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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년 음력 11월 16일(양력 12월 21일) – 1898년 음력 2월 2일(양력 2월
22일)은 조선 말기의 왕족이자 정치가, 화가이며 대한제국의 황족, 추존 왕이다. 이름은 이하응(李昰應)이다. 부인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남연군(원래는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후에 양자 입적)과 군부인 민씨의 넷째 아들이며, 고종의 친아버지이다. 1863년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하며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고,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침략적 자세에 대하여 척왜강경정책으로 대응하였다.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해동거사(海東居士)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1907년 10월 1일 대원왕(大院王)으로 추봉되었고, 헌의(獻懿)를 호로 받아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 되었다.
출생과 소년기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1820년 음력 11월 16일(양력 12월 21일) 종로방 안국동(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에서 출생하였다. 8세에 맏형 흥녕군 이창응(興寧君 李昌應)의 사망에 이어 12세에 어머니 군부인 여흥 민씨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아버지 남연군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인척인 인연으로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가 글과 그림을 수학하기도 했다. 17세 때에는 아버지 남연군을 여의었다. 일찍 고아가 되었으나 13세에 외가의 먼 일족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와 결혼하였다.
청년기 1841년 (헌종 7년) 흥선정(興宣正)에 봉작되었다가 흥선도정(興宣都正)을 거쳐 1843년 (헌종 9년)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1846년 수릉천장도감(緩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이 된 후 도감 (都監)에 참여한 공로로 가자(加資)되었으며, 비변사 당상을 거쳐 1847년(헌종 13년) 종친부 유사당상 (有司堂上)이 되었다. 1847년 종친부(宗親府)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직책인 유사당상(有司堂上)으로 재직할 때, 선파인(璿派人 전주 이씨 중에서 왕실에서 갈려 나온 파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신역 면제를 관장하는 등 종친부의 권한 확대를 추진하였다. 종친부의 권한확대를 위해 흥선군은 당시의 세도가인 안동 김씨 세력과 정치적 거래를 시도하였다. 종친부 유사당상 재직 중 그는 왕실의 족보 편찬을 종친부에서 간행 할 수 있도록 추진하였다.
파락호 생활
쌀장수 이천일과의 우정 안동김씨의 왕족 숙청을 피해 건달행세를 해야 했던 비참한 시절인 파락호 시절에 흥선군은 춥고 배고팠다. 심지어는 홍종의 집의에게 음식을 얻으러 갔다가 훨씬 신분이 낮은 하인에게 얻어맞기까지 했다. 하지만 뛰어난 통찰력으로 건달행세 속에 가려진 정치적 재능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쌀장수 이천일은 다친 흥선군을 치료해주었고, 대원군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였다. 이천일은 흥선대원군에게 “대감은 어찌해서 누한 곳에 행차를 하셨습니까”하고 물었고, 대원군은 “다른 이유가 없고 몇 년 전부터 내가 그대의 은혜를 입어 왔으나 지금 세모를 당하니 추운 걸기(乞氣)에 살아갈 길이 막연하여 염치불구하고 찾아왔네”하고 대답했다. 이천일은“형편이 그러시다면 물건 보내라는 패지 (牌紙 쪽지) 한 장이면 족하실텐데 대감께서 예까지 친림하셨습니까. 송구할 따름입니다. 염려하지 마시고 돌아가십시오. 내일 아침 일찍 조처하여 보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황송해 했다. 대원군은 집에 돌아왔으나 저녁을 굶은 터라 추위가 더욱 혹독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천일은 약속대로 이튿날 아침 일찍이 물자를 보내왔다. 흥선군이 조반 후에 서강의 이천일에게서 보내온 목록을 보니 쌀 20섬, 돈 천꾸러미, 장작나무 50바리, 정육 100근, 서초(西草, 평안도 에서 나는 담배) 30근이나 되었다. 이를 받은 흥선군은 ‘이 은혜를 어찌 갚을꼬’ 라고 생각하면서 ‘만약에 하늘이 도와 내가 집권자가 된다면 제일 먼저 그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하였다.
이천일의 은혜를 갚다 흥선군이 국태공이 되었고,1863년 12월 8일 철종이 갑자기 승하하시니 운현궁에 왕기가 서렸다. 아들 고종 임금이 되고 흥선군이 대원군으로 뜬 것이다. 즉 막중한 실세가 된 것이다. 즉위식 날 대원군이 자신에게 자비를 베푼 서강의 쌀장수 이천일을 특별히 부르니 천일이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날듯이 달려와 운현궁으로 들어섰다. 대원군이 친히 손을 잡고 인도해 갔으니 천일은 떨리고 황공하여 나아가지 못하고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몸을 굽히고 있었다. 그 두터운 은혜를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려웠다. 이 때 대원군의 부인인 여흥 부대부인이 남편에게 잘해준 이천일이 온 것을 알고 궁중의 잔칫상을 내어오게 하니 천일은 손이 떨려 진수 성찬을 다 먹을 수가 없었다. 이에 대원군이 친히 천일의 손을 잡아 상에 앉게 한 뒤 큰 은반에 홍로주(紅露酒)를 가득 부어주니 천일에게 그렇게 큰 영광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천일은 대원군 집정후 선혜청 고직(庫直)에 임명되었다.
이장렴을 자기 사람으로 얻다 흥선군(이하응)이 기녀 춘홍의 집 드나들던 어느날 금군병장 이장렴과 시비가 붙어졌다. 이장렴이 빰을 때리면서 한 나라의 종친이 창가(娼家)의 그러니까 자신의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천한 창기에게 외상술이나 먹어서 되겠느냐 하며 호통을 외쳤다. 후일 대원군이 된 이하응(흥선군)은 이장렴을 운현궁 으로 불러 "그대는 아직도 내 뺨을 때릴 수 있겠느냐?"하고 묻자 이장렴은 당당하게 "대원위 대감께서 기녀의 집에 드나드실 때처럼 행동하신다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훌륭한 인재를 얻게 되었다며 술상을 차리게 했다. 한편 도정궁 이하전 이 사사된 뒤 그의 소행으로 알고 운현궁에 자객으로 침투했던 이상지 역시 그를 돕게 된다.
