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시 엘름허스트의 東初禪寺 / Chan Meditation Center: 불교 교육을 중시하는 ‘Melting Pot Chinese Temple’ / 이종권
I. 들어가며
플러싱 메인스트릿에서 Q58번 버스를 타고 약 20분정도 가면 동초선사(東初禪寺, 영어명: Chan Meditation Center)라는 중국절이 나온다. 대만에서 오신 상엔(聖嚴) 선사가 1977년에 처음으로 플러싱 지역에 세운 이 절은 1988년 인근의 3층 건물을 사들여 이곳으로 옮겨왔다. 우리의 방문을 미리 전화로 알리기는 했지만 아는 사람 없는 타민족 단체를 방문하게 되면 늘 그렇게 되듯이 중국인들이 모여 있는 이곳 선원의 문턱을 넘으며 다소나마 쭈삣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대문을 들어서자 유창한 영어로 안내역을 맡은 중국인 보살님이 맞아준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오전 예불을 마치고 점심공양을 마친 때여서 신도들은 삼삼오오 법당 안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거나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기도 했다.
눈길을 끈 것은 중국절임에도 여러 명의 타인종 불자들이 중국인 신도들 사이에서 편안하게 뒤섞여 있다는 점이었다. 미국에서의 불교현상을 연구하는 많은 유럽계 미국인 불교학자들은 미국에서는 불교가 아시아 이민자들이 위주가 된 “이민가방 불교 baggage Buddhism” 그리고 중산층 이상의 백인들이 주축이 되고 있는 “백인불교 White Buddhism”로 구분하며 무릇 미국불교라 함은 백인들이 주축이 된 “새로운 불교”가 미국불교를 대표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해 불교계 내부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한편 Paul David Numrich는 시카고에 자리잡은 캄보디아계 테라바다 불교 사원을 연구한 「Old Wisdom in the New World」라는 연구서를 통해 “Parallel congregation”라는 개념을 발표하여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가 말하는 parallel congregation이란 하나의 사찰 안에 아시아계 이민자들과 타인종들의 법회가‘따로 따로’열리는 현상을 지칭하는데, 미국에 있는 대부분의 사찰들이 인종적 금긋기(racial line)에 따라서 아시아계 불자들은 아시아계 불자들만 모이는 사찰에, 유럽계 불자들은 또한 그들만의 선원에서 수행을 해오는 미국불교계 풍토를 견주어 볼 때 이 테라바다 사원은 한 걸음 진전된 형태의 미국적 불교문화라는 주장이다.
이곳 동초선사에서 총간사를 맞고 있는 Jeffery Kung( 天傑)거사의 설명에 따르면 마침 참선 안거를 마치고 돌아온 타인종 불자들이 주례 염불법회에 참석하고 있는 것인데 이곳 동초선사에는 활동적인 신도가 약 150여명, 그리고 큰 법회가 있을 때마다 참석하는 신도가 약 400여명 가량 되는데 이 가운데 약 20퍼센트 가량이 비중국계 신도들이라고 했다. 중국인 신도들과 뒤섞여 경건한 자세로 관세음보살 정근을 하는 검은 피부의 불자와 금발의 불자들을 보면서 이것이 미국에서 사는 불자들 모두가 지향해야 할 미국불교의 미래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원주의 미국사회의 이상적인 모습은 이렇게 아시아인들이 주축이 되어 법당에서 시작하여 온 사회로 퍼져나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록에 따르면 미국 불교는 19세기 중반 중국인 이민자들에 의해서 처음으로 미국땅에 상륙하였지만 하층 노동자의 자격으로 들어온 중국인 불자들이 신봉하는 불교는 아시아계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과 냉대 속에서 전법의 여력을 갖지 못했었다. 더욱이 20세기 중반 중국에서는 공산화와 문화혁명 등 중국 내부의 사정으로 인하여 불교 자체가 거의 고사할 지경에 이르렀던 까닭으로 중국의 불교는 유구한 전통에도 불구하고 일본, 한국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미국진출이 늦어진 것이 사실이다. 제프리 쿵 거사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미국에서 활동중인 불교단체들은 대부분 대만과 홍콩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본토에선 이제 막 중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많은 사찰들은 여전히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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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 Corona Ave, Elmhurst에 자리잡은 이곳 동초선사는 대만에 본부를 둔 불교단체 법고산(法鼓山)의 뉴욕분회이다. 공 거사에 따르면 대만에는 규모면에서 세 개의 불교단체를 손꼽을 수 있는데, 가장 큰 단체인 慈濟功德會는 재난구제사업에 치중하여 해외의 어려운 지역에 자비의 손길을 뻗치고 있으며, 두 번째로 큰 단체인 佛共山에서는 세계 곳곳에 불사를 일으키는데 많은 힘을 기울이고 있다고 했다. 미국에서 규모가 큰 사찰하면 캘리포니아의 서래사를 떠올릴 수 있는데, 이 서래사 역시 이 단체의 소속이라고 했다. 상엔 스님이 이끄시는 법고산(영어명은 Dharma Drum Mountain)은 무엇보다도 교육에 역점을 두어 전세계 불자들에게 불법을 전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한다고 했다. 법고산은 상엔 선사의 스승이 되시는 퉁추(東初) 스님이 세운 중화불학 연구소(Institute of Chung Hwa Buddhist Culture)를 모태로 설립되어 스승의 유지를 물려받은 상엔 스님의 정열적인 포교활동에 힘입어 지금은 대만 안에만도 22개소의 본원과 지원이 있고 미국과 캐나다에 14개소의 센터를 열고 있다. 이곳 뉴욕에 자리잡은 동초선사(東初禪寺 혹은 Chan Meditation Center)는 바로 상엔 스님의 스승이신 퉁추 선사(東初 禪師)를 기리는 뜻에서 그분의 명호를 따온 것이라고 했다.
