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전 국악그룹 '들소리'
국내무대 넘어 해외로 눈길 49개국 300여 차례 공연
국악에 레게·재즈 등 버무려 NYT "깊고 장중한 두드림"한낮의 열기가 32도를 오르내리던 지난달 20일 서울 성산동의 지하 1층 스튜디오. 조명을 켜자 50평 남짓한 연습장은 근사한 소극장으로 변했다. 전통 타악기를 바탕으로 월드 뮤직을 지향하는 국악 그룹 '들소리'가 일반 관객들에게 연습 과정을 공개하는 오픈 리허설 현장이었다.
5명의 주자가 큰북 3대를 마주 보며 북채를 잡자, 둥덩둥덩 맥박을 닮은 소리가 일제히 울려 퍼졌다. 북재비의 손놀림이 빨라지자, 신명도 한층 배가됐다. '반야심경' 같은 불교 경전에서 노랫말을 가져와서 아쟁과 가야금, 태평소와 대금, 장구와 북으로 우리 음악의 색채를 우려낸 '사바하(娑婆訶)'는 절정 대목에 이르자 서양의 레게 음악과 재즈가 어우러지면서 흥을 더했다. 국악의 편성을 살리면서도 세계 음악의 공통분모인 리듬에 착안해서 역동적인 성격을 살린 것이 들소리의 매력이다. 전현숙(30) 들소리 공연팀장은 "국악이라고 해도 우리는 잔잔한 호수가 아니라 끓어오르는 용암과 같다"고 말했다. '퓨전 국악'의 일종인 이들의 음악은 국적과 장르를 구분하기 어려운 묽고 밍밍한 '칵테일'이 아니라, 국악의 향(香)이 진하게 살아있어 걸쭉한 '막걸리'를 닮아 있다. 지난 2008년 뉴욕타임스는 들소리의 공연에 대해 "이웃 마을 농부들의 잔치 마당에서 들려올 법한 깊고 장중한 두드림"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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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퓨전 국악그룹‘들소리’의 해외 공연 모습. 1993년 일본 공연을 시작으로 49개국 146개 도시에서 300여차례 공연을 펼쳤다. /들소리 제공
'월드 비트(world beat)'라는 이들의 구호처럼 들소리는 1993년 일본 공연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49개국 146개 도시에서 300여 차례 공연하면서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지난 7월에는 북유럽 록 음악제인 덴마크의 로스킬레 페스티벌에도 초청받아 공연을 펼쳤다. 보컬을 맡고 있는 이은비(26)씨는 "영국에서 공연한 직후 스페인으로 건너갈 때는 36시간 동안 쉬지 않고 차를 탔다. 해가 뜰 때에도, 질 때에도 여전히 차는 달리고 있었다"며 웃었다.
'들소리'는 단원 18명과 스태프 10명의 단출한 규모이지만, 항상 공연이 가능하도록 2개의 연주팀을 가동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다 보니 하나의 무대에서 전공을 넘나들면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는 것이 이들에겐 자연스럽다. 가야금 단원 정경아(31)씨는 "기존의 장벽을 허물고 타악기와 기악을 소화하는 멀티플레이어가 우리의 지향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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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열렸던 공연.
'들소리'가 처음부터 세계무대에서 쾌속 질주한 건 아니었다. 1984년 경남 진주에서 마당극 단체로 출발했고, 1997년 IMF 경제위기 이후에는 청소년 전통교육으로 방향을 수정했다. 서미숙(35) 기획실장은 "대학로에서 한동안 쪽방 신세를 못 면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2005년 세계적 월드 뮤직 페스티벌인 워매드(Womad)에 초청받은 것을 계기로 7차례나 이 축제에 섰고 미국과 영국, 스페인과 칠레 등 전 세계로 활동반경을 넓혔다. 고3 때부터 들소리에서 활동해온 타악기 단원 김하람(21)씨는 "칠레 산티아고의 야외광장을 가득 메운 2만여명 앞에서 공연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이 공연이 들소리의 단독공연으로는 가장 많은 관중 앞에서 연주한 무대였다.
이들의 음악적 야심은 멈출 줄을 모른다. 지난 2006년 영국 법인, 2008년 미국 법인을 설립하면서 상시 해외공연이 가능한 시스템을 갖췄다. '세계를 움직이는 국악 공연 팀'인 셈이다. 상쇠를 맡고 있는 하택후(30) 공연팀장은 "한국에서는 국악이 설 자리가 좁기 때문에 역발상으로 처음부터 해외로 과감하게 눈을 돌렸다. 가사의 뜻은 통하지 않아도 '얼씨구' '잘한다' 같은 추임새가 주는 어감은 외국 팬들도 즉각적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행복을 축원하는 한국의 전통행사에서 착안한 '비나리'를 비롯해 언제 어디서든 외국 무대에 설 수 있는 '맞춤형 레퍼토리'를 4개까지 확보하고 있다. 서미숙 실장은 "매년 여름이면 세계 축제 투어, 가을에는 남미 공연, 겨울에는 유럽 극장 공연이라는 식으로 한국의 들소리가 세계 전역에서 울려 퍼지게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들소리 '여우락 페스티벌' 공연, 9~10일 오후 8시 국립극장, (02)2280-4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