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족형 정랑공 묘갈명(族兄 正郎公 墓碣銘) -
[생졸년] 1679년(숙종 5)~1739년(영조 15)
도암 이재(陶菴 李縡) 찬(撰)
공의 휘는 집(䌖)이고 자는 여장(汝章)이니 정랑 휘 분(翂)의 손자요 현감 휘 만형(晩亨)의 차남이다. 이씨(李氏)의 본관은 우봉(牛峰)으로, 나와 공은 부제학공 지신(之信)을 같은 조상으로 두고 있는데, 5대 동안 고양(高陽)의 도정리(陶井里)에서 함께 살았다. 공은 나보다 앞서 기미년(1679, 숙종 5) 태어나 7세 때 처음으로 직접 만나고 10세 때 함께 공부하였다.
공은 남달리 총명하여, 5세 때 현감공을 따라 양구(楊口) 고을로 갈 때의 일을 말하는데 산천과 여정에 이르기까지 눈앞에 보이는 듯 명료하게 말하였다. 독서할 적에는 한번 보면 곧 외웠으니, 나 또한 기억력이 좋지 않다고 할 수 없었으나 매번 공에게는 미치지 못함을 알았다.
《상서(尙書)》의 기삼백(朞三百)에 대한 주석은 아이가 배워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공은 하룻밤 사이에 남김없이 궁구하고 추산하니 우리 중부 귀락공[歸樂公, 이만성(李晩成,1659~1722)]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내가 조금 장성해서 서울로 가게 되자 세상에는 이별하고 만나는 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의 종제인 구(絿) 여강(汝剛)은 공의 후배였는데, 구의 부친 귀락공이 공의 재능을 아껴서 함께 공부시켰다. 이때부터 학교를 출입하여 여러 번 무리들을 굴복시켰다. 또 시(詩)로 감시(監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재명(才名)이 더욱 자자했고, 마침내 을미년(1715, 숙종41)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병신년(1716)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다가 곧 영희전(永禧殿)으로 옮기고, 장원서 봉사, 제용감 직장으로 옮겼다가 통례원 인의, 의금부 도사에 올랐다. 형조 좌랑이 되어서는 마음가짐이 공정하여 귀신처럼 적발하니 판서가 공을 신임하고 아꼈다.
신축년(1721, 경종 1) 외직으로 산음 현감(山陰縣監)에 제수되었는데, 마침 시사가 일변하였으나 귀락공의 명으로 마지못해 부임하였다. 이어 스스로 면려하기를,
“하루라도 관직이 있으면 응당 하루의 책무를 다해야 한다.”
하였다.
삼가고 부지런히 봉직하여 하루 종일 게을리하는 법이 없었는데, 마음속으로 죄를 어겨 파직되길 원했다. 관찰사가 대부분 흉당의 무리였지만 공의 치적이 도에서 으뜸이라 비록 포상하는 장계를 올리고 싶지는 않아도 또한 감히 파직시킬 수는 없었기에 임기가 만료되어 비로소 체직되었다.
공이 산음 관소에서 병환이 생기자 온 고을의 승려와 백성이 밤낮으로 위문하여, 사당에 빌기도 하고 산천에 빌기도 하였으며 구하기 어려운 약물도 반드시 구해 올렸다. 공이 돌아갈 적에는 노소 구분 없이 모두 길을 에워쌌는데, 공이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물을 따라주며 전별하는 이도 있었다.
당시 조정에서 관찰사로 하여금 각기 고을 수령으로 삼을 만한 인재를 추천하라고 했는데, 관찰사 유척기(俞拓基) 공이 공을 추천하였다. 무신년(1728, 영조 4) 영남의 역적 정희량(鄭希亮)과 조성좌(曺聖佐)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얼마 뒤 정희량은 같은 당파에 의해 참수되었으나 남은 무리들이 여전히 삼가(三嘉)를 근거지로 버티고 있었으니, 이곳은 경상우도의 요충지였다.
조정에서 새 수령을 차임하여 보내려고 했으나 마땅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판서 이병상(李秉常,1676~1748)이 일찍이 함양(咸陽)에 유배되었을 때, 옆 고을에 있던 공의 치적을 잘 알고 있었기에 조정에 말하기를,
“민심을 진무하여 복종시키고 피폐해진 백성을 어루만지는 일은 이 아무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하니, 마침내 공을 삼가 현감(三嘉縣監)에 제수하였다.
공은 그날로 필마로 달려 부임하였는데 백성은 공이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서로 말하기를,
“옛날 산음의 수령이 우리 땅을 다스리는구나.”
하며, 돌아오는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공은 우선 역리(逆理)와 순리(順理)의 이치로 타일러 새로 거듭날 길을 열어주고, 옥에 갇혀있는 흉당 가운데 주모자와 추종자를 구분하여 법대로 처벌하여 백성을 안정시키니 온 고을이 편안해졌다. 신해년(1731, 영조 7) 대기근 때 또 정성을 다해 진휼하여 굶어죽는 백성이 한 사람도 없자 칭송하는 소리가 더욱 넘쳐흘렀다. 또 임기가 찬 후에 체직되었다.
갑인년(1734, 영조 10)에 와서 별제와 사직서 영에 복직되고 공조와 형조의 좌랑을 거쳐 정랑에 올랐다. 1년 뒤에 외직으로 나가 함창 현감(咸昌縣監)이 되었는데 고을의 사람들이 이미 삼가현에서의 공의 정사를 들었으므로 위엄을 세우지 않아도 두려워하고 사사로이 은혜를 베풀지 않아도 사모하였다.
