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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주 향우 사랑방 스크랩 영광의 지명유래와 전설
블리스- 추천 0 조회 371 16.04.21 08: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영광의 지명 유래와 전설

1. 곧올재(관람산과 옥녀봉사이 고갯길)


  영광은 백제(百濟)에 무시이군(武尸伊郡)이었고 신라(新羅)때 무영군(武靈郡)이라 했으나 고려때 영광(靈光)으로 고쳤다. 당시 영광은 압해(押海), 임자(荏子), 흑산(黑山)에 이르는 서해 도서는 물론 장성(長城)일부, 무안(務安), 함평(咸平)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으로 나주목(羅州牧), 순천부(順天府) 다음으로 컸다. 고을은 원래 남쪽 산기슭에 있었으나 왜구의 침노가 잦자 산수(山水)를 등진 불리한 지리요 망루가 낮은 탓이라고 우와산(牛臥山) 동쪽으로 옮겼다.


  오늘날의 읍은 조선에 접어들어 성산(城山)(146m)을 선창으로 계선주삼아 배가  정박해 있듯 조성했다. 읍은 머릴 동남쪽에 수퇴봉(水退峰)을 두고 그 아래 노인봉(老人峰)(257m) 정동쪽에 옥여봉(玉女峰), 북쪽에 관람산을 두어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옥녀봉이 있어 양택명지(陽宅明地)가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의 곧올재는 관람산과 옥녀봉 사이의 고갯길이다. 해발 80m내외의 이 고개는 읍내서 동북으로 바라보이는 고개로 20분 가량 오르면 되는 곳이다. 이 고개는 영광읍 교촌리 1반에 속하거니와 이 고개를 넘으면 연성리(蓮城里) 성동부락(城洞部落)이고 묘량북부가 나오며, 대마면(大馬面)을 거쳐 장성으로 가거나 서울로 가던 옛길이다.


  몇년전까지도 영광읍내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 대마와 장성, 삼계의 경계를 이룬 태청산(太淸山)(593m)으로 땔나무를 하러 다녔고 지금도 이 고개를 이용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옛부터 이 고개에서 초부(樵夫)들이 부르는 피리소리는 영광읍내 입경(入景)에 속했다 하거니와 지금도 이 고개를 넘는 장꾼들은 술이 거나해지면 이 고개를 넘으며 옛 노래를 불러 옛 정취를 느끼게 하는 고개이기도 하다.


  이 고개 이름이 곧올재가 된 것은 읍지(邑誌) 등 문헌으로 보아 옛부터 있던 고갯길이라 하여 고봉(古峰)라 썼고, 고도(古道)라고 썼는데 이것이 고도재로 읽히고   곧올재로 발전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주민들간에 전해온 전설이겠지만, 이미 MBC에서 방송한 바 있고, 한국의 전설 제1권에도 실린 전설이 있으므로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다.


  백제(百濟)가 호남 땅을 다스리기전, 전남은 삼한시대의 마한(馬韓)이었다 한다. 마한이란 남풍(南風)을 마파람이라 하듯이 남쪽에 있는 한(韓)나라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는데, 사실 이 마한은 통일된 한나라가 아니라 50여 부족국을 통틀어 이른 이름이라 한다.



  이 부족국가간에는 싸움이 자주 있었다. 영광고을을 중심으로 있던 나라는 성진이었다. 이 고을에 금실이 좋은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편 도손은 열심히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의 부인이 산기(産氣)가 있던 어느날, 이웃 부족들이 이 고을을  쳐들어 왔다. 군사들이 싸우는 동안 부녀자들은 교촌 뒷산 고갯길을 넘어 태청산 (太淸山)으로 피난을 갔다. 도손은 만삭의 부인을 등에 들쳐업고 피난을 나섰다.   그러나 만삭의 부인을 업고 피난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이 아니었다. 고을에서는 싸움이 한창이었다. 피난을 떠나는 사람들은 빠른 걸음으로 고갯길을 넘어 태청산으로 피난을 가버렸다. 만삭의 부인을 등에 업고 가장 뒤늦게 고개를 넘던 도손이 부인을 고갯길에 내려놓자 곧 아기를 낳을 듯 심한 진통을 했다. 드디어는 피난길에서 아기를 낳고 말았다. 아기를 낳을 날이 차지 않았건만 전쟁의 충격 때문에 조산을 하고 만 것이다.


  아기를 받아 본 일이 없는 도손은 당황하기만 하였다. 혼수상태에 빠진 부인은 물을 찾고 있었다. 도손은 물을 가져와야 했다. 아기도 받아야 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못 본 체 하며 피난길을 재촉해 갔다. 당황한 그는 적진이 되고 만 고을을 향해어갔다. 전쟁터에서는 이웃이 모두 필요없었다. 「여보! 곧 올게, 조금만 참고 있어」라면서 도손은 아기를 덮을 걸레며 가위며 물이며, 그의 부인과 아기를 구할 도구와 약이 급했던 것이다.

 집을 향해 뛰던 그는 적들에게 붙잡혔다. "너 이놈! 웬놈이냐." 도손은 피난 떠나던과 그의 부인이 출산해 급한 사정을 얘기했다. 그러나 적병들은 곧이 들으려 들지 않았다. 적군 병사들은 "이놈이 첩자임에 틀림없다."면서 모진 매를 때렸다. 도손은 정말이라며 사정했다. 첩자가 아니라 위급한 부인을 구하러 왔노라고 울면서 애원했다. 그러나 그의 애원은 통하지 않았다. 군인들은 그를 쳐죽였다. 도손은 죽으며 고을 동북쪽 고개를 향해 손을 허우적이며 "곧 갈께"를 수없이 되풀이하며 숨을   거두었다.


  돌보는 이없이 산길에서 조산아를 낳은 도손의 부인도 도손을 부르며 죽어갔다. 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왔다. 금실 좋던 부인은 산마루에서 남편은 산아래서 서로를 향해 손을 허우적이며 죽어 있었다.

