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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바벨탑이냐 하나님의 나라건설이냐
구속사 아카데미
밝은빛 교회 김인수 목사
본문 : 창세기 11장 1-9절
11: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11: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11: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11: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11: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1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11: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11: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11: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강론
오늘 본문은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하는 바벨탑을 쌓는 내용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어거스틴은 신국(神國, City of God), 즉 하나님의 나라라는 방대한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의 나라(City of man)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느냐? 아니면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점은 지금 나의 행동과 사고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늘 성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생활은 “신앙생활”이 되어야 하는데, 자칫하면 “종교생활”이 되어 바벨탑을 쌓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종교가 무엇입니까? 사전에는 “신이나 절대적인 힘을 통하여 인간의 고민을 해결하고 삶의 근본 목적을 찾는 문화 체계”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신의 뜻, 하나님의 계획이란 말은 없습니다. 이것이 “종교인이요, 종교생활”인 것입니다. 이는 ‘나’ 중심의 생활입니다. 하지만 성도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경험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종교인이 되어 종교생활을 하게 되면 부지중에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허다하다는 것이 바울의 결론입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3:18)합니다.
어찌하여 “십자가의 원수”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로 자기중심적인 삶은 죽고 하나님의 중심의 삶을 살게 하시려고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사람들은 어떤 자들인가? 이점을 갈라디아서 2:20절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위주로 살아간다는 것은 아직 중생하지 못한 자의 삶인 것입니다.
성경에선 산 자와 죽은 자를 자주 언급합니다. 생명의 근원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과 단절되었다면, 그 코에 호흡이 있다고 한들 그게 생명이 있는 자겠습니까? 반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된 자라면, 그 코에 호흡이 없다하더라도 그는 산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가리켜 “죽었다”고 하지 않고 “주안에서 잔다”(살전 4:14)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성도들에겐 죽음이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이렇게 그리스도를 믿으며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자는 그가 살았거나 죽었거나 상관없이 ‘산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면 자기중심으로 사는 자는 ‘죽은 자’입니다.
종교생활이 아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힘든 이유는, 타락한 아담의 죄성이 아직 우리 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상은 죽은 자들의 세상이며, 죽은 자들이 세워놓은 가치관이 이끄는 세상이고,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육체 또한 죽은 자에게 길들여진 몸입니다. 이를 한마디로 “바벨탑 문명”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중심적인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높고 넓은 성을 쌓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모여서 성을 쌓게 되었습니까? 그 당시에는 언어가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 일하기가 편했습니다. 서로 말이 잘 통했기 때문에 쉽게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왜 잘못일까요? 하나 됨을 이루는 건 좋은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하는 것이 가득했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4)
탑을 세우는 목적이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 첫째는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는 것입니다.
㉯ 둘째는 자기들의 이름을 내려는 것입니다.
㉰ 셋째는 땅에서 흩어짐을 면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① 첫째로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11:4a)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앞에는 홍수심판(6-9장)이 나옵니다. 그런데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는 것은 하나님이 홍수심판을 또 내린다 해도 자신들의 힘으로 안전을 누리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물로 심판하지 않으실 거라고 약속하셨는데 말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탑을 높이 건설하려고 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숨은 그림과 같은 보다 더 중요한 요점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다시는 심판하지 않겠다하신 것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되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죄로 말미암아 10번, 100번을 심판을 한다 해도 인간의 행위로는, 인간의 자력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이점이 “어려서부터 악함이라”는 묘사에 나타납니다.
