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산수유국에 들다 듀공 목련보신탕 늙은 쌍둥이들 ‘밥을 딴다’라는 말 백주대낮에 여자들이 칼을 들고 설치는 이유 매화 종다리, 종아리 별리 술도가가 있는 골목 먼저 온 신발 한 나무를 사랑할 수도 있다 피리 소리 봄꽃들 버들치야, 버들치야, 첫사랑 봄밤의 냄새 치자꽃 장미전(煎) 마른 장마 첫물 수련 모란해후 결이라는 말
제2부 각시투구꽃을 생각함 하루종일 비 독한 눈 하얀 저수지 어떤 밥상 황매실이 있는 풍경 아오리 역행(逆行) 육필 원고 공중 낯짝 향기의 처소 여름의 기원 배경이 되는 일 기다리는 무덤 눈사람의 시 국화차를 달이며 무덤의 그 마음을
제3부 일식 오동나무집 대구 뒤통수 연가 검색 공화국 부채에 대하여 당신들이 꽃이에요 점심 꽃 민들레 도장 반딧불이 죽집 은단 여자의 적은 여자다 일식 2 취업일기 나도 우주를 들러서 이곳으로 왔다 아욱꽃이 피었다 국수집에서 파꽃 줄 타는 사람 풀 정읍 김동수씨 작은댁 사랑채 이건기(移建紀) 방을 닦다 관제엽서가 왔네
해설|여정 시인의 말
삶의 비애를 넘어가는 애틋하고 간곡한 목소리
생의 중심에서 밀려나 변방의 그늘 속에서 살아가는 소외된 이들의 누추한 삶의 풍경을 따스한 감성의 필치로 그려온 문성해 시인의 세번째 시집 『입술을 건너간 이름』이 출간되었다. 5년 만에 새롭게 선보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도시의 후미진 외곽 지역을 들여다보면서 슬픔조차도 주린 배를 채워주지 못하는 상처투성이의 안쓰러운 삶의 순간순간들을 읽어내며 삶의 진면목을 사유하는 존재론적 성찰에 이른다. 대상을 바라보는 세밀한 관찰력과 선명한 이미지가 투명한 언어에 실려 반짝이는 가운데 섣부른 수식이나 과장 없이 냉정한 시선으로 그려내는 삶의 다양한 무늬들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하며 잔잔한 울림을 자아낸다.
오늘 나는/썩은 사과를 먹는 사람//사과 속에 깃든/벌레의 하늘과 땅과/벌레의 과거와 미래를 먹는 사람/벌레의 낮과 밤과/벌레가 피해 다닌 무서운 길들을 먹는 사람/벌레가 그토록 아끼던 희디흰 도화지를 더럽히는 사람/벌레를 파내고/벌레만 제외된 모든 세계를 먹는 사람//사과 한알의 별이 우주 속에서 폭발한 오늘/나는 나의 세계를/둥글게 베어 먹는 거대한 입을 바라본 사람(「일식」 전문)
문성해의 시는 곧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이자, “아래로 눌렸던 것이 일순간 튀어오르는”(문태준, 추천사) 듯한 삶의 간곡한 노래이다. 시인은 특히 “도시의 외곽에 기계부속품들로 흩어져 살”(「대구」)아가는 이주노동자들이나 “하루 삼만원 일당”의 공공근로에 나서는 여인들처럼 “누구에게 꺾어줄 수도/머리에 꽂을 수도 없는 꽃”(「파꽃」)과 같이 존재감을 잃어버리고 삶을 연명해가는 존재들에게 애틋한 관심을 보인다.
땡볕에 오글오글 쪼그리고 앉은 저 여인들/며칠 뒤면 시작되는 꽃 축제로 급하게 투입된 저 꽃들/호미와 모종삽을 든 꽃/저린 다리를 수시로 접었다 폈다 하는 꽃/작업반장의 눈을 피해 찔끔 하품을 하는 꽃/맘속에 수만가지 생각이 들끓는 꽃/하루 삼만원 일당을 받는 꽃/그 일당으로 밀린 공과금 내고 나면 없다는 꽃/아직 다섯시간은 더 쪼그리고 일해야 하는 꽃/누렇게 이가 썩고 입안에 하얀 구혈이 난 꽃/한번도 꽃인 적 없던 꽃들이/알록달록 차양 모자를 받쳐 쓰고/새로 외국에서 들여왔다는 꽃모종을 심고 있다(「당신들이 꽃이에요」 부분)
자본주의 사회의 메마른 현실 속에서 “그래도 한번은 피고 죽어야 한다고”(「점심 꽃」) “잉여된 목숨을 사는”(「하얀 저수지」) 이들을 시인은 따듯한 연민의 손길로 감싸안으며, “더이상 젖은 몸을 누일 집”도 “더운 숨을 섞을 가족”도 없이 “둥그스름한 슬픔만 남”(「눈사람의 시」)은 누추한 변두리의 삶에 훈훈한 생기를 불어넣는다. 또한 소멸의 시간들을 되살려 “지구 밖으로/우주 속으로 떠밀려난 것들”(「아오리」)을 소생시키고 사라져버린 존재감이 있었던 자리를 되짚어 찾아가는 길을 놓기도 한다.
