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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지바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에서 처음으로 세상에 등장한 남북단일기의 출발은 순조롭고도 감동적이었다. 북한의 탁구 영웅 이분희와 남한의 핑퐁마녀 현정화의 활약에 힘입어 남북단일팀은 만리장성을 가차없이 허물어 버리고 아리랑의 목멘 합창 속에 단일기를 세계 정상에 내건 것이다. 내가 그 경기를 지켜 보더라면 아마도 내 인생의 명승부 하나가 추가되었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때 나는 방위병 신분으로 열심히 부대를 청소하고 있었다. 간부들 방에서 들려오는 환호성과 비명에 일희일비하면서.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상관이나 고참 눈치 보지 않고 단일기의 나부낌에 가슴 벅찰 수 있는 기회가 바로 들이닥쳤다. 91년 포르투갈 세계 청소년 축구 대회 아시아 예선 1,2위를 차지한 남과 북이 단일팀을 구성하여 본선에 나간 것이다. 중계시간이 보통 새벽이었으니 초저녁부터 부지런히 잠을 자 두고 경기 보고 바로 출근하면 되는 스케줄이었다. 나는 그때 선수들의 유니폼에 달린 단일기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하얀 바탕에 하늘색 한반도..... 태극기와 인공기 대신 왼쪽 가슴에 그 단일기를 붙이고 나니 누가 남이고 북인지 구분할 길이 없었다. 굳이 구분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지금 와서 구분을 해 본다면 당시 팀 구성은 다분히 정치적이었다. 선수들의 기량을 따지는 평가전 같은 건 없었고 철저하게 남북 동수의 원칙에 따라 거의 9대9로 남북 선수들이 선발되었다. 단장은 남쪽이 맡고 부단장을 북한이, 감독은 북한이 가져가고 코치는 남쪽이 나서는 '상호평등의 원칙'이 완벽하게 지켜졌다. 공격과 수비까지 분담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강철, 박철이 이끄는 수비진은 한국 선수 중심으로 채워졌고 최철 윤철을 앞세운 공격진은 북한 일색이었다. (혹시 이름까지 신경쓴 진용은 아니었을지..... 웬 철이가 그리 철철 넘쳤는지 ^^) 누가 봐도 성적보다는 참가에 의미를 둔 남북 단일팀이었다. 거기다가 조편성은 원산 폭격 이상으로 끔찍했다. 아르헨티나 포르투갈 아일랜드..... 그리고 코리아. 아르헨티나는 일찌감치 열외로 돌려 두고 포르투갈은 이후 그 대회에서 우승한 강팀이었다. 그 유명한 루이스 피구와 2002년 박지성에게 '짐승같은 태클'을 걸어 퇴장당했던 후앙 핀투, 콘세이상 등 이름만으로도 밤하늘이 대낮같을 샛별들이 포르투갈의 '골드 제너레이션'을 밝히고 있었다. 남북에서 최정예만 골라와도 아일랜드 하나 어쩔까 말까인데 아르헨티나와 포르투갈이라니 예선 통과는 물 건너 가도 아마존을 건너간 셈이었다. 첫 경기 상대는 아르헨티나. 질 게 뻔한 경기기는 하지만 그래도 남북단일팀의 역사적 첫 경기를 놓칠 수는 없어서 새벽에 눈비비고 일어났던 나는 시종일관 아르헨티나를 몰아붙이는 코리아의 선전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생판 다른 팀이었다가 발 맞추고 머리 맞댄지 얼마 안될 날림팀의 선수들이 어쩌면 저리도 팀워크가 좋으며 공수호흡이 척척 들어맞는 드림팀이 되었단 말인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보다가 나중에는 정좌하고 있었고 후반 40분을 넘어서서는 5분만 버티라고 응원하면서 마루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종료 2-3분 남았을까. 아르헨티나 문전에서 혼전이 벌어지다가 공이 외곽으로 흐르는 것이 보였고 붉은 유니폼 하나가 비호와 같이 달려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터진 대포알같은 중거리슛....... 꿈처럼 음악처럼 공은 아르헨티나 문전에 꽂혔다. 카를로스의 중거리슛? 저리 가라 그래라. 베컴의 오른발조차도 내 기억이 맞다면 평안도 어디가 고향이라던 조인철의 환상적인 슛에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1:0 코리아팀 감격의 첫 승 며칠 뒤 한국과 아일랜드의 2차전 경기 전날 우리 집에 손님이 왔다. 군 입대 전 전국을 돌며 여행을 하고 있는 친구였다. 축구에는 별 관심이 없는 친구였지만 전 가족이 눈에 불을 켜고 축구를 보고 앉은 우리 집의 손님이었던 고로 별 수 없이 응원단의 일원이 되어야 했다. 