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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릉(思陵)은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능이며 단릉 형식이다. 처음에는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출가한 해주 정씨 묘역이었던 곳에 민간 신분의 묘로 조성되었다. 그 후 중종 때 대군 부인의 예로 복위되고, 1698년(숙종 24) 숙종에 의해 노산군이 단종대왕으로 복위되자 부인도 정순왕후로 복위되었으며, 신위는 창경궁에 모셔져 있다가 종묘에 안치되었다. |
戊洋의 조선왕릉 순례기 (아래를 Cl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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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定順王后,1440~1521)
1454년(단종 2)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1455년(세조 1) 세조의 찬역(簒逆)으로 단종이 왕위를 내놓고 상왕(上王)이 되자,
왕비도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로 봉해졌다. 그후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1457년 상왕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자
의덕왕대비도 부인(夫人)으로 강봉(降封)되었다. 소생은 없었으며, 1698년(숙종 24) 노산군이 단종으로 추복(追復)되자,
정순왕후로 추복되었다.
궁궐을 나와 사는 시절에는 동대문 밖의 동망봉 기슭에 초가집을 짓고 시녀들이 해오는 동냥으로 끼니를 잇다가,
염색업을 하며 평생을 살았다. 1521년(중종 16) 6월 4일을 일기로 장장 7대 왕대에 걸친 삶을 마감하였으니 이 때,
춘추 82세였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단종의 장릉
단종의 릉은 영월 읍내에서 제천으로 가다 보면 동을지산 기슭에 장릉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 및 메모
이번의 답사지는 한 많은 왕인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의 사릉를 거쳐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조선의 측천무후 문정왕후릉인
태릉이다.
먼저 사릉에 들렀다.
사릉의 위치는 남양주시 진건면에 있는데 고종,순종릉인 홍릉,유릉과도 멀지 않다.
사릉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화재청 사릉관리소에 신고를 하고 들어간다.
한적한 곳에 있는지라 방문객이 별로 없어 관리인을 한참동안이나 찾앚다.
사릉입구는 능 정문이 아니고 위사진 표지판 앞 관리소 우측에 신고하고 들어간다.
홍살문, 정자각, 비각...여늬 왕릉과 비슷하다
능비 : 조선국 정순왕후 사릉
곡장 안에 아담하게 조성된 능역
마석(1쌍), 문인석(1쌍), 망주석(1쌍), 양석(1쌍), 호석(1쌍)
왕자나 왕자비 정도의 묘 수준에 해당하는 기본적인 구성이다.
왕이나 왕후릉의 권위를 상징하는 무인석과 난간석이 없다.
나중에 왕비로 추복되었으나 릉의 상설은 새롭게 꾸미지 않은 모양이다.
이런 경우는 다른 능에도 있다.
문인석과 마석..마모된 곳을 덧칠을 했는지 얼룩이 많아 보기가 좋지않다.
왕릉의 석물치고 작다.
망주석과 세호
중종때 조성된 릉이므로 (정순왕후는 82세까지 살았으니 요즘같으면 100세를 훨씬 넘긴 셈이다)
세호가 등장할 시기이다.
혼유석과 4각 장명등
태릉(泰陵),강릉(康陵)
태릉 (泰陵) 개관
태릉은 11대 임금 중종의 제 2 계비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으로, 능침은 단릉 형식이다. |
태릉 안내 사이트 : Click here !
조선의 측천무후, 철의 여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1501~1565)
문정왕후는 1501년(연산군 7)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딸로 태어났다.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가 1515년(중종 10) 인종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7일 만에 승하하자,
2년 뒤인 17세 때 왕비로 책봉되었다.
당시 인종이 세자로 책봉된 가운데, 문정왕후가 경원대군(훗날 명종)을 낳자, 기존의 세자를 폐하고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소윤(小尹)과 기존의 세자를 지키려는 대윤(大尹) 간의 권력싸움이 조정을 어지럽게 하였다.