  사람들은 도손이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자기 부인을 뒤에 두고 고을을 향해 뛰어가면서 "곧 올게 조금만 참아"하고 소리치던 말이 생각났다. 사람들은 이 고개 마루에 이들 부부를 묻으며 "곧 올께"를 되풀이했다. 이후부터 이 고개 이름은 곧올재가  되었다.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적의 침공을 받았던 약한 나라 백성의 슬픔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것이다.


  영광(靈光)사람들은 조선초기 왜놈 해적의 침공을 자주 받았고, 6.25때는 인민군의 피해를 많이 받았다. 이런 난리가 일어날 때마다 영광사람들이 몸을 피하는 곳은 역시 태청산(太淸山)으로 이 재를 넘어갔다.


2. 방고개


  영광읍에서 광주방면으로 가다가 불갑저수지를 끼고 돌아서면 하나의 큰 고개가 야에 들어온다. 이 고개의 이름이 바로 방고개이다. 이 고개에 얽힌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옛날에는 길이 험해서 이 고개를 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런데 영광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이 고개를 넘어야만 했는데, 원님에게 공문을 전달해야 하는 포졸들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때 포졸들이 이 고개 위까지 힘겹게 올라와서   옥당(玉堂)골 가는 길을 내려다보면, 돌아올 일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한다. 그래서 더 이상 가지 않고 고개 위 나무에다 방을 걸어놓고 돌아갔다 한다. 이방의 내용은 고개를 오가는 사람들이 읽어 전했다 한다. 그러다 보니 그 고개는 방을 걸어 놓는 고개가 되었고, 이름도 「방고개」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3. 벼락셋터 (영광읍 신하리)


  벼락셋터는 영광읍 신하리에 있다. 여기에 얽힌 얘기는 다음과 같다.


  영광(靈光)에서는 비가 오지 않으면 염산면 야월리 신초부락 앞 해중제단(海中祭壇)에 군수(郡守)가 제관(祭官)이 되어 용왕수신(龍王水神)에게 기우제를 지냈다. 제관(祭官)은 비가 오기 전에 영광읍성(靈光邑城) 안으로 들어서야 한다. 들어서지 못하면 벼락을 맞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래 내려오는 동안에 헤아릴 수 없이 기우제는 지냈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그 까닭은 제관(祭官)이 벼락을 맞지 않기 위하여 바닷속 깊이 제단(祭壇)에 까지 가지 않고 해변에서 돼지를 물속에 넣고는 재빨리 돌아오는 정성(精誠)없는 기우제를 지냈지 때문이었다.


  그러기를 계속하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280년전 임호군수(林濩郡守)때였다. 백성은 계속되는 가뭄에 대흉년을 맞아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다. 임군수(林郡守)는 명산을 찾아 기우제를 지냈으나 비는 오지 않아 인심은 날로 흉흉해져 갔다.

  임군수(林郡守)는 마지막으로 신명(身命)을 바쳐 용왕수신(龍王水神)에게 기우제를 지내기로 작심하고 염산면 신초부락 앞 수중제단으로 길을 텄다. 임군수(林郡守)는 바닷속 깊이 있는 제단(祭壇)에 이르러 제물(祭物)을 바치고 용왕수신(龍王水神)에게 이렇게 빌었다.


  "용왕님 꼭 비가 내리게 해주소서. 지금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내 신명(身命)을 바쳐 드리는 祭이오니 비를 내려 이 불쌍한 백성들을 구해주소서…."



  이와 같이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걸음을 재촉하여 돌아오는 길이었다. 영광읍성(靈光邑城)이 눈앞에 보였다. 그때 바로 하늘에서 검은 먹구름이 일고 폭풍우와 함께 뇌성벽력이 치면서 임군수(林郡守)가 벼락을 맞아 말 위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백성들은 다같이 슬퍼했다. 그해는 우순풍조하여 대풍(大豊)이 들었다. 백성들은 임군수(林郡守)가 身命을 바쳐 기우제를 지낸 덕분이라고 얘기했다. 그의 공(功)을 못잊은 백성(百姓)들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쇠숟가락을 앞다투어 모았다. 임군수(林郡守)의 선정비(善政碑)는 후일 많은 목민관(牧民官)의 귀감이 되었다. 이 비(碑)는 일제때 파손되었으나 해방후 靈光 士林의 뜻을 모아 군청(郡廳) 경내에 다시 세웠다.(故 이기태)


4. 우평리 당산제(祭) (영광읍 우평마을)


   영광읍 우평마을은 약 500년 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도깨비들이 살던 터였다. 사람이 살기 위해 이 터에 들어와 밤을 맞이하였다. 이때 갑자기 도깨비가 나타나 집을 부수고 못살게 하므로 마을 터를 놓고 사람과 도깨비 사이에서 시비가 생겼다. 그러나 사람으로서는 도깨비를 이겨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은 도깨비들에게 우리가 무슨 일을 하여 주면 터를 물려주고 피해를 주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도깨비는 "본 터의 중앙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 사방에 다섯그루의 나무를 심고 음력 10월 14일 도깨비들을 위하여 당산을 모시고 당산제를 훌륭하게 지내 주라. 제물의 음식은 도깨비가 제일 좋아하는 메밀묵과 우평, 즉 소의 형국을 지닌 터이므로 소의 발목을 반드시 제물로 올려 주라"고 요구하였다. 사람은 도깨비가 요구한대로 제사를  지내주었다. 이러한 도깨비와 사람과의 약속은 5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지켜지고 있다.


  우평마을은 이 제사를 「당산제」라 하는데 매우 엄격하여 거행한다. 제사를   지낼 집사는 전날(음력 10월 31일)부터 새벽에 찬물(샘물)로 목욕하고 변소를 갈 수 없다. 또한 당산제월인 10월에 사람이 사망하거나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더럽혔다  하여 그 달은 절대로 제를 지내지 않았으며, 그 다음달인 11월중에 다시 좋은 날을 택하여 모시게 되어 있다.