집권 직전 이후 사복시 제조, 오위도충부 도총관 등을 지냈다. 1853년(철종 4년)에는 궁궐에 무상으로 출입하지 않는다하여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왕족들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였다. 풍수지리를 굳게 믿어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묘를 충남 예산으로 옮기고 때를 기다리기도 하였다. 흥선군은 난과 그림을 그려 양반가에 매각하기도 하였다. 난을 잘 치기로 유명하였으나 석파란으로 알려진 난초화를 계속 그리자 그의 난초값은 하락했다. 흥선군의 집은 뒤에 덕성여대가 들어선 곳 근처의 큰 기와집이었다. 따라서 그의 가계는 어느정도 부유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가 전 국민의 1% 안에 드는 부자였음을 증명한다는 시각까지도 있다. 충청도 화양동의 만동묘에 갔을 때는 그를 따라온 사람들이 그를 부액(부축)하려 하자 화양동서원의 한 유사가 그것을 말리며 나무라 하였다. 한편 대원군은 이호준과도 교분을 쌓게 되었다. 이호준은 첩에게만 아들 이윤용이 있었고 정실부인 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이완용을 양자로 맞이하였다. 흥선군은 이들 형제를 신임하여 이윤용 에게 자신의 첩이 낳은 서녀를 시집보내 사위로 삼았다. 훗날 이완용, 이윤용 형제는 친일파가 되는데, 그 빌미를 흥선군이 만들어준 셈이었다. 흥선군은 이호준을 통해 조성하와 그의 사촌동생 조영하와도 접촉하였는데, 조성하와 조영하는 이하전이 사사된 후 왕위계승감을 찾지 못하던 조대비에게 그를 소개하고, 흥선군은 그들을 통해 종친이라는 명분으로 조대비에게 접근하게 된다. 철종이 언제 사망할까 불확실하므로 흥선군은 궁중의 환관과 궁녀를 포섭해서 정보를 알아냈고 안동 김씨 가문에도 자신의 세력을 만들기도 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김병학은 자기 딸을 고종의 비로 삼기로 흥선군과 밀약을 맺었다고도 한다. 철종이 후사없이 시름 시름 앓게 되면서 후사 논의가 진행됐고, 그 중 김홍근은 흥선군을 추대하자는 주장도 했다. 흥선군이 어리석은 인물이라는 계산에서였으나, 그의 파락호 행실과 그의 나이 등 여러가지 조건에 걸려 반대에 부딛쳐 묵살당하였다. 김병기(金炳冀)는 그에게 야심이 있는가를 시험하려 하였으나, 그는 일부러 어리석음을 가장하여 그에게 장남 이재면의 관직을 청탁하기도 했다. 고의로 파락호 생활을 하며 천하장안으로 알려진 천희연, 하정일, 안필주, 장순규 등을 측근으로 삼아 가까이 했으며, 이상지, 이경하 등도 포섭하여 측근으로 삼았다. 흥선군만이 왕실 족보상 왕위 계승에 가장 근접한 인물은 아니었기에, 왕위를 계승하려면 능력을 보여야 했고, 정치적 작업도 해둘 필요가 있었다.
생애 중기
고종의 즉위와 제1차 집권 초기 철종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후사 결정권을 가지고 있던 조대비와 밀계(密計)가 있어 자신의 차남인 명복(이재황)을 익종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하고, 익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시킨 뒤 자신은 대원군(大院君)이 되어 정책 결정권을 부여 받았다. 1863년 12월 아들인 조종이 즉위하자 조대비가 수령청정을 하였으나 곧 흥선대원군에게 고종을 보필하라며 형식상으로 수령청정을 행하니 이때부터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시작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 일문을 축출하고 문벌과 사색당파를 배제한 인사등용을 하였으며, 영의정에 조두순, 좌의정에 김병학, 훈련대장 겸 포도대장에 이경하를 임명했다. 한편 집권 후 안동 김씨의 영수격이며 순원왕후의 동기간인 영의정 김좌근이 사임하였다. 1864년 판서와 좌찬성을 역임한 김병기는 광주부유수로 좌천되었다. 이후 김병기(金炳冀) 등 일부 안동김씨 세력을 축출하기도 했지만, 안동김씨를 중심으로 한 권력층의 명문 양반가를 일부 포섭하면서 조대비와의 동맹관계 및 김병학(金炳學)·김병국(金炳國) 등 안동김씨 일부 세력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조선 500년의 금기를 깨고 종친들을 요직에 등용하였으며, 서얼의 관직 진출도 확대했다. 조선 정조 사후 확정된 노론의 일당 독재도 깨트리고, 소외되어 있던 다른 당파를 이전보다 고르게 등용했다. 그는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하며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또한 그 동안 세도를 누려온 안동 김씨일족들을 대부분 몰아내고, 파벌과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역량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인사 행정을 펴나가려 노력했다. 대원군은 타락하고 훼손된 낡은 왕조를 재가동시키고자 했지만, 왕조에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한편 김좌근 등은 그에게 왕의 아버지로서 대군의 예에 준하는 예우를 한 뒤 정치참여는 불가하게 하였으나, 흥선군 스스로 정승들이 타는 사인교를 타고 예우는 받지 않겠다고 함으로서 실무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공식 호칭은 대원군으로 최초로 살아있는 대원군이므로 존봉 문제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사적인 호칭으로는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 대원위합하(閤下)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집권 전, 화양동 서원에 갔다가 모욕당한 일을 기억하던 흥선대원군은 자신을 모욕한 유사를 잡아 죽였다. 이때 화양동서원의 고지기를 불러 "내가 지금 화양동 서원에 가도 부액을 못하게 하겠느냐?"고 추궁하였으나 고지기는 그 자리에 다시 와도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대원군은 그 고지식한 고지기는 살려주었다. 한편 안동 김씨 가문에 빼앗겼던 세력을 되찾아 오고자 했던 조대비는 고종의 비를 자신의 친정 일가인 조면호의 딸로 정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역시 흥선대원군의 반대로 취소해야 했다.