그러면 “어려서부터 악함이라”하신 자들의 “죄”는 어떻게 하신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죄를 묵과하실 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셨다는 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해답은 노아가 “정결한 제물로 번제를 드렸다”는 “번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력으로는 불가능한 구원계획을 “번제”물의 대속을 통해서 이루시려는 것입니다.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창 8:21)하신 말씀 속에는 우리 대신 자기 아들을 심판하시겠다(번제)는 뜻이 함의되어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번제”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바벨탑”을 쌓았다는 것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② 이제 두 번째 요점인 “우리 이름을 내고”(11:4b)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자신의 이름을 내고자 한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 같고 잘못이 아닌 것 같은데, 이것이 하나님께는 큰 죄악이 됩니다. 왜냐하면 저들이 바벨탑을 쌓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더 “번제”를 통한 구원을 싫어하고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이점이 “우리 이름을 내고”한 자기중심에 나타납니다. 대속이 아닌 자력으로 구원을 이루겠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오늘의 바벨탑 사상, 문화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십시오. 왜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살아갑니까? 다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 집안을 위해서, 가문을 위해서일 것입니다. 이름이란, 자기가 누구인지 드러내줍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이 남기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열심히 이름 남기기 전쟁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소위 출세라고 합니다. 이런 것이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듯이 생각되지만 신앙인이 아닌 종교인이 되면 이렇게 전락하게 됩니다. 이름을 낼 재주가 없으니 가만히 있는 것이지, 할 수만 있다면 하려고 열심히 노력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 죄인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꿈에도 이것이 죄 인줄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자기 이름을 내려는 시도는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려는 시도와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 심판 이후에 오직 한 분의 이름만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그 이름에 당신의 공의와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흠 없는 정결한 제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드러나게 하셔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려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어떤 이들은 “그래도 생명책에는 우리의 이름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이름도 귀한 것 아닙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이름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누구’라고 적혀있는 것이지, 우리 이름이 단독적으로 올라갈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계14:1)합니다. 성도의 이마에 어린 양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기 때문에 생명책에 기록이 되는 것입니다. 즉 내가 잘나서 내 이름이 올라가는 게 아니기에 내 이름을 높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12장에선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시겠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한 것은 번제물로 인해 대속을 받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스로도 하나님의 심판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탑의 종말을 계시록 6장에서는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6:15-17)고 말씀합니다. 저들이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는 의도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대속자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③ 마지막으로 세 번째 요점인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왜 흩어짐을 면하려고 했을까요? 이것은 누군가 자기들을 흩어 놓으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이점이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술 취하여 벌거벗은 사건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함이 먼저 보고 셈과 야벳에게 고했습니다. 그러자 셈과 야벳은 덮어드렸습니다. 같은 장면을 통해서 고한 자와 덮어준 자, 축복을 받은 자와 저주를 받는 자로 나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아 “흩어짐을 면하자”는 이에 대한 반발이요, 대항이었던 것입니다.
이점에서 함의 자손들의 나라가 “시날 땅의 바벨”(창 10:10)이라 한 점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는 바벨탑을 쌓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자들이 누구였는가를 말해줍니다. 함의 자손들은 주권적인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반기를 든 것입니다. 흩어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주받을 자는 저주받고, 복을 받는 자는 복을 받도록 나누시려 하셨는데, 이에 대해서 바벨탑을 세움으로 감히 거부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반역한 인간에 대해서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완전히 흩어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계획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십니다. 그게 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타협하지 않는 것이 은혜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탑을 쌓아 한 곳에 모이도록 허락하셨다면 그 곳은 곧 지옥입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는 속담이 있듯이, 사람들은 자기가 세우는 탑이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탑을 세워 하나님께 헌신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탑은 무너질만한 ‘자기 행위’라는 탑이고,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한 헌신일 뿐입니다.
우리가 알 것은, 하나님께서도 흩어지지 않는 견고한 성을 만들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성을 하나님 자신이 만드시길 원하십니다. 어쭙잖은 인간들이 만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다윗의 예를 들면,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아닌 하나님께서 친히 건축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삼하7:11-13). 누구를 통해서 건축하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이 견고한 나라를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으니,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하여,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그를 섬깁시다”(히12:28, 새번역).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세워진 나라를 ‘흔들리지 않는 나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외에 사람들이 세운 나라는 결국 흔들리고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여러분, 바벨탑 사건으로 흩으셨던 저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 됨을 이루시는 지 살펴보겠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수동태)”(엡2:13-22).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바벨탑 반역 때문에 대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제 새롭게 하셔서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고, 원수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함께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어져 가느니라”(22하) 한 표현을 수동태로 썼습니다. 우리가 짓고 있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짓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제가 오늘 이러이러한 것을 했으니, 영광을 받아 주시옵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늘도 저를 사랑하셔서 이렇게 인도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하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자신은 부인하며, 하나님을 주인삼아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신의 인생을 그리고 교회를 건축을 하고 있습니까, 건축 당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건축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성령이 거하시는 처소로 우리 인생이 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를 머리로 하고 살아가는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건축으로 인해 하나로 모입니다. 그 하나 됨을 보여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는 모두가 하나입니다.
세상의 여러 공동체처럼 나의 이름을 내기 위해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하나님께서 새롭게 모으신 하나입니다. 우리가 주의 몸으로 하나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 하나 됨의 의미를 날마다 깨달아가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