  우평마을 주민은 당산제를 깨끗이 모시지 않는 경우, 그해 운수가 불길하다 하여 祭를 위해 한 집도 빠짐없이 손수 떡과 음식을 만들어 방, 곳간, 샘, 철융 등에 차려놓고 엄숙하게 그해의 행운을 비는 제사를 지낸다. (오규석)



5. 龍바위(영광읍 교촌리)


  영광읍 교촌리에 물무산이 있는데 그 산 옆에 용바위가 있다.


  옛날 물무산과 칠산바다에 살고 있는 용은 서로 친분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영광 물무산에서 칠산바다로 가는 굴이 있었지만 지금은 굴이 무너지고 입구만 남았다.


  그런데 하루는 웬지 모르게 물무산 용과 칠산바다의 용이 서로 싸웠다. 그런데 서로 갈등이 생긴 뒤로는 왕래가 끊기고 서로 말도 없었다. 그러나 옛 친분의 추억을 잊을 수가 없어 서로 보고 싶은 마음뿐이어서 계속 비가 왔다.


  그러던 어느날 물무산 용이 승천할 때가 되어 칠산바다 용을 만나지 못하고 승천하게 되었다. 물무산 용은 눈물을 흘리며 칠산바다 용을 그리워하며 올라갔다. 이때, 물무산 용이 흘린 눈물 두 방울이 바위에 떨어져 그 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다. (노두옥)


6. 콩밭에서 태어난 전씨(田氏)의 결조 시조(始祖)(영광)


 고려때의 일이다. 당시의 세도가인 회동대감 댁에 경사가 났다. 이 집에 수가낭 (秀佳娘)을 자기 후궁으로 데려가기로 하였던 것이다. 회동대감 댁에서는 물론이려니와 나라에서도 경사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수가랑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지금까지 아름답게 가꾸어 온 것은 남의 나라 왕의 후궁으로 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근심과 걱정으로 방안에서 가야금으로 세월을 보내던 어느날 수가랑은 좋은 묘안을 찾아냈다. 그녀는 자기집 종 꺽쇠를 불렀다.


   "꺽쇠"

   "부르셨습니까?"

   "날이 점점 가까이 오는데 어찌하면 좋겠느냐!"

   "소인은"


   꺽쇠는 더 말을 잊지 못하고 수가랑을 쳐다보았다. 순박하고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차 있고, 새벽 별 같은 그의 눈에는 어느 사이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러나 머슴인 꺽쇠에게 무슨 힘이 있으랴.


   "꺽쇠야~ 소인 하지만 말로 이 수가랑의 마음이 되어서 한번 생각해 보렴."

   "하지만 소인이 무슨 …"

  "또 소인일세. 그러지 말고 꺽쇠야 우리 멀리 도망가자. 나를 멀리 데려다 주어 응?"

   "아가씨 그건 말이어요. 어떻게 감히 아가씨를 모시고 대감마님을 거역할 수가      있겠습니까? 소인은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아가씨는 소인 등에 업혀        자라서 아가씨에 대한 정도 깊지만, 대감마님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꺽쇠는 단숨에 말하고는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억척스럽게 힘은 세지만 이런 일에는 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수가랑의 입에선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면 꺽쇠는 내가 아버님의 분부대로 저 원나라 황제의 후궁으로 가버려도       좋단 말인가"


 수가랑의 눈엔 슬픔이 서려 있었다.


  "아가씨 그런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다만 무엇이 어쨌다는 거냐?"

   "소인은 그저 어찌할 바를 모를 뿐입니다."

   "그렇다면 아무 걱정말고 나를 데리고 어디 먼데로 가주어 응?"


 꺽쇠는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후궁은 되지 않을 것이다. 꺽쇠는 내가 죽는걸         봐야 좋겠느냐?"

   "아니올씨다. 소인은 그저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따름입니다."


 수가랑은 결심을 하고 품에서 한자루의 장도를 꺼내었다. 깜짝 놀란 꺽쇠는 한발자국 다가서며 외쳤다.


   "아, 아가씨 아니되오. 아니됩니다."

   "그러니 꺽쇠, 제발 나를 살려주어. 아버님은 꺽쇠도 잘 알잖아. 나라의        영을 어기면서까지 나를 돌봐 주시지 않으시리란 것을… 우리 아무도 모르는 것에     가서 오손도손 살아."

   "그러나 대감마님이 아신다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더구나 아가씨는 대감마님의      외동딸이므로 설마 아가씨가 죽는다면 그대로 버려 두시지는 않으실거예요."

   "소용없는 일이야."


 수가랑은 한가지 남았던 희망마저 무너지니 이제 남은 거라곤 절망밖에 없었다. 수가랑은 흐린 눈빛으로 말을 했다.


   "꺽쇠는 내가 싫은가 봐. 언젠가 행랑채에서 이야기할 때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면서. 이제 보니 거짓말이었군."

   "아니 아가씨께서 그 얘길 어떻게?"

   "몸종 항아가 듣고 와서 말해 주었지."


꺽쇠는 당황하여 몸둘 곳을 모르고 주위만 두리번 두리번 살폈다.




   "꺽쇠, 내가 싫지 않으면 함께 먼 곳으로 가 응?"

   "그렇지만 아가씨 어떻게 사실려구요?"


꺽쇠는 두려운 눈으로 조심스레 수가랑을 쳐다봤다.


   "그건 걱정말어. 내가 알아서 준비 할테니까 꺽쇠는 나서기만 하면 되는거야."


수가랑은 환히 웃었다. 이젠 원나라로 끌려갈 걱정이 없어졌으니까.


