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2년 11월 6일 구스타프는 그의 군대를 던져, 발렌슈타인(Wallenstein)을 공격했으나 그 스웨덴의 보병은 압도당할 뿐이었다. 왕은 기병의 공격으로 상황을 수습했으나, 그때 그의 우익이 분쇄될 위험에 있다는 말을 듣고, 궁지에 몰린 그의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짙은 안개를 뚫고, 그의 기병대를 지휘했다. 갑자기 대부대의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안개 밖으로 물밀듯이 뛰쳐나와 구스타프 부대를 포위했다. 왕의 말은 부상을 입었다. 구스타프 자신의 팔은 머스킷(musket) 탄환을 맞아 부러졌다. 그리고 그가 말을 몰아 그 소란을 헤치고 나아가려 할 때, 그는 등에 총을 맞았다. 크로아티아(Croatia)의 기병대는 마침내 구스타프 2세 아돌푸스에게 그가 항상 기대했고 아마 희망했던 전투에서의 죽음을 주었다. 그의 부서진 피투성이의 몸은 나중에 완전히 벗겨진 채 시체 더미 밑에서 찾아냈다. 그는 38세였다. 왕의 죽음은 스웨덴 군대의 실망을 크게 뛰어넘어 그것에게 적에게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복수심에 불타는 결의를 준 것 같았다. 밤이 시작되었을 때, 발렌슈타인은 전장의 양편에 1만 2천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퇴각했다.
가톨릭의 유럽은 신의 은총의 증표로 신교의 챔피언의 죽음을 축복하였다. 마드리드와 비엔나에서는 '찬미의 노래'가 엄숙히 불리어졌고 스페인의 궁정은 "스웨덴 왕의 죽음"이란 표제의 기적극으로 환호하였다. 신교도들은 상대적으로 풀이 꺾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스타프는 역사의 방향을 바꾸었고 그의 덕택으로 그들의 대의는 안전했다. 그러한 문제에 대한 나쁜 심판자가 아닌 나폴레온(Napoleon)은 "구스타프는 전술을 혁신했고 그의 적들이라도 그들의 찬양을 유보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후에 선언했다." 구스타프와 싸웠던 이탈리아인인 구알도 프라이오라토(Gualdo Priorato)는 썼다. "어느 왕자도 그이처럼 사랑받지는 못했다..., 그이에게 보다 더 큰 애정과 준비성으로 복종을 받은 어느 장군도 없었다. 그는 신교도들을 가톨릭교도들 보다 더 너그럽게 대우하는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신(God)에 의해 창조되었고, 각자는 신앙을 가지고 권위의 법칙을 충실히 준수하는 존재로 존중한다는 것을 천명했다". 이 위대한 왕은 오늘 스톡홀름의 리다홀름 교회(Riddarholms Church)에 잠들어 있다. "그는 죽음으로 승리했다."
구국의 신
덴마크의 크리스티안(ChristianⅣ)에게 큰 요새지인 칼마르(Kalmar)가 함락되고, "중풍의 노망인"으로 조롱받던 구스타프의 부친 찰스(Charles)왕이 죽자, 한동안 그의 부친의 대리 역을 했던 17세의 구스타프 아돌푸스는 1611년 11월 30일에 그의 왕국을 떠맡았다. 스웨덴의 왕위에 오른 그 젊은이는 어느 모로 보나 천부적인 통치자였다. 그는 바른 예절, 호감을 주는 인성, 이런 자산에다 일류의 교육을 추가했다. 스웨덴어 이외에 구스타프는 독일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네덜란드어, 러시아어, 폴란드어와 스페인어를 말했다. 13세에 그는 벌써 선친의 조언자들, 외국 대사들과 국사를 의논하고 있었다. 2년 후에 그는 칙어(勅語)와 함께 의회를 열었고, 자기에게 부여된 공작의 업무를 집행했다. 그 젊은 공작은 초년에 고난과 전술을 익혔고, 전 유럽을 경악시켰던 전쟁공부를 했다. 그의 외모는 출중했다. 그는 이탈리아인들에게 "황금의 왕"으로 부르게 했던; 키가 크고 넓은 어깨와 아름다운 머리칼을 가졌었다. 어느 군주도 구스타프의 인간적인 매력과 풍채를 가지지 못했다.