개혁정책
집권 초기 고종이 즉위하자 마자 불굴의 투지를 지닌 오만하고 개성이 강한 그는 왕의 교서 대신 '대원위분부' (大院位分付)라고 시작하는 공문을 전국에 발송하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은 이경하(李景夏)를 신뢰하여 집권 직후 이경하를 포도대장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자신의 측근이던 천희연, 하정일, 안필주, 장순규 등 세칭 천하장안으로 불리던 인사들을 배치하여 정보 탐지 업무를 수행하게 하였고, 안기영 등을 신임하였다. 화서학파를 이룬 노론계열 인사 이항로 역시 대원군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항로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를 반대하다가, 철폐령 이후 대원군에 비판적인 입장으로 돌아섰고, 이항로의 제자 최익현은 민씨 척족과 손잡고 대원군 타도를 자임하게 된다. 자신의 집권을 도왔던 조성하와 조영하 역시 초기에는 신임 하였으나 섭정을 겸하면서 조씨 일족을 요직에서 배제하여 소원해졌다. 이들 역시 민씨 척족과 손잡고 대원군 타도에 힘을 기울이게 된다. 또한 실학에 관심이 있었고, 노론 외에 노론 실학자와 남인, 소론과 300년간 정권에서 배제 당한 북인계 인사들도 중용하여 거국내각을 구성하였다. 1863년 12월 김좌근과 안동김씨 척신들은 흥선대원군에게 대군에 준하는 예로써 가마를 타고 보국숭록대부 이상은 시생을 이하는 소인으로 칭한다 하여 대원군을 우대하되 현실정치에는 나서지 못하도록 제약을 하려 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특혜를 거부하고 일반 정승들이 타는 사인교를 타겠다고 고집하여, 정권불간섭을 전제로 한 우대를 거절하였다. 이후 그의 사저는 왕이 출생한 곳으로서 궁궐로 불리게 됨에 따라 운현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당시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이 점점 노골화되었으나 대원군은 이에 응하지 않고 쇄국정책으로 맞섰다. 1866년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면서 횡포를 부리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워 없앴고, 그 직후 프랑스(1866년), 미국(1871년) 등과 강화도에서 군사 분쟁(프랑스 - 병인양요, 미국 - 신미양요)이 일어났으나 대원군은 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척화비를 세웠다. 한편 양요가 일어났을 때 한양에서 도주한 양반은 관리 임용에서 불이익을 주기도 하였다. 1869년 일본이 메이지 유신과 왕정 복고를 알리는 국서를 보내왔으나 이 또한 거절하였다. 한편 증기선이었던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말미암아 대동강에 가라앉았다는 말을 들은 흥선대원군은 그것을 건져다가 한강에 옮겨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증기선 복제 계획은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김기두 등 기술자를 시켜 국가의 경비 수십만 냥을 들이고, 조선 정부에서 보유한 동과 철을 거의 다 들여 1876년 무렵에 제너럴셔먼호와 똑같은 형태의 선박을 만드는 데 성공했고, 증기기관의 연료로는 목탄을 썼다. 그러나 배는 움직이지 않았고, 고친 뒤에도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그러자 증기선을 만들든지 구하든지 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관제 정비와 제도 개혁 고종의 즉위 교서에서 밝힌 바 ‘모두 더불어 유신(維新)을 단행’해야 한다는 요구와 조대비가 형식상의 수렴청정을 하며 흥선대원군에게 힘을 실어주자, 그는 곧바로 개혁에 착수한다. 우선 세도정치로 인해 약해진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고, 당쟁의 원인이며 국가 재정에 피해를 주던 서원도 47개소만 남겨 두고 대폭 정리하였다. 서원 정리는 착취로 고통 받던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당파(黨派)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으며, 의정부의 기능을 부활시키고, 조선 후기의 상설 기관이던 비변사를 완전 폐지하고 삼군부를 두어 군사 업무를 맡게 하여 정권과 군권을 분리하는 등 군제를 개혁하였다. 법치 질서의 재정비를 위해서도 노력하였고, 세도정치의 혁파와 탐관오리 일소에 노력하였으며, 지방 토호들의 백성에 대한 학대를 엄금하였다. 또한 《대전회통, 육전조례(六典條例)》등과 《삼반예식(三班禮式), <양전편고, 오례편고(五禮便攷)》및 《종부조례(宗府條例)》 등의 법전을 편수하여 정치 기강을 확립하고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를 완비하려 했으며, 의복제도를 개량하는 등 사치를 엄금하였다. 1867년(고종 4년)에는 폐단이 많았던 환곡제도를 개혁하고 사창제를 실시하여 국가 재정 확보와 민심 안정을 꾀했다. 향리에 대한 통제도 강화하였고, 조세횡령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근무연한에 따라 서리들을 입역(立役)하게 했다. 지방관직에 대한 매관매직을 금지하였고, 유명무실화 된 암행어사를 다시 파견하여 지방관들의 비리행위를 조사하였고, 지방관의 근무성적을 평가하여 행정의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 반대세력의 억제를 방지하기 위해 수령의 구임(久任)을 강조하였고, 수령에 대한 고과(考課)를 엄격히 하고 수령 재임시의 부정을 살피기 위해 해유문기(解由文記)의 작성도 직접 보고 받는 등 철저하게 실시했다. 5척 단신인 흥선대원군은 기강을 확립한다고 길게 늘어진 양반들의 도포 자락을 짧게 자르게 하였는데, 그 주된 이유는 도포 자락에 뇌물을 숨겨서 왕래한다고 해서였다. 긴 담뱃대도 대를 짧게 잘라 피우게 하였으며 긴 갓도 줄이는 등 의식 개혁 운동을 시행하였다. 신복룡의 견해에 따르면, 대원군의 개혁정책은 우선 중화사상의 탈피와 이를 통한 자주 의지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둘째로 척신의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약해진 왕권의 강화이며, 셋째로 안민과 국제적 공존을 위한 쇄국 정책을 높이 평가하였다. 한편 이러한 개혁정책은 홍경래의 난과 1862년 진주민란으로 피폐해진 민심의 환영을 받기도 했다.