포르투갈이 워낙 강세를 보이는 터라 아일랜드에게 패하기라도 한다면 기껏 아르헨티나를 꺾은 것이 공염불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분위기는 이미 '아일랜드 쯤이야'로 흐르고 있었다. 초반 분위기도 그랬다. 아르헨티나 때 못지않게 잘 싸우는 듯 했다. 그런데 얼마쯤 지났을까. 벼락같은 아일랜드의 슛이 코리아팀 골대를 때렸다. 그 슛은 아리랑의 흥겨움에 찬물을 들이붓고 지켜보는 내 얼굴을 단일기의 한반도 빛깔보다 더 푸르게 만들어 놓았다. 이후로 아일랜드는 기세 좋게 코리아팀을 공격했고 코리아는 수시로 수세에 몰렸다. 그 경기에서 가장 빛을 발했던 것은 남한의 조진호와 북한의 최영선으로 기억한다. 메기처럼 넙적한 얼굴에 곱슬곱슬한 머리의 단신이었던 조진호는 바지런히 뛰어다니면서 아일랜드를 헤집었고 최영선은 가끔 날카로운 패스로 공격의 활로를 뚫어 주었다. 남한의 주전 수비수 (이임생으로 기억하는데.... 정확지 않다)가 출장이 정지되어서 그런지 코리아 수비는 자주 흔들렸고 결국 치명적인 일격을 당하고 만다. 프리킥을 허용하고 공이 문전으로 날아들고 한국 축구 특유의 어 어 하는 분위기가 잠시 문전을 감싸더니 갑자기 공이 코리아 골대 안에 있는 것이다. 후반전 시작하고 얼마 안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 가장 많이 흥분한 것은 엉뚱하게도 축구는 별로 관심없다던 친구 녀석이었다. 비명을 지르고 땅을 치고 누워서 버둥거리고 하여간 완전히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축구는 같이 보아야 재밌다는 말은 그런 녀석이 하나씩 끼기 때문이지만 녀석은 어느 새 경기에 홀딱 빠져 있었다. "코리아 화이팅~~~" 한국도 아니고 조선도 아닌 코리아의 경기에..... 조진호의 슛이 정말로 간발의 차이로 빗나갈 때 우리는 머리를 짓찧으며 아쉬워했고 부상 중이라는 북한의 비밀병기 윤철이 나와서 노동 1호처럼 아일랜드 문전을 날려 주기를 기도했지만 시간은 코리아의 편이 아니었다. 조진호의 입에서 "쉬발" 소리가 읽히고 북한 공격수 최철은 "씨앙"이라는 입 모양을 수시로 선보였다. 이미 경기에 미쳐 있던 내 친구가 갑자기 소리를 내질렀다. "코리아 포기하지 마라. 읏쌰 읏쌰 읏쌰." 그 말을 듣기라도 했을까. 종료 1분 전쯤, 북한 출신의 최영선이 불같은 스피드로 터치라인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서산에 기운 해의 발악이라고 봤는지 아일랜드의 수비도 악착같지 않았다. 눈깜짝할 사이에 최영선은 아일랜드 문전 코 앞까지 가 있었다. 방송 중계 커트가 최영선을 가까이서 잡았던 그 짧은 순간을 나는 잊지 못한다. 헐떡임 속에서도 악물려 있던 그의 입매가 너무도 또렷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뭔가 일을 낼 듯한 그 느낌을 나만 받은 것이 아니었는지 아버지도 벌떡 일어나셨고 친구 역시 괴성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르며 엉덩이를 뗐다. 최영선은 뒤늦게 달라붙은 아일랜드의 수비를 뚫고 크로스를 올렸고 그 문전에는 역시 북한의 최철이 있었다. 쇼트트랙에서 한국팀의 장기로 얘기되는 '발 내밀기' 기술을 배우기라도 한 듯 최철은 아일랜드 수비보다 반 발짝 먼저 발을 내밀었고 그 발에 걸린 공은 아일랜드 골문 네트를 출렁이고 말았다. 후반 44분 40초 정도에...... 동점골이 터진 것이다. 환성보다는 절규에 가까운 소리가 우리들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중계팀도 그랬고 선수들도 그러면서 터치라인 근처에서 무더기로 엉켰다. 머리가 벗겨진 남대식 코치도 악을 쓰고 있었고 단일기를 흔들며 응원하던 교포들도 그랬을 것이다. 아르헨티나 전에서의 조인철의 결승골보다도 더 값진 골이었고 아르헨티나전에서의 승리보다도 더 짜릿한 무승부였다. 참가에 의의를 둔 코리아팀이 예선 통과의 9부 능선을 넘은 것이다. 그 열광의 도가니 가운데 필요 이상으로 미쳐 날뛴다 싶던 내 친구가 별안간 뜻밖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햇빛은 넘치어라 평양 하늘에 산 넘고 바다 건너 우리는 왔네~~~" 아니 이것은..... 89년 평양 축전 당시의 평앙 축전 찬가가 아닌가. 정신이 반쯤 넘게 나가버린 김에 노래를 함께 부르면서도 의아함이 있었는데 녀석이 뭐라고 하는 걸 들은즉 북한 출신들이 멋진 플레이를 했으니 북한 노래로써 축하해야 한다 대충 그런 의도였던 것 같다. 나도 신이 나서 녀석의 손을 잡고 평양 축전 왈츠를 추었다. "평축의 축포 오르는 평양의 밤 흥겨워라..... 