젊은 왕은 곧 그의 기질을 보였다. 그의 능숙한 공수작전으로 스톡홀룸Stockholm)을 향한 덴마크 군대의 끈질긴 공세를 꺾고, 스웨덴의 저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마침내 1613년 크리스티안의 처남인 영국의 왕 제임스I(James I)의 중재로 스웨덴에게는 덴마크에게 라플란드(Lapland)를 할양하는 등 매우 무거운 배상이었지만, 강화조약을 이끌었다.
그렇지만 러시아와의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었고, 스웨덴의 군대는 러시아의 훨씬 더 큰 군을 연파했지만, 러시아 황제는 항상 군을 새로이 할 수 있었으나 스웨덴은 그럴 수 없었다. 전쟁은 또 다시 제임스 I의 중재로 끝났다. 그러나 1617년의 강화조약은 러시아가 스웨덴에게 핀란드의 영토의 할양하고, 에스토니아(Estonia)와 라트비아(Latvia)의 권리를 폐기하여, 스웨덴에게 배상금을 지불했다. 평화조약의 타결 직후 구스타프 아돌푸스는 정식으로 스톡홀룸의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러시아 인구의 약 30분의 1인 스웨덴이 러시아의 전면적인 공격에 저항하기를 결코 희망할 수 없다는 교훈을 배웠다. 그는 대관식 연설에서 스톨보바(Stolbova) 조약의 덕택으로 스웨덴은 지금 늪, 강, 호수, 특히 라도가 호(Lake Ladoga)장벽에 의해서 동쪽까지 보호하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왕은 말했다. "하느님께 희망하온데 러시아인들이 그 도랑을 건너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를 바란다."
스웨덴은 스톨보바(Stolbova)의 조약 후 4년의 평화를 누렸다. 그동안 귀족들은 이전에 없었던 많은 해외여행과 새로운 지식을 가지고 고국에 돌아왔다. 따라서 구스타프에게는 많은 처세에 능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구스타프를 충족시키는 탁월한 정치가도 있었다. 구스타프는 11세 손위의 옥셀세로나(Count Axel Oxenstierna)는 그의 통치 중 현명하게 그를 충족시켰던 훌륭한 국왕비서였다. 구스타프는 열정의 감성인이었고 옥셀로나는 침착하고 성숙한 내성인이어서 왕과는 이상적인 균형을 이루었다. 어느 때 구스타프는 그의 비서에게 말하였다.
"만약 나의 열정이 그대를 녹이지 않았다면 그대는 오래전에 얼어버렸을 것이다." 이 재담에 옥셀세로나는 자극받아 비슷하게 대답하기를, "만약 저의 냉정이 폐하의 열정을 완화하지 못했다면, 폐하는 오래전에 불에 타버렸을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
이 평화 기간 중에 왕의 가장 주목할 만한 행위중의 하나는 그들의 판결이 왕에게 상소될 수 있는, 스톡홀룸에 대법원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구스타프는 이 법정의 타당성을 위한 엄격한 기준을 설정했다. 그는 법학자들에게 경고했다. "만약 어떤 법관이 왕이나 또는 어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목적으로 행동하면, 왕은 그를 매질할 것이요, 그의 피부는 법정에서 못 박힐 것이요, 그의 귀는 건조될 것이다!"
1621년에 평화의 해는 끝났다. 폴란드의 황제(Sigismund)는 구스타프에게 스웨덴의 왕관의 상실은 물론 구스타프를 경멸하고 "공작"의 칭호를 고집하여 그를 스웨덴의 왕으로 부르기를 거절했다. 구스타프는 이런 행위를 용납할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군대는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Riga)를 포위했다. 구스타프 자신의 노력은 그의 장병들의 그것들과 어울렸다. 모든 훌륭한 사관들이 그렇듯이 그는 그자신이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어떤 일을 그의 군대들이 하기를 결코 요구하지 않았다, 왕은 포위된 도시 주변의 참호를 파는데 그 부하의 누구보다도 힘차게 삽과 괭이를 휘둘렀다. 그에게 특전의 한 스코틀랜드의 장교는 후에 썼다, "그러한 장군을 나는 기쁘게 섬기겠다. 그러한 장군을 거의 만나지 못할 것이다. 누구를 돌보든 위험 중에 그 자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고, 사관들의 사랑을 받으며, 노동과 위험의 동반자였다."
리가는 짧은 전투 후에 함락되었고 스웨덴 사람들은 라트비아 전역을 점령했다.