꼬리 없는 개의 꼬리 있던 자리/한쪽 다리 없는 사내의 다리 있던 자리/오늘 아침 해머로 쓰러진 건물의 자리//꽃이 지고 난 자리/저수지의 물 마른 자리로/차곡차곡 차들어오는 것이 있으니//물결처럼 소슬히 밀려들어오는 이것을/나는 공중이라 부르니//공중은 사라지지 않는 것/밀가루풀처럼 빽빽히 찬 것//그러한 힘으로/저 가련한 이들의/꼬리며 팔이며 다리 있던 자리에//빼곡히 그것이 돋아올랐으리라/나는 믿고 또 믿는다(「공중」 전문)
“주변과 중심에 대한 예사의 생각을 거역하고 역전시키는 도발적인 상상력”(문태준, 추천사)이 빛나는 문성해의 시는 부정적인 현실을 뒤집는 힘으로 삶의 비애를 뛰어넘는다. 목청을 높이는 법 없이 담담하게 “저녁 기도를 위해 가는 향을 피우는 사제”(「국화차를 달이며」)의 심정으로 “한 방울의 맹독”과 같은 시를 짓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숭고한 시정신을 엿보게 된다.
시 한 줄 쓰려고/저녁을 일찍 먹고 설거지를 하고/설치는 아이들을 닦달하여 잠자리로 보내고/시 한 줄 쓰려고/아파트 베란다에 붙어 우는 늦여름 매미와/찌르레기 소리를 멀리 쫓아내버리고/시 한 줄 쓰려고/먼 남녘의 고향집 전화도 대충 끊고/그곳 일가붙이의 참담한 소식도 떨궈내고/시 한 줄 쓰려고/바닥을 치는 통장 잔고와/세금독촉장들도 머리에서 짐짓 물리치고/(…)/어느 먼 산 중턱에서 홀로 흔들리고 있을 각시투구꽃의 밤을 생각한다/그 수많은 곡절과 무서움과 고요함을 차곡차곡 재우고 또 재워/기어코 한 방울의 맹독을 완성하고 있을(「각시투구꽃을 생각함」 부분)
추천사
시는 유행(遊行)을 노래한다. 문성해 시인의 시는 매인 데가 없고 휘휘한 때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도시를 만행한 후에 얻은 간곡한 노래이기도 하다. 그에게 도시는 늙었고, 다분히 신경질적이다. 진열장에 불과하고, 거대한 입을 가졌으며, 사람들을 해치는 도둑과도 같다. 여기저기 도시를 행각하면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도시의 외곽 구역과 그곳에 사는 외곽인들이다. 도시의 중심으로부터 밀려난, “짓무른 눈가”를 지닌, 작은 신체의, 지지리 못난, 가령 “하루 삼만원 일당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는 이 구역과 사람들을 되레 세계의 상석에 앉힌다. ‘꽃’으로 대우한다. 심지어 구혈을 앓는, 외곽과 낱낱의 외곽인들로 인해 늙은 도시가 회춘하게 된다고 과감하게 발언한다. 주변과 중심에 대한 예사의 생각을 거역하고 역전시키는 도발적인 상상력이 그의 시 발생의 모태이며 힘이다. 그리하여 문성해 시인의 시는 어느 누구의 시편들보다 결기가 있고 열렬하다. 그의 강직한 시 앞에서는 아무 말 못하게 될 것이다. 뒤집는 이 힘은 아마도 울분 때문이리라. 아래로 눌렸던 것이 일순간 튀어오르는 강력한 시의 탄성! 시집을 잡고 있던 내 손아귀가 휘어지고 얼얼하다. 문태준 시인
시인의 말
밥벌이를 위해 하루 여섯시간을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가도 가도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람이 나라는 게 신기했다 누군가의 정강이뼈는 따스했고 누군가의 그것은 연장처럼 차가웠다 눈 뜬 잠 위로 한강이 흘러갔고 두어 차례의 태풍과 흐느낌이 지나갔다 나는 지하에서 무고했다 세시간을 달려 땅 위로 올라서면 눈이 두더지처럼 침침했다 이곳에서 태어난 몇편의 시를 내 곁에 머물렀던 따스한 정강이뼈들에게 바친다
2012년 초가을 3호선 지하철 안에서 문성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