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20 - 수 양제 고구려 침공에 요동성 전투 및 살수대첩과 3차와 4차 침공!
589년 수(隨)나라가 남조의 진(陳)을 멸해 후한 황건적의 난 400년만에 중국을 통일하니 590년에 즉위한
영양왕은 591년 사신을 보내 표문(表文)를 올려 사은하고 왕을 봉해 주기를 청하니, 3월 수나라 황제가
상개부의동삼사 요동군공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수레와 의복을 주니 5월에 사은했고, 592년과 597년
에 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는데 중국 무기 기술자를 빼내온 일로 문제가 국서를 보내 책망합니다.
돌궐과 토욕혼은 물론 베트남, 백제, 신라등 주변국들은 왕과 신하 관계로 조공을 하는등 수나라 제후국이
되었지만 고구려는 주저하니, 문제는 국서를 보내 수나라 신하국으로써 조공을 하라는 것과 제후국으로
인정함은 물론 조공을 거역하면 군사를 동원해 양씨 황족 중 1명을 고구려 왕으로 앉히겠다며 질책합니다.
이에 영양왕은 오히려 선제 공격으로 나오니 598년 2월에 말갈의 무리 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략하였는데, 영주(營州) 총관(摠管) 위충(韋)이 이를 격퇴했으며 수나라 문제는
노하여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積)을 원수(元帥)로 삼아 수군과 육군 30만
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쳤으며.... 또 황제는 조서를 내려 고구려 왕의 관작을 빼앗았습니다.
“한왕 양의 군사가 임유관(臨渝關) 으로 나와서 홍수를 만나 군량의 운반이 이어지지 못하자,
군사들은 식량이 떨어지고 또 전염병에 걸렸다. 주나후(周羅睺)가 동래(東萊)로 부터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쳐들어오다가 역시 바람을 만나 배가 많이 표류하고
가라앉았다. 가을 9월에 수나라의 군대가 돌아갔으나 죽은 자가 열명 중 여덟, 아홉 이었다.”
삼국사기 영양왕 조에 王亦恐懼 遣使謝罪 上表稱 遼東糞土臣某 “ 왕도 역시 두려워
하여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표를 올려 ‘요동 더러운 땅(糞土 분토) 의 신하 모(某)’
라고 스스로 칭하였다. 황제가 이리하여 군진을 풀고 고구려를 처음과 같이 대하였다.”
604년에 문제가 죽고 수 양제가 뒤를 이으니 고창국(高昌國) 왕과 동돌궐의 계민가한(啓民可汗)
이 친히 입조해 공물을 바쳤으니 영양왕에게도 입조(入朝) 하라고 말했지만 영양왕은 두려움
을 느껴, 《수서》의 표현대로라면 번국의 의무를 소홀히(?) 해 수양제를 노하게 했는데.... 607년
수 양제가 계민가한을 만나러 왔다가 고구려 사신과 마주쳤으니 노한 수양제는 전쟁을 결심합니다.
1. 수 양제 611년 고구려 2차 침공
總百十三萬三千八百,號二百萬,其餽運者倍之 총 병력은 113만 3800명이고, 200만이라
불렀으며, 식량 운반자는 그 배 였다.《수서》 권4, 제기, 제4, <양제 하 편> 중국의 정사
《수서》에는 '113만 3,800명' 이라고 100 자리 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수나라의
호적 제도와 용(庸) 제 등의 징용 및 징병 기록을 참조하지 않고서는 서술이 불가능합니다.
“한국고대전쟁사”시리즈의 저자이자 토크멘터리 전쟁사에 출현하는 사학자 임용한은 수나라군의
편제 기록을 토대로 실제 전투병력이 28만 8천명이었으며, 113만 명 중 나머지 병력은
원정에 참가한 비전투 병력(수비병, 보급 인원 등)이라고 주장했으며 또 '두 배의 식량
운반자' 는 아마 중국 내부에서 국경지대 까지 식량을 나르는 인부들이었을 거라고 추정했습니다.
기록을 보면 수나라군은 총 24개 군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1개 군에는 기병 4개 단과 보병 4개 단이
있었으니 기병 1개 단은 10개 대로 이루어져 있었고, 각 대의 정원은 100명으로 기병 1개 단의
인원은 1,000명 가량이었고, 1개 군의 기병 병력은 4,000명 정도였던 셈인데 보병의 병력은
몇명인지 나와있지 않지만 기록에 의하면 1개 군에는 기병 40개 대와 보병 80개 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병의 대와 기병의 대의 병력이 같은지는 알수 없는데 임용한 교수를 비롯한 '전투 병력 30만설'
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보병 역시 기병과 마찬가지로 1개 대가 1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따라서 1개 군이 4,000명의 기병과 8,000명의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각 군의
병력이 12,000명이고 24개 군이 있었으니 총병력은 113만이 아니라 28만 8,000명 정도 되는 셈입니다?