도 안의 흉당들이 종사소(從祀疏)에 반박한다는 핑계로 본읍(本邑)에 모여 학교와 서원에서 소란을 일으켰는데, 고을의 백성도 그 안에 섞여있었다. 공이 잡아와 목에 칼을 씌우고 옥에 가두니 무리들이 놀라서 흩어졌다. 기미년(1739, 영조 15) 4월 13일 병으로 관아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1세였다.
선비와 백성이 급히 달려와 아침저녁으로 영전에 곡하며 감히 돌아가지 못하였고, 고을 안에는 공을 애도하기 위해 3일 동안 밥을 짓지 않았다. 관이 돌아갈 적에는 고을을 텅 비우고 나와 전송하며 매우 슬프게 곡을 하였으니, 어진 은택이 백성을 감동시킨 것이 깊다고 이를 만하다.
공은 천성적으로 민첩하여 관리의 사무에 뛰어났으므로 고을의 질고(疾苦), 백성의 실정과 거짓을 모두 정확하고 분명하게 알았다. 남들과 얘기할 적이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끊임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포편(蒲鞭)을 가하지 않아도 아전과 백성은 두려워서 복종하였다. 부임하는 곳마다 은혜로운 정사를 펼쳐서 그곳을 떠난 후에는 각기 송덕비를 세워 사모하였다. 공이 항상 말하기를,
“곡물을 따로 챙겨놓아서 진휼을 잘했다는 포상을 얻는 것은 사대부가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하였다.
평소의 친구일지라도 그가 높은 관원이 되면 편지를 보내거나 방문하지 않았기 때문에 벼슬길이 순탄하지 않아 몇몇 고을 수령으로 끝나고 말았다. 관직에 있을 때 재산은 신경 쓰지 않았기에 죽을 때는 오직 몇 칸의 초가집뿐이었다. 조카 제언(濟彥)이 종사(宗祀)를 주관한다고 해서 그를 지극히 보살폈는데, 모든 노복들을 조카에게 보냈으니 이것 역시 남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다.
공의 초취(初娶)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현감 명화(鳴華)의 따님이니 부녀자의 덕이 있어 공은 매우 훌륭하게 여겼다. 공보다 24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재취(再娶) 백천 조씨(白川趙氏)는 부친이 참봉 휘벽(輝璧)이다. 계자(繼子)는 제령(濟寧)이다. 공은 처음에 도정리(陶井里) 선영에 안장하였다가 그 후 모년에 이장하여 신숙인(申淑人)과 합장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평생의 친구 가운데 우리 형만한 사람이 없었다.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굶주린 것처럼 허전하여 형의 생전에는 잠시라도 떨어져서는 안 될 듯이 하였다. 이제 공이 나를 버려두고 먼저 떠나간 지 이미 8년이 되었으니, 나 역시 조만간 죽을 것이다. 공에 대해 한마디의 말이 없다면 이것은 공을 거듭 저버린 것이니, 마침내 눈물을 훔치며 서술하고 명(銘)을 덧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공이 가난 때문에 벼슬하였다고 하나 / 謂公自混於祿仕兮
몸가짐은 처녀와 같았네 / 乃其持己則處子
남들은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쓴다고 비유했지만 / 人或譬諸割雞之牛刀兮
공은 유능한 관리보다는 어진 관리가 되길 원했네 / 公則不願爲能吏而願爲良吏
효우와 청렴한 절의는 / 惟孝友淸脩之節兮
거의 선조의 법도보다 나아서 부끄럽지 않네 / 庶幾軼先矩而無愧
고인이 명을 지으니 / 故人作銘兮
자잘한 자취는 생략하고 그 뜻만 기록하네 / 脫略粗跡而寫其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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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족형 정랑공 묘갈 :
저자가 이집(李䌖, 1679~1739)을 위해 쓴 묘갈문이다.
[주02] 상서(尙書)의 …… 주석 :
고대 역법(曆法)의 기초가 되는 이론으로, 해와 달의 운행과 달의 대소(大小)와 윤달에 대한 설명을 이른다.《서경》〈요전(堯典)〉
에 “기(朞)는 366일이니, 윤달을 사용하여야 사시를 정하여 해를 이루어 진실로 백관을 다스려 모든 공적이 다 넓혀질 것이다.[朞
三百有六旬有六日, 以閏月, 定四時成歲, 允釐百工, 庶績咸熙.]” 하였다.
[주03] 무신년 …… 일으키고 :
무신년(1728, 영조 4)에 이인좌(李麟佐)가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정희량(鄭希亮)과 조성좌(曺聖佐) 등이 영남에서 거병
하였다.
[주04] 포편(蒲鞭) :
때려도 아프지 않도록 부들 가지로 만든 회초리인데, 아전과 백성을 심한 형벌을 내리지 않고 관대하게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후한서(後漢書)》권25〈유관열전(劉寬列傳)〉에 “아전과 백성이 과실이 있을 때는 단지 포편으로 매를 때려서 모욕만 줄 뿐이
고 끝내 고통을 가하지 않았다.[吏人有過, 但用蒲鞭罰之, 示辱而已, 終不苦.]” 하였다.
[주05] 닭 …… 쓴다 :
예악(禮樂)으로 고을을 다스림을 말한다.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읍재(邑宰)가 되어 예악을 가르쳐 고을 사람들이 모두 현악
(弦樂)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는데, 공자가 무성에 가서 그 소리를 듣고는 빙그레 웃으며 “닭을 잡는 데에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
[割鷄焉用牛刀.]”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論語 陽貨》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