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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간의 병원 생활
최철순
9월 27일의 사고 (2020년)
해마다 가족 묘지 벌초는 추석 전날 3형제 아들을 데리고 애초기를 준비하여 남에게 부탁하지 않고 해마다 조상의 가족 묘지를 벌초했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서울에 사는 정익을 추석에 오지 못하게 하고 정진 정길과 함께 일요일날 벌초를 했다 .
일이 거의 끝날 무렵 나는 갈퀴로 잘라진 풀을 버리고 오는 순간 정진의 애초기가 오른쪽 무릅 허벅지에 닿아 순간적인 실수로 상처를 입힌 것이다.
돌발적인 불운의 순간이었다. 가족 묘지 인근까지 119 구급차를 불러 해남 종합 병원 응급실로 가게 되었다. 지혈 응급조치를 한 후 정길의 승용차로 조대 병원 응급실에 갔다. 승용차 안의 바닥에 피가 흘러 다리를 높이 올렸다. 그러나 추석을 앞둔 일요일이라 급한 수술을 할 수 없어 대중 병원으로 안내 해 주었다. 입구에서는 코로나 감염 때문에 체온을 잰 결과 37.5도가 되어 입실이 되지 않아 다시 집 가까운 21세기병원 응급실에 왔다.
피를 많이 흘린 충격에 체온이 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결과로 판단하기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CT 촬영 결과 폐에 이상이 없으나 빠른 수술을 위해서 전대 병원에서 코로나 진단 검사는 구급차를 타고 가서 받았다.
다음 날 아침 코로나 진단 검사 결과 문자가 온다는 기대 속에 아내와 함께 응급실에서 첫 밤을 보냈다. 각종 검사와 응급실 비용이 28만원 정도 계산되었다.
9월 28일 [월요일]
아침 7시경 드디어 코로나 검사 결과 음성 판정 문자가 왔다.
그러나 이곳은 실핏줄을 봉합하는 현미경 시설이 없어 수술을 할 수 없다는 담당 의사의 의견에 따라 다시 정밀 봉합 수술 할 수 있는 대인동에 있는 광주 대중병원으로 옮겨 입실하게 되었다 . 이곳은 응급실이 없어 4인실에 들어가 수술 연락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X레이검사 초음파검사 MRI검사 등 모든 검사를 받은 후 오후 7시경 수술실에 들어갔다.
파란 까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만 보였다. 등뼈 척추 아랫 부분에 부분 마취를 한 것 같았다. 카텐으로 앞을 가려 수술 상황을 볼 수 없었고 마취 진통제 효능으로 전혀 통증 없이 무사히 수술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추석 전후 연휴가 되어 자칫하면 수술을 못하게 될 우려가 많았는데 천만 다행으로 행운을 받은 것 같았고 간호해 준 딸 미애의 안내 역할이 컸다.
9월 29일 (화요일)
수술 후 하루 밤을 보낸 날이다. 여러 상처 부위에 칼을 댄 곳을 실로 묶은 흔적이 보였고 카메라 영상에 남겨 놓았다. 뼈가 다치지 않는 것이 천만 다행이었고 상처 부위의 붕대에 피가 조금씩 묻혀 있었다. 4인실은 화장실이 없고 비좁아 미애의 권유로 705호 2인실로 옮겼다.
9월 30~10월 1일 (수 목요일)
추석 전후 이틀간 집이 아닌 병실에서 이렇게 누워 있다는 것은 나의 생애 중 가장 슬픈 일이었고 불행한 시간이었다. 정길이 나의 병 수발을 다했다. 오른 쪽 다리를 움직이지 못 하니까 세끼 식사하기 옷 갈아입기 화장실 가기 휠체어로 운동하기 등 나를 대신해서 궂은 일을 헌신적으로 수고해 주었다. 집에서 정진이가 영환 손자와 함께 추석 차례를 지냈다고 한다.
옆침실에는 가거도 공사 현장에서 손가락 상처를 입은 50대 환자로 간식도 나누어 먹고 대화도 했으나 움직이는 소리에 잠을 못 잔다는 돌발적인 그의 말을 듣고 불쾌한 감정을 억제할 수 없고 전과자 같은 느낌도 있어 불안한 마음도 느껴 방을 옮기기로 했다. 건너쪽 709호실로 옮겼다.