  "내일밤 자시에 떠나기로 해. 그동안 내가 알아서 다 할테니까. 알았지?"


수가랑은 말을 마치자 총총히 안채로 들어갔다. 얼떨결에 대답은 하였지만, 꼭 무엇에 흘린 듯이 멍하니 서 있던 꺽쇠는 수가랑이 사라지자 이내 묘한 웃음을 띄며, 어디론지 가버렸다.


  이미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수가랑의 방엔 밤이 이슥하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내일밤 집을 떠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패물을 싸서 그것을 허리에 두르기 편하게 만들었다. 짐을 다 꾸리고 나니 새삼 슬픔이 복받쳐 올라왔다. 막상 집을 떠날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고 알 까닭이 없는 초생달은 나무가지에 걸려서 창으로 비춰 들어오고 있었다. 수가랑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가야금을 무릎에 올려놓고 타기 시작했다. 어떻게 나를 길러준 부모인가. 그런데 이제 부모를 떨치고 가야 한다니 만일 부모님이 아신다면 얼마나 비통해 하실까? 적막하고 고요한 밤에 가야금 소리만이 텅빈 수가랑의 마음과 방안을 메웠다. 촛불은 미풍에 한들거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온갖 추억은 하나하나 되살아나고, 밤은 더욱 고요하기만 하였다.


  문득, 가야금 소리가 멎었을 때 파르르 장지문이 떨고 촛불이 흔들거렸다. 미닫이 문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한 어린 중이 수가랑 앞에 나타났다. 깜짝 놀란 수가랑은 그저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동승이 수가랑을 내려다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수가랑은 들으시오."


 그저 놀랍고 괴이한 일을 당한 수가랑은 두려움으로 가슴이 마구 뛰었다.


   "내일, 아니면 몇일내로 그대에게 목숨이 위태로운 변이 닥칠 것이요. 변을         당하거든 곧 한입(一口)에 쌀뿔받침 하고 열(十)이 모인 곳(田)으로 피하시오.      그리고 이것은 天豆라는 콩인데 심으시오 자! 어서 이 콩을 받아 먹으시오."


  수가랑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동승이 내미는 콩을 받아먹었다. 향기가 입안에 가득차고 전신에 기운이 퍼지는 것 같았다. 수가랑은 꿈인지 생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동승은 움직이지도 않고 수가랑이 받아 먹은 것을 보고 이내 사라져 버렸다. 문득 정신을 차린 수가랑이 주위를 둘러봤지만 동승은 이미 온데 간데 없고 동승이 서 있던 자리엔 콩 한 알이 있을 뿐이었다. 수가랑은 조금전에 일어났던 괴이한 일을 생각해봤다. 「변을 당하거든 한 입에 쌀뿔하고 열이 모인 곳으로 가라고? 그 곳이 어딜까?」수가랑은 동승이 주고 간 콩알을 손에 쥔 채 이내 깊은 잠 속에 빠지고 말았다.


  동창이 환히 밝아 올 무렵에 잠이 깬 수가랑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배가 아이 밴 여자처럼 둥글게 불러 있었다. 그리고 손에 쥔 콩알에서는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수가랑은 이상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가랑은 황급히 일어나 마당 한 귀퉁이에 싹이 돋고 있는 콩알을 심었다.


  마침 찬연히 비쳐오는 아침 햇살에 싹이 빛나고 있었다. 그러더니 새싹은 금새 자라서 가지를 뻗고 잎사귀가 무성해 지더니 사람의 키만큼 자라나 있는 것이다.


  또 한번 놀란 수가랑은 움직일 줄 모르고 한동안 콩나무 앞에 서 있었다. 밤새 없었던 콩나무가 마당 한 귀퉁이에 자라는 것도 이상한 일이려니와 그 나무가 금방 자라서 사람 키 만한 것에 집안 사람들도 놀랐다. 그러나 더욱 놀란 것은 수가랑의 배가 불러서 곧 아기를 낳을 것 같은 일이었다.


  수가랑의 아버지 회동대감은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했다. 양가의 규수가 아기를 가진 것도 변이지만 머지않아 원나라로 가게 될 몸이 이 꼴이 되었으니, 이것은 회동대감 집안의 일 뿐만 아니라 곧 나라의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회동대감은 한동안 넋을 잃고 앉았다가 수가랑을 불렀다.


   "너 이것아 어찌하여 이꼴이 되었느냐? 사실대로 말하여라."


 화가 난 아버지 앞에 수가랑은 고개도 들지 못하였다. 그러나 몰아대는 성화에 흐느끼며 모든 얘기를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믿을 리가 없었다. 어찌 인간의 세상에 그런 괴이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뭐라고? 이 애비를 놀리는 거냐? 말도 되지도 않는 소리다. 도대체 뱃속의         아이 애비는 누구냐 말이다."


  그러나 수가랑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가랑 자신도 도무지 믿기 어려운 사실인데 하물며 보지 않는 남이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쓰러져 흐느껴 울뿐이었다. 이제 그녀에게는 어젯밤의 일들이 악몽같이 여겨지고 자기를 이렇게 만든 그 동승이 저주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숙명으로 돌리고 죽기에는   너무나 젊고 아름다웠다. 방안은 한숨소리와 수가랑의 울음소리로 가득 차 있을 뿐 사람들은 감히 그 앞을 얼씬도 못하였다. 아버지에게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죽여 버리자. 집안의 망신이고 나라의 명을 거역하지 않는 길이란 그것 밖에 없다. 오늘밤 자객으로 하여금 수가랑의 방에 들게 하여 죽이도록 하리라.」처녀의 몸으로 이미 아이를 배었으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썩 물러가거라. 네 방에 가 있어. 그리고 네 방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서는       안된다. 알았느냐?"


수가랑은 자기 방으로 건너왔다. 마당 한 귀퉁이에 탐스럽게 서 있는 콩나무를라보며 시름없이 가야금을 튕겼다. 눈물이 흘러서 볼을 적시고 가슴까지도 적셨다.