이 절의 창설자인 상엔 스님은 1931년 상하이 근방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3세에 출가했다. 특기할 점은, 이 스님은 선종의 2대 종파인 임제종과 조동종 양쪽 모두에서 전법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이력은 중국불교에서는 전례를 찾기 힘든 것으로써, 상엔스님이 중국 선불교의 정통 맥을 잇고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상엔 스님은 또한 1975년 Risso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중화불학 연구소(中華 佛學 硏究所) 총장과 중국문화대학(The Chinese Culture University) 교수를 역임했고 약 100 명에 이르는 비구 ?비구니를 양성하였으며, 미국에 약 3,000명 그리고 대만에는 30만명의 제자가 지금도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고 한다. 상엔 스님이 저술한 약 90권의 저서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 베트남어, 스페인어, 불어, 이태리어, 그리고 독일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고 한다.
뉴욕 퀸즈 인근에는 약 10여개의 중국절이 있다고 한다. 중국 불교는 한국불교와 마찬가지로 북방 대승불교권에 속하여 유사한 전통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에 중국절에서는 한국절과 어떤 점이 유사하고 어떤 점이 상이한지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먼저 법당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데, 물론 부처님의 모습도 한국 절과는 다르게 표현되어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부처님의 후면에 탱화가 없다는 점이 다르다. 그 대신에 금동 조각물이 놓여져 있는데 무엇을 의미하냐고 물었더니 부처님의 몸에서 발현하는 광채란다. 즉, 佛光이라는 것이다. 불상 앞에 놓인 탁자 위에는 나무로 만든 커다란 목어(木魚)가 놓여져 있다. 한국에서 목어라 함은 四物의 하나로 범종, 운판, 법고와 함께 종루에 설치된 공양구인데, 이곳 중국절에서는 한국절의 법당에서 목탁과 같은 기능을 하는 불교용구(佛具)를 지칭한다. 중국절의 목어와 한국절의 목탁은 자면서도 눈을 뜨고 있다는 물고기의 본성에 영감을 받아 고안되었다는 점은 같지만 목어는 목탁처럼 들고 다닐 정도의 크기가 아니어서 탁자 위에 고정시켜놓고 친다. 목어는 이렇게 수박만한 크기의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먹만큼 작은 것도 있는데 이것 역시 우리네 스님들처럼 늘 바랑 속에 넣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불단 밑에 보관하였다가 행선하는 중에만 속도를 맞추기 위하여 사용한다고 한다. 신도들과 스님의 호칭 역시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한국에서 사용되는 스님은 영어로는 여러 군데서 유래된 전통에 따라서 Sunim, Roshi, Venerable, Master 등으로 표기하는데 중국어로는 “Shifu(師父)”라고 한다. 또한 한국에선 남신도는 거사 혹은 처사라고 호칭하며 여신도는 보살이라는 호칭을 하는데 비하여 중국절에서는 거사라는 호칭이 남녀 모두에게 사용되어 남거사, 여거사라고 하며 보살이란 칭호 역시 남녀에게 공히 사용한다고 한다.
이곳에는 지금 비구니 한 분과 비구 한 분 이렇게 두 분의 스님들이 상주하고 계신다. 선종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이 절은 새벽 네시 반부터 한시간 동안 참선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여 이어지는 예불을 마친 후 본격적인 일과업무에 들어간다고 한다. 절은 지하의 식당과 일층 법당, 이층의 참선방, 삼층에 있는 도서관, 그리고 요사채로 사용되는 뒷채까지 규모가 매우 큰 관계로 스님들 두 분으로는 건물 관리가 벅차기 때문에 자원봉사를 하는 신도들의 도움을 받는다. 제프리 쿵 거사 역시 자원봉사자로, 이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근무하는데 이런 분들이 네 분이 계시다고 한다.