구스타프가 이른바 30년 전쟁(Thirty Years' War)에 개입한 것은 폴란드에 대한 앙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30년 전쟁은 기본적으로 신성 로마제국 황제가 이끈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家)(house of Hapsburg)와 카톨릭의 지배에 반대했던 신교의 왕자들과 독일의 도시들 간의 투쟁이었지만, 그 싸움의 실제는 신앙의 갈등 이상으로 주변국들 간의 힘의 대결과 영토의 패권이 주목적이었다.
그리고 결국 승리는 힘과 권력이 있는 만큼, 자기의 힘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람들의 마음과 활력을 주는 지도자와 사람들, 하늘의 섭리에 돌아갔다.
구스타프는 이때 그의 발틱 해(the Baltic)의 완전 지배의 목표와 독일에서의 전쟁에 골몰하고 있었다. 한편 덴마크의 크리스티안은 자기의 영토를 추가할 좋은 기회로 독일의 영토를 탐하였다. 그는 주로 독일 용병들로 구성된 군대로 1625년에 독일에 진격하여 1626년 8월에 결정적으로 패하여 그의 연합군은 그를 버렸고, 곧 황제의 위대한 사령관 발렌슈타인인은 유트란트(Jutland)를 장악하고 덴마크 인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잔인으로 약탈하고 마음대로 그들을 "이교도들"로 유린하였다.
카톨릭의 계획은 유트란트를 스페인에게 양도하고, 한편 폴란드는 스웨덴과의 투쟁에서 구해주고 독일의 신교도들로 부터는 예데보리(Gotebory)에서 그들의 특혜의 무역권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발렌슈타인은 물밀듯이 스웨덴에 접근하여 슈트랄준트(Stralsund)를 포위했다. 이것은 스웨덴 개입의 신호였다. 정예의 스코틀랜드 용병들의 구스타프 군대들은 발렌슈타인을 현저히 패배시키고 그를 격퇴했다. 구스타프 아돌푸스는 이렇게 신성로마 황제에게 도전했다.
한편 황제는 발렌슈타인이 점령했던 지방을 신교의 포기를 조건으로 덴마크에게 반환한다는 협약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여기에서 구스타프는 크리스티안에게 체통을 지킬 것을 주장했으나 극도로 좌절한 덴마크 왕은 구스타프에게 가섭 말기를 촉구했다.
독일의 신교에 대한 박해는 너무 컸기 때문에 구스타프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그는 그들의 구조를 결심했으나, 첫째 폴란드와의 강화에 유의했다. 따라서 6년간 지속되었던 폴란드와의 휴전은 불란서와 영국의 중재로 이루어졌고, 구스타프는 페르난도(FerdinandⅡ)황제 및 구교 동맹국과의 화해에 대한 그의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었다.
독일에서의 크리스티안의 좌절로, 구스타프는 발틱 해를 지배하고 스웨덴을 통치했다. 그러나 그 바다의 남부 해안 위의 독일 영토를 자기 지배로 추가하려는 신앙적 열망은 독일에서의 성공적인 전쟁이 되기를 바라게 했다. 그는 더욱이 황제의 군대들이 독일의 신교도들을 격파하고, 이어 신교의 스웨덴을 공격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국회에 "예방전"의 이득을 촉구했고 국회는 "우리의 말을 적의 울타리에 매는 것이 적의 말을 우리의 울타리에 매는 것 보다 낫다"고 동의했다.
스웨덴 왕이 독일 침공을 제안했던 그 군대는 일직이 유럽이 겪은 어떤 것과는 아주 달랐다. 스웨덴의 각 지역은 인구에 따라서 한, 두 연대를 배당받았다. 그리고 공백은 지역의 파견대로 채워졌다. 왕은 그의 병력은 가능한 스웨덴인이기를 원했지만 그의 나라는 그가 필요했던 모든 인원을 채울 수가 없었다. 이때 스웨덴의 전 인구는 약 850,000이었고, 핀란드에는 350,000의 선박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구스타프가 구상했던 "총 동력"까지도, 순전히 스웨덴 군대만으로 유럽에서 큰 전쟁을 수행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웨덴의 연대(聯隊)들은 잘 훈련된 스코틀랜드와 독일의 용병으로 보충되었다.
전술의 연구로 부터 구스타프는 기동성이 현대 군대의 제일 요소임을 결론지었다. 모든 장비는 가능한 가볍고, 부싯돌 식 발화총은 신속히 장착되고, 포병대는 놀라울 만큼 이동하기 용이했다. 그리고 설치한 대포는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되었으나, 구스타프의 "나르는 대포"는 적이 당황할 만큼 장소를 쉽게 전환할 수 있었다. 구스타프는 실제로 현대 전술의 개념을 소개했다.
