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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간행된 순흥안씨1파 20세 찬성공파 안석경(安錫儆, 1718~1774)의『삽교집(霅橋集)』3권에 1765년에 지은 순흥안씨족보서(順興安氏族譜序)가 있어 여기에 옮깁니다. 이 족보 서문은 순흥안씨 을유보(乙酉譜, 1765)의 서문입니다.
順興安氏族譜序 a_233_481b
生民之隨姓有譜。將以尊祖而收族也。尊祖則法其可法。收族則敎其可敎。率其所敎而嚮其所法。此其譜氏之本意乎。族大者莫不有可法之祖。祖賢者莫不有可敎之孫。良以順天之德。其嗣必昌。而傳子之氣。其類不易故也。徵之歷古。驗之當世。的的乎可指而數。嗚呼其可誣也哉。我安氏自順興起。而閱三世至文成公。德業巍然。爲百歲儒宗。而族子文懿公。篤義明識。爲時名臣。密直公蘊德不試。纔見而隱。至其子文貞文敬二公。以文顯於天下。猗其盛矣。東國自箕子世衰而道始晦。至於王氏之朝。佞佛諂鬼而武殺赫然。人倫穢亂。去羗狄無幾。惟我文成公尊慕孔朱。興學授經。奬用儒雅。排佛遠鬼。慨然以善世自任。國風一新。五典復明。賴其倡導。而標準六百年於此矣。文懿公之隨難盡忠。遴文得人。密直公之恬退自修。誨子有聞。雖皆以天授之美。而蓋亦薰養之所及也。其在後承。多襲文行。華顯蕃昌。而亦有閼派瘁枝降於農商。卽尠姦頑之氓。與他氏有異。或能自度爲文士。豈不以尙類而然耶。竊甞聞之矣。天之播氣而傳於人也。譬之草木。盖有種焉。人以最靈而能變化。雖異於物類之拘滯。然其淸濁之大分。則有未可混者。涵襲之大同。則有未可外者。寧有英賢之胤。可以等鄙苗而儕慝裔乎。若其盛衰之故。則因乎培覆之氣。而氣蓋本乎道。道盖主乎生。生生之道。行於天而爲陽和之氣。在於人而爲文明之德。道與器偕。物以類至。故文德之厚。而和氣斯聚。文德之薄。而和氣斯散。散斯覆之而衰矣。聚斯培之而盛矣。自古篤文敎而提萬姓。胥匡以生者。和氣所以叢注。而晜雲所以榮茂乎。以此而言之。我安氏旣承先古之懿德矣。宜乎蕃衍長遠。尙荷餘祿而所禀無濁亂。少難敎之人也。順興舊有譜。竹窓公所錄也。詳整無僥冒。嘉靖丙午。文簡公添修入榟。後一百有十四年己亥。順原君繼錄榟行。而出入之際。不能無可憾。今又經百有餘年。來仍益盛。宜有類辨之擧而莫之能也。歲壬午。宗人大濟甫必觀甫。曁吾族子羽濟。同事繼修而仍之辨正。三君皆吾宗之秀也。考訂之詳而紀載則精。柝覈之明而取舍則公。我文成公文懿公密直公子孫凡三派。各以類分成書十有六冊。逾三歲乙酉始刊之。吁其勤摯矣。錫儆遠伏深山。不得與末議。而譜所移書索序文。錫儆辭不敢不得。乃謹序之。而抑區區之願。惟在譜頒之後。凡吾宗族顧譜而自愛。不移於流俗。其秀士之習於詩禮者。據譜而收其所接。振其可敎。與之同師乎先祖耳。我文成公在荒昧之世。而獨以朱子爲必可師焉。則其於妙道精義。必有所深契于心。其在身則五事。以莊重安詳見穪。而經國之務。先以立學養才。講明人紀。雖於武人。力開其惑。俾不自外於先聖之敎。是其修己治人之迹。而可想其知行之並至也。及乎文懿公之著烈。密直公之潛德。殆千載之下。四海之所可法。况以後孫而受一氣之傳者耶。於戱。可師之德。近在於吾祖矣。可敎之資。多在於吾族矣。吾猶未之學焉。則宜思自奮而偕吾族。以學吾祖也。吾其幾於學焉。則宜思自進而效吾祖。以訓吾族也。窮而獨善其身歟。尙可以及吾族。達而兼善天下歟。當自吾族而始。吾宗君子。於戱勉之哉。
순흥안씨족보서
사람들이 성씨에 따라 보첩이 있는 것은 장차 조상을 높이고 집안을 수합(收合)하기 위해서이다. 조상을 높이면 본받을 만한 일을 본받으며, 집안을 수합하면 가르칠 만한 사람을 가르칠 수가 있으니, 가르칠 만한 자들을 인도하여 본받을 만한 일로 향하게 하는 것이 씨보(氏譜)의 본의(本意)일 것이다.
집안이 큰 가문은 꼭 본받을 만한 조상이 있으며, 조상이 훌륭한 자는 꼭 가르칠 만한 자손이 있으니, 이는 하늘의 덕을 순(順)히 따르면 그 후손이 반드시 번창하는 바, 자손에게 전하는 기운이 변치 않기 때문이다. 지나간 일에 경험을 해보고 당세(當世)에 시험해 보면 분명히 이것을 가리켜 밝힐 수가 있으니, 아, 이를 속일 수 있겠는가.