II. 상엔 스님과의 인터뷰
상엔 스님은 대만의 본사와 북미 각지의 안거 여행으로 인해서 이곳 선사禪寺에는 4개월에 한번씩 오셔서 참선지도를 하신다고 한다. 취재를 위해서 선사에 들렀을 때 상엔 스님은 마침 Upstate New York에 있는 Dharma Drum Retreat Center에서 안거를 마치고 다음 주에 이곳으로 오신다고 해서 전화로 인터뷰 약속을 하였다. 인터뷰는 일주일 후 선사의 이층 선방에서 이루어졌다. 스님은 중국어로 말씀하셨고 태니라는 스님의 상좌가 통역해주었다. 인터뷰는 상엔 스님이 많은 미국인들을 제자로 두고 있다는 점과 아시아의 여러 불교 전통이 미국땅에서는 혼재되어 있는 점을 고려하여 몇 가지 질문을 드렸다. 중국어로 말씀하시는 스님의 음성은 차분하면서도 깊은 울림이 남는 듯하였는데,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미주현대불교 책을 들고 환한 미소로 포즈를 취해주는 다감함도 보이셨다.
인터뷰는 6월7일 오후3시 이 절의 이층 참선방에서 이루어졌다.
JK: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엔 스님: 한국 불교 잡지에서 오셨다니 말인데. 나도 한국인 스님들을 몇 분 알지요. 숭산스님...그리고 삼우 스님을 알고 있습니다.
JK: 예, 그분들이 미국에서 가장 많은 활동을 하시는 한국스님들이죠...헌데 제가 관찰한 바에 바에 의하면 선불교는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본성을 직접 지향하기 때문에 경전 공부나 계율과는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없지 않은데, 스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상엔 스님: 어떤 종파에 속해 있든, 혹은 어떤 수행을 하든지 간에 모든 불자는 준수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선불교는 보리달마에 의해서 인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으로 전수되어 육조대사 혜능까지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스님이었습니다. 스님은 스님으로서 지켜야 할 책임과 규칙이 있습니다. 혜능 대사 이후에도 대부분의 스승들은 스님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속인들도 불가의 전통에 개입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예가 그 유명한 방거사입니다. 중국의 전통에 따르면 모든 승려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요구사항은 비구계와 보살계입니다. 하지만 속인들이 지켜야할 계율은 보살계입니다. 따라서 선불교의 전통에서도 우리는 계를 받습니다. 능엄경에 따르면, 선정을 수행하면서 계를 지키지 않으면 마구니의 경계에 빠져들게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계를 지키는 것은 수행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중국의 선불교에서 능엄경은 매우 귀하고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불자들이 지켜야 할 것은 오계입니다. 또한 범망경을 보면 보살계가 나옵니다. 보살계는 섭율의계瑁 섭선법계瑁? 섭중생계瑁? 의 세 가지 내용으로 구분됩니다. 섭율의계는 ‘선하지 않은 일을 버려라’이고, 섭선법계는 ‘선한 일은 생겨나도록 하라’이고, 섭중생계는 ‘중생에게 이익되는 일을 하라'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 내용으로 형성된 보살계는 10개의 무거운 계와 48개의 가벼운 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중국의 선 전통에서 계율은 매우 중요하며 심각하게 받아들여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JK: 스님은 오랫동안 미국에서 가르치시고 또한 대만에서도 가르치셨습니다. 스님이 보시기에 이 두 그룹의 제자들이 수행 태도 등에서 어떻게 다르다고 보셨습니까?
상엔 스님: 기본적으로 이 두 그룹의 제자들에게 큰 차이점은 없습니다. 내가 경험한 바를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만 제자들의 경우, 불교가 동양의 종교이기 때문에, 동양에는 (서양에 비해서) 많은 스님들과 스승들이 있고, 따라서 선택의 여지도 풍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때때로 이 스님 저 스님을 찾아다니게 됩니다. 그리하여 수행이 안정적이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대만은 또한 매우 많은 종류의 종교들이 혼재해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본질을 정말로 이해하고 수행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정말로 선 수행에 임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미국인 제자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은 보다 꾸준합니다. 이를테면, 나는 1975년에 처음 미국에 왔는데 그때 나에게 지도받았던 제자들이 아직도 이곳에서 나와 함께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직도 나를 따르는 까닭은 나의 지도방식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가르침에 신뢰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지금도 나를 따르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절이나 다른 스승에게 찾아간 제자들도 있고 그래서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경우 다시 돌아와 나와 함께 수행하고 있습니다.