경복궁 중건 경복궁의 중건은 헌종 때 수리할 것을 계획했으나 재정이 모자라 그만두었다. 대원군은 선왕의 뜻을 계승한다는 구실을 내걸고 간언을 듣지 않고 공사를 서둘렀는데 필요한 기금을 마련하고자 원남전을 강제 징수하였고, 대장군 이경하에게 감독을 맡기고 세금을 인상하였으며 결두세라는 특별 세금을 부과하고 장정들을 징집하여 매일 수만 명을 작업에 동원했다. 또한 충꾼과 기녀를 모집하여 인부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열었다. 경복궁을 중건하던 3월에 방화로 추정 되는 불이 나 경복궁 중건에 쓸 재목이 모두 타버리자 사람들이 놀라 공사를 중지하자고 건의하였으나 대원군은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않고 더욱더 재목을 채집할 것을 요구하여 공사를 독촉하였다. 그리고 원납전이라는 강제 기부금을 백성들에게 징수하고 도성 4대문을 통과할 때 통행료인 문세를 받았다. 또한 다시 당백전, 원납전 등을 주조하여 공사비를 조달, 동원했다. 재목이 부족하자 또 각처의 무덤가에 있는 나무까지 벌채하고는 "이것은 국가의 성스러운 일이니 그대 집안 선대가 영험이 있다면 필시 즐겨 하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하였다. 공사비는 8천만 냥이었다고 한다.
양반 세금부과 및 국방력 정비 경복궁 중건으로 소모된 재정을 회복하기 위하여 호포제를 실시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였다. 종래는 상민 들에게만 부과하였으나 양반에게까지 확대해서 징수한 것이다. 이로 인해 양반들의 불평불만이 대단하였다. 그러나 양반들의 반발에 꺾이지 않고, 계급 여하를 막론하고 1호당 2냥씩을 균일세로 부담케 하여 그 실시를 강행했다. 양반과 상민을 가릴 것 없이 군포를 징수하자는 주장은 흥선대원군 집권 이전 1600년 대부터 노론 실학파나 일부 남인 계열이 주장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양반의 존엄을 해친다는 반대 때문에 묵살당하였고, 흥선대원군은 200여 년 만에 이를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대원군은 김기두(金箕斗)와 강윤(姜潤)에게 지시하여 군용품으로 포군(砲軍)용 철모· 목탄증기갑함(木炭蒸汽甲艦), 수뢰포(水雷砲) 등의 군사 무기를 개발, 제조하게 했다. 그리고 서양 군대의 총탄을 막기 위해 솜으로 제조한 배갑(背甲)을 제조하였다. 그러나 무겁고 두꺼운 배갑은 쉽게 벗을수 없어 조선병사에게 불리한 점으로 작용하였다. 1860년대 말 대원군은 학우조비선(鶴羽造飛船) 이라는 이름으로 비행선을 개발하게 하였다. 학우조비선은 학과 두루미의 깃털을 모아 아교로 연결하여 배에 붙인 것으로, 배가 포탄에 맞더라도 물에 가라앉지 않게 할 목적으로 개발하였다. 그러나 배가 물에 닿으면서 아교가 모두 녹아 조비선 개발은 실패하고 말았다.
토지 개혁 사상적으로 중농적 실학 사상의 영향을 받은 흥선대원군은 위민정치의 부흥을 위해서는 문란한 삼정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위민정치의 구체적 실현으로써 그는 문란한 삼정을 바로잡고 안정을 꾀하는 획기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토지대장에 올라 있지 않은 땅을 찾아내고 지역 토호와 유지들의 토지 겸병을 금지하였는가 하면, 토지조사를 통해 부분적으로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전정을 바로잡고자 했다. 지방 수령과 토호의 농간이 가장 심했던 환곡제는 사창제로 개혁하여 환곡을 합리적으로 운영하도록 하였다. 또한 감찰의 목적에서 타락한 도장(導掌)·궁차(宮差) 등의 파견을 금지하고, 신설 궁방에 토지 지급을 폐지하여 궁방전을 억제하였다.
서원 정리와 서원 철폐령 흥선대원군은 유교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원이 당쟁과 연계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등 병폐가 잇따르자 집권 직후 서원 철폐령을 내렸다. 서원 철폐령으로 도산서원과 소수서원 등 전국에서 47개의 서원을 제외한 8백여 개의 서원이 철폐되었다. 서원 철폐는 지방 유생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으나 흥선대원군은 "공자가 다시 살아나서 나를 위협한다 해도 이 정책은 끝까지 밀고 나가겠으니 그리 알라."며 강행하였다. 서원 철폐령을 취소해 달라는 전국 유림들의 집단 상경집회가 있었으나 이때마다 대원군은 유림들의 집회를 강제 진압하고, 유림들을 강제로 노량진 밖으로 축출 함으로서 유학자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대원군을 지지하던 이항로 등도 이때부터 대원군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이항로의 문인 최익현은 민씨 정권과 손잡고 대원군을 탄핵하기에 이른다.
통상수교 거부 정책 고종 1년 2월 28일에 아라사에서 사람 몇 명이 두만강 얼음을 타고 함경도로 내려와 통상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오자 거절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권》 흥선대원군은 국경을 맞댄 아라사의 남하에 대비하기 위해 불란서 천주교 선교사들과 접촉해 아라사를 막아준다면 천주교 포교를 인정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그러나 일이 틀어졌는지 천주교 신자를 모두 잡아들여 사형에 처한다. 이 사건이 병인박해다. 이에 관해 김병학, 김병국 형제가 흥선대원군을 압박해 흥선대원군을 정치적으로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학설이 있다. 영국 상선과 독일 상인 오페르트 등이 충청동 연안에 와서 각기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거절하였다. 오페르트는 그 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덕산에 있는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여 부장품을 훔쳐가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대원군을 더욱 분노케 하여 천주교 박해와 쇄국책을 강화하는 원인이 되었다. 대원군의 통상 거부 의지는 보다 강경해졌다. 그는 서양인을 오랑캐라 하고 배척하면서 각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척화비를 세웠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병인양요가 발생하기 직전,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평양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통상을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재물을 약탈하다가 평양 군민과 충돌을 일으켜서 배가 침몰하여 선원들의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1871년 미국은 셔먼 호 사건의 책임을 빌미 삼아 대원군을 굴복시키고 조선 통상을 강요 하고자, 5척의 군함을 보내 강화도를 공격하는 신미양요를 일으킨다. 1871년 4월 미국 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와 덕진진(德津鎭)과 광성보(廣城堡)를 점령하자, 흥선대원군은 항전을 주장하며 한성부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결사항전을 준비했다. 조선 조정에서 통상을 거부하고 외교교섭에 응하지 않고 전투가 장기화되자 미국 함대는 71년 5월 철수했다. 양요들을 물리친 흥선대원군은 서양 열강에 대한 경계심이 더욱 굳어졌을 뿐 아니라, 이를 격퇴하는데 자신감을 갖게 되었으며,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한층 강화 하였다. 그러나 척화정책을 추진한다고 해도 척화비는 세울 필요는 없었다. 척화비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할 때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간결한 문구가 전부 였다. 조선은 이보다 훨씬 복잡한 포고령도 전국 방방 곳곳에 배포할 수 있는 수준의 행정망을 갖고 있었다. 또한 척화를 둘러싸고 국민의 여론이 아직 크게 잘라진 것도 아니었다. 서양과 통교하자는 사람은 당시 조선 전국을 뒤져도 얼마 되지 않았을 시대였다. 진짜 목적은 기왕이면 척화에 대한 국민 의식을 고양하고, 결의를 다지기 위함 이었다. 임용환에 의하면 대원군은 척화라는 이슈를 국가적 이벤트로 만든 것이라는 것이다. 척화비는 전국 각지에 세워졌으나, 이때 세운 척화비는 흥선대원군 실각 (1873년) 직후와 한일 합방(1910년) 직후에 파괴·매장되었다. 양요들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내정개혁 정치와 쇄국 정치는 결과적으로 많은 반발을 일으켜 며느리인 명성황후와 유림 세력의 담합을 유도하게 된다. 명성황후는 한편으로 대원군에 의해 숙청되었던 안동 김씨 및 풍양 조씨 등의 세도가 및 노론 세력과 손잡고 실력을 비밀리에 키운다.
