것이다.

 

넌지시 물어보았다.

서운하지 않느냐고? 쓸쓸하지 않느냐고?

헌데 참 묘한 노릇이다.

그 놈의 자식과의 천륜이 무엇인지,  생각만하면 눈이 녹아내리듯 사람의 상식으로 있을 수 있는 감정들이 사라지는지    전혀 표정이 변하지 않고 은근히 자랑을 섞어 말한다

우리 애들은 모두 부모 걱정 안 시키는 효자들 이라고?

그래도 내는 자식농사는 퍽 잘 지었다고-

그것도 당신 덕이 아니고   자식들이 다  저 잘나고  똑똑하고 노력들을 해서-

첫째는 서울서 신한은행에 전무이고, 둘째 놈은 안양서 전자대리점 사장이고 셋째놈은 대전서 중학교선생이고, 넷째 년은 남편이 수원 시청공무원 과장 이고, 막내 년은 크지는 않지만 송탄에서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고-

이만큼 애비에게 걱정 안끼치며 손 안 벌리고 살고 있으니 바랄게 그 무어냐고............

자랑스럽지 않느냐고-

젊어 고생으로 관절에 심하게 병이 와 앉은뱅이로 항상 마루에 나와 앉아있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할망구에 손수 하루세끼 식사까지 챙기면서도 말이다.



 

 

요새 신식 사고가 그러니까  ,  시대가 변해서,  모두가 바삐 돌아가는 사회라서  그런거 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려해도, 

말 그대로 효본이 천본인건데 누구나 다 늙어 부모되어  자식들에게서 이다음   그런 대접 받으면 그때 가서  지들  한일 생각 않고 자식들 에게만 서운타고  할 것인지.

저러다 북망산 가시는 길에  상여 뒤에서 동네사람 모두 보고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내가 효자요  라며 조금 더 살다 가시라고,    왜 일찍 가셨냐고 통곡하고 후회할 것인지,

그때 가서 목청껏 울어 봐도 소용없는 일임을 그나마 알고는 있는지 의문스럽기만 하다.

한 많은 소외계층노인들 푸념처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네가 한 것 만큼만 받아라." 라는말 이 입에서 나올락 말락 한다.


그래도 자기 새끼들에게는 과외 시키고  외국 여행시키고,   화장품은 뭘 사줘야하고,

몇년은 그대로 더 입을만 하건만  또 새옷을 사주겠다는 둥 그러지는 않았을지 물어보고 싶다.

잘 모셔 소문나서 효자 효부상 까지 바라지는 않더라도,    늙고 병든 저런 몸으로까지도 자식들의 안위를, 

그들에게 욕되지 않기를 바라는 그 마음을 알고 있는지,    모 르고 있는지........

 

재물 앞에,     거기에 얽힌 이익 앞에  똥파리 떼처럼 모이다가  득 될 것 없으면   들 파리 날리듯  소원한 우리네 어디에서나 보고 있는 이런 모습들이   무심하고 쓸쓸 하기만하다.



 

생각해본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어떻게 자랐는가?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내 온 몸과 마음  구석에 묻어있는 내  부모의 계실 자리는  과연  있는 것인가?

세태의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인 그 잘난 서구식 개인주위가,    핵가족화가 병폐 일뿐,

내핏줄 이라는 작자들의  그 하는 짓꺼리들은  잘못이 아니라고 자위하려해도  

왠지 똥씹은 맛이고  허전하고   화가 나는것은  나만의  고려때적  때 묻은 팔푼이  감정일까?

하기사 요사이 시내 사람들 보는 테레비에는

말그대로 물건은 내놔야 팔린다더니 사람이 모이는데라야 장사된다고 온갖 내 달린 물건은 다 내놓는다질 않나,

시에미 때리는 테레비만 나온다질 않나 ..

 

 

어느새 어둠이 서산에로 부터  밀려오고있다.
저  밭에   허수네 애비,  그 잘난 새끼 기다리는지   멀리   신작로 앞에를 아직도 꼼짝않고 바라보고 서있다.

 

"갈 걷이 헐때나  차갖고 올 자식을 뭘 벌써 부터  기다리는지  원..."

 

 

따뜻한 고향의 향기를 느끼려 갔었지만   씁쓸하게 돌아설수 밖에 없었다.

여전히 공사차량과,   모르는 이들이 무언가를 하기위해 바쁘게 내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언듯 나를 바라 보게 되었다..................

 

저 멀리 보이는 북망산   아버지 산소를 바라보며 혼자 중얼 대었다.

" 아부지   일찍 잘 돌아가셨어요.  안볼꺼 안보시고 ......."

 

 

                                                                                  20050805beol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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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6.05.03 14:30

    첫댓글 5월 가정의달, 어버이날을 맞이하면서 작년에 써놓았던 졸필의 글을 되새기며 올립니다.

  • 06.05.04 17:27

    진백이 정말로 글읽는 내가 부끄러우이, 마음은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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