JK: 猖이 중국어로는 찬이라고 불리고 한국에선 선이라고 불리고 일본에서는 젠이라고 불리기 때문에 미국인들에는 혼동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셋이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상엔 스님: 뿌리는 같은 것이지요. 일본의 젠도 중국에서 기원한 것이고요. 하지만 일본에는 그들의 문화가 있고 스타일이 있습니다. 해서 찬이 일본에 이르러서는 동화되어 독특한 특성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젠이라고 불리우게 된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선 역시 찬과 같은 것입니다. 발음만 다르게 되는 것만 빼고요. 조계종 역시 지눌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는데...사실 한국의 조계종 역시 6조 혜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따라서 그 기원은 같은 셈이죠. 나 역시 지눌의 저서를 읽은 적이 있지만 중국의 전통인 찬의 가르침과 같습니다. 더군다나 그의 저서는 한문으로 씌여졌지요. 따라서 그 조상은 같다고 할 수 있지요.
JK: 그러니까 종교적 의미에서는 같지만 문화적 맥락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까?
상엔 스님: 기자가 말씀하신 것은 내가 지금 얘기한 것을 잘 요약한 것이지만 100프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중국의 찬 전통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른 스타일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민족과 지역에서 다른 스타일의 찬을 발전시킨 것입니다. 중국에서도 북방선과 남방선이 있습니다. 스타일은 매우 다르지만 기본적인 원칙은 같은 것입니다.
JK: 미국에서 포교활동을 하시면서 어려운 점은 무엇입니까?
상엔 스님: 내 관점에서는, 서양인들을 가르친다고 해서 특별히 힘들었던 점은 없는 것 같습니다. 법문을 할 때면 법문을 통역하는 통역자가 있었고, 때로는 서로간에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했지요. 그들은 나를 한번도 외국인으로 대하지 않았고 나도 그들을 서양인이라고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JK: 이곳 뉴욕에서 우리 한인들과 중국인들은 비슷한 상황에 있습니다. 대개가 이민온지 얼마 되지 않았으면서 한 지역에 모여 산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스님께서 우리 한국인 불자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없으신지요?
상엔 스님: 사실 한국불자들은 한국불자들끼리 그리고 중국불자들은 중국불자들끼리 수행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스타일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익숙한 것이 다르니까 그렇게 모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더군다나 언어도 다르니까요. 하지만 내가 뉴욕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원각사와 긴밀한 교류를 갖고 있었지요. 법안스님과는 아주 친하게 지냈어요. 원각사는 이사를 많이 다니면서 작은 곳에서 점점 더 큰 곳으로 옮겼었는데, 그때마다 모두 방문했어요. 법안스님도 물론 이곳을 방문하셨고요. 말씀하신 대로 한국인 불자들이나 중국인 불자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모두들 이민자들이고 같은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형제 자매처럼 서로를 대해야 합니다. 한쪽이 도움이 필요하면 다른 한쪽이 도우러 와야 합니다. 그리하여 상호교류를 해야 합니다. 한국인 불자들이 도움을 청하러 이곳으로 오시면 저희들도 돕겠습니다.
JK: 상호교류를 위해서 어떤 시스템이 있다면 좋겠는데요.
상엔 스님: 그럴 수 있는 예가 있기는 한데, 여러 나라의 서로 다른 불교 전통들이 모여서 행사를 했지요. 부처님 오신날 행사와 같은 행사를 하지요. 그 행사는 다양한 불교 단체에 의해서 준비되고 있는데, 만일 우리가 그 행사를 서로의 전통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행사를 아주 성공적으로, 그리고 큰 효과를 거두며 치룰 수 있을 것입니다. 헌데 몇 년 전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불행히도 의사소통이 단절되었어요.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모든 불교 전통들이 함께 했던 그 때는 중국의 찬, 한국의 선, 일본의 젠, 그리고 티벳불교, 테라바다 불교, 이렇게 모두들 함께 행사를 준비했었지요. 아무래도 너무나 다양한 문화가 함께 모이다 보니까 어떤 그룹에서는 함께 일을 하기에 너무 힘들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그와 같은 협조체제가 무너졌을 것입니다. 하나의 가능한 해결책은 보다 많은 교류를 갖는 것입니다. 보다 많은 교류를 하다 보면 다른 문화에 대해서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그리하여 협조체제는 보다 강해질 것이고 보다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늙었고, 해서 강력히 권고하고 싶은 것은, 젊은이들이 계속해서 이와 같은 노력을 힘닿는 데까지 해나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III. 상엔 스님의 법문
동초선사는 훌륭한 웹사이트를 가지고 있어, 이 절에서 발행했던 뉴스레터와 잡지의 과월호들에 대한 거의 완벽한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해놓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절에서 주관하는 행사와 모임 그리고 안거 일정, 찾아오는 길과 연락처까지 이 웹사이트만 방문하면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제작해 놓았다. 사이버 시대를 맞이하여 웹사이트를 구축하는 일도 새로운 형태의 불사라고 할 수 있는데, 동초선사와 상엔 스님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 여러분은 다음의 주소로 찾아가시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여겨진다.
이곳의 주소는 http://www.chan1.org.