종교 탄압
천주교 탄압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대하여 크게 반감이 있지 않았다. 그는 베르뇌 주교(천주교 조선교구장) 등의 선교사를 통해 남하 정책을 실시하는 제정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천주교에 대해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리하여 신자 남종삼과 수차 회동하여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천주교 신부들의 힘을 빌리려 했으나, 불행히도 그 계획에 차질이 생겨 불신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때마침 청나라에서의 천주교 탄압 소식과 이전부터 싹텄던 위기의식에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는 의도가 가미되어 정책을 바꾸게 된다. 그리하여 흥선대원군의 천주교에 대한 정책은 우호정책에서 강경 정책으로 바뀐다. 우선 선교사들은 조선의 정치에 개입하고 싶어하지 않아 이용가치가 없었고, 지배 계급에게 '천당과 지옥을 주장하며 혹세무민하는 종교’로 해석되던 천주교회가 이미 1831년 천주교 조선교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생길 정도로 성장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있었으며, 대외적으로 ‘종교를 앞세워 열강 세력이 침투하는’문제에 대한 경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였다. 결국 1866년 남종상 등을 비롯, 8천여 명 가까운 천주교 신자들이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승 등 전국 각지에서 처형당했다.(→병인박해) 1866년부터 처형당한 천주교인의 수는 1~2만 명을 넘는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에 들어와 포교하던 프랑스인 천주교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화를 면한 프랑서 천주교회 사제 리델은 청나라로 탈출하여 베이징 주재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전했다. 박해는 1872년지 이어졌다. 프랑스는 조선정부의 프랑스의 천주교 선교사 살해의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로즈(Roze)) 제독이 이끄는 함대를 파견하였다. 물론 영국, 프랑스등의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확장으로 세력을 넒히던 수단이 기독교(종교), 군대(폭력), 상인(자본) 이었음을 생각한다면, 병인양요는 조선의 기독교 박해를 핑계로 삼아 침략한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보복 원정에 나선 로즈 제독은 함대 7척과 군사 600명을 이끌고 강화도를 침략한 뒤 서울근교 서강까지 진출했다. 그해 11월 프랑스 해군 160명은 정족산성을 공격하려다가 60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손실을 입었는데,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은 피해 규모가 사망 1명, 부상 4명에 불과했다. 조선 군대와의 교전에서 큰 패배를 경험한 프랑스군은 사기가 크게 떨어졌으며, 로즈 사령관은 조선 침공의 무모함을 깨닫고 철군했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국방을 더욱 굳게 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동학 탄압 널리 전파되던 동학에 대해서도 1864년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여 군문 효수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의 일부 지도자들과도 연결을 취하기도 했다. 불교에 대해서는 별다른 탄압이 없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남 1873년, 최익현 등의 보수적 유학자들을 앞세운 민비와 고종의 견제로 실각하고, 아들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다. 이후 흥선대원군이 출입하던 전용문은 폐쇄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은 한동안 운현궁에 은둔하였다. 그의 실각 이후 조선은 쇄국정책을 버리고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계기로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대원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민씨 집안은 권력을 주체하지 못했다. 권력남용과 함께 부정 축재가 심하였고, 일가가 권력을 독식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점점 대원군 섭정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대원군은 세도정치의 반의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대원군과 안동 김씨 김병학의 밀월 관계는 쉽게 잊어버리고, 대원군이 안동 김씨들에게 천대와 굴욕을 당하고 살았으며, 세도정치의 재발을 염려해서 가난하고 몰락한 집안 출신인 명성황후 민씨를 며느리로 간택했다는 이야기만이 대중 속으로 파고들게 되었다. 한편 1874년 민승호 폭사의 배후로 지목되었으며 1876년 이준용 추대 음모에서 그 배후로 여겨지게 되나 구체적으로 증명된 것은 없다. 1881년 9월 13일 대원군 계열의 인사였던 안기영 등의 주도로 흥선대원군의 서장자 이재선을 옹립하려는 이재선 추대 음모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재선 추대 음모는 내부의 고변으로 실패하고 안기영, 이재선 등은 처형당했다. 이재선의 모역 사건에는 흥선대원군이 배후로 관련되었으나, 국왕의 생부라는 이유로 언급하지 않고 불문율에 붙여졌다.