  어느덧 해는 기울고 어둠이 찾아왔다. 어둠은 차라리 모든 시름을 감춰주는 것 같았다. 촛불을 밝힐 생각도 하지 않고 하염없이 콩나무만 바라보며 가야금을 타고 있었다. 가야금의 가락을 따라서 콩나무가 너울너울 춤추는 것 같기도 하고 손짓하며 부르는 것 같기도 하였다. 수가랑은 가야금을 내려놓고 사뿐히 마당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콩나무 앞으 다가갔다. 콩나무는 어둠속에서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는 같았다. 수가랑은 손을 펴 열매를 만져 봤다. 그러자 그 어떤 알지 못하는 힘이 그녀를 이끌어 콩나무 그늘 속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때였다. 콩나무 뒷담을 뛰어 넘어오는 괴한이 비수를 번뜩이며 수가랑의 방 앞에서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곧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자 다시 되돌아 나온  괴한은 회동대감의 사랑방으로 사라져 갔다. 이내 회동대감의 대노한 목소리가 집안에 쩡쩡 울리고 하인들은 관솔에 불을 붙여 집안을 샅샅이 찾았다. 그러나 수가랑이 있을 리가 없었다. 수가랑은 콩나무 밑에서 이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인들은 모조리 집안을 뒤졌으나 수가랑을 찾지 못하자 회동대감은 다시 하인들을 시켜서 수가랑을 뒤쫓게 했다. 수가랑은 하인들이 찾으러 멀리 나가고 집안이 조용해지자 콩나무 밑에서 나왔다. 밖에 나오자 이 일을 알고 있던 꺽쇠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아가씨! 제가 데려다 드릴께요."

   "아, 꺽쇠 고마워"


  수가랑은 자기도 모르게 꺽쇠의 손을 덥썩 잡았다. 꺽쇠는 수가랑을 업고 쪽문을 지나 뒷문으로 나가 남쪽을 향하여 뛰었다.

  이윽고 냇물을 건널 무렵, 두사람을 쫓는 한 쌍의 人馬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수가랑과 꺽쇠는 엉겁결에 부근에 있는 콩밭으로 뛰어 들어가서 엎드렸다. 뒤쫓던 무리들이 개울을 건너 콩밭에 이르자, 말들은 앞발을 높이 치켜들고 소리내어 울었다. 그리고 콩잎을 먹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아무리 채찍질을 하고 소리를 질러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했다. 군사와 하인들은 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틈에 수가랑과 꺽쇠는 멀리 영광땅으로 달아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콩밭에서 콩밭으로 달아났다. 어디만큼 갔을까? 한참을 달려간 그들은 멀리 동쪽에서 동이 터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이 무렵에 수가랑은 콩밭에서 사내아이를 낳았다.


  수가랑이 아이를 밭에서 낳았다 하여 밭 전子 전대두(田大豆)가 전씨의 시조(始祖)가 되었다고 하며, 이분은 장성하며, 이분은 장성하여 훗날 고려를 위태로움에서 건진  장군이 되었다고 한다. (광주일보 1976. 7. 15)


7. 큰샘(영광읍 계송리 송정마을)


  靈光邑 계송리(桂松里) 송정마을 대나무숲 부근에 우물이 하나 있다. 이 우물과 관련된 얘기는 다음과 같다.


  옛날 마을 할머니가 저녁에 마을로 놀러 가는 길이었다. 우물옆을 지나는데 겨울에 물소리가 나서 깜짝 놀랐다. 이 할머니는 누가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여 우물로   다가갔다. 그런데 하얀 소복을 입은 女子가 긴머리를 늘어뜨리고 머리를 감고 있지 않는가! 할머니는 너무 놀라 악을 써버렸다. 이때 소복입은 여자가 화가난 얼굴로 사라져 버렸다.


  그후 그 우물에서는 물이 나오지 않아 마을사람들은 큰 걱정이었다. 마을민은 거기에 굿을 쳐보기고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물이 나오지 않는 까닭을 그 할머니는 알고 있었다. 그때 소복 입은 女子가 우물의 神으로 자기 모습을 사람에게 보여서 화가 나 있다는 것을 할머니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우물神의 화를 풀게 하기 위해서 보름달이 훤히 비추는 한밤중에 "나는 안 보았소"하고 새벽이 될 때까지 외치고 있어야 물이 나올 것 같다고 마을민에게 얘기했다.


  마을민이 할머니 얘기대로 했더니, 다음날 아침 물이 넘치도록 나와 마을에서는 그 우물을 「큰샘」이라고 불렀다 한다. (송기묘)


8. 마을 이야기(영광읍 도동리)


  아침에 밭에 가서 모시로 천을 짜 밥 덮개를 만드는 처녀가 있었다. 이 처녀는 그 재주에 맞먹는 배필이 없어 시집을 못갔다.


  마을에 석삼내는 총각이 내기를 하여 이기면 나에게 시집오라고 하여 시합하였다. 그러나 이 총각은 세포기를 하지 못하여 장가를 가지 못했다. 또 한 총각이 있었다. 그는 하루 저녁에 벼룩을 서되 세홉을 잡아 굴레를 씌워 잔디밭에 굴리는 재주가 있어 내기를 하였다. 그러나 그만 한 놈이 굴레를 벗고 도망가서 실패했다. 그런데 마을에 심술궂은 또 한 총각이 있었다.  그 총각은 처녀에게 내기를 신청하여 어디로


나오라고 하였다. 처녀가 찾아가니 아무것도 해놓지 않고 담배만 피우고 있던 총각은 시집오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처녀는 거절하였다. 화가 난 총각은 처녀를 들어서 던졌는데 영광까지 날아왔다. 이때 영광에 대밭을 보러왔던 총각이 처녀를 받았다.