웨스턴미시건 대학교의 교수 빅터 슝이 집필한 “Emperor Yang of the Sui Dynasty: His Life,
Times, and Legacy”에 따르면 당시 부병제 병력이 60만명 정도였는데, 양제는 그 두 배
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기에 질 낮은 징집병들이 다수 포함되었을 거라고 지적했으며
113만 병력이 고구려에 주둔하면 할수록 숫자가 계속 줄어들었을 거라고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기록을 보면 수나라군의 보급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으며 굳이 전투를 치르지 않더라도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사망하는 인원이 엄청났을 것이며..... 전근대 군대 대부분의
특징이기도 하니 기록의 자세함과 후속 영향이나 전장 묘사, 극단적인 도박수를
감행하도록 수나라군을 압박한 원인 등을 고려해봤을 때 가장 가능성이 높은 학설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수양제가 총 113만 대군으로 이루어진 편제를 계획했으며 이것이 오늘날의
정사에 기록되었으나, 실제 전투병이라 부를수 있는 병력은 이를 상당히 밑돌았을
가능성이 있으니.... 편제상 병력과 실질 병력이 따로 노는 케이스로 애초에
전근대 국가에서는 '서류상 행정' 과 '실제 현장' 이 다르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군대편제가 엄격한 로마에서도 1개 군단의 이론상 정원은 5,000명 내외였으나 잦은 소규모 전투 부터
대규모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전역자 등으로 결원이 자주 발생하여 많은 군단들의 병력은 정원을
밑돌았으니, 일반적으로 로마 군단은 4,000명 가량이었으며 저 유명한 카이사르의 정예 군단들은
7년이 넘는 원정과 내전으로 한개 군단이 2,000 ~3,000명 정도였습니다.(The Roman Army at War)
명나라의 경우에도 16세기 후반~ 17세기 초반 장부상에는 병력이 300만 대군에 달했으나 실제 운용
가능한 병력은 부족했고, 16세기 말에는 그 수가 50만명을 상회할지도 의심스러운 수준이었으니
전근대의 열악한 통신, 행정능력으로는 수만 병력을 징병, 통제하는 것은 힘들었고 편제상 병력은
113만명이 맞더라도 인원 부족, 도주하는 사람 등으로 인원이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이러한 무리한 전쟁은 당시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등장한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던 수나라를 파탄케
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으니..... 614년 마지막 고구려 침공 이후 수나라의 국력은 처참하게
고갈되어 전국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이어지고 세수가 걷히지 않게 되는 엄중한 사태가 벌어집니다.
“매일 1군씩을 보내어 서로 거리가 40리가 되게 하고 진영이 연이어 점차 나아가니, 40일 만에야 출발이
완료되었다.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지고 북과 나팔 소리가 서로 들리고 깃발이 960리에 걸쳤다.
어영(御營) 안에는 12위(衛)·3대(臺)·5성(省)·9시(寺)를 합하고, 내외 전후 좌우(內外前後左右) 6군을
나누어 예속시키고는 출발하게 하니 또한 80리를 뻗쳤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1월.
수나라 군대가 북방의 탁군(베이징 또는 보정시)에 집결하기 시작했고 산동성 동래에 병선 300
여척을 건조하라는 명령이 내려가니 원정에 늦지 않도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를 강행
하자, 일꾼들은 허리까지 물에 잠긴채 일하느라 전체의 3분지 1이 죽었다고 기록되었으며
심지어는 하도 오랫동안 물속에 있어서 하반신이 썩고 구더기가 슬었다는 이야기까지 있습니다.
드디어 탁군(涿郡)으로 병력이 모였고 7월에는 군량을 수송했으니 여양(黎陽)과 낙구(洛口)
에 큰 식량 창고군이 있어 배를 이용해 탁군으로 실어 날랐는데 꼬리를 물고 이어진
배가 1,000리였다고 하니, 유사이래 어마어마한 소동이었으며 육로로 가는 병대들은
마음 놓고 쉴수도 없었으니 밤에도 걸어야 했기때문에 피로로 쓰러지는 자가 속출했습니다.
죽은 자가 머리를 나란히 하고 누웠고 썩은 내가 거리에 진동하여 천하가 소동했으며 군수품을 나르는
인부와 차부가 60만명이나 징용되었는데 길은 멀고 험했으며, 두 사람이 쌀 석섬을 날랐는데 그것은
자기들 식량으로도 부족했으니 장거리 원정의 최대 약점으로 보급, 수송 부대도 이동하면서 보급품
(식량, 사료, 석유)을 소모하기 때문에 최전선 전투부대가 요구하는 분량의 몇배를 실어날라야 합니다.
전근대 시대 원정에서 강이나 바다등 수운이 중요하니 선박은 적은 보급품을 소모하면서 많은 양을 수송
할수 있기 때문인데,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군은 초반에는 쾌속 진격했지만 나중
에는 석유 보급 트럭이 최전선까지 가는 동안 적재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석유를 사용하는 코메디
가 벌어지니 노르망디 항구에는 석유가 산처럼 쌓여있는데, 최전선에선 석유가 없어 진격이 정지됩니다.
정해진 분량을 나르지 못하면 처벌받기 때문에 징용된 사람들은 도망칠수 밖에 없었고, 불법자가
될수 밖에 없었으니 천하에 쫓기는 자가 넘쳐나자 그들은 여기저기서 떼를 지어 비적이
되었으며, 심지어 민가에서는 661년에 왜군이 백제부흥군을 도우기 위해 1천척의 배를 띄울 때
핏빛 비가 내린다고 노래했듯 "요동에 끌려가서 헛되이 죽지마라" 라는 노래가 유행했다고 합니다.
611년경 나온 것으로 “자치통감” 에 기록된 당대의 반전 가요 제목은 (무향요동낭사가
無向遼東浪死歌) 로, '요동에 가서 떠돌다 죽지 말자는 노래' 인데.... 산동 지역
장백산에 은거하는 지세랑(知世郎)을 자처하는 왕부(王薄)라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長白山頭知世郎 純著紅羅錦背襠 장백산 아래에서 나(왕부)는 비단옷 대신에 농부의 옷을 입었다.
긴 창이 하늘의 반을 가리우고, 전쟁무기를 실은 수레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네. 上山吃獐鹿,
下山食牛羊。산 위에서 노루와 사슴을 잡고, 들에서는 소와 양을 잡으며 평화롭게 지냈는데.
문득 들으니 관군이 도착하여 칼을 들고, 전쟁터로 사람들을 끌고 가고 있다하네. 譬如遼東豕,
斬頭何所傷。사람들이여, 요동에서 죽는것을 깨달아라. 참혹하게 머리가 잘리며 부상당한 모습을.