민씨세도 용인과 권력투쟁 세도정치를 거부했다는 주장과는 달리 대원군은 세도정치를 거부하지 않았다. 단지 세도가의 대상을 안동 김씨나 풍양조씨에서 자신의 처가인 여흥민씨로 바꾸었을 뿐이고, 그 여흥민씨 세력이 유림과 손잡고 대원군을 축출(1874년)하기 시작하면서 민씨가와 대원군의 협력관계가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임용학에 의하면 대원군은 세도정치를 거부하지 않았다. 대상을 바꾸었을 뿐이라고 보았다. 대원군이 (집안에 재산이 있던 왕족)으로 가난한 파락호가 아니었듯이, 명성황후 민씨의 집안도 (아버지를 일찍 여의기는 했지만) 완전히 몰락한 양반가가 아니었다. 명성황후가 여덟 살 때 아버지 민치록(閔致祿)이 사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흥 민씨가는 조선 시대에 왕비를 세 번이나 배출한 명문가였고, 명성황후는 그 중에서도 핵심 인물인 민유증의 직계 자손이다. 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 또한 민유증의 5대손인 민치구의 딸이다. 민치록은 아들이 없어 민치구의 아들 민승호를 양자로 삼았다. 명성황후는 시어머니 부대부인 민씨와 언니 동생 뻘의 같은 항렬이며. 민승호와의 인연도 남달랐다. 민씨와 명성황후는 가까운 사이였고, 고종도 어려서 명성황후를 알아서 안국동 이모 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즉 대원군은 철종의 처가인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 자신의 처가로 그 자리를 채운 것이다. 초창기에는 민씨 정권의 세도를 일부 용인했으나, 권력을 독식하려던 민씨 일족이 대원군을 축출하면서 다시 권력을 획득하려는 대원군과 독식하려는 민씨 가문 간의 권력쟁탈전이 발생하였다.
생애 후기
제2차 집권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재집권하였다. 이때 명성황후는 변복을 하고 궁궐을 벗어나 여주로 내려가 은신하였다. 봉기군의 추대로 입궐한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 보고한 뒤 황후가 입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1882년 6월 고종에게 임오군란의 사태수습을 위한 전권을 위임 받자, 이 기회에 정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궁궐에서 도망쳐나간 민비가 죽었다고 공식으로 선포한 후 무위영(武衛營)·장어영(壯禦營)·별기군(別技軍)을 폐지하고 5군영을 복설 했으며,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삼군부를 복설하였다. 그러나 민씨 세력과 내통한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 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자신도 이홍장 일파에게 납치되어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청나라의 텐진으로 압송되어, 1개월 만에 실권하였다. 청나라에 끌려간 흥선대원군은 보정부(保定府)에 감금되었다. 흉선군 (凶鮮君)이라는 멸시와 홀대를 감수하며 견뎌야 했다. 청나라 납치 1882년 7월 12일 한양에 입성한 청나라 장수 오장경·마건충(馬建忠) 등은 군사문제로 회담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에게 "오늘 밤 남양만에서 배를 타고 톈진(天津)에 가서 황제의 유지(諭旨)를 받아야 한다"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거절하자 강제로 보교에 태워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으로 납치해 갔다. 이후 배를 타고 텐진에 도착, 흥선대원군은 4년간 텐진의 보정부(保定府)에 억류되어 생활하였다. 청나라장수 이홍장 등과 국제정세에 대하여 격론을 벌였고 납치 주동자 마건충에게는 "되놈!"이라고 호령하면서 그 기백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황달을 앓기도 했고, 대원군은 그곳에서 난초를 그리며 소일하였다. 난을 치며 분노와 한을 삭이고, 정치적 시련을 예술로 극복 하려 하였다. 난을 잘 쳤던 흥선대원군이기에 중국에서도 그의 난초는 인기가 대단하였다 한다. 1882년 12월 장남 이재면이 방문하여 위로하고, 1883년 3월에 일시 귀국하였다. 다시 그 해 5월에 다시 청나라에 가서 흥선대원군을 봉양하였다. 조선에 체류하고 있을 때, 반대파로부터 그의 작 호를 풍자한 흉선군 (兇宣君)이라는 별명도 붙여졌다. 청나라에서는 흉악한 조선의 폭군이라는 뜻의 흉선군(兇鮮君)이라는 칭호로 그를 비하, 조롱하였다. 1885년 민씨 정권이 친러, 친일 등의 성향을 보이며 청나라를 견제하려 하자,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청나라 정부와 위안스카이 등의 정치적 계산으로 4년 여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민비는 노서아 공사에게 대원군 귀국 반대에 후원해 줄 것을 청하는 밀서를 보내기도 했고, 민영익 등은 대원군의 귀국을 강하게 반대하며 반발하였다. 안동 김씨 출신으로 그 해에 과거에 급제한 신진관료 김명규(金明圭)는 문의관(問議官)으로 텐진(天津)에 가서 대원군의 귀국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되돌아왔다. 그러나 1885년 초 원세개는 대원군의 귀국을 주선한다. 1885년 4월 이재선은 귀국하였고, 1885년 8월 이재면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같은 달 원세개의 주선으로 배를 타고 이재면의 시종을 받고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귀국 후 기생 출신 애첩인 추선의 죽음을 보았고, 이후 운현궁에 칩거하며 재기를 노렸다. 이후 1887년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와 결탁하여 고종을 폐위 시키고 큰 아들 이재면을 옹립하여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이재선과 이재면을 옹립하려던 추대기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흥선대원군은 장손인 이준용을 추대하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준용 추대 시도 역시 수포로 돌아갔다.