  밥덮개를 잘 만드는 처녀와 삼태기를 잘 만드는 총각은 결혼해서 총각이 처녀를 받은 곳, 즉 영광읍 도동리에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노부영)


9. 구호동(九虎洞)(백수읍 길용리)


  원불교(圓佛敎)에서 대종사(大宗師)라 부르는 교조(敎祖) 박중빈(朴重彬)은 1891년 5월 5일 백수읍(白岫邑) 길용리(吉龍里)에서 박회경(朴晦傾)과 유정천(劉定天)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26세 나던 1916년 이곳 노루목에서 도를 깨쳐 1924년 전북(全北) 익산군(益山郡) 북일면(北一面) 신용리(新龍里)로 옮겨 본부(本部)를 정하고 포교를 하다가 광복직전인 1943년 6월 1일에 53세로 죽었다.


  길용리(吉龍里)는 보통 구호동(九虎洞)이라 하거니와 이같은 지명은 구수산(九岫山) (375m)에서 뻗어내린 9개 지맥이 호랑이 형국으로, 중빈(重彬)이 대각(大覺)을 했다는 노루목의 노루 한 마리를 잡아 먹기 위해 아홉 마리나 달려가고 있는 골짜기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인걸은 그가 태어난 자연경관(自然景觀)의 영향을 받는다 하거니와 길용리(吉龍里)명산다운 산은 없지만, 옥녀봉(玉女峰)이란 기이한 봉(峰)이 있어서 영택(靈宅)으로는 명지(名地)로 알려진 곳이다. 원래 길용리(吉龍里)는 7개 자연부락을 합해 부르는  행정구역 지명으로 이 옥녀봉(玉女峰)은 영촌(靈村)이란 마을 뒤에 있는 해발 1백 40m 내외의 작은 산봉우리다.


  이 옥녀봉(玉女峰)에 오르면 멀리 법성(法聖)이 북쪽으로 보이고 이 법성(法聖) 앞바다가 마치 거울처럼 보여서 옛부터 천상(天上)의 옥녀(玉女)가 이 바다를 거울로 머리를 빗는 형국이라 말했다 하거니와 이 옥녀봉(玉女峰)은 마치 여자의 낭자처럼 보인다.

  중빈(重彬)은 옥녀봉(玉女峰) 밑 1백m 거리에 있는 영촌(靈村) 출신인데 그의 선대에는 밭 4천여평, 논 1천여평을 벌어 중농(中農)에 속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영촌(靈村)은 중빈(重彬)이 열살 나던 해인 1900년 큰 홍수가 져 떠내려가 버렸지만금은 다시 16호가 산다. 중빈(重彬)은 이때 이곳에서 3백m 가량 위에 있는 마을인 구호동(九虎洞)으로 이사가 살았다. 열한살 나던 해 10월 그는 아버지를 따라 군서면(郡西面) 마읍리(馬邑里) 북종산(北鍾山)(111m)에 있는 선산의 시향제에 따라 갔다.


선영의 묘에 젯상을 차리기전 묘에서 좀 떨어진 곳에 상을 차리고 산신제를 지내는 것을 보고 "왜 산신제를 먼저 지내느냐"고 물었다. 그의 아버지가 "산신은 이 산을 주재하는 신으로 할아버지 보다 더 능력이 있는 신이므로 그런다"는 대답을 해 주자 그는 山에는 능력 있는 산신(山神)이 있는 것으로 믿었다.


  옛부터 삼두구미(三頭九尾)에 만인가활지지(萬人可活之地)가 있다는 말이 전해왔다고 한다. 이상하게 백수(白岫)에는 용머리 등 머리라는 어귀가 든 지명이 세 개 있고, 구미(해안지명(海岸地名)의 고어(古語))라는 지명(地名)이 아홉 있었는데 오늘날의  구수리(九岫里)는 구시미고 그 옆이 모래미, 대신리(大新里)는 대치미가 변한 지명이며 이 부락(部落)곁에 백미가 있고, 백암리(栢岩里)는 동백구미가 변한 지명이다.


  어려서부터 모든 사물에 의문을 품고 깊이 따지는 습성이 있던 중빈(重彬)은 산신(山神)이 능력이 있다는 말을 들은 뒤 구수동에서 마을 서당을 다니다 팽개치고 그의 집에서 3km거리에 있는 개미절터라는 곳(일명 삼밭제)의 10여평 남짓한 마당바위를 찾아가 매일처럼 "산신님이여 나타나사 내게 가르침을 주소서"하고 빌기를 5년이나 계속했다. 그러나 산신령이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20세 때부터는 집을 다시 귀영바위로 옮겨 기도하다가 24세때 노루목이란 곳으로 옮겼다.


  노루목이라는 곳은 길용리(吉龍里) 당산(堂山)으로, 그 뒷산의 생김새가 마치 노루가 엎드려 있는 형국이고 堂山이 머리에 속하는데 이 당산과 뒷산 사이가 목처럼 가느다랗게 생겨 사람들이 넘어 다니는 길목이다. 이 노루목은 중빈(重彬)의 대각(大覺)터다. 중빈(重彬)은 마을사람들로부터 "도통(道通)한다고 미쳐버렸다."는 비웃음을 받으며 이곳에 초막을 짓고 2년을 지내다 그이 나이 26세 나던 1916년 4월 28일 스스로 즉심시불(卽心是佛)의 원리를 터득했다고 한다. 道를 깨치고 그는 "물질(物質)이 개벽되니 정신(精神)을 개벽하자"고 외치며 동지를 규합, 그가 탄생했던 집에서 70여m 거리의 옥녀봉(玉女峰) 밑에 구간도실(九間道室)을 짓고 수도하면서 마을 밑 와탄천가에 간척사업을 벌였다.