우리 안씨(安氏)는 순흥(順興)에서 일어났는데, 3대를 지나 문성[文成公, 안향(安珦, 1243∼1306)])선자에 이르러는 덕업(德業)이 뛰어나 백세의 유종(儒宗)이 되었으며, 족자(族子)인 문의공[文懿公 안문개(安文凱, 1273∼1338)]은 돈독한 의(義)와 밝은 식견으로 당시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밀직공[密直公, 안석(安碩)]은 덕을 간직하고도 등용되지 못하여 잠시 나타났다가 은둔하였으며, 그 아들인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 1287∼1348) ] 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 1302∼1357)]에 이르러는 문장으로 천하에 드러났으니, 아, 거룩하다.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의 세대가 쇠함으로부터 도(道)가 비로소 어두워졌으며, 고려(高麗) 왕씨(王氏)의 조정에 이르러는 부처에게 아첨하고 귀신을 섬겼으며, 무력으로 살상을 자행하고 인륜이 혼란하여 오랑캐와 별로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오직 우리 문성공(文成公)은 공자(孔子)와 주자(朱子)를 존모(尊慕)하고 학교를 일으키며, 경서(經書)를 전수하고 유학을 권장하며, 부처를 배척하고 귀신을 멀리 하였다. 개연(慨然)히 세상을 좋게 만들 것을 자임(自任)하여 국풍(國風)이 일신하였으며, 오륜(五倫)이 다시 밝아졌다. 그리하여 그의 창도(倡導)로 말미암아 지금 600년 동안 표준이 되어 오고 있다.
문의공은 국난에 충성을 다하고 문장을 선별하여 훌륭한 인재를 뽑았으며, 밀직공은 한가히 물러나 스스로 닦고 아들을 가르쳐 명성이 있었으니, 비록 모두 천품(天稟)에 받은 아름다운 자질(資質)때문이었으나, 또한 문성공의 교양(敎養)이 미친 바였다.
후손에 있어서는 문행(文行)을 많이 이어 크게 드러나고 번창하였으며, 또한 영락(零落)한 계파가 있어 비록 농업과 상업으로 내려간 자가 있으나, 간사하고 완악(頑惡)한 사람이 적어 다른 성씨와 차이가 있으며, 혹은 스스로 발신(發身)하여 문사(文士)가 되기도 하였으니, 이 어찌 종류가 뛰어나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내 일찍이 들으니, 하늘이 기운을 내려 사람에게 전해 줌은, 초목에 비유하면 종자가 있는 것과 같다 한다. 사람은 가장 영특한 존재로서 기질(氣質)을 변화할 수 있으니, 비록 기질에 구애되는 일반 물건과는 다르다 할 것이다. 그러나 청탁(淸濁)의 큰 구분은 뒤섞일 수 없으며, 또 함양(涵養)하여 대동(大同)하게 하는 것은 예의일 수가 없는 것이다. 어찌 영현(英賢)의 후손으로서 더러운 싹과 같으며 간특(奸慝)한 후손과 똑같다 하겠는가.
성쇠(盛衰)의 이유로 말하면 북돋워주고 전복(顚覆)하는 자연의 기운에게 달려있는데, 기운은 도(道)에 근본하고, 도는 낳는 것을 주장한다. 상생(相生)의 도는, 하늘에 행해지면 양화(陽和)의 기운이 되고, 사람에게 있으면 문명(文明)의 덕(德)이 되니, 도는 기운과 함께하고 물건은 종류에 따라 이른다. 그러므로 문덕(文德)이 많으면 화기가 모이고, 문덕이 적으면 화기가 흩어지며, 화기가 흩어지면 전복되어 쇠망하게 되고, 모이면 북돋워져 번성하게 된다.
자고(自古)로 문교(文敎)를 돈독히 하고 만백성을 진작시켜 서로 바로잡아주며 살게 하였으니, 이 때문에 화기가 모여지고 후손이 번성한 것이다. 이것으로 말한다면 우리 안씨는 이미 선대의 아름다운 덕을 이었으니, 마땅히 자손들이 번성하고 길이 전하여, 아직도 남은 복을 받아서 기질에 탁란(濁亂)함이 없어 가르치기 어려운 사람이 적은 것이다.