제3차 집권 1892년 봄, 운현궁에서 화약이 터지고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이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황현은 명성황후 배후로 지목하였다. 황현은 운현궁의 폭탄 테러 사건을 명성황후가 대원군 일가를 폭살하기 위해 벌인 짓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흥선대원군의 사랑채와 이재면, 이준용 부자의 거처에도 폭약이 장치되어 있었으나 다행히 점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각되었다. 이는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에게 폭약을 보내 일가를 폭사 시켰던 전례에 대한 정치적 보복 극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1893년 그는 동학 농민군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정교는 1893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였다. 1894년 봄 동학농민운동 발생 당시 일부 동학군 지도자와 결탁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전봉준은 대원군과의 연관성을 추궁당하기도 했다. 6월 21일 일본군 혼성여단이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하였다. 정권 회복과 왕조 중흥 방안 마련에 골몰하던 대원군은 “조선의 땅을 한 치도 요구하지 않겠다.”라는 스기무라 후카시 일본 공사관 서기관의 확약을 곧이곧대로 믿고 일본 상인의 호위를 받으며 입궐하였다. 이로써 민씨 세도는 무너졌다. 갑오경장 초기에 대원군과 이준용은 명성황후 폐서에 착수하였다. 6월 22일 흥선대원군은 측근 이원긍을 오토리 일본 공사에게 보내 명성황후 폐서의 취지가 담긴 문건을 제시하고 동의를 요구하였다. 이준용도 24일까지 오토리 공사를 설득하기 위해 일본 공사관을 두 차례 방문하였다. 그러나 스기무라 서기관을 비롯한 일본 공사관 요원들이 강력히 반발했기 때문에 대원군과 이준용의 의도는 좌절 당하였다. 그는 6월 24일 이준용을 별입직에 임명하여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감시를 한층 강화하였다. 1894년 7월 초 갑오개혁 당시 일본의 종용으로 제3차 집권하였다. 흥선대원군이 7월부터 8월까지 달포에 걸쳐 섭정을 하였으나, 일본이 바라는 것과 달리 자신의 정치 소신을 피력하자, 일본은 그에게 은퇴를 강요한다. 1894년 10월 중순 이후 일본 측은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이 항일활동을 전개한 증거들을 가지고 추궁하며 양인에게 공직 사퇴를 종용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고종이 평양의 청장들에게 보낸 밀서를 일본 측이 문제 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대원군의 축출에 동의했었다. 이에 대원군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일본 공사에게 자신이 추진한 항일 운동에 대해 사과하고 손자 이준용의 장래 교육을 부탁하였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대신하여 김홍집 내각을 앞세워 경장사업(更張事業)을 추진했다. 1895년 3월 24일 이준용이 김학우 암살 혐의로 체포되었다. 박영효와 서광범 등은 이준용 역모사건을 이용하여 대원군파를 일소하려는 의도에서 이준용과 그 당여들을 사형에 처하려 하였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이준용을 구하려는 흥선대원군의 절박한 부탁을 받은 이노우에 공사와 각국 영사들이 이준용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고 나서서 결국 이준용은 사형을 면하고 종신 유배형을 받았다.
은퇴와 죽음
명성황후 살해 배후 의혹 1895년 일본 공사로 부임한 미우라 고로와 스리무라 후카시(杉村濬),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등이 명성황후 제거를 모의했는데 이들은 대원군을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대원군은 처음에는 거절하였다. 대원군은 장손 이준용이 교동에 유폐된 이래 불만을 품고 공덕동 별장에 칩거하면서 외출도 하지 않고 있었다. 뒤에 오카모도가 운현궁을 찾아 대원군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비밀리에 일본 공사관을 출입했는데, 유길준은 그가 수시로 일본 영사관을 드나들었다고 지적했다. 명성황후가 살해된 양력 10월 8일을 전후하여 친일적 성향으로 변신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성향에 대해 단지 ‘반일 성향이 아니었을 뿐이다.’라는 주장도 있다. 1895년 가을 그는 일본 영사관을 찾아 일본 공사관 오카모토 류노스케를 만나 도움을 요청한다. 유길준에 의하면 1894년 가을 명성왕후가 개화당(개화파) 모두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몄다가 흥선대원군의 첩보망에 발각되었고, 흥선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10월 8일 명성황후가 암살되자 유길준은 그를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였다.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하였으며 미국인 은사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명성황후를 개화당 살해의 배후로 보았다. 편지 본문에서 유길준은 민비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와 비밀 접촉하고, 1894년 가을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대원군에게 발각되었고 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고 진술하였다.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 암살은 실행되었지만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유길준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사학자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 2대 대통령인 박은식도 그를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였다. 박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주순(趙盾)이 왕을 암살한 것을 비유하여 이와 다를바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감정이 사람의 양심을 가린다며 비판하였다.
말년 1895년말 대원군의 행동을 제약하는 법을 정하여 유폐생활을 강요당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은퇴하여 다시 양주로 가서 은거하다가 1898년 1월 부인 여훙부부인의 죽음을 본 후, 2월 운현궁 별장 아소당에서 죽었다. 그의 장례식에 아들 고종은 불참하였다 한다. 사망 직후 '아소당' 뒤뜰에 묻혔으며, 묘호는 흥원(興園)이라 명명되었다. 만년에는 국태공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그가 죽자 한성부에서는 7일장을 했으나, 고종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순종 즉위 후 1907년 8월 26일 장례원경(掌禮院卿) 이중하(李重夏)가 그를 대원왕으로 추존할 것을 건의하였고, 1907년 10월 1일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이에 따라 헌의대원왕 (獻懿大院王)이라고도 부른다.
사후 1898년 5월 16일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에 부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와 처음 묻혔다가 1908년 1월 30일 경기도 파주군 운천면 대덕동으로 이장되었다. 1907년 왕의 예로써 다시 장례하라는 명이 내려진 이후 흥원의 천봉은 융희(隆熙) 원년(1907년) 11월10일에 시작돼 융희 2년(1908년) 2월1일에 마무리됐다. 1966년 6월 16일 다시 경기도 남양주군 으로 이장되었다.
평가 외모에 대해서는 '형형한 눈빛과 매섭고도 날카로운 하관'이라 한다. 헐버트(H.B Hulbert)는 자신의 저서 《대한제국멸망사》에서 흥선대원군을 이렇게 묘사했다. 헐버트에 의하면 '그는 개성이 강하면서도 오만한 기질을 가진 남자였다. 백성들은 아무리 그를 미워하더라도 한편으로는 항상 그를 존경했다. 그는 아마도 한국의 정치 무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걸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매사에 반항적이었으며, 어떠한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그것이 도덕적인 문제이든 경제적인 문제이든 관계없이 자신이 의도한 바를 관철해 나가는 불굴의 투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민족주의 사가인 박은식은 "대원군은 그 지위가 군주와 같아 대권이 손안에 들고 모든 관료가 그 지휘를 따르면 만백성이 그 위세를 우러러보고 명령하고 행하고 금하면 그쳐 후세의 이윤이나 주공과 같이 될 수도 있다"고 하였으며 "대원군이 섭정함에 주의 사정과 제반 조건이 중흥을 기대 할 수 있었으나 학식의 부족함이 애석하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박은식은 그를 명성황후 살해의 동조자로 보고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작가 김동인은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에서 대원군은 지배계급의 횡포로 인권을 존중 받지 못하는 민중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이해했을 것이라고 이해했다. 소설을 읽다 보면 대원군이 강제추방의 위기에 놓인 민중들을 보면서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며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김동인은 대원군을 호랑이같은 사내대장부이면서도, 안동 김씨의 탄압을 피해 때를 기다리며 참고 견딜줄을 아는 속깊은 사람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대원군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아는 사람은 그를 존경하는 기녀밖에는 없다고 보았다.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대한 평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대해서는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은 폐쇄정책'이라는 평가가 있고, 반면에 '그 당시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 곧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소를 도굴한 사건, 두 차례의 외세 침공 (병인양요, 신미양요),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의 횡포와 문화재 약탈 등 서구열강의 위협 문제는 대원군으로 하여금 열강에 대해 경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그에 따른 자구책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는 또한 대원군이 중시했던 백성을 편안케 하고 조선을 국제사회에서 살아 남게 하려는 국제적 공존을 위한 정책이었다는 평가도 있으며, 이는 신미양요 당시 미국 함대 사령관 로저스에게 보낸 치서(致書)에서도 드러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서원 철폐에 대한 평가 서원을 철폐하려고 7년 여를 기다린 일에 대해서도 '때를 기다릴 줄 알았다'는 평가와 '완고하고 고루하다'는 평가가 엇갈린다.
