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2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노워리기자단 4기
클레어 키건 소설, 홍한별 옮김, 『이처럼 사소한 것들』, 다산책방
걱정보다 깊은 사랑을
안정인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올해 초 한겨울에 읽었고, 이번에 노워리기자단 모임을 앞두고 다시 읽었다. 역시 재독의 힘! 처음 읽었을 때 눈에 안 들어오던 부분까지 세세하게 느끼게 되는 독서 경험이었다. 10월 말 서머타임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겨울의 스산함이 시작되는 아일랜드 날씨 묘사부터 책이 시작되는데, 영국에 살아본 나로서는 너무 와 닿는 것. ‘도입부를 날씨 이야기로 문을 여는 것 보니 역시 아일랜드 사람 맞네.’ 싶어 웃으며 책을 넘기기 시작했다.
처음에 작가는 그저 평양냉면처럼 슴슴하게 주인공 펄롱과 그가 하는 일, 그를 둘러싼 가족들, 그의 출신 배경 등을 소개한다. 그러다 수녀원에서 한 소녀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급물살을 탄다. 평범한 내면을 가진 한 인간이 어떻게 용기를 내게 되는지, 내면의 무수한 갈등을 거쳐 결국 한 아이를 구해내는 결단을 하기까지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서 보여준다. 아니, 121페이지밖에 안 되는 짧은 소설이 어떻게 이렇게 차근히 독자들을 설득해 내는지! 오히려 짧기에 한 단어도 허투루 쓰지 않고 정확하게 지면에 활자로 박아 넣음으로써 독자의 심장도 관통하게 만드는 책이다.
독서 모임을 하면서 주인공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펄롱이 진지하게 수녀원에 갇혀있는 아이들 얘기를 꺼냈을 때 아내 아일린은 “어쨌든 간에,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우리 딸들은 건강하게 잘 크고 있잖아?” (55쪽) 라고 말했더랬다. 성향이 정반대인 아내가 펄쩍 뛸 게 뻔하고, 거대 권력 수녀원에 맞서면 그 학교에 다니고 있는 딸들은 어떻게 될 것인지 모를 리가 없었던 펄롱. 가족들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감행한 그의 선택이 무심하고 무책임한 것 아니냐고, 주인공보다는 주인공의 아내에게 감정이입 하는 분위기였다.
글쎄,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건 단순한 소시민이 소 영웅으로 바뀌는 서사가 아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펄롱을 키운 어머니는 주인 미시즈 윌슨의 호의가 아니었더라면 지금 수녀원의 아이, 세라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걸 기억하는 그가 세라를 외면했다면? 펄롱은 아마도 죄책감으로 조금씩 무너졌을 것 같다. 마음의 소리에 귀를 꼭 닫고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펄롱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사소해 보이는(사실은 절대 사소하지 않은)’ 친절로 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몸소 체험한 사람이었으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는 두고두고 이날을 복기했을 것이고, 부끄러움에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99쪽)” 앉아 있던 소녀를 구한 것은 과거 자기 어머니를 구한 것과 마찬가지고, 더 나아가 자기의 존재 의미를 발견한 순간이다.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 아무 일이 없어도 늘 잔잔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던 그였다. 세라를 데려오며 다소 과장되어 보이는(아무리 그래도 제 아이를 낳았을 때보다 기뻤다고?) 펄롱의 행복감과 뿌듯함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 비로소 설명이 된다.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 - 거기에 무슨 이름이 있나? - 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갓난 딸들을 처음 품에 안고 우렁차고 고집스러운 울음을 들었을 때조차도! (119쪽~120쪽)
그 이후는 어떻게 되었을까?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121쪽)”에 대해 키건은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먼저 가족들의 놀란 반응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잠시의 소란이 지나간 뒤에 결국 아일린과 딸들은 펄롱의 결정을 지지해 주었을 것 같다. 당장 눈앞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내 남편이, 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면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하고 받아주었을 거라고. 내가 나서서 용기 있는 선택을 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남과 다른 길을 간다고 했을 때 그걸 응원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걱정보다 깊은 사랑을, 신뢰를 안겨주는 사람이고 싶다.
문지혁 소설가는 클레어 키건의 두 작품을 평하면서 "‘맡겨진 소녀’가 더 아름답고,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더 깊습니다." 라 하셨는데 반쯤은 동의가 된다. 아름다움은 모르겠으나 깊이는 확실히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두 소설 사이에 10년이라는 시차가 존재하는데, 작가는 그동안 자기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벼리고 있었던 것 같다. 짧지만 깊은 소설, 읽고 난 뒤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을 수밖에 없는 소설, 반드시 재독을 부르는 소설. 그리하여 121쪽이 아니라 242쪽으로 완성되는 소설, 이 이야기 당신 마음에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 벌써 궁금해진다.
첫댓글 다른 이의 용기를 응원해주는 것도 정말 중요한 '친절'이자 '사랑'일 거예요.
정인샘의 솔직한 다짐을 응원합니다^^
펄롱은 우리 앞에 놓인 가장 큰 거울같네요!
자기 모습을 마주하도록 하는~
맞아요. 한 인물을 이렇게 깊게 만날 수 있는 건 혼자 독서 - 함께 나눔 - 글쓰기 3콤보로 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에게 펄롱은 잊을 수 없는 인물로 살아있겠죠. 특히 그 이후를 생생하게 쓰신 우리 재순쌤께는 특히! ^^
책나눔 때 정인쌤이 펄롱에 대해 이야기하셨던 부분들이 펄롱을 조금 더 이해하고 책을 한번 더 읽어보는 데 도움이 되었어요^^ 글에도 펄롱이 세라에게 했던 행동이 친절 이상, 용기 있는 선행 이상이었음을 정인쌤의 통찰로 풀어가는 부분이 잘 나타나 있네요.
<삶을 돌보는 책읽기>의 저자와 함께한 책읽기 시간 매우 유익😉
이번 기자단 책읽기는 유독 책나눔 시간이 좋습니다. 선정된 책도 좋구요~ 다시 읽고 글을 쓰며 또 읽으니 제가 주었던 별점이 얼마나 가벼운 것이었는지..;;;
그걸 깨달아가는 게 독서모임의 묘미인 것 같아요. 책만 나누면 자칫 공허해질 수 있는데 우리의 다짐을 글로 꼭꼭 박아놓으면 또 한뼘 달라지더라고요. 저도 선생님들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지점을 많이 배워요. 소중한 노워리 기자단 쌤들, 그 중에서도 우리 혜화쌤은 그저 빛!!!! ^^ 내일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