이렇듯 천하가 어지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612년 음력 1월, 수 양제는 공식적으로 고구려 총공격
을 명령했으니 수 양제가 직접 작성한 선전포고문 입니다. “고구려 작은 무리들이 사리에 어둡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渤海)와 갈석(碣石) 사이에 모여 요동 예맥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
비록 한(漢)과 위(魏)의 거듭된 토벌로 소굴이 잠시 기울었으나, 난리로 막히자 종족이
또다시 모여들어 지난 시대에 냇물과 수풀을 이루고 씨를 뿌린 것이 번창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하늘의 도는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리니 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 도리를 어지럽히고
덕을 그르침이 헤아릴수 없고, 간사함을 가리고 품는 것이 오히려 날로 부족하다. 조칙
으로 내리는 엄명을 아직 직접 받은적이 없으며, 조정에 알현하는 예절도 몸소 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도망하고 배반한 자들을 유혹하고 거두어들임이 실마리의 끝을 알수 없다.”
“ 청구(靑丘)의 거죽이 모두 직공(職貢)을 닦고, 벽해(碧海)의 물가가 같이 정삭을 받드는데, 드디어
다시 보물을 도둑질하고 왕래를 막고, 학대가 죄 없는 사람들에게 이르고 성실한 자가 화를
당한다. 사명을 받던 수레가 해동에 갔을 때 정절(旌節)의 행차가 번방의 경계를 지나야 하는데,
도로를 막고 왕의 사신을 거절하여,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신하의 예절이라고 하겠는가?”
“이에 친히 6사(六師)를 지배하여 9벌(九伐)을 행하고, 저 위태함을 구제하며 하늘의 뜻에 따라
이 달아난 무리를 멸하여 능히 선대의 정책을 잇고자 한다. 지금 마땅히 규율을 시행하여
부대를 나누어서 길에 오르되 발해를 덮어 천둥같이 진동하고 부여를 지나 번개같이 칠 것이다.”
“방패를 가지런히 하고 갑옷을 살피고 군사들에게 경계하게 한 후에 행군하며 훈시하여 필승을 기한
후에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좌(左) 12군(軍)은 누방(鏤方)·장잠(長岑)·명해(溟海)·개마·건안(建安)·
남소·요동·현도·부여·조선·옥저·낙랑등의길, 우(右) 12군은 점제(黏蟬)·함자(含資)·혼미(渾彌)·
임둔(臨屯)·후성(候城)·제해(提奚)·답돈(踏頓)·숙신·갈석(碣石)·동이(東𦖮)·대방·양평(襄平) 등의
길로 연락을 끊지 않고 길을 이어 가서 평양에 모두 집결하라.”《삼국사기》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엄청난 병력을 동원한건 대제국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지만 고구려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서니 고구려 성은 촘촘히 연결돼 하나의 방어선을 구축했는데 여러 성의 집합이었던
만리장성이나 고려에서 축조한 천리장성등 성들의 집합인 마지노 선과 같은 방어선으로
한군데를 뚫어도 주변의 성에서 응원군이 역포위를 하거나 후방을 교란해 보급로를 차단
하고, 성을 함락하더라도 방어선 자체는 건제하기 때문에 주변의 성을 경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100만명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방어선에 투입하면 야전에서는 일단 밀리니 함부로
전투도 못하고 다른 성들에서 응원군도 오기 힘들며, 설사 오더라도 역포위 위험도
적고 그 많은 병력이 어디로 움직일지 모르기 때문에 각 성은 자기 방어하는데 신경을
쓸수 밖에 없고 예비대 투입도 곤란하기 때문에 고구려 방어선은 일시적으로 마비됩니다.
수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로 하여금 육로로 요동을 공격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내호아에게는
수군 대장의 직책을 맡겼으니... 그리하여 육군이 요동을 뚫고 고구려의 내지로 잠입
할 때 내호아의 수군이 이와 합류하여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을 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612년 음력 2월, 수 양제가 이끄는 부대는 요수(遼水)에 이르렀으며 여러 군대가 모여 대단한 숫자를
이루었지만, 고구려군은 우선 강을 막고 지켜서 수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였으니....
수양제는 공부상서(工部尙書) 우문개(宇文愷)에게 명령하여 강을 건널수 있는 부교를 만들게 합니다.
첫번째 시도 때는 부교를 세개 만들었으나 강의 길이를 잘못 예측하여 부교가 딱 어른 한명 키 남짓
모자랐고 이로 인해 1차 도강에는 실패했는데,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도강 중인 수나라군을
고구려 군대가 화살 세례를 퍼부으며 공격하자 큰 피해를 입었으니수나라군은 맥철장(麥鐵杖) 등
장수가 용감하게 부교로 뛰어올라와 싸워보려 했으나 전사웅(錢士雄)·맹차(孟叉)와 함께 전사합니다.
이에 수 양제는 잠시 물러났다가 부감(少府監) 하조(何稠)에게 명령을 내려 다시 부교를 만들게 했고,
하조가 2일 만에 완성하여 다시 한번 공격하자, 이번에는 고구려군이 대패를 당하여 무려
10,000명의 사망자를 냈으니... 야전에서는 수나라 군대의 우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형세가 됩니다.
수나라군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요동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지만 함락이 되지않고 요동성 군사들이 가끔
나가서 싸웠던 것으로 보이며 불리해지면 성문을 닫고 버텼고, 수나라군은 시간이 지나도 요동성을
함락하지 못하며 본래 전력이 엉망이 되는데 양제는 요동성을 겹겹히 포위하며 100만이면 함락은
시간 문제라고 판단했지만 요동성의 병력은 강한 저항을 했고 3개월간 수 양제의 공격을 버텨냅니다.
요동성은 험한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가 아니고 평야성으로 성벽의 흔적이 남지 않아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요동성 무덤의 벽화를 보면 이중성이었음은 확인이 되는데, 요동성이
평야에 지어진 쿤 규모의 성이라면 요동 성주와 장병들은 대단한 일을 해낸 것이니 평지성
은 방어가 힘들뿐더러...... 성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방어 측에게 불리해지기 때문 입니다.
(임진왜란때 한성은 성벽이 길다보니 밤에 성벽의 병사들이 하나둘 도주하니 전투없이 무느집니다)
당장 고구려만 해도 이런 이유로 평지의 평시 수도 국내성과 산지의 전시 수도 환도성으로
이루어진 이중 수도를 두었던 역사가 있으며, 여요전쟁 및 여몽전쟁 당시의 고려,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당시의 조선 등이 적군의 침략 앞에서 수도를 버리고
나주나 강화도, 의주나 남한산성 등으로 가서 맞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 또한 이것 입니다.