상반되는 인물평가 한편 정책 전반에 대해서는 쇄국정책을 통해 개항과 개방을 막고 발전의 기회를 차단하였다는 비판이 있다. 쇄국정책을 통해 서구의 문물과 과학기술이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고, 발전과 부흥의 계기를 막았다는 것이다. 또한 '역사를 역행한 시대착오론 자'라는 평가와 '왕권 강화 및 국권 융성을 꾀한 개혁가'라는 평가도 엇갈린다. 그의 개혁정치는 일시적으로 내부적 모순을 완화시키고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모두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시대착오론자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오히려 일본에 줄기차고 거세게 저항했던 흥선대원군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의도적으로 폄하했다는 식민사관의 유산이라는 반론이 있다. 또한 천주교인에 대한 대량학살과 동학 탄압, 서원 정리 과정에서의 유학자 탄압 역시 인권탄압과 종교탄압이라는 비판이 있다. 손자인 순종은 '태황제(고종)가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왕은 황제의 본생부로서 주공이 어린 성왕을 보필했던 일을 떠맡았다. 구족을 돈목하게 하고 사색의 당파를 평등하게 기용하였으며, 요행의 문로를 막고 언론의 통로를 열며 침체된 사람들을 발탁하고 세도가들을 물리쳤다.'고 평가했다. 현재, 대원군에 대한 평가는 병인박해의 피해를 입은 한국 천주교회, 안동 김씨, 여흥 민씨 가문 등 흥선대원군과 관련자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므로 객관적인 평가는 어렵다.
월권행위에 대한 비판 역사가이자 유학자인 황현은 그의 월권행위와 독재를 지목했다. 황현에 의하면 '종전의 세도는 비록 한사람이 주관하고 있을지라도 아들과 조카, 인척들이 종종 한몫을 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간섭하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오직 실각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러내 대원군 때는 혼자 집권했기 때문에, 비록 음관 한 명이나 변방의 장수 한 사람이라도 대원군을 거치지 않고는 명령을 발령할 수가 없었다. 인사발령을 할 때는 언제나 그(대원군)가 미리 후보 명단을 작성하여 자리를 채운 뒤에 올리면 고종은 그것을 따라 낙점만 할 뿐이었다는 것이다.
선정비와 권력남용 대원군 집권시 전국 각지에는 대원군에게 감사하는 선정비도 세워졌다. 여러 고을의 불합리한 관행이나 해묵은 과제를 해결해주고, 자신의 업적을 찬양하는 선정비를 세웠다. 임용한에 의하면 '대원군 자신이 직접 세운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선정비 건립 자체가 불법이었고, 이를 대원군이 몰랐을 리도 없다' 는 것이다. 이것은 대원군 개혁 정치의 핵심이자 목적인 불법적 관행을 제거하여 국가의 법체를 회복하는 것과도 맞지 않는다. 게다가 흥선대원군의 권력은 국왕의 아버지 라는 지위를 이용한 권력이었다. 그럼에도 대원군은 이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선정비를 통해 적극적으로 과시했다. 임용한은 선정비와 척화비를 보며 독재자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독재자로 변해갔다고 평가했다.
가족 양 조부 : 은신군 (恩信君, 1755년 - 1771년)
생 조부 : 이병원(李秉源, 진사 , 사후 증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 인평대군의 5대손)
아버지: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 1788년 - 1836년)
어머니: 군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 ?년 - 1831년)
형 : 흥녕군 이창응(興寧君 李昌應,1809년 - 1828년)
형 : 흥완군 이정응(興完君 李晸應, 1815년 - 1848년)
형 : 흥인군 이최응(興寅君 李最應,1815년 - 1882년)
아내 : 여흥순목대원왕비 민씨(驪興順穆大院王妃 閔氏, 1818년 - 1898년 1월)
아들(적장자) : 흥친왕 이재면(興親王 李載冕, 완흥군(完興君),1845년 - 1912년)
맏며느리 : 풍산 홍씨(豊山 洪氏, 1844년 ~ 1887년 12월), 통덕랑(通德郞) 풍산인(豊山人) 홍병주(洪秉周)의 딸. 손자(적장손) : 영선군 이준용(永宣君 李埈鎔, 1870년 ~ 1917년)
손자 : 이문용(李土+汶鎔, 1882년 ~ 1901년) 장손녀 : 이씨, 군수(郡守) 김인규(金仁圭)에게 출가. 손녀 : 이씨, 비서승(秘書丞) 김두한(金斗漢)에게 출가. 며느리 : 여주 이씨(驪州 李氏, 1884년 ~ 1978년), 참봉(參奉) 여주인(驪州人) 이인구(李麟九)의 딸. 손녀 : 이씨, 주사(主事) 김규정(金奎定)에게 출가. 아들 : 고종(이재황(李載晃),1852년 - 1919년 1월 21일)
장녀 - 이씨, 한양인 조경호와 혼인
차녀 - 이씨, 풍양인 조정구와 혼인
소실 : 계성월
서장자 : 완은군 이재선完恩君 李載先, ?년 ~ 1881년)
소실 : 추선(秋善, 기생 출신 소실, ? ~ 1885년)
소실 : 서씨(徐氏, ? ~ 1914년 1월)
소실 : 진채선(陳彩仙, 1842 ~ ?, 조선 최초의 여류 명창, 경복궁 중건 축하 낙성연에서 처음 만나
애첩이 되었지만 흥선대원군 몰락 후, 곁을 떠나 어디서 죽었는지 확실치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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