이 가운데 1544년(중종 39)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여 대윤이 득세하는 걸로 당쟁이 일단락되는 듯 싶었으나,
인종이 재위 8개월만에 승하하자 정권은 경원대군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에게로 넘어왔다.
1545년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문정왕후는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면서 모든 권력을 손에 쥐었다.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물린 이후에도 명종의 뒤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였으며, 오빠인 윤원형을 포함한 소윤 일파는
대윤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을사사화를 일으켰으며, 그 후 다시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권세를 누리던 문정왕후는 1565년(명종 20) 창덕궁에서 65세로 승하하였다.
문정왕후는 불교중흥정책을 취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문정왕후는 독실한 불교신자로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를 뽑고
전국 300여 개의 절을 공인하는 등 당시의 유교지향정책을 무시하고 불교 중흥을 도모하였다.
양주 회암사에 있던 승려 보우를 맞아들여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임명하고 훗날 중종과 함께 묻힐 요량으로 봉은사
근처(정릉)에 중종의 능을 천장하기도 하였다. 폐지되었던 승과를 부활시켰으며,
이러한 노력으로 불교 교단은 활기를 띠고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이에 유생들은 문정왕후의 불교 중흥 노력에 심한 반발을 시작했다. 각지에서 보우를 타도하라는 상소와 종단 및 승과
폐지의 상소가 빗발쳤다. 요승 보우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다 못해 성균관 유생들이 성균관을 비우는 집단 시위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문정왕후는 불교 중흥 정책을 그만두지 않았으며, 그녀의 지원을 받은 보우는 도대선사가 되었다.
그러나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성난 유생들은 회암사로 몰려가 불상의 목을 자르고 절을 불질러 버렸다.
명종 역시 문정왕후의 불교를 중흥하라는 유언을 무시하고 깊은 산 절로 도망친 보우를 체포하였다. 전국에서 보우를
처형하라는 여론이 빗발치기 시작하였고, 율곡 이이 등이 이를 만류하였으나, 명종은 보우를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보우는 이곳에서 험악한 여론을 살피던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결국 살해당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문정왕후에 대한 보충 자료 : 여기를 clcik!
사진 및 메모
학창시절 무던히도 많이 다닌 태릉인데...
그때는 태릉이 누구의 능인지는 커녕 능이 있는 줄도 몰랐고 주변에는 가보지도 않았다.
그저 배밭에서 미팅하고 공원에서 막걸리 마시고 노는 곳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요번에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기념으로 왕릉을 순례하면서
가보니 이제 내눈에는 공원이고 배밭이고는 눈에 띄이지 않고
그저 거대한 왕릉만 보인다.
아는 만큼 보이고 관심을 가지고 안가지고에 따라 이렇게 다른 것이다.
문정왕후릉인 태릉과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의 능인 강릉이 같은 능역에 있다.
그런데 왕릉보다 왕후릉이 훨씬 크고 웅장하다.
그리고 강릉은 일반에 공개되지도 않고 있다.
태릉도 능상까지 올라가려면 관리사무소에 허가를 받아야 한다.
조선왕릉순례기를 쓰고 있다고 하니 특별 허가를 해준다.
왕릉 근무자를 동행하고
능상 위까지 올라가서 사진을 찍을수 있었다.
연산군~명종 조의 왕실 가계도
문정왕후는 중종의 2번째 계비로써 어린 명종을 대신하여
친정쪽 파평윤문 (소윤쪽)과 함께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홍살문에서 참도를 따라 정자각까지.. 엄청 넓은 능역이다.
요즘은 태릉을 찾는 시민들의 좋은 휴식터이다.
정자각도 규모가 크다
정자각 처마의 잡상들 (삼장법사, 손오공...),
우측은 수복방과 비각
능비 "조선국 문정왕후 태릉"
널찍한 능역에 저멀리 산까지 트인 전경...