요동성은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고려시대, 조선시대와는 비교조차도 안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물량 공세에 시달리는 와중이었음에도 끝끝내 양제의 대규모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며
시간을 끌었던 것이니 중요 지역이라 화강암을 통으로 깎아 성벽을 올리는 식으로 방어력을
높이기는 했지만...... 훗날 당태종이 요동성을 뚫은데서 볼수 있듯 절대적인 이점도 아니었습니다.
요동성주와 군민들의 믿을수 없는 저런 놀라운 분전 덕분에 이후 여수전쟁의 승패가 갈렸
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요동성은 평지성이라 구조적으로 여러 불리한 조건이
있어서 평양성의 조정에서도 요동성이 저리 오래 버티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을 것입니다.
요동성은 지금의 심양 언저리에 있었는데 한나라 때 부터 상당히 크고 견고한 요새가
축성되어 있었으며, 삼국시대 때 요동 공손씨 정권이 성을 차지하고 있다가
조위에게 멸망한 뒤에 위진남북조시대 때 중국이 대란에 빠졌으니 북위가 풍씨
의 북연을 정벌하는 혼란기를 틈타 고구려가 요동으로 진격하면서 얻은 성입니다.
위(曺魏)나라 사마의가 공손씨가 세운 나라인 요동을 정벌했는데 이때 사마의는 요수와
양평(요동성)을 정벌하는데만 100일이 걸린다고 했으니, 이렇게 본다면 100일 정도인
3개월을 버틴 것도 이상한게 아니지만 사마의의 요동 정벌군은 40,000명에 불과했던
데 반해 수나라의 군세는 100만이라 자칭할 정도로 막강한 군세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수나라 군대와 보급부대를 합쳐 200만으로 잡으면 당시 중국 인구의 6% 정도인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생산에 종사해야 하는 청년층의 남자이니 이들이 빠진지라 수나라는 전쟁을
오래 지속할수 없음은 뻔한 일인데, 사마의의 요동 정벌군이 40,000명을 동원했을 뿐인데도
원정 거리가 길어서 조정에서 실행할수 있을지 고민했을 정도였는데 하물며 100만 대군이라?
이것이 원인이 되어 후에 그 유명한 우중문 별동대가 구성되는 것이니 요동성
이 끈질기게 버텨준 덕분에 다급해진 수 양제는 평양 직공을 위해
우중문과 우문술을 위시한 30만 5천명의 별동대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초에 고구려가 방비가 철저했던 것도 있지만 처음 부터 고구려의 얄미운 “항복
운운” 계략이 먹혀 들었던 전투가 바로 요동성 공방전으로.... 고구려군은 농성
하는 도중에 상황이 불리해지면 바로 수나라군에게 항복 의사를 타진했는데,
최고 통수권자인 양제가 친정을 와 있는 상황이 오히려 매우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지휘관에서 황제까지 보고가 올라가는데 시간이 소요되고 황제가 의논하는데 시간이 걸리며 항복을
받아들인다든지, 무시하고 계속 공격을 하든지 결정이 내려져 다시 일선부대 지휘관까지 명령이
전달되는데 시간이 소요되니.... 당연히 이 기간 동안은 “휴전” 이 불가피했고, 위험에 빠졌던
고구려군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요동성의 피해를 복구하고 수비군의 손실을 메우는데 쏟았습니다.
이런 고구려의 얄미운 계략이 먹혀든 원인 제공자는 다름 아닌 수 양제이니.... 그는 장수들
에게 “일체 전쟁은 진격하고 정지함을 모두 반드시 아뢰어 회답을 기다릴 것이며
제멋대로 하지 말라.”라고 명령을 내렸고, 덕분에 수나라 장수들은 급하게 싸워야 할
때 감히 나서지 못하고 황제의 명을 받느라 성을 함락할 좋은 기회를 매번 놓쳐 버립니다.
급기야 요동성이 함락될 수도 있는 급박한 위기가 올때, 성 내에서 항복하겠다는 (거짓) 의사 표시
를 하면 장수들은 감히 싸우지 못하고 항복한다는 요동성의 의견을 후방에에 알렸고, 황제의
말을 듣고 다시 나서려 할 때면 그 동안에 요동성은 다시 방어태세를 갖추어버린지라 처음
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으니“수서” 의 기록에 따르면 이런 짓을 "세번" 연속으로 되풀이 합니다.
수나라 군대가 바보가 아닌 이상 고구려군이 장난질 하는게 뻔히 보이는 상황인데도 “저항을 중지하고
항복하는 적군은 대국의 아량으로 받아 줘야 한다” 라는 천하를 통일한 수양제의 대국 다운 논리로
이 장난질을 받아줬던 것이니.... 물론 그 허세질의 대가는 고스란히 수나라 장병들이 뒤집어 썼습니다.
이쯤 되면 양제 입장에서도 분노 할수 밖에 없었으니 그간의 정복 사업이 쉬웠던 탓도
있었으니 이동식 궁궐을 짓는다든지 하는 위엄을 보이는 방식으로 여러 국가들의
항복을 받아왔던 것인데... 그에 비하면 고구려 정벌은 애초에 목적 자체가 고구려
의 완전한 멸망인지 혹은 국왕의 입조인지 아니면 단순한 복종인지도 불분명 했습니다.
여름이 되었으나 여전히 수나라 113만 대군은 요동성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기만 할 뿐
이었고, 단 한명의 군사도 요동성 성벽을 넘어가지 못했으니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수 양제는 장수들을 불러 질책하였으니 6월 기미(己未)에 수 황제가 요동성 남쪽
으로 행차하여 성과 못의 형세를 보고 여러 장수를 불러 잘못을 따져 꾸짖어 말합니다.
