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없는 아이들
김연기 목사(용강면 출신)
둘째 딸이 초등학교 다닐 때 일이다.
여름방학이 지나 개학식 첫날 학교에서 돌아와 하는 말이
“엄마, 우린 왜 시골이 없어?”
친구들이 여름방학 동안 시골에 다녀와서
매미도 잡고 개울에서 고기 잡던 이야기하며 자랑들 하는데
시골에 가보지 못한 딸이 몹시 부러웠던 모양이다.
아빠 고향은 이북이라 갈 수 없고
외갓집은 6.25 피난 후에 정착한 포항이라서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에는 한 번 다녀오기가 쉽지 않았다.
벼루고 벼루다 한 해 여름방학에 아이들이 꼭 한 번 다녀왔다.
우리 아이들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효창동’이라고 서슴없이 말할 것이다.
5남매가 모두 초등학교로부터 대학까지 효창동에서 다녔고
또 다섯이 모두 효창동에서 결혼까지 했으니까...
그래도 효창동엔 효창공원이 있고 백범 김구 선생의 묘소도 있어
고향이라고 하기에 별로 손색이 없는 동네였다.
그러나 지금 손자들에게 네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생각하니 야릇한 느낌이 든다.
‘서울’이라고 대답하기엔 마치 내 고향이
‘대한민국’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해서 그렇고...
아마도 xx동 xxx아파트 xxx동xxxx호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출생지는... xx병원 산부인과라고 해야겠지?
우리 자랄 때에 비하면 별로 부러울 것 없이
밝고 명랑하게 자라난 손자들인데도
왜 측은하게 여겨지는 지 알 수 없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나는 “용강 알뫼”라고 대답한다.
정확히 말하면 평남 용강군 용강면 란산리 677번지 바로 내가 태어난 곳이다.
‘알뫼’(卵山)는 동네 옆에 있는 작은 산의 모양이
계란처럼 둥글다 해서 붙은 동네 이름이다.
200 여 호나 되는 의성김씨(義城金氏)의 집성촌으로
매우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동네였다.
동네에 4개의 서당이 있었는데, 그 중의 화재(花齋)라는 서당은
홍경래가 수학했던 서당으로 유명했었다.
1924년에 나의 선친이 김인성(麟聲. 독립운동가 건국훈장 애족장)과 함께
어렵게 설득해서 4개의 서당을 합하여 명신학교를 설립함으로써
비로소 동네에 신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1935년에 선친(김영신)이 교장을 사임하고 교회 목회의 길을 시작했다.
내가 세살 때 고향을 떠났으니까 고향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지만
여름방학 때면 할머니 집에 가서 고향 농촌체험을 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고향에 가려면
대동강 하류 석구당 나루를 건너 기차를 타고
태성이나 진지동역에서 내려 25 리를 걸어가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길이 얼마나 지루하고 지겨웠는지 모른다.
가다가 해주(연못)를 만나면 목욕을 하고 쉬어 가니
거의 반나절이 걸려서야 겨우 저녁에 도착하는 것이다.
몇 해 전 용강면 면민친목회가 모이는 날
마침 고향에서 살다 왔다는 30대의 젊은 탈북자가 참석했다.
모두 기대감을 가지고 이것저것 궁금하던 것을 물었으나
55년 전의 이야기가 그 젊은이에게 통할 리 없었다.
행정구역과 명칭이 모두 달라졌다는 것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정지용의 “고향”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하지만 내 마음에 그려진 고향 ‘용강 알뫼’의 그림만은
내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집 앞 넓은 마당 앞의 텃논과 마주 바라보이는 월암산까지 이어지는 넓은 전야,
그리고 그 사이에 흐르는 시냇물이 눈에 선하다.
아마 그래서 우리 조상이 교통이 불편함에도 여기에 자리를 잡았나보다.
그 월암산 중턱에는 범굴이 있고 그 밑에 처관 할아버지(고조부)의 무덤이 있다.
지금도 언제든지 찾아만 가면 할머니가 반겨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