취재를 위하여 필자도 이 사이트를 둘러보았는데, 스님의 과거 법문들이 영어로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가운데서 본지는 상엔 스님의 "내가 선승인 까닭"이란 제목의 법문을 법고산의 허락을 받아 번역 게재한다. 이 글은 이 절의 창립자이자 법고산의 가장 높은 스님인 상엔 스님이 출가를 하게 된 배경과 불교교육을 받는 과정을 회고한 글인데 구도를 추구하는 한 순박한 스님의 정신적 성장과정과 중국이 공산화되는 과정 동안의 중국불교의 개략적인 모습까지 잘 묘사되어 있다. 이 법문은 상엔 스님이 1992년 5월 16일 티벳 센터에서 행해져 이 절의 뉴스레터인 Chan Newsletter 1992년 7월호에 게재되었고 영어 원문은 http://www.chan1.org/ddp/channews/07-1992.html에서도 볼 수 있다. 번역을 허락해준 Chan Center에 감사드린다.
여러분들 몇몇은 내가 어떻게 선승이 되었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알고자 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자서전도 쓴 적이 없지만 지금의 내가 여기에 오기까지 있었던 몇몇 사건들을 연관시켜 이야기할 수는 있습니다.
중국에서 내가 살았던 지방은 한때는 융성했지만 서서히 몰락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태어날 무렵 그 지방은 가난에 찌들었습니다. 토지는 풍요로와 쌀과 밀이 손쉽게 자랐지만 식량은 부족했습니다. 내가 가장 많이 기억하는 것은 고구마를 먹었던 일입니다. 그 고구마는 우리가 이곳에서 먹는 그런 (질 좋은) 고구마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고구마를 잘라서 햇볕에 말렸습니다. 옥수수도 자주 먹었던 기억이 나는 것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대개는 돼지에게 먹였던 그런 류의 옥수수였지요.
나는 여덟 형제의 막내였습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이미 48세였습니다. 어머니에게는 내게 먹일 젖이 나지 않았고 그 당시는 우유도 중국에서는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심지어는 암퇘지조차도 새끼를 먹일 우유를 제대로 짜내지 못했지요. 동물들은 모두 빼빼 말랐었고, 사람들 역시 영양부족의 상태였습니다. 나는 여섯 살이 되어서야 걸어다닐 수 있었고 아홉 살이 되어서야 간신히 말을 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나는 학업을 시작했고 13세가 되어서 4학년을 마쳤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아버지의 일을 도왔습니다. 바로 그 무렵 그 지역의 스님이 어린 승려 두명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승려를 찾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처님께 기도했고 양자강 남쪽을 찾아보라는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 절은 강의 북쪽에 있었고 그래서 스님은 내가 살고 있는 쪽으로 강을 건너왔습니다.
폭풍이 치던 와중에 근방을 여행하던 신도 한 분이 우리 집에서 비를 긋게 되었습니다. 헌데 우연히도 그분은 그 스님이 아는 분이었고 스님은 그분에게 승려로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어린아이를 물색해보라고 이야기해둔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보시더니 어머니에게 나를 출가시킬 의향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대답했지요. “이 아이가 스님이 되고 싶다면 그건 아이에게 달린 문제지요. 우리 집안은 매우 가난합니다. 이 아이가 우리랑 함께 살면 결혼시킬 돈조차 없을 것같아 두렵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4학년을 마쳤고 계속해서 내 학업을 뒷받침할 수 없을 것같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 거사님은 내게 말했습니다. “아그야. 스님이 되어 보는 게 어떻겠니?” 나는 스님이 어떤 건지, 무엇을 하는 건지 아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그 말은 나에게 다가와 나는 말했습니다. “예, 되고 싶어요.”그 거사님은 내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어서 그 스님에게 전했습니다.
나는 이 일을 곧 잊었지만 육개월 후 그 거사님이 다시 나타나 어머니께 말했습니다. “지금 아드님을 데려가려고 합니다. 스님을 만들기 위해서 강북쪽으로 데려가겠습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강 북쪽에 계시던 스님은 내 사주(생년월일)를 관세음보살 앞에 놓고 내가 승려로서 적합한지를 알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세 번 물었고 세 번 모두 대답은 “Yes”였습니다. 그 거사님이 나를 절로 데려가려고 왔을 때 나는 가거나 가지 않는 것에 대하여 특별히 강한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놀랐죠. “잠깐만, 얘야.”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나는 네가 스님이 된다는 것이 농담인줄 알았다.” 다음날 나는 그분과 절을 향해 떠났습니다.
강건너 절이 자리잡은 산에 도착하자 산 전체가 사원 건물을 위해서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법당 앞에서 나는 그 커다란 사람이 누구인지 의아스러웠고 이내 나는 그 안에 조용히 앉아 계시는 분이 부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크담?