“공(公)들은 관직의 높음과 집안의 지체를 믿고 어리석고 나약한 사람으로 나를 대우하려 하느냐?
공들이 내가 오는 것을 원치 않은 것은 병패(病敗)를 당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공들이 하는 바를 보아 목을 베려함이다. 공들이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여 힘을 다 내지
않으니 공들을 죽일수 없을 것이라 여기느냐?” 하였습니다. 《삼국사기》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장수들은 모두 두려워서 얼굴 빛이 잃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수 양제의 무능과 고구려군의 놀라운 분전
이 이어지며 수나라 대군은 요동성 근처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으니, 요동성
이 함락되지 않자 답답했던 양제는 요동성과 방어선을 구축한 인근의 다른 성들을 건드려
보지만 요동성과 같은 전술을 썼는지 어쨌는지 효과가 신통치 않아서 한 개의 성도 점령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수양제 113만 대군의 침공에 3개월이나 버텨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요동성주의
이름은 누굴까요? 모릅니다! 성주 이름을 모르니 장수들의 이름도 전혀 모르며
그후 당태종의 30만 대군을 맞아 안시성을 사수해 전쟁을 승리로 이쓴 성주의
이름은 누굴까요? 역시 장수와 성주의 이름은 모르니 이게 한국 역사학계의 현실입니다?
요동성주 이름은 모르지만 안시성주 이름은 양만춘 이라구요? 그럼 梁萬春 입니까? 아니면 楊萬春 ?
1145년에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 김부식은 "총명하고 세상에 다시 나오기 힘든 당태종을 물리
치다니 성주는 호걸로 보통이 아닐텐데 이름이 전하지 않으니 매우 애석하다." 라고 한탄했습니다.
고려 중엽인 1145년에는 이미 멸망한 나라인 고구려나 백제 역사서가 전해지지 않으니 김부식
은 주로 중국 역사서에서 한국 관련 부분을 추려서 삼국사기를 쓴 것이지요? 통일신라가
고구려사나 백제사를 편찬해 주었더라면 좋았겠지만 편협했던 탓인지.... 그런 아량은
없었으며 게다가 자기나라 역사서“국사” 조차도 고려로 전하지 못한 나라가 신라 입니다?
안시성주 이름은 모르다가 임진왜란 때에 참전한 중국 병사가 말해주어 알았다는 얘기와 그 15년 전에
명나라에 사신갔던 사람이 듣고 왔다는 말도 있는데, 안시성 전투 909년 후인 1553년 명나라 熊鍾谷
이 ‘編集’ 하여 간행한 『唐書演義』라는 소설책 속에 안시성주 이름이‘양만춘’ 으로 나온답니다? 당시대
도 아니고 천년이나 지난 후에, 역사서도 아니고 소설가가 쓴 소설책에 나오는 지어낸 이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요동성주와 안시성주의 이름을 모르는 이유는 중국 사서에 두 성주의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 입니다. 1145년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때 우리 고대 기록이 워낙 적은지라 중국사서에서
뽑아 쓴게 많은데, 중국 사서가 중국 입장에서 썼다고 비난하지만.... 저 중국 사서가 없었다면 학생들은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동예, 옥저, 부여등 역사교과서가 거의 대부분 빈페이지로 된 것을 볼 것입니다?
수 양제는 고구려성들의 격렬한 저항에 작전에 큰 차질이 생겼음을 알고 육군 대장 좌우익대장군인
우문술, 별동군 총사령관인 우중문(于仲文)으로 하여금 9개군 30만 병력을 차출해 평양 직공을
명하니 방어선을 우회하고 평양 일대에서 수군과 합류해 일격에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시도였습니다.
수 양제는 방패, 갑옷, 옷감, 무기, 화막(火幕, 땔감) 등을 지급하여 별동대를 꾸렸는데문제는 보급
체계 때문에 유사시를 대비한 100일분의 추가 식량을 병사 개개인이 짊어지게 함으로써
병사들의 피로가 더하게 되니, 식량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길을 가다가 버리는 병사들이 늘자
지휘부가 버리면 죽는다고 엄포를 놓으니 이번에는 땅을 파고 그곳에 보급품들을 묻어버립니다.
하지만 버리면 굶게 되니 별동대는 절반 정도 온 상태에서 식량이 떨어질 판이 되어 눈치만
살피고 있었는데... 방패, 갑옷, 옷감, 무기, 화막에 식량까지 챙길 정도면 완전 군장 그
이상의 수준으로 먼 거리의 원정을 떠난다면 오래 주둔해야 하니 당연하긴 하지만 그런
물자들을 보급부대에게 운송하게 하는게 아니라 병사들이 짊어지라는건 가히 미친 짓입니다.
이게 말도 안되는게 엄청난 무게이니 오늘날에도 국군이 군장을 꾸릴 때 20kg 에 육박
하는 무게 때문에 엄청나게 힘들어 하는데.... 수군은 한달 쌀 10kg 에 석달이면
30kg 이니 군장을 합쳐 1인당 50kg이나 되는 짐을 짊어지고 요동성 부터 평양성
까지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서 행군한다고 가정하면 하루도 되기 전에 기진맥진 합니다.
그 와중에 고구려군이 게릴라전이라도 펼치게 되면 행군의 난이도는 인간이 수행
할 수 없는 지경으로 올라가며 더군다나 길도 평지가 아니라 곳곳에 험한길이
있는데다가 요즘처럼 도로 사정이 좋지 못하며 산길도 나올테고..... 그럼
유일한 해결책은 굶어죽을 걸 알면서도 밤에 몰래 군량을 파묻어 버리는 것입니다.
별동대 전술의 성격상 보급선의 유지는 불가능하니 별동대는 곳곳에 설치된 고구려 방어선
을 돌파하지 않고 우회하면서 평양성으로 직행했는데, 이는 별동대의 후방에 고구려군을
고스란히 놔뒀다는 뜻이므로... 전투부대 보다 전투력이 취약한 보급부대의 안정적인 지원
을 생각할 엄두조차 못할 작전이니 좋든 싫든 자기 보급품은 짊어지고 갈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중문, 우문술의 30만 5천 대군은 평양성 인근에 정박해 있는 내호아 수군의 병참 지원을 받기로
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내호아가 해로를 통해 실어온 식량등 군수물자와
공성용 무기들을 지원받아 왕도인 평양성과 요동 방어선을 분단시키는게 주전략이었다고 봅니다.