  동지 9명과 함께 1년만에 2만 6천여평의 간척지를 완성하고, 1923년 지금 원불교영산(圓佛敎靈山)출장소가 있는 범현동으로 옮겨 영산원(靈山院)을 지었다. 이듬해에 그는 전북 익산군(益山郡)으로 옮겨 엿 행상과 척식회사 논을 소작하며 포교하다 1943년에 죽은 것이다. 이곳 영촌(靈村)을 중심으로 원불교(圓佛敎) 교조(敎祖) 박중빈 (朴重彬)의 어린시절과 대전후에 얽힌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사람들은 중빈(重彬)은 옥녀봉(玉女峰)의 지기(地氣)를 받은 인물이고, 이곳을 만인(萬人)이 살 땅으로 만든 전설의 인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10. 멧바위(백수읍 길룡리)


  백수읍 길룡리 저수지가 있는 불목제 밑에 멧바위가 있다.


  옛날 이 바위 밑 동굴에는 산신령이 살았다고 한다. 마을의 처녀들이나 아주머니들이 그쪽으로 산나물을 캐러가면 산신령은 그들의 마음을 읽어냈다. 산신령은 이 사람들이 평소에 착한가 나쁜 짓을 많이 하였는가를 판결하였다. 그런 다음에 평소 나쁜 행동을 많이 한 사람에게는 호랑이로 변해서 그들 앞에 나타나 나물은 커녕  혼짝을 내서 쫓아 버리고 평소에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산나물이 더 많은 곳을 안내해 주었다고 한다. (김영섭)


11. 고인돌(백수읍 지산리 서봉마을)


  이 고인돌은 백수읍(白岫邑) 지산리(芝山里) 서봉마을에 있다. 지금부터 약 200년전마을에 어디서 왔는지 더벅머리 총각이 흘러 들어왔다. 그는 이집 저집의 허청에서 잠을 자며 얻어먹고 사는 형편이지만 낮이면 남의 집일을 잘해주는 건장한 남자였다.


 바보스런 몰골이지만 어딘지 한구석에는 비상한 데가 엿보였다. 이런 사람에게 이 마을 처녀가 시집가기를 자청하여 부모의 반대와 마을사람들의 질시속에 혼사(婚事)가 이루어졌다. 이들 부부는 가정을 꾸며 살림을 불려 나가다가 3년후에 옥동자를 낳았다. 이 아이가 자라서 난리가 나자 의병으로 활약하여 많은 공을 세우고 전사하였다. 그후, 그가 묻힌 곳에 고인돌을 세우고 앞에는 정자나무를 심어 그의 충절을 기렸다. 지금도 그의 무덤인 고인돌과 정자나무는 마을 어귀에 남아 있어 후손들에 귀감이 되고 있다. (나종태)


12. 竹寺山 화미(火米)(백수읍 죽사리 대절사)


  백수읍 죽사리 대절산에 있었던 대절사에 상승과 하승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석간수가 흘러 나오는 바위쪽에 구멍이 뚫려 있어 매일 하루 세끼니, 2명분의 쌀이 이 구멍으로 나와 끼니를 이었다.


  어느날 불공(佛工)을 드리기 위해 한 손님이 찾아왔다. 구멍에서 나오는 쌀로   손님에게 밥을 지어주고 나니, 하승이 먹을 밥은 없게 되었다. 암자에 손님만 찾아오면 하승이 먹을 쌀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 구멍에서는 두사람이 먹을 쌀만 나오기 때문에 손님이 찾아오면 상승과 손님의 쌀만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손님에게 밥을 안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승은 참다 못하여 불에 달구어진 쇠부깽이로 쌀구멍을 쑤셨다. 그러나 부지깽이가 쌀을 까맣게 태워 그 이후로 까만 쌀이 나왔다고 한다. (김상준)


13. 아기업은 바위(홍농읍 칠곡리 월곡 앞바다)


  홍농읍 칠곡리 앞바다에 큰 바위가 하나 있다.


  옛날 어떤 아주머니가 월곡 앞바다 모래밭에서 아기를 업고 빨래를 하였다. 그때 맑던 하늘이 갑자기 캄캄해지더니 큰 파도와 세찬 바람이 불어 그만 그 아주머니를 덮치고 말았다. 아기는 파도에 밀려 떠내려가고 아주머니는 겨우 살아났다. 그후 아주머니는 날마다 바닷가에 나와 아기를 기다렸다. 이를 본 용왕님이 아기와 아주머니를 가엾게 여겨 월곡 앞바다에 큰 바위를 만드셧다. 이 바위를 아기업은 바위 또는  아기업은 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정인명)


14. 금정암(金井庵) 약수(금정암 법당위 상도실)


  金井庵 법당에서 위로 400m 올라가면 절벽에 상도실이 있는데, 이곳에는 천연적으로 생긴 바위동굴이 있다. 이 동굴에는 마시면 몸이 좋아진다는 약수물이 있다. 이곳은 아무리 심한 가뭄이 들어도 절대로 물이 마르지 않아 마실 수 있다고 한다.


  그 약수물 위에는 움푹 패인 곳이 있는데 항상 금물이 떠 있었다. 그래서 아래에 있는 절을 금정암(金井庵)이라 하였다 한다. 그 금물을 뜨려고 손을 집어넣으면 누런 금물은 퍼져 아무도 뜨지 못했다 한다. (전성환)


15. 이감관과 자라바위 (대마면 성산리 평금마을)


  조선조 중엽에 지금의 영광군 대마면 성산리 평금마을에 이감관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재산이 넉넉하여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았으나 슬하에 일점 혈육이 없었다.