불당의 부처님은 인상적이었다. 부처님은 너무나 커서 내가 살던 집 스무 채 가량의 집을 합친 것과 맞먹는 규모였다. 불상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허리를 뒤로 젖혀야 했다. 나는 “부처님은 보통사람들과는 정말 다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도착후 나는 이미 스님이 된 다른 소년을 보았습니다. 머리는 삭발이었지만 일반적인 불교식과는 달리, 마치 중세의 기독교 승려처럼 정수리부분은 삭발이고 주변머리는 남아 있었습니다. 재미있어 보였지만 그래도 좋아 보였습니다. 나는 스승님께 나에게도 그와 같은 머리스타일을 해주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나는 내 머리가 항상 그런 식으로 깎여 있었으면 하고 바랬지만, 그런 일은 나에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스승님은 내가 키가 너무 커서 그런 식으로 머리를 깎아놓으면 우스울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스승님은 나를 다른 스님들께 소개를 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스님들이 너무 많아 나는 그들의 이름을 거의 기억할 수 없었다. 절의 위계질서에 대해 말하자면, 각각의 승려는 일곱 “세대”가 될 때까지 한명의 제자를 갖게 됩니다. 가장 최근의 입산자는 그의 손 윗 승려에게 “너의 사부 Your Master”로 소개됩니다. 그리고 그 스님의 손윗 스님은 “너의 큰 사부”로 소개됩니다. 나는 이와같은 계통관계를 외우는 것이 매우 번거로웠습니다.
스승님은 두 명의 승려가 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도착했지만 나의 상대방은 늦게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화가 났지요. 결국 이 소년은 나의 사형이 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훈련을 시작하기를 갈망했지요.
그는 세 달이나 지나서 도착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물었지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오래 걸렸습니까? 퍽 늦었습니다.”그는 대답했습니다. “그대는 왜 이렇게 빨리 왔는가?”
그는 아마도 한 살 가량 저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입니다. 나는 열 셋이었죠. 나이가 열 네 살이었던 나의 사부는 열일곱에 죽은 형이 있었어요. 물론, 중국인 어머니들은 손주를 갖고 싶어하지요. 그래서 그의 어머니도 그에게 집으로 돌아와 형의 아내와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가 절을 떠났을 때 내 사부의 사부(grand master)가 나의 직속 사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내게 말했지요. “나는 네가 나의 직속 제자가 되기를 바랬었네.”
그 시절 중국에서의 어린 승려 교육은 어땠느냐 하면, 나에게는 두 명의 스승이 계셨어요. 한 분은 경전 낭송과 염불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다른 분은 나에게 불교 외적인 것을 가르치도록 되어 있었지요. 내 사부는 뭘 가르쳤느냐고요? 그릇 닦고 채소 심고 요리하기...젊은 승려는 거의 모든 일을 스스로 해야 했습니다.
열 여섯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시골에서 상하이 시에 있는 어느 절의 말사로 갔습니다. 매우 상이한 체험이었죠. 상하이에서 스님들은 신도들의 장례식 때 염불을 해주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신도들이 우리를 고용하여 자랑하는 사람들이 내생에 나은 삶을 얻도록 돕지요. 이 일만 해도 우리는 상당히 바빴습니다. 일이 온종일 그리고 밤새도록 계속되기도 했지요. 어떤 날은 네 집을 다니면서 염불을 하고 장례에 필요한 식을 치루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을 일년이 넘도록 한 후에 나는 생각했지요. “승려가 된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어느 날 금강경 한 권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스님에게 이것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 경은 공과 무에 대해서 설하고 있습니다. 지금 스님에게는 다소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언제쯤이면 내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지 물었습니다. 그는, “먼저 수행을 하십시오. 그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아홉 살이 되어서야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고 앞서 이야기했지요. 짐작하시겠지만 나의 학력은 아주 낮았습니다. 나는 경전 암송에 문제가 많이 있었지요. 나의 스승님은 나의 업장이 무거워 그것을 고치려면 매일 관세음보살님께 오백배씩 하라고 일렀습니다.
처음에 이것은 몹시 힘들었습니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두시간동안 육칠백배를 할 수 있게 되었지요. 삼사개월 후 나는 경전을 암송하고 사물을 배우는 능력이 엄청나게 향상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후 나는 암송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경전을 이해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경전 강의를 해주는 절을 찾아내어 나의 사형에게 거기 갈 수 있도록 허락을 구했습니다.
이 절에서는 경전강의에 참석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입학시험을 요구했어요. 나의 사부는 자기소개서 쓰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것이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나는 그것을 암기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건 그들이 원했던 것이 아니었지요. 완전히 다른 주제가 요구되었지만 그들은 나의 글을 좋아했어요. 그들은 나의 글쓰기 실력이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하여 나를 받아주었습니다.
내가 도착하였을 때 나는 중국 여러 지방 출신의 승려들을 만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투리가 너무 심해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다행히 중요한 사항은 선생님들이 칠판에 써주었지요. 나의 암기력도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시험을 아주 잘 보았으니까요. 첫해에 나는 40명 가운데 3등을 했어요. 그리고 둘째해에는 일등을 했지요. 하지만 내가 무엇을 배웠는지를 묻는다면 솔직히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말로 알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정확히 선생님들이 원했던 대답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요.