요동성을 함락시켜 국경 밖과 안으로 부터 고구려 왕도를 완전 포위하는 전략적이었으나 하지만
공명심에 눈이 먼 내호아가 별동대를 기다리지 않고 독단으로 작전을 수행해 평양성으로
진격하다가.... 왕제 건무의 유인작전에 말려 수군이 궤멸되면서, 보급이 완전히 끊긴채
적진 한가운데서 고립되어버린 우중문, 우문술의 30만 별동대는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립니다.
이때 영양왕은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보내 요동성주 처럼 거짓으로 항복을 하니, 을지문덕은
적진에 들어가 국왕의 항복 준비를 구실로 직접 염탐을 하고 돌아왔는데... 수 양제가
을지문덕이나 영양왕 둘 중 하나라도 오면 무조건 잡아두라고 한 것을 보면 요동성에서 하도
속아서 그리 명령한 것으로 보이지만... 우중문은 대국의 체면 때문에 그냥 돌려보낸 것입니다?
고구려군의 특기인 거짓 항복 전술은 당나라군에게 황해도 석문전투에서 대패해 서라벌이 위험해지자
문무왕이 차마 옮기지도 못할 정도로 구역질 나는 비루한 언사로 용서를 빈 국서를 보낸 것이나,
대몽항쟁때 1차 침입시 야전에서 대패하고 몽고군이 개성에 육박하자 항복하고 국왕이 내조하겠다고
약속해 몽고군이 물러가자 바로 강화도로 천도했으며, 그후 여러번 침공때 마다 조정은 거짓 항복을
되풀이해서 여러차례 몽고군을 물리쳤고, 정묘호란 때도 거짓 항복으로 후금 군대를 물러가게 합니다?
아니면 요동성에서 하도 속다보니 진짜 항복할 생각이 있으면 왕이나 재상 을지문덕이 직접 찾아
오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으니, 그럼 을지문덕이 찾아간 것은 정탐이라기 보다는 협상을 핑계
로 “시간을 끌기” 위한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한데.... 병자호란 때 최명길이 청태종과
만난 것은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대피하기 위한 시간벌이”를 한 것과 같은 행동으로 보입니다.
항복 의사를 밝힐듯 말듯 하면서 협상을 시도하는 척하며 시간 끌기라면 을지문덕과 같은 고위층
인사가 방문하는게 이상하지 않으니.... 예나 지금이나 협상 과정은 마음만 먹으면 끝도
없이 늘어질 수 있기 때문인데, 우중문은 명령대로 을지문덕을 체포하려고 했지만 상서
우승 유사룡이 사신을 잡아두는 법은 없다며 반대했으며 유사룡은 이 일로 전쟁 후에 처형됩니다.
우중문은 속은 것을 눈치채고 평양을 향해 진격할 것을 주장한 반면에 우문술은 병사들의 사기
가 꺾였고 을지문덕이 수나라 진영을 염탐하고 돌아갔으니 싸워도 이기기 힘들 것이라 반대
하며 철군까지 주장하는데, 우중문은 정예 병력으로 공격하면 일을 이룰수 있다고 주장하며
벌컥 화를 내면서 우문술을 꾸짖으니 우문술은 지휘를 받는 처지라 명령을 따라야만 했습니다.
결국 추격전이 벌어졌으니 배고프고 지친 탈진상태의 수나라 군대는 을지문덕을 추격하였고,
적군의 지친 기색을 눈치챈 을지문덕은 피곤하게 만들려고 싸울 때마다 거짓 패하여 달아
났으니 하루에 일곱번을 싸워 일곱번을 모두 지는 일도 있었는데, 지휘한 것은
우문술로 보이니 퇴각을 주장하던 그도 계속되는 승리에 생각이 적잖이 바뀐 것으로 보입니다.
우문술도 평양성에만 도착하면 수군과 합류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보급 문제는 다 해결
될 것이라고 믿게 된 것 같은데, 고구려군의 거짓 후퇴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니 이러한
지연 전술이 효과를 보니 먼저 평양 인근에 도착한 수나라 수군은 30만 육군이
도착하지 않자 조급해진데가 공명심으로 5만 병력으로 독자적으로 평양성 공략에 나섭니다.
수나라의 수군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서는 평양성에서 60리 떨어진 곳에 상륙
했는데 그곳에는 고구려군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고려의 군주 고원이
경내의 군사들로 맞서 진을 펼쳤는데 그 길이가 수십리에 달했으니 장수
들이 두려워하자 사령관 내호아가 웃으면서 부장 주법상과 군리들에게 말합니다.
‘본래 고려에서는 청야전술로 우리를 맞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죽기를 자처하다니,
마땅히 저들을 물리치고 아침밥을 먹으리라’고원(영양) 왕의 아우 고건무는
용맹과 무공이 절륜하였는데 결사 수백을 이끌고 맞섰으니.... 결국 내호아가
크게 승리하여 평양성 외곽에 이르렀는데 참획한 것이 셀수 없이 많았다. 《북사》 내호아 열전
수나라 내호아의 수군은 여기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인 가지 않는 승리를 거머쥐고는 기세가
오른 채로 평양성 앞에 접근하는데.... 별동대등 육군의 합류를 기다려야 한다는 부장 주법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호아ᅟᅳᆫ 자만심에 가득차서 4만의 병력을 가려뽑아 평양성 직공에 나섭니다.