10월 2일 (금요일)
함께 있을 환자는 광양에 사는 초등학교 2학년생인 양가경이었는데 자전거를 타다가 왼쪽 발꿈치에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40대 젊은 부부가 교대로 아들 간호를 하고 있었는데 너무 나에게 친절했고 도움을 많이 주었다.
활발하게 움직일 수 없는 고통을 언제까지 받아야 할까 하는 생각에 한 없이 마음이 연약해지는 순간이었다.
오전 11시 반경 서울의 둘째 자부로부터 전화가 왔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무슨 죄의 댓가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지 한 없는 슬픔에 잠겼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소리내어 눈물을 흘렸다. 오랫 동안 대변을 보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정진의 도움으로 장애인 화장실에서 대변을 보고 나니 퍽 몸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오후 4시경 동욱 부부가 집으로 병문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10월 3일 (토요일)
아침밥은 7시 점심은 12시 저녁밥은 5시에 식사가 나온다.
그러나 운동도 하지 않고 병실 생활만 하면서 밥을 먹으니 밥맛이 좋을리 없다. 잠도 잘 오지 않아 밤 시간이 너무 길다. 억지로 참아야 했다.
특히 옆 사람에게 수면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조심스런 행동을 해야 했다. 최승환 최성환 손자로부터 안부 전화가 왔다.
10월 4일 (일요일)
조희목 윤희병처 박홍기 박영순 장원석으로부터 병 치료 안부 전화가 왔다. 9시경 큰 자부가 간호하기 위해서 아내를 태우고 왔다. 오늘도 큰 자부를 보자 마자 눈물이 나왔다. 자꾸만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다.
점심은 정진이가 사온 호박죽을 맛있게 먹었다. 이제부터 밥 대신에 죽을 신청했다. 여러 종류로 죽이 나와 다양하게 먹을 수 있었다. 미애도 간식 거리를 갖고 찾아 왔다. 오늘까지 연휴지만 내일부터 정진 미애도 직장에 나갈 것 같다. 휠체어에 나를 태우고 1층으로 내려가 바깥을 나간 것이 맑은 공기도 마시며 길거리 차량 이동도 볼 수 있고 운동도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점차 휠체어 작동 방법도 익혔다. 샤워실에서 머리도 감겨 주었다. 기분이 상쾌했다 . 자식에 대한 든든함을 느꼈다.
10월 5일 (월요일)
오늘도 노령의 나이에 나를 간호해 주기 위해 아내가 수고하고 있다.
처음으로 간호 경험을 하면서 배우고 있다. 아침에는 죽 식사를 하고 간식을 먹은 후 양치질을 한다. 세수는 물수건으로 한다. 다음은 아침에 먹을 약을 찾아 먹었다. 이같은 일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다리를 못 움직여서 활동하지 못 하기 때문에 혼자 있기란 고역이다.
말 동무라도 해 주는 아내가 퍽 고맙고 아무런 부담이 없기에 편하고 좋았다. 지인들이 찾아오겠다는 것도 나의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고 코로나 때문에 오지 말라고 사양했다. 그러나 송병옥 이방춘이 승용차로 찾아와 아래층 카페홀에서 아내와 함께 만났다. 차를 마시면서 잠깐이나마 담소할 수 있었다. 또 11명의 노인 회원들이 위로금을 나에게 보내주었다. 너무나 고마웠고 쾌유되면 꼭 답례라도 할려고 생각한다. 아내가 택시로 집에서 가져 올 상비품을 갖고 왔다. 저녁엔 이달에 찾아 올 큰 자부의 생일 축하금도 농협 뱅킹으로 보냈다. 오늘 아내의 도움으로 장애 화장실에서 변을 보았고 점차 수술 부위가 좋아져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오줌관에 꽂힌 호스도 빼 버렸다. 점순 동생과 서울 둘째 자부로부터 위로 전화가 왔다.
10월 6일 (화요일)
바깥 날씨가 쌀쌀한 느낌이다. 밤중에 소변을 할 때 소변기통을 비워야 하는데 옆 사람에게 지장이 없도록 조심히 아내가 처리했다. 나를 도와준 의사를 찾기 위해 스마트 폰에서 네이버를 눌렀다. 수술을 해 주신 분은 김성진 원장이었고 내과의사는 김은경 원장이었으며 7명의 전문의가 정형외과를 맡고 있었다. 간호사용 휠체어는 사용 희망자가 많을 경우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일등 의료기에 연락하여 한달 임대료 3만원을 주고 자유롭게 사용하게 되었다.