나는 이 절에서 참선수행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특별히 누가 지도한 것은 아니었죠. 맨처음 내가 할 수 있었던 가장 좋은 일은 여러 경전을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참선 이외의 시간에 속으로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노승에게 어떻게 참선하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어요. “뭐라꼬?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고? 바로 그 접근법이 아주 훌륭한 거라네.” 확실히 자넨 참선법을 알고 있어.” 나는 이 말을 듣고도 그리 편하지 않았어요. 나는 꽤나 어리숙했지요. 나는 그에게 재차 말했습니다. “참선을 하면 견성하게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견성에 이르는지 보여주십시오.”그가 뭐라고 말했을 것같습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요. 그는 단지 내 머리통을 후려치며 말했지요. “옛다. 이제 견성할 것이네. 하루 아침에 견성하고 싶다고? 우린 여기 수십년을 앉아 있었네. 우리가 일없이 이렇게 해왔다고 생각하나?”
그 후로 나는 안거에 참석하기 시작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들도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들도 내가 잘 앉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어요. 어떤 몇몇 스님들이 내게 말했지요. “스님은 언젠가 훌륭한 선사가 될 것입니다.” “왜요?”나는 물었어요. “우리는 몸을 비틀고 움직이며 다리와 등이 아픈 것을 불평하는데 스님은 마치 바위처럼 앉아서 깊은 수행을 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하고 그들이 설명했습니다. “그건 스님네들 생각이지요,” 하고 내가 말했지요. 그리고는, “저는 제가 뭘 하고 있는 건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그저 앉아서 속으로 경전을 반복하는 것뿐이지요. 소승은 금강경과 능엄경 등을 반복합니다. 그것 뿐입니다.” 그들은 내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어요. “듣자 하니 스님은 그걸 전혀 안가지셨군요.” 내가 처음으로 공안과 화두에 대해 들은 것은 그때였습니다. 내 수행은 향상되기 시작했지요.
스무살이 되었을 때 나는 타이완으로 건너가 팔년을 살았습니다. 스물 여덟이 되던 어느날 밤, 살고 있던 절에서 참선을 하고 있었지요. 하루종일을 앉아 있었고 잠이 오려던 시점이었습니다. 하지만 내 옆에 계시던 노승께서는 늦은 시간인데도 참선을 계속하셨어요. 나는 스스로 물었지요. “이 스님은 왜 계속 참선을 하고 계시는 걸까? 무엇이 이 스님을 이토록 정진케 하는 걸까?”나는 자고 싶었지만 멈추기에는 민망했습니다.
내 마음은 불법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했습니다. 나는 이 노스님이 나를 도와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요. 해서 스님의 어깨를 두드리고 속삭였습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아주 많은 질문이요. 도와주시겠습니까?” 노스님은, “그뿐인가, 아니면 다른 질문이 더 있나?” 나는 물론 더 많은 질문이 있었고 다른 질문을 드렸지요. 그러면 그 스님은 “그뿐인가, 아니면 다른 질문이 더 있나?” 나는 계속해서 질문했고 노스님은 다른 질문이 있는지 계속 물으셨어요. 이렇게 한동안이 지났지요. 나는 이 스님이 나의 모든 의문을 들으시고는 어떤 불가사의하고도 지혜에 찬 대답으로 그 모든 질문들을 아우르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더욱 더 많은 질문을 드렸지요. 그리고는 점점 더 흥분되었습니다.
이윽고 스님은 앉아 계시던 방석을 막대기로 힘껏 내려치시면서 말씀하셨어요. “모두 내려놓고 가서 주무시게!” 노스님이 그렇게 하시자 모든 나의 의문이 사라졌어요. 그리고는 다른 방법으로 모든 질문들이 해결되었어요. 이것은 공을 설하는 반야심경에 부합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나에게는 크게 영향을 준 경험이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났어요. 미국에서 여러 해를 보내고 내가 마흔 여섯이 되었을 때였지요. 나는 대만으로 돌아가 이 가르침을 주셨던 노스님을 뵈었습니다. 그분도 그 일을 기억하고 계셨지요. 스님은 내가 미국에서 무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다지 하는 일이 없다고 말씀드렸지요. 내가 하는 일이란 참선 지도뿐이었습니다. 스님은 말씀하시길, “그 시절에도 나는 자네가 스승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네. 하지만 자네는 법통을 가져야 한다네.” 그리고는 나에게 그 분의 법통의 법명을 주셨고 나를 그분의 법손(法孫)으로 인정하여 주셨지요. 모두 글로 적어 서명까지 했습니다.