“우리 장수는 나성 안의 빈 절에 병력을 숨겨두고, 다른 병력을 출동시켜 내호아와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하였다. 내호아가 쫓아 성으로 들어와서, 병력을
풀어놓아 약탈을 하게 하면서 다시 대오를 갖추지 않았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이제 고구려군의 게략이 시작됐으니 평양성은 외성 - 중성 - 내성 - 북성의 4중 구조인데 군대를 숨긴채
일부러 패하는 척하며 적을 외성 안으로 유인했으니, 수나라 병사들은 이리저리 흩어졌고 그때 부터
고구려군이 미끼를 문 수나라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니 이때 왕제 건무는 500명의 결사대로 적진을
휩쓸었고 매복했던 고구려군이 수나라군을 도륙하니 내호아는 이로 인해 퇴각합니다.《수서》 내호아열전
“숨은 병력이 일어나니 내호아는 크게 패하여 겨우 붙잡히는 것을 면하였고, 사졸로서 돌아간
자는 수천에 불과하였으니 아군이 추격하여 배 있는 곳에 이르렀으나, 주법상(周法尙)
이 진영을 정비하고 기다리고 있어 아군이 후퇴하자 내호아가 병력을 이끌고
돌아가 바닷가 포구에 주둔하였으며, 다시는 호응하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중국 측에서도 절륜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고건무(훗날 연개소문에게 살해됨)의 무공은 대단했던
모양이니 그의 돌격에 평양을 직공하려는 수나라의 회심의 일격은 무력화되었고, 또한
육로로 평양을 향하던 30만 육군과의 연계 역시 기대할 수 없게 되었는데 만약 수군이
30만 육군 별동대와 평양성 근교에서 합류해 보급문제를 덜어주게 된다면 위협적이었을 것입니다.
한편 우중문의 별동대는 평양성까지는 도착했지만 군량이 바닥난 상황에서 적의 견고한
성채를 보고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였으니.... 이때 을지문덕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군사를 물리면 왕과 함께 항복하겠다" 라는 내용이었으며 이때 을지문덕은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 (與隋將于仲文詩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내는 시)를 함께 보냅니다.
언뜻 보면 적을 칭찬하고 추켜세우는 글로 보이지만 전황을 파악 못하는 바보가 아닌
이상 글에 담긴 뜻은 명백하니... "너희는 이미 졌고 더 이상 할수있는 것도 없다."
이 도발에 우문술과 우중문은 분노했지만, 감정이 이성을 지배하는 바보들이
아니었던 지라 그들은 더이상 작전 속행이 불가하다고 판단해 퇴각을 명령합니다.
수군은 방진을 치며 후퇴했는데 이는 고구려 공격을 염려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으니 7월 수나라
군대는 살수(薩水)에 이르렀는데... 군대가 강을 반쯤 건넜을 무렵 갑자기 고구려 군대가 뒤에서
공격해오자 후위를 맡은 신세웅의 부대가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하며 전 부대가 혼란에
빠지니 전투고 뭐고 할수 없는 상태에서 살아남은 수나라 군대는 하루에 무려 400리를 달아납니다.
수나라 지휘관 신세웅은 전사하고 왕인공(王仁恭)과 설세웅만이 최후부대로 남아 고구려군
을 물리쳐 다른 부대가 달아날 수 있게 하였으니... 30만 5,000명에 육박하던 별동대
9군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겨우 2,700명이었고 수만을 헤아렸던 군수와 기계는 모두
잃어버렸으니 그 유명한 살수대첩으로 한국사에서 야전으로 거둔 가장 큰 대 승리 입니다.
살수대첩의 참패를 접하여 진노한 수양제는 패전하여 돌아온 우문술, 우중문, 내호아 등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삭탈 관직한후, 우문술을 쇠사슬로 묶어 죄수취급을 하며 수나라로 압송한뒤 먼저
유사룡을 을지문덕의 염탐을 위한 거짓 항복에 속아 살려 보내준 책임을 물어 참수형에 처합니다.
내호아와 우문술은 지위가 박탈되어 서민으로 떨어졌고 우중문 역시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 하옥되었으며, 이 때문에 홧병이 발생해 석방되었다가 결국 병사했는데....
다만 우문술의 부장이었던 설세웅 만큼은 살수대첩 후에 뒤를 추격해오는 고구려군
을 맞아 싸워 승리한 공으로 패전의 책임을 전혀 지지 않았고 오히려 승진 하였습니다.
수 양제는 고구려에 원정온지 8개월 만에 참혹한 패배를 당하고 수나라로 귀환하니 2차 전쟁
역시 고구려의 승리로 끝나는데.... 수나라 군대는 요수 서쪽 무려라(武厲邏)를 함락시키고
요동군과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하였을 뿐, 그외에 성 하나도 제대로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했으니 그야말로 대패였고 고구려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승리였던 것입니다.
2년 후인 613년 3월, 수 양제는 2차전쟁 당시 겪었던 패전의 울분과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한번
4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였으니... 2차 침략을 교훈삼은 수 양제는 3차 침공
때 부터는 장수들에게 자유 재량권을 부여하여 고구려를 효율적으로 몰아붙였고, 2차 보다 더
적은 병력으로 원정을 왔음에도 불구하고 요동성은 오히려 더 큰 위기를 맞이해 함락 직전까지 갑니다.
살수에서 설세웅과 함께 대활약으로 고구려군 추격을 멈추게 했던 왕인공이 이끌었던
선봉대는 신성을 공격하였으며, 이후 요격에 나선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신성에서 타 지역 지원에 나서는 것을 봉쇄하였고... 그 다음에 본대가 요하를
도하하여 요동성을 재차 공략하면서 20여일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집니다.
초반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요동성이 함락되지 않자 포대 1백여만장을 쌓아 요동성을
내려다보며 공세를 펼첬고, 이동식 망루를 통해서 공세를 펼치기도 했는데
2차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별동대를 차출해 압록강 인근까지 접근시키니 113만
이라는 물량으로 밀어붙인 2차 때보단 덜하지만 이때 역시 고구려의 큰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수 양제 휘하에서 보급 임무를 담당하던 예부상서 양현감이 과거의 원한과 수 양제의
폭정에 불만을 품어 친구인 포산공 이밀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키면서 수 양제는 철군을 결정
하는데.... 이때 양제의 측근이자 양현감의 오랜 친구였던 병부시랑 곡사정이 고구려로 망명하니,
곡사정은 양현감과 내통하던 중에 수 양제에게 들킬 위험에 처하자 고구려로 망명했다고 여겨집니다.