10월 7일 (수요일)
아침 간호사 순방시 엄지 발가락 부기가 많이 빠졌다고 한다. 기분이 좋았다. 오늘부터 이틀간 큰 자부가 도와주기로 했다. 아내와 달리 젊으니까 생각과 행동이 빨라 시중 드는데 불편이 없었다.
오늘부터 가경 아빠가 와서 간호하고 있다. 잔잔한 일까지 솔선해서 나의 불편함을 도와주고 있어 너무 고마웠다. 시간을 메우기 위해 T.V보기 카톡보기 정진이가 사온 월간지를 읽었다. 또 3층 로비에 동아일보와 무등일보 일간지가 있어서 신문을 읽을 수 있었고 하루 3~4차례 병원 밖을 나가 바깥 공기도 마시고 운동도 하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이러한 활동을 할 다리 역할은 휠체어이기 때문에 작동을 도와준 일은 보조자의 몫이었다.
10월 8일 (목요일)
오늘도 어제에 이어 날씨가 쌀쌀하다. 오후 1시경 오랜만에 아토피 커피를 마셨다. 엊저녁에 수술 부위와 엉덩이 부분이 간지러워 잠이 오지 않아 고역을 치렀다. 아침 식사는 내가 좋아하는 김칫국에 입맛이 당겨 억지로 한그릇을 먹었다. 이틀만에 큰 자부의 부축을 받아 변을 보니 뱃속이 시원한 것 같았다. 오후에 7층 코너 탁자에서 우연히 해남읍에 살고 있는 개인 택시 환자를 만나 해남군의 각종 소식을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10월 9일 (금요일)
오늘은 한글날이라 공휴일이다. 개천절과 마찬가지로 국경일 경로당 국기를 달아 줄 것을 송병옥씨에게 어제 부탁했다. 경로당 회장이란 책임 때문에 병원에 있으면서도 항시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다. 종전처럼 오후에 106동 조희목 댁에서 회원들이 놀고 있어서 퍽 다행스런 일이고 협조해 주신 어르신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휴일이라 3층 엘리베이터 작동이 되지 않았다. 엊저녁엔 잠도 잘 잤고 다리 움직임이 더 좋아졌다.
화장실에서 대변도 보았다. 그러나 휠체어를 전후 좌우로 작동하기에 장애인 화장실 입구 공간이 좁아 불편했다. 아침 간식은 베지밀과 토마토로 해결했다. 아침 9시경 임무 교대로 막내 자부가 왔다. 운동을 하기 위해 복도에 나가보면 여자 환자들은 그냥 모르는 사람도 대화 분위기가 쉽게 이루어진데 남자들은 그렇지 않는 것 같았다.
10월 10일 (토요일)
최병학 서울 친구로부터 중국 건국일인 쌍십절이라고 아침 카톡이 왔다.
부담이 될 것 같아 나의 병실 생활을 알리지 않았다. 오늘은 구름 한점 없는 포근한 맑은 가을 날씨이었다. 순간적인 착각으로 잔여 복용약을 집으로 보냈는데 약봉지를 확인해보니 약이 부족했다. 다시 집에서 가져와 보충하는 일이 발생했다. 창피스런 일이었다. 오전에 정길이가 개운하게 머리와 몸을 물로 씻어주어 기분이 상쾌했다. 정진도 와서 조선일보 신문을 구해 와서 빠짐 없이 읽어 보았다. 집에서 가져 온 포도 고구마를 먹고 나니 점심밥을 많이 남겼고 오메가3와 울금 알도 저녁에 먹었다. 내일은 서울의 정익 부부가 병문차 승용차로 온다고 연락이 왔다.
김성진 원장이 오전에 오셨다. 그분 모습만 보아도 나를 수술해 준 생명의 은인이라는 생각에 한 없이 고마왔고 희망이 솟는 생동감을 느꼈다. 받침대도 더 짧개 하라고 지시해 주셨다.