능은 누가 보아도 명당이다.
그런데도 문정왕후의 후예는 아들 명종에서 왕통이 끝난다.
그러고 보면 명당이라는 것도 별 효험이 없는건가?
(조선 왕들이 모두 천하의 명당을 골라서 섰을테지만 글쎄...)
앞의 가계도에서 보듯이 명종의 독자인 순회세자는 문정왕후가 살아있을때 요절하고 만다.
이후 왕통은 왕후가 아닌 중종의 후궁인 창빈안씨의 소생인
덕흥대원군의 아들 선조로 이어진다.
그리고 조선조는 우유부단하고 유약한 성격의 선조와
그 후손들에 의해 서서히 쇠락의 길을 간다. (임진왜란도 겪고)
또 그 이후 다시한번 무수리의 후손이 조선후대의 왕통을 이어가고...
그 당시에 혹시 문정왕후의 후손이 왕통을 이어갔다면 더 나았을까?
좀 권력욕이 강해서 험한일도 많이 했겠지만 (태종, 세조와 같이)
지적인 능력이 뛰어나고(역사서에 기록됨),
남성사회에서도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리더십이 있던 여장부의
후손들이 조선의 왕통을 이어갔으면 혹시??
그냥 해본 생각이다.
하기야 지금은 왕조시대가 아니니 그당시의 왕이 누구였건 별 차이야 있었겠냐만...
왕후릉이지만 어느 왕릉보다고 웅장하고 장대한 석물과 능상의 규모
사후에도 이 정도의 능을 꾸며줄 정도이면
당시 문정왕후의 위세가 어느정도인지가 짐작되고도 남는다.
문정왕후릉에는 세조와 세종대왕의 능에도 없는 병풍석까지 둘렀다.
(병풍석이니 난간석이니 설명하자면 많지만 앞편에서 몇번 다루었으니 생략한다)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을 의미하는 방위신을 새겼고, 그 주위를 난간석으로 다시 보호하였다.
병풍석 위의 만석(滿石) 중앙에는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원래 십이간지가 문자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병풍석을 없애고 신상을 대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등장한 것인데,
여기에서는 신상과 문자가 함께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능상 앞의 상계(초계)에는 양석,호석, 혼유석과 망주석을 배치하고
중계에는 문인석, 마석과 장명등을
하계에는 무인석과 마석을 매치한다.
문무의 구별이 분명했던 시대이다.
장대한 문인석
태릉의 문무인석은 높이가 260cm로 조선왕릉의 문무인석 중에서 아주 큰 편이다.
모습은 목이 짧고 얼굴이 상대적으로 큰 형태이다.
문석인의 모습은 관복에 과거 급제자가 홍패를 받을 때 착용하는 복두를 쓴 공복차림을 하고 있다.
무석인은 갑옷에 투구를 쓴 위용 넘치는 무장의 모습이다.
그러나 얼굴 생김새는 아무래도 좀 덜 생겼다.
양석과 호석..
조각이 섬세하다. 호석은 긴 꼬리까지
무석인의 크기를 보라. 내 키가 거의 180cm인데..
거대한 조각품이다.
조선중기를 지나면 실물크기의 작은 문무인석이 많이 나타난다...
8각 장명등과 망주석
망주석의 세호
이 때는 초기의 구멍뚤린 귀모양에서
후기의 구멍 없는 세호로 변하기 전인 중간단계 쯤의 모습이다.
동물 형상같은 조각에다 구멍이 뚤려있는...
(세호 이야기는 또 길다. 전편을 참조)
참고 : 조선시대의 내명부 품계
첫댓글 역시 우리 종친들에겐 인문학적 dna가. 누가 이 글솜씨를 평생 자연과학자의 것으로 볼까요? 게다가 직접 발로 뛰어 쓴 글이라 더욱 와 닿습니다.
조선왕릉 순례 잘하고 갑니다.
우리 조상들의 뿌리는 대단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