병부시랑 곡사정의 투항으로 수나라 군대에 대한 기밀, 특히 철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고구려는
이 정보를 활용해 철수하던 수나라 군대의 후미를 공격하니.... 예상하지 못한 고구려군의 기습에
수나라군은 당황했고 고구려는 승리하였으며 이때 수천여명의 적군을 패사시키는 전공을 올립니다.
수 양제는 수나라로 귀국한 이후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하여 일단 발등의 불은 껐으나 친구였던 이밀은
독자 세력을 거느리고 군웅의 행세를 하며 위세를 떨쳤으며, 또한 양현감의 반란을 계기로
수나라 내부에서 수 양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각지의 세력가들과 농민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납니다.
이런 와중에도 수 양제는 고구려에 대한 원한과 집착으로 수군 대장 내호아로 하여금 비사성을
공격하게 하니, 이때 비사성이 함락되면서 여수 전쟁에서 최초의 성 함락이란 소득을 얻었
지만... 그러나 수나라 내부에서 반란은 갈수록 거세져 육군은 이를 진압한다고 움직이지도
못했으며 내호아가 지휘하는 수군만으로 고구려를 침공하는 것도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도 오랜 전쟁으로 기진해 너무나도 지쳐 있었기 때문에 영양왕은 고구려로 망명했던
곡사정을 수나라에 넘기니 그는 끔찍하게 처형당했는데.... 수서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귀부
하는 형태로 수나라에 화친을 제의하니 수 양제는 체면치례가 된지라 이를 받아들였으며 4차
침략군에 철군 명령을 내렸다고 하니 이렇게 하여 고구려와 수나라 간의 전쟁은 종결 되었습니다.
망명한 인사를 송환해 정전을 꾀하는 것은 신의가 없는 것이니 양심에도 어긋날뿐더러 굴욕적
이지만, 20년간 대륙 통일 국가의 침략을 무려 3차례나 막아낸 고구려로서도 나라가
황폐해지고 엄청난 피로와 인명 및 재산 손실이 있었으니... 대규모 전쟁에서 으례 수반
되는 청야 전술로 고구려가 입은 피해는 너무나도 막심해서 전쟁을 지속할 힘이 없었습니다.
수나라는 수 문제, 수 양제의 2대에 걸쳐 고구려와 싸웠으나 결국 패하였으니 특히 수 양제
가 고구려와 벌였던 2차 전쟁의 경우에는 살수대첩으로 인하여 순식간에 30만의
대군이 궤멸당하는 엄청난 대패를 겪고 말았는데... 그에 따라 피해도 막심하여
엄청난 군량미와 군수 물자가 소진되었으며 수나라 조정의 재정도 상당히 소모되었습니다.
수 양제는 대운하 건설과 대규모 황궁 건설등 잦은 토목공사로 인한 인력징집과 징세가 늘면서 민심을
잃었고, 부황과 형제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했으며 간언하는 신하를 처형할 만큼 성격도 잔혹해 점차
신하와 장군들도 등을 돌렸는데... 양현감의 반란으로 고구려에서 철수한후 결국 수나라는 내란에
휩싸였고, 당국공 이연이 내란에서 군웅들을 제압해 당을 세움으로써 수 왕조는 완전히 멸망합니다.
고구려 원정으로 인해 군량미 강제 징수와 젊은층의 희생으로 수나라 농촌은 피폐해졌으며
도처에 기근이 발생하자 불만이 쌓인 나머지 반란으로 이어졌고.... 정부의 통제력은
심각하게 약화되었는데 굶주린 농민들에게 식량을 분배하거나 군사력으로 진압했다면
모를까, 반란을 진압할 군사력은 고구려 원정에 묶여있었고 식량은 이들을 먹이는데 쓰였습니다.
수 양제는 양현감의 반란은 진압했지만 이후 각지에서는 거대한 규모의 반란이 발생하니 양쯔강
델타 지역에서는 유원진이 반란군을 조직했고, 산둥에서는 오해류가, 동해에서는 팽효재 등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럼에도 양제는 또 다시 고구려 원정을 계획했으나 재정파탄과 행정력
붕괴로 병력을 제대로 모을수 없었고 618년 우문술의 아들로 친위대 우문화급에게 피살당합니다.
“4차 침입시 양제가 회원진(懷遠鎭)으로 행차하였다. 수나라는 혼란하여 소집한 병사 대부분이 기일을
어기고 오지 않았고, 우리 나라도 역시 지치고 쇠약한 상태였다. 수나라의 장군 내호아가 비사성
(卑奢城)에 이르자, 맞이하여 싸웠으나 호아가 승리하고 곧 평양으로 진격하려고 하였다. 임금(영양왕)
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곡사정(斛斯政) 을 돌려보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제8
영양왕이 승하한후 그의 뒤를 이은 영류왕(건무)은 수나라 멸망후 중국 통일이 되기 전부터 당나라와
화친을 맺는등 중원에 유화적인 제스쳐를 취하며 노선을 바꾸니 전쟁의 피해를 복구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기도 한데... 중국을 자극할 만한 북방 세력에 대해서도 소극적인 태도로 선회하니 태자 시절
수나라군을 격파한 영웅임에도 친당 정책으로 일관했는데 통일 왕조의 저력을 체험했기 때문 입니다.
한편 당나라에서도 평화를 지향하던 당고조와는 달리 당태종은 야욕을 버리지 않고
고구려 정벌을 위한 작업들을 추진하는데.... 이에 대해 온건파로 타협적이던
영류왕은 강경파 연개소문이 일으킨 정변으로 시해당하고 이후 조카 보장왕이
옹립되자 고구려와 당나라 양국간의 갈등이 불거져 고구려 ~ 당 전쟁이 발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