10월 11일 (월요일)
어제보다 다리 움직임이 부드러워졌다. 받침대도 더 짧아져 움직이기에 더 편해졌다. 아침밥은 엊저녁 아내가 사 온 구운 김으로 입맛을 돋아 밥 한그릇을 비웠다. 아침 8시경 정익 부부가 입원실을 찾아 왔다. 코로나 때문에 추석에도 못 오고 이제 고향에 온 것이다. 고맙고 반가왔다. 형제간에 만남의 기회를 갖도록 부탁했다. 염주동 집으로 모여 만남을 가졌고 정진의 주선으로 정진 집을 방문 한 후 담양 쪽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헤어졌다고 한다. 병실에 나 혼자 있었는데 변이 마려워 홀로 화장실에 갔는데 오른쪽 다리 감각이 좋아져 지혜를 모아 무사히 변기에 앉을 수 있었다.
호전 되었다는 신호인 것 같아 퍽 기뻤다.
10월 12일 (월요일)
오늘의 날씨도 전형적인 포근한 가을 기온이었다. 날마다 링겔과 항생제 주사만 꾸준히 간호사들이 놓아주고 간다. 엊저녁엔 소변을 네차레 하면서 누운 불편을 겪었다. 아침 수간호사 일행이 와서 실밥을 뺀다고 말해 주었다. 수술한지 2주째 되는 날이었다. 부족한 비뇨기과 약을 큰 자부의 수고로 한 달분 복용약을 대리로 처방 해 가져 왔다. 다리 소독을 담당한 직원들이 와서 실밥을 빼 주었다. 드디어 주치의가 오셔서 내일 오전에 퇴원 수속을 하라는 말을 해 주었다. 새장 속에 같힌 새가 밖으로 나오는 최고의 기쁜 소식이었다. 오후에 집으로 가져갈 물건들을 일부 보냈고 내일 입을 나의 옷도 가져 왔다.
10월 13일 (화요일)
드디어 퇴원한다는 기쁨에 엊저녁에 잠이 오지 않아 세 차례나 잠이 깼다. 풍암동 김정호 그리고 이기술이 보내온 불같은 가을 단풍 묘기 백출한 미술 공연 44번버스 동영상 카톡을 감명 깊게 보았다. 보내 준 분들에게 충심으로 고마움을 보낸다. 마지막 아침밥을 먹었다.
처음으로 휠체어를 버리고 목발에 의지해 화장실에 다녀 왔다. 나를 위해 수고해 주신 주치의 간호사님 709호실에 함께 생활했던 양가경 부모님 그외 도움을 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오전 10시반에 간호사실에서 퇴원 수속을 하라는 연락이 왔다. 막내 자부가 수고해 주었다.
삼성카드로 2,499,020원을 결재했다. 하늘을 날것 같은 기분으로 막내 승용차에 실려 아내와 함께 드디어 그리운 집에 돌아 왔다.
저녁엔 미애가 준비해 온 장어구이와 추어탕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세 자녀 부부가 함께 모여 퇴원을 축하해 주었고 형제간에 나의 병 간호를 기회로 화합의 분위기가 더욱 조성 된 것 같았다.
끝으로 나의 순간적인 사고로 사랑하는 자녀들이 모두 함께 열성적인 간호를 해 준 고마움을 영원토록 잊혀질 수 없었으며 또한 평소엔 받을 수 없는 효도를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김준호 지회장 박영숙 부회장 공군에 근무중인 최영환 손자가 직접 병원을 찾아 왔고 계순 계련 점순 여동생과 아내 동창 모임에서 따뜻한 위로의 정을 보내 주었다. 퇴원 후 집으로 윤 상범 처남과 노원재 이봉순 회원께서 문안 방문을 해주셨으며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최지혜 손녀가 할아버지를 보기 위해 찾아와 너무나 반가왔다.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보낸다. 앞으로 온 가족이 항상 건강하고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다. 이번 병원 생활은 광주 병원 대장 용종 수술에 이어 두 번째로 건강의 중요성과 가족의 고마움을 느끼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평소 튼튼한 몸과 즐거운 생활을 통해서 병원을 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고 죄를 지어 감옥 가는 일이 없도록 항상 주의해야 하는 것도 본인의 행복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 된다.