축전 축전의 노래 우리 부르며~~~" 거기까지만 해도 아무 거리낌이 없었는데 친구 녀석이 "불타는 탱고"라 흔히 얘기되던 이북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현역 군인은 흠칫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자식이 미쳤나? 아니면 나 모르는 사이에 주사파로 전향이라도 했나. "불타는 청춘 , 피끓는 심장 애국의 새세대로 달려가네 우리는 영예로운 반미해방전사 청년들 힘차게 앞으로,..... 자주의 깃발로 민주와 통일을......." 북한 출신이면서도 북한을 악마처럼 미워하는 아버지의 눈치를 힐끔거리며 녀석의 광기(?)를 진압하려는 순간 아버지 역시 친구의 신바람에 동참하며 박수를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가사를 못들으신 건지 아니면 곡조의 흥겨움에 도취되셨던 것인지는 지금도 알 길이 없지만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나는 '영예로운 반미해방전사'가 되어 불타는 탱고를 추며 승리의 느낌을 만끽했다. 아마 그때 조금만 더 분위기를 고조시켰다면 초등학교를 흥남에서 다녔던 아버지로부터 "장백산 줄기줄기...."가 흘러나오지는 않았을까. 그 소동 와중의 화면에 다시 한 번 단일기가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하얀색 바탕의 하늘색 한반도....... 코리아.... DPRK도 ROK도 아닌 코리아...... 그 대회 우승팀이자 홈팀 포르투갈에게 지극히 해괴한 페널티킥같은 프리킥 결승골을 내 줘 1:0으로 졌지만 코리아는 예선을 통과했고 다음 상대로 브라질을 만나 완패하고 행진을 멈추었지만 91년 코리아 청소년 축구팀의 선전분투는 전무후무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뒤로 여러 차례 시도는 있었으나 단일기 사용은 올림픽 동시 입장 정도의 이벤트에 그쳤고 어떤 종목에서든 단일기를 가슴에 단 채 상대와 겨루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바로 91년 코리아 대표팀의 구성 방식에 내재된 경직성 때문이었다. 남북의 경기력이 갈수록 벌어지는 상황에서 남북 선수 동수 선발 따위의 명분은 한두번은 몰라도 두 번 이상은 듣기 거북한 꽃노래에 불과했던 것이다. 월드컵에 남북 단일팀을 꾸린다고 하면서 남측의 쟁쟁한 프로 선수들을 제외하고 생경하기 이를데없는 북한 선수들이 그 자리를 메우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를 상상해 보면 그 답이 나오지 않을까. 명분은 현실을 이기지 못하고 그 빛을 잃은 명분은 집착과 고집으로 산화하게 마련이다. 최초의 단일팀이라는 명분과 그 팀에 승선한 선수들이라는 사명감이 날림팀을 드림팀으로 만들었고 터치라인을 타고 달리던 최영선의 악문 이는 그 상징처럼 내 기억에 남아 있지만 그 감동이 재연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북한을 끔찍히 싫어하던 아버지와 싫어하는 이유와 정도가 좀 다르긴 하지만 대학가에서 한창 유행했던 북한 노래도 별로 부르기 싫어하던 나와 내 친구가 굳이 북한 노래까지 빌려 와 가며 북한 출신의 젊은이를 치하했던 그날의 흐뭇함은 아마 다시 오기 어려울 것이다. 이미 그날의 명분은 퇴색하기 싫어하는 희나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북한은 월드컵 홈 경기까지 포기하면서까지 남한의 태극기와 애국가를 평양 하늘에 올리고 울리는 일을 거부했고 그 빈약한 대안으로 단일기와 아리랑을 내세웠다. 중국 상해에서 인공기와 태극기가 진열되는 것은 참을 수 있으나 평양에서만큼은 불가하다는 괴이한 사고방식의 행주치마로 단일기가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셈이다. 또한 서울 경기에서는 인공기를 허용할 수 있다는 축구협회장의 발언에 발끈해서 인공기가 올라간다면 운동장을 점거하겠다고 나대는 분들도 다시금 출현했다. 이 지극히 꼴통스러움의 남북합작 속에 그 하늘색이 오염되어 버린 단일기와 91년의 단일기를 비교하면서 나는 문득 서글퍼진다.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기쁜 무승부의 날 스탠드를 꽃피우던 단일기의 물결만큼은 잊기 어려울 것 같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골문을 향해 달리던 최영선의 비장함과 함께...... 그리고 우리집 안방에서 벌어졌던 공화국 춤판과 함께...... |
첫댓글 과거의 기억이 참 새삼스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