1630년 여름, 구스타프는 출진 준비를 했다. 그는 그의 평의원들에게 그에게는 다만 두 길이 열려있는데 크리스티안Ⅳ의 비참한 결함을 쫓고 수동적으로 폭풍이 지나가기를 바랄 것인가, 혹은 그의 배후에서 모든 사람이 용기를 발휘하여 폭풍을 극복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다. 평의회는 후자가 바른 답이라고 동의했다. 옥셀세로나(Axel Oxenstierna)는 후년에 그 결정을 "천재의 영감" 이라고 불렀다.
죽음의 예언
구스타프는 스톡홀룸에 고위 귀족회의를 소집해서 그들에게 그의 의향을 말했다. 그때 그는 세 살인 그의 독녀 크리스티나(Christina)를 팔에 안고 엄숙하게 그의 백성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주전자가 자주 샘에 떨어지면 마침내 그것이 깨지는 (꼬리가 길면 밟힌다) 일이 흔히 생기듯이, 많은 위험에서 스웨덴의 복리를 위해서 나의 피를 흘릴 필요가 있었음에도 지금까지 하느님이 나의 목숨을 아껴왔지만, 마침내 그것을 잃어야 될 운명이 나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여러분들을 하느님의 보호 하에 맡기고, 이 비참하고 고난의 생애 후에 주께서 우리에게 마련했던 영원한 기쁨이 있는 천국의 삶에서 우리가 서로 만날 것을 기원한다."
다음날 왕은 독일로 출항했다
대부분이 스페인 사람인, 황제의 주둔군을 제거하고 구스타프는 정착했다. 그는 5분의 1이 스웨덴인일뿐인, 10만이 넘는 군의 사령관이었다. 모든 독일의 신교의 왕자는 유럽 전역의 대사들처럼 구스타프의 궁정을 방문했다. 사람들은 "신교의 황제"를 말하기 시작했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장대한 계획들이 안출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야심적인 것은 구스타프가 알프스를 넘어서 황제로부터 성 베드로(Saint Peter)의 열쇠를 점유하는 것이었다.
다뉴브강을 건너면서 구스타프는 강의 반대편에 그를 기다리는 틸리(Tilly)를 발견했다. 작동하는 "나르는 대포"로 그의 군대는 상대적으로 기동성이 있었고 적의 심장부를 부셨다. 틸리의 다리는 포환에 부서졌고 그의 군대는 사기를 잃고 줄행랑을 쳤다. 2주 후에 그는 죽고, 발렌슈타인이 황제와의 의견 차이를 조정하여, 다시 황제의 군을 지휘하였다. 그는 곧 색슨족(Saxons)을 보헤미아에서 제거하고 구스타프를 바바리아의 북방으로 유인하기 위하여 뉘른베르크로 진격하였다.
발렌슈타인의 계획은 성공하였다. 구스타프는 뉘른베르크를 구제하기 위하여 진격하였고 2개월 동안 스웨덴과 황제의 양 군대는 참호를 공고히 하고 시외에서 서로 노려보았다. 마침내 구스타프는 발렌슈타인의 전선을 공격하여 크게 격퇴하였다. 스웨덴과 그들의 연합군은 발렌슈타인이 뒤따라오기를 희망하고 오스트리아 남방으로 향했다. 황제의 대장은 뉘른베르크의 점령을 강화하였으나 그의 군대들의 공급부족 때문에 구스타프를 남쪽으로 쫓지 않고 적의 스웨덴과의 통신망을 위협하며 북방으로 진격하였다. 일련의 강행군에 이해서 구스타프는 튀링겐(Thringia)을 지나 돌진했고 드디어 적과 함께 진을 쳤다. 그때 발렌슈타인은 작센(Saxony)에 있는 뤼첸(Lützen)의 겨울 진영에 정착하였다.
구스타프가 귀족회의에서의 ‘영원한 삶’의 예언과 약속은 뤼첸의 승리와 그의 처절한 죽음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생명과 힘, 지혜의 뿌리는 백성이었고, 백성의 믿음과 사랑이 그의 말과 행동의 샘이었으며, 결국 그 황제는 그 샘물로 백성들의 삶을 꽃피웠고 역사를 새로이 썼으며, 하늘의 뜻을 실현했다. (The Horizen Concise History of Scandinavia by Ewan Butler, Pubished by American Heritage Publishing Co. ,INC. New york. 1973. pp. 127-8, 115-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