17일간의 병원 생활
최철순
9월 27일의 사고 (2020년)
해마다 가족 묘지 벌초는 추석 전날 3형제 아들을 데리고 애초기를 준비하여 남에게 부탁하지 않고 해마다 조상의 가족 묘지를 벌초했었다.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서울에 사는 정익을 추석에 오지 못하게 하고 정진 정길과 함께 일요일날 벌초를 했다 . 일이 거의 끝날 무렵 나는 갈퀴로 잘라진 풀을 버리고 오는 순간 정진의 애초기가 오른쪽 무릅 허벅지에 닿아 순간적인 실수로 상처를 입힌 것이다. 돌발적인 불운의 순간이었다. 가족 묘지 인근까지 119 구급차를 불러 해남 종합 병원 응급실로 가게 되었다. 지혈 응급조치를 한 후 정길의 승용차로 조대 병원 응급실에 갔다. 승용차 안의 바닥에 피가 흘러 다리를 높이 올렸다, 그러나 추석을 앞둔 일요일이라 급한 수술을 할수 없어 대중 병원으로 안내 해 주었다. 입구에서는 코로나 감염 때문에 체온을 잰 결과 37.5도가 되어 입실이 되지 않아 다시 집 가까운 21세기병원 응급실에 왔다. 피를 많이 흘린 충격에 체온이 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결과로 판단하기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ct 촬영 결과 폐에 이상이 없으나 빠른 수술을 위해서 전대 병원에서 코로나 진단 검사를 저녁에 구급차를 타고 가서 받았다. 다음 날 아침 코로나 진단 검사 결과 문자가 온다는 기대 속에 아내와 함께 응급실에서 첫 밤을 보냈다. 각종 검사와 응급실 비용이 28만원 정도 계산되었다
9월 28일 [월요일]
아침 7시경 드디어 코로나 검사 결과 음성 판정 문자가 왔다.그러나 이곳은 실핏줄을 봉합하는 현미경 시설이 없어 수술을 할 수 없다는 담당 의사의 의견에 따라 다시 정밀 봉합 수술 할 수 있는 대인동에 있는 광주 대중병원으로 옮겨 입실하게 되었다 .이곳은 응급실이 없어 4인실에 들어가 수술 연락만 기다리고 있었다.그동안 xray검사 초음파검사 mri 검사 등 모든 검사를 받은 후 오후 7시경 수술실에 들어갔다. 파란 까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만 보였다. 등뼈 척추 아랫 부분에 부분 마취를 한 것 같았다. 카텐으로 앞을 가려 수술 상황을 볼 수 없었고 마취 진통제 효능으로 전혀 통증 없이 무사히 수술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추석 전후 연휴가 되어 자칫하면 수술을 못하게 될 우려가 많았는데 천만 다행으로 행운을 받은 것 같았고 간호해 준 딸 미애의 안내 역할이 컸다.
9월 29일 (화요일)
수술 후 하루 밤을 보낸 날이다.여러 상처 부위에 칼을 댄 곳을 실로 묶은 흔적이 보였고 카메라 영상에 남겨 놓았다. 뼈가 다치지 않는 것이 천만 다행이었고 상처 부위의 붕대에 피가 조금씩 묻혀 있었다. 4인실은 화장실이 없고 비좁아 미애의 권유로 705호 2인실로 옮겼다.