지난 가정(嘉靖) 병오년(1546)에 문간공[文簡公, 안현(安玹, 1501~1560, 1파 14세 찬성공파)]께서 죽창공[竹窓公, 안정(安珽, 1494~1548, 1파 14세 참찬공파)]이 편수한 초보(草譜)를 인(因)하여 더 기록하고 간행하여 3책(冊)을 만들었으며, 그 후 114년이 지난 기해년(1659)에 순원군[順原君, 안응창(安應昌, 1593~1673, 1파 18세 참판공파)]이 뒤이어 간행해서 6책을 만들었다. 이제 또 100여년이 지났는데 후손이 더욱 많아졌으니, 마땅히 거두어 기록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지난 임오년(1762)에 종인(宗人)인 상사(上舍=進士) 대제[大濟, 안대제(安大濟, 1722~1789, 1파 21세 찬성공파)]씨가 나의 족자(族子)인 우제[羽濟, 안우제(安羽濟, 1720~1784, 1파 21세 찬성공파)]와 함께 뒤이어 수보(修譜)하는 일에 종사하였는데, 출입하는 사이에 혹 실수가 있을까 염려하여, 또 종족의 장로(長老)인 필관(必觀)씨와 함께 상의하고 분별하여 바로잡았다. 세 군(君)은 모두 우리 집안의 빼어난 자들이니, 고증(考證)이 상세하고 기재(記載)가 정확하며, 분석하여 밝힘이 명확하고 취사(取舍)가 공정하다.
우리 문성공 ․ 문의공 ․ 밀직공의 자손인 삼 대파(三大派)를 각기 종류에 따라 나누어 14책으로 만들어, 4년이 지난 을유년(1765)에 비로소 간행하였으니, 아, 노고가 지극하다 하겠다.
나는 멀리 깊은 산속에 엎드려 있어 말석에 참여하지 못하였는데, 보소(譜所)에서 편지를 보내와 서문(序文)을 요청하니, 나는 감히 사양할 수가 없으므로, 마침내 삼가 이것을 쓰는 바이다.
나의 구구한 소원은 오직 족보를 반질(頒帙)한 뒤에 우리 종족들이 족보를 돌아보고 자중자애(自重自愛)하여 유속(流俗)에 빠지지 말며, 시(詩)와 예(禮)를 익힌 빼어난 선비들은 족보를 의거하여 상대할 만한 사람을 수합하고 가르칠 만한 사람을 진작시켜서 함께 우리 선조를 본받았으면 하는 바이다.
우리 문성공은 황폐하던 세대에 홀로 주자(朱子)를 반드시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고 여겼으니, 그 묘(妙)한 도(道)와 정(精)한 의(義)에 있어, 반드시 마음속에 깊이 합하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행신함에 있어서는 장중(莊重)하고 안상(安詳)함으로 칭찬을 받았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는 먼저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인륜을 강명(講明)하여, 비록 무신(武臣)들에 있어서도 그 의혹을 힘써 열어주어 선성(先聖)의 가르침에 벗어나지 않게 하였으니, 이는 바로 자기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린 행적으로서, 지(知) ․ 행(行)이 모두 지극함을 상상할 수 있다.
문의공의 아름다운 업적과 밀직공의 숨겨진 덕으로 말하면 거의 천년 뒤에도 사해(四海)에서 본받을 만한 바이니, 하물며 후손으로서 한 기운의 전함을 받은 자에 있어서이랴.
아! 본받을 만한 덕을 가까이 우리 할아버지에게 있으며 가르칠 만한 자질이 우리 집안에 많이 있으니, 내가 아직 배우지 못했다면 마땅히 스스로 분발하여 우리 집안들과 함께 우리 할아버지를 배울 것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요, 내 거의 학문을 이룩하였다면 마땅히 스스로 나아가 우리 할아버지를 본받아 우리 집안을 가르칠 것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궁(窮)하여 자신만을 홀로 선(善)하게 하더라도 오히려 내 집안에게는 미칠 수 있으며, 영달(榮達)하여 천하를 선하게 할 수 있다면, 마땅히 내 집안으로부터 시작하여 미루어 나아가야 할 것이니, 아, 우리 집안의 군자(君子)들은 노력할지어다.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세 번째 되는 을유년(1765) 맹동(孟冬) 상순(上旬)에 후손 석경(錫儆)은 삼가 서(序)하다.
안석경(安錫儆, 1718∼1774) : 순흥1파 20세 찬성공파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숙화(淑華), 호는 완양(完陽)·삽교(霅橋). 아버지는 중관(重觀)이다. 안중관은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으로 이병연(李秉淵)·민우수(閔遇洙) 등 당시 노론계 인사 및 홍세태(洪世泰)같은 중인출신 시인과도 교유한 노론계 학자였다. 1752년(영조 28)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이곳저곳 아버지의 임소(任所)를 따라 생활하였다. 당시 신흥도회가 형성된 홍천·제천·원주 등이 그곳으로 청년기를 이러한 도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지낸다. 이때 그는 자신의 진로에 대하여 명예나 권력을 좇는 무리들이 날뛰는 환로(宦路)에서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과거가 아니고는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 없는 사회현실 속에서 심한 갈등을 하게 된다. 결국 세 차례 과거에 응하지만 모두 낙방한다. 출세지향의 공부를 힘쓰지 않았던 그에게 낙방은 오히려 당연하기도 하다. 1752년은 과거에 응한 마지막 해이기도 하지만, 그해 아버지가 죽자 그는 곧 강원도 두메산골인 횡성 삽교(霅橋)에 은거한다. 삽교를 중심으로 시작되는 후반기는 도회적인 생활을 떠나 벼슬을 단념한 채 산중에 은거하는 처사적인 생활이었다. 저서로는 《삽교집》·《삽교만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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