거기에는 이 노스님의 시중인 다른 스님이 계셨는데, 이 일을 지켜보셨습니다. 그분은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의아스러워했을 겁니다. 도대체 누구길래 자기 스승으로부터 법맥을 전수받는 것일까? 이 일은 아주 눈 깜짝 사이에 일어났지요.
나는 노스님께 삼배를 올리고 떠나려고 하자 그 시중을 들던 스님께서 다가와 말씀하셨습니다. “스님은 미국에서 참선을 가르치신다고요...저도 가르쳐주시겠습니까?”저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내 귀를 믿을 수가 없군요. 스님이야말로 이곳에서 노스님과 바로 곁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부탁이라면 스님께 직접 하시지요.” 그는 말했습니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을 잘 모르시는군요. 노스님은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시죠. 하루종일 정신없이 왔다갔다만 하십니다.”
이 일화의 교훈은, 인연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의 바로 곁에 보살이나 부처님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절한 인연없이는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지나쳐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노스님은 대만에서도 잘 알려진 분입니다. 그분은 이십세기 중국 승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분이신 슈운(虛雲)대사의 법손이십니다. 중국 전통에 따르면 이런 방식으로 인가를 하는 경우는 드물지요. 이 노스님은 오직 두 명의 스님에게만 법통을 내렸습니다. 저와 다른 스님 한 분이 이렇게 말입니다.
질문: 스님이 절을 하실 때 그 스승님은 그것 말고 다른 것을 하도록 하시지는 않았나요? 예를 들면, 심상(visualization)이나 염송 혹은 기도 같은 것말입니다.
상엔 스님: 스승님은 일심으로 절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씀은 없었어요.
질문: 스님은 공안을 사용하는 것을 권장하십니까? 스님 말씀에 따르면 견성이란 순식간에 마음을 비우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상엔 스님: 어떤 사람은 공안만 사용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식 등과 같은 다른 방식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산만하면 아무 소용없지요. 그런 경우 저는 절을 하도록 권장합니다. 견성이란 마음 속에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속세로부터 집착을 절연함을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반야심경에 이르기를 “색이 즉 공이고 공이 즉 색이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견성입니다.
질문: 저는 어떻게 중심을 잡고 고요히 머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제겐 아이들이 여럿 있습니다. 언제나 헐레벌떡 뛰어다니지요. 이곳에는 가급적 자주 옵니다. 여기에 오면 저는 고요해집니다. 하지만 저는 집으로 돌아오면 쉽게 평정을 잃지요. 저는 항상 마음이 급합니다.
상엔 스님: 바쁜 생활로부터 평정을 얻을 수 있는 한가지 좋은 방법은 산티데바 Shantideva의 ‘보살의 길The Bodhisattva’s Way of Life’에서 가르친 조언을 따르는 것입니다. 마음공부를 하십시오. 항상 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식하십시오. 이것을 수행할 때는 마음이 불안할 때도 의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즉시 대책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수행법은 모든 형태의 불교에서 공통적인 것입니다. 저는 산티데바의 글을 통해 그것을 알게 되었죠.
질문: 스님께서 공안을 공부하실 때는 답변을 찾아낼 때까지 안거에 머물러 있도록 요구받으셨나요?
상엔 스님: 공안을 가지고 공부할 때는 (그 공안이 발생하게 된) 일화와 거기에 연관된 상황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 내용에 대해서 명상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공안에 대한) 대답을 알고자 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논리적인 답변을 구해선 안됩니다. 생각을 내려놓으십시오. 때때로 공안은 차별심을 없애는 데 사용되기도합니다.
질문: 우리가 명상을 배울 때 왜 호흡을 헤아리는 명상법을 먼저 배우는지요? 왜 공으로 직접 지붕할 수 있는 보다 직접적인 방법으로 시작하지 않는지요?
상엔 스님 우리는 대부분 산란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에게는 차분히 앉아서 모든 것을 내려놓을 방법이 없습니다. 우선 마음을 집중시킬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서 나중에 당신이 말씀하신 그것에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질문: 스님께서 그 노스님께 많은 질문을 드리자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하셨던 그 이야기를 제가 잘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씀은 스님은 스님 스스로의 스승이었다는 뜻입니까? 스님은 스스로 답변을 찾으셨고 그 노스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나요?
상엔스님: 내 질문들이 나나 그 스님 혼자 힘으로 해결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해결은 상호의존적이었지요. 그 노스님이 아무 말씀도 안하셨지만 “모두 내려 놓아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더라면 그 의문들을 해결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만일 내가 여러 해를 수행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이 의문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갈망이 없었다면 그 노스님이 바닥을 두드리실 때 (깨우침을 얻을 만큼) 성숙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깨달음이 나와 그 스승님 가운데 어디에서 왔는지는 말하기 힘들지요. 만일 당신이 계속 나에게 질문을 한다면 나 역시 같은 대답을 할지도 모릅니다. 나의 베개를 내려치며“모두 내려놓고 잠이나 자시오.” [2002년 7월 1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