9월 30~10월 1일 (수 목요일)
추석 전후 이틀간 집이 아닌 병실에서 이렇게 누워 있다는 것은 나의 생애 중 가장 슬픈 일이었고 불행한 시간이었다.정길이 나의 병 수발을 다했다. 오른 쪽 다리를 움직이지 못 하니까 세끼 식사하기 옷 갈아입기 화장실 가기 휠체어로 운동하기 등 나를 대신해서 궂은 일을 헌신적으로 수고해 주었다.집에서 정진이가 영환 손자와 함께 추석 차례를 지냈다고 한다. 옆에는 가거도 공사 현장에서 손가락을 상처 입은 50대 환자이었다. 간식도 나누어 먹고 대화도 했으나 움직이는 소리에 잠을 못 잔다는 돌발적인 그의 말을 듣고 불쾌한 감정을 억제할 수 없고 전과자 같은 느낌도 있어 불안한 마음도 느껴 방을 옮기기로 했다. 건너쪽 709호실로 옮겼다
10월 2일 (금요일)
함께 있을 환자는 광양에 사는 초등학교 2학년생인 양 가경이었는데 자전거를 타다가 왼쪽 발꿈치에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40대 젊은 부부가 교대로 아들 간호를 하고 있었는데 너무 나에게 친절했고 도움을 많이 주었다. 활발하게 움직일 수 없는 고통을 언제까지 받아야 할까 하는 생각에 한 없이 마음이 연약해지는 순간이었다. 오전 11시 반경 서울의 둘째 자부로부터 전화가 왔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무슨 죄의 댓가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지 한 없는 슬픔에 잠겼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소리내어 눈물을 흘렸다. 오랫날 동안 대변을 누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정진의 도움으로 장애인 화장실에서 대변을 누고 나니 퍽 몸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오후 4시경 동욱 부부가 집으로 병문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10월 3일 (토요일)
아침밥은 7시 점심은 12시 저녁밥은 5시에 식사가 온다. 그러나 운동도 하지 않고 병실 생활만 하면서 밥을 먹으니 밥맛이 좋을리 없다. 잠도 잘 오지 않아 밤 시간이 너무 길다. 억지로 참아야 했다. 특히 옆 사람에게 수면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조심스런 행동을 해야 했다. 최승환 최성환 손자로부터 안부 전화가 왔다.
10월 4일 (일요일)
조희목 윤희병처 박홍기 박영순 장원석 으로부터 병 치료 안부 전화가 왔다. 9시경 큰 자부가 간호하기 위해서 아내를 태우고 왔다. 오늘도 큰 자부를 보자 마자 눈물이 나왔다. 자꾸만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다. 점심은 정진이가 사온 호박죽을 맛있게 먹었다. 이제부터 밥 대신에 죽을 신청했다. 여러 종류로 죽이 나와 다양하게 먹을 수 있었다. 미애도 간식 거리를 갖고 찾아 왔다. 오늘까지 연휴지만 내일부터 정진 미애도 직장에 나갈 것 같다. 휠체어에 나를 태우고 1층으로 내려가 바깥을 나간 것이 맑은 공기도 마시며 길거리 차량 이동도 볼 수 있고 운동도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점차 휠체어 작동 방법도 익혔다. 샤워실에서 머리도 물로 씻어 주었다. 기분이 상쾌했다 .정진 정길 모두 수고해 주었다.
10월 5일 (월요일)
오늘도 노령의 나이에 나를 간호해 주기 위해 아내가 수고하고 있다. 처음으로 간호 경험을 하면서 배우고 있다. 아침에는 죽 식사를 하고 간식을 먹은 후 양치질을 한다. 세수는 물 수건으로한다. 다음은 아침에 먹을 약을 찾아 먹었다 .이와같은 일이 아침 생활의 기본이었다. 다리를 못 움직여서 활동하지 못 하기 때문에 혼자 있기란 고역이었다.. 말 동무라도 해 주는 아내가 퍽 고맙고 아무런 부담이 없기에 편하고 좋았다. 지인들이 찾아오겠다는 것도 나의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고 코로나 때문에 오지 말라고 사양했다. 그러나 송병옥 이방춘이 승용차로 찾아와 아래층 카페홀에서 아내와 함께 만났다. 차를 마시면서 잠깐이나마 담소할 수 있었다. 또 11명의 노인 회원들이 위로금을 나에게 보내주었다. 너무나 고마웠고 쾌유되면 꼭 답례라도 할려고 생각한다. 아내가 택시로 집에서 가져 올 상비품을 갖고 왔다. 저녁엔 이달에 찾아 올 큰 자부의 생일 축하금도 농협 뱅킹으로 보냈다. 오늘 아내의 도움으로 장애 화장실에서 변을 누었고 점차 수술 부위가 좋아져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오줌관에 꽂힌 호스도 빼 버렸다. 점순 동생 ,서울 둘째 자부로부터 위로 전화가 왔다.
10월 6일 (화요일)
바깥 날씨가 쌀쌀한 느낌이다. 밤중에 소변을 할 때 소변기통을 비워야 하는데 옆 사람에게 지장이 없도록 조심히 아내가 처리했다. 나를 도와준 의사를 찾기위해 스마트 폰에서 네이버를 눌렀다. 수술을 해 주신 분은 김성진 원장이었고 내과의사는 김은경 원장이었으며 7명의 전문의가 정형외과를 맡고 있었다. 간호사용 휠체어는 사용 희망자가 많을 경우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일등 의료기에 연락하여 한달 임대료 3만원을 주고 자유롭게 사용하게 되었다.
10월 7일 (수요일)
아침 간호사 순방시 엄지 발가락 부기가 많이 빠졌다고 한다.기분이 좋았다. 오늘부터 이틀간 큰 자부가 도와주기로 했다.아내와 달리 젊으니까 생각과 행동이 빨라 시중 드는데 불편이 없었다..오늘부터 가경 아빠가 와서 간호하고 있다. 잔잔한 일까지 솔선 해서 나의 불편함을 도와주고 있어 너무 고마웠다. 시간을 메우기 위해 tv보기 카톡보기 정진이가 사온 월간지를 읽었다. 또 3층 로비에 동아일보와 무등일보 일간지가 있어서 신문을 읽을 수 있었고 하루 3~4차례 병원 밖을 나가 바깥 공기도 마시고 운동도 하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이러한 활동을 할 다리 역할은 휠체어이기 때문에 작동을
도와준 일은 보조자의 몫이었다.
10월 8일 (목요일)
오늘도 어제에 이어 날씨가 쌀쌀하다. 오후 1시경 오랜만에 아토피 커피를 마셨다. 엊저녁에 수술 부위와 엉덩이 부분이 간지러워 잠이 오지 않아 고역을 치렀다. 아침 식사는 내가 좋아하는 김칫국에 입맛이 당겨 억지로 한그릇을 먹었다. 이틀만에 큰 자부의 부축을 받아 변을 보니 뱃속이 시원한 것 같았다. 오후에 7층 코너 탁자에서 우연히 해남읍에 살고 있는 개인 택시 환자를 만나 해남군의 각종 소식을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10월 9일 (금요일)
오늘은 한글날이라 공휴일이다. 개천절과 마찬가지로 국경일 경로당 국기를 달아 줄 것을 송병옥씨에게 어제 부탁했다. 경로당 회장이란 책임 때문에 병원에 있으면서도 항시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다. 종전처럼 오후에 106동 조희목 댁에서 회원들이 놀고 있어서 퍽 다행스런 일이고 협조해 주신 어르신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휴일이라 3층 에레배터 작동이 되지 않았다. 엊저녁엔 잠도 잘 잤고 다리 움직임이 더 좋아졌다. 화장실에서 대변도 보았다. 그러나 휠체어를 전후 좌우로 작동하기에 장애인 화장실 입구 공간이 좁아 불편했다. 아침 간식은 배지밀과 도마토로 해결했다. 아침 9시경 임무 교대로 막내 자부가 왔다. 운동을 하기 위해 복도에 나가보면 여자 환자들은 그냥 모르는 사람도 대화 분위기가 쉽게 이루어진데 남자들은 그렇지 않는 것 같았다.
10월 10일 (토요일)
최병학 서울 친구로부터 중국 건국일인 쌍십절이라고 아침 카톡이 왔다. 부담이 될 것 같아 나의 병실 생활을 알리지 않았다. 오늘은 구름 한점 없는 포근한 맑은 가을 날씨이었다. 순간적인 착각으로 잔여 복용약을 집으로 보냈는데 약봉지를 확인해보니 약이 부족했다. 다시 집에서 가져와 보충하는 일이 발생했다. 창피스런 일이었다. 오전에 정길이가 개운하게 머리와 몸을 물로 씻어주어 기분이 상쾌했다. 정진도 와서 조선일보 신문을 구해 와서 빠짐 없이 읽어 보았다. 집에서 가져 온 포도 고구마를 먹고 나니 점심밥을 많이 남겼고 오메가3와 울금 알도 저녁에 먹었다. 내일은 서울의 정익 부부가 병문차 승용차로 온다고 연락이 왔다.
김성진 원장이 오전에 오셨다. 그분 모습만 보아도 나를 수술해 준 생명의 은인이라는 생각에 한 없이 고마왔고 희망이 솟는 생동감을 느꼈다. 받침대도 더 짧개 하라고 지시해 주셨다.
10월 11일 (월요일)
어제보다 다리 움직임이 부드러워졌다. 받침대도 더 짧아져 움직이기에 더 편해졌다. 아침밥은 엊저녁 아내가 사 온 구운 김으로 입맛을 돋아 밥 한그릇을 비웠다. 아침 8시경 정익 부부가 입원실을 찾아 왔다. 코로나 때문에 추석에도 못 오고 이제 고향에 온 것이다. 고맙고 반가왔다. 형제간에 만남의 기회를 갖도록 부탁했다. 염주동 집으로 모여 만남을 가졌고 정진의 주선으로 정진 집을 방문 한 후 담양 쪽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헤어졌다고 한다. 병실에 나 혼자 있었는데 변이 마려워 홀로 화장실에 갔는데 오른쪽 다리 감각이 좋아져 지혜를 모아 무사히 변기에 앉을 수 있었다. 호전 되었다는 신호인 것 같아 퍽 기뻤다.
10월 12일 (월요일)
오늘의 날씨도 전형적인 포근한 가을 기온이었다. 날마다 닝겔과 항생제 주사만 꾸준히 간호사들이 놓아주고 간다. 엊저녁엔 소변을 네차레 하면서 누운 불편을 겪었다. 아침 수간호사 일행이 와서 실밥을 뺀다고 말해 주었다. 수술한지 2주째 되는 날이었다. 부족한 비뇨기과 약을 큰 자부의 수고로 한 달분 복용약을 대리로 처방 해 가져 왔다. 다리 소독을 담당한 직원들이 와서 실밥을 빼 주었다. 드디어 주치의가 오셔서 내일 오전에 퇴원 수속을 하라는 말을 해 주셨다. 새장 속에 같힌 새가 밖으로 나오는 최고의 기쁜 소식이었다. 오후에 집으로 가져갈 물건들을 일부 보냈고 내일 입을 나의 옷도 가져 왔다.
10월 13일 (화요일)
드디어 퇴원한다는 기쁨에 엊저녁에 잠이 오지 않아 세 차례나 잠이 깨었다. 풍암동 김정호 그리고 이기술이 보내온 불같은 가을 단풍 묘기 백출한 미술 공연 44번버스 동영상 카톡을 감명 깊게 보았다.보내 준 분들에게 충심으로 고마움을 보낸다. 마지막 아침밥을 먹었다. 처음으로 휠체어를 버리고 목발에 의지해 화장실에 다녀 왔다. 나를 위해 수고해 주신 주치의 간호사님 709호실에 함께 생활했던 양가경 부모님 그외 도움을 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오전 10시반에 간호사실에서 퇴원 수속을 하라는 연락이 왔다. 막내 자부가 수고해 주었다. 삼성카드로 2,499,020원을 결재했다. 하늘을 날것 같은 기분으로 막내 승용차에 실려 아내와 함께 드디어 그리운 집에 돌아 왔다. 저녁엔 미애가 준비해 온 장어구이와 추어탕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세 자녀 부부가 함께 모여 퇴원을 축하해 주었고 형제간에 나의 병 간호를 기회로 화합의 분위기가 더욱 조성 된 것 같았다. 끝으로 나의 순간적인 사고로 사랑하는 자녀들이 모두 함께 열성적인 간호를 해 준 고마움을 영원토록 잊혀질 수 없었으며 또한 평소엔 받을 수 없는 효도를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김준호 지회장 박영숙 부회장 공군에 근무중인 최영환 손자가 직접 병원을 찾아 왔고 계순 계련 점순 여동생과 아내 동창 모임에서 따뜻한 위로의 정을 보내 주었다. 퇴원 후 집으로 윤 상범 처남과 노원재 이봉순 회원께서 문안 방문을 해주셨으며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최지혜 손녀가 할아버지를 보기 위해 찾아와 너무나 반가왔다.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보낸다. 앞으로 온 가족이 항상 건강하고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다. 이번 병원 생활은 광주 병원 대장 용종 수술에 이어 두 번째로 건강의 중요성과 가족의 고마움을 느끼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평소 튼튼한 몸과 즐거운 생활을 통해서 병원을 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고 죄를 지어 감옥 가는 일이 없도록 항상 주의해야 하는 것도 본인의 행복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