  그는 자식이 없으므로 외로운 생활로 지냈으나 마음씨가 착하고 도량이 넓어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처지였다. 마을에 어려운 일이 있거나 이웃의 어려운 사정을 보면 자기 일처럼 돌보아 주었고 흉년이 들면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루는 마을 사람을 모아놓고 "우리가 이렇게 모여 사는 것도 서로의 인연이 맺어진 것이니 이웃간에 서로 돕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을이 잘 살고 서로 화합하여 우리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제단을 만들어 마을의 안녕과 주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생각해 보니 그럴싸한 일이라 생각이 되어 "좋을대로 하십시다" 하고 서로들 호응을 하였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제단을 만들어야 하겠습니까?"하고 서로들 호응을 하였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제단을 만들어야 하겠습니까?" 하고 마을 사람들이 물었다. 이감관은 "우리 마을을 수호하는 신의 제단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 자식은 없으나 이 마을을 위해서 평소 생각한 바 있습니다. 우리 마을이 평지에 있고 들이 좋으니 후손들이 오래오래 평안히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거북이형의 제단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이 일은 나에게 맡겨 주시기 바랍니다." 마을 사람들이 생각해 보니 이감관이 본래 남다른 데가 있고 솔선해서 만든다 하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감관은 이내 고산아래에서 자라 모양의 바위를 옮겨 제단을 만들고 매년 3월   그믐에 마을 공동제를 지내게 되었다.


  이로부터 수년이 지나 마을은 재앙이 없어지고 차츰 부자 마을이 되었다. 그리고 서로 돕고 협조하는 기풍이 일어나 인심좋은 마을로 변하였다.


  어느덧 이감관은 늙어 자리에 눕게 되었는데 하루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놓고 유언하기를 "내 나이 늙어 자식이 없어 나의 재산을 전할 곳이 없으니 모든 재산을 평금마을의 재산으로 하여 주시오"하고 운명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하여 장례를 마을 공동으로 후히 치르고 의논한 끝에 제사는 마을제인 3월 말일로 정하고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주기로 하였다.


  몇 해가 지난 뒤 마을 사람중에 우리 마을이 이처럼 잘 살게 된 것은 이감관이 마을 제단으로 만든 자라바위의 덕택인데, 지금 자라의 머리가 평금천 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이 자라머리를 마을 안쪽으로 돌려놓으면 더욱 더 잘살 수 있다는 설을 주장하여 자라바위의 머리를 마을안쪽으로 돌려놓았다. 이 일이 있은 후 마을에는 재앙이 일어나고 가정에 화가 미치는 집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를 지켜 본 주민들은 이는 필시 자라바위의 머리를 돌려놓았기 때문이라며, 다시 전과 같이 돌려놓았다. 그후 마을은 다시 평안해지고 아무 탈이 없게 되자 이감관의 신통한 재주와 제단(자라바위)의 영험을 마을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이 마을에 신삼봉(申參奉)이 살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영험을 보고 느낀 바 있어 이감관의 유산으로 마을재산이 된 산에서 소나무를 벌채하여 자금을 마련하여 자라바위 옆에 이감관의 송덕비를 세웠다. 지금도 평금마을에는 매년 3월 말일에 동제(洞祭)와 같이 이감관의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그때 이감관이 기증한 논 500평(坪)이 지금도 마을 재산으로 남아있다.(전재인)


16. 당산나무와 열녀(烈女)(대마면 월산리 월산마을)


  옛날 대마면 월산리 월산마을의 당산나무와 그에 얽힌 어느 烈女의 이야기이다.


  당산나무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외딴 집 한 채가 있었다. 마을과 떨어진 이곳에 다리를 쓰지 못하는 남편과 그의 아내가 살고 있었다. 아내는 낮에 품팔이를 하였고,


밤에는 남편의 다리를 완쾌시켜 달라고 당산나무에 물 한그릇을 떠다놓고 비는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언제나 방에 누워 있었고, 몸은 쇠약해져 마음도 몸도 병들어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점점 자기 아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예쁜 아내가 밤마다 나가는 것을 처음에는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의심은 날로 더해져 아내가 낮에 일하고 오면 구박을 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얼마후 어느 겨울밤, 한 나그네가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그 집에 찾아왔다. 아내는 착했으므로 누추한 집이지만 자고 가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그날 밤따라  눈보라가 몹시 휘날렸으나 착한 아내는 남편의 다리를 낫게 해달라고 물 한 그릇을 떠가지고 당산나무를 향해 나갔다.


  그런데 이때 일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남편은 나그네가 잠깐 치간(화장실)에 가는 것을 자기 아내를 따라가 정분을 통하기 위한 것인 줄 알고 눈보라치는 밤에 당산나무를 향해 기어갔다. 아내는 남편이 그러는 줄도 모르고 눈보라치는 당산나무  아래서 오직 남편만을 위해 빌고 또 빌었다. 드디어 남편은 집에서 멀지 않은 당산나무 가까이 왔다. 그는 당산나무아래에서 벌벌 떨며 기도 드리는 아내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쇠약해진 남편의 몸은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아내는 돌아오는 길에 죽은 남편을 발견하고 짐짓 눈치를 채고 오열을 토하며 당산나무 밑에 남편을 눕혀놓고 나무에 목을 매었다. (류재복)


17. 李範 과 공북석(拱北石)(대마면 복평리 방축마을)


  대마면 복평리 防波堤가 있는데 그 옆에 拱北石이라고 글씨가 쓰여 진 높이 2.4m, 폭 1m 가량의 立石이 있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조선조 말엽 순조 방축마을에 이절(李節)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남달리 재주가 있고 용모가 비범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태어날 때부터 기구한  운명(運命)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의 부친이 낮잠을 자다가 태몽(胎夢)을 꾸었는데 해(太陽)가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꿈을 꾸었다. 부인(婦人)에게 그 꿈을 얘기하고 동침을


요구하였으나 부인은 대낮에 무슨 짓이냐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흥분을 억제하지 못하고 노비와 동침하였는데 잉태하게 되었다. 그후부터 노비(奴婢)의 배는 허리띠를 졸라  매게 하고 婦人에게는 걸레를 두둑히 싸매서 출산후(出産後)는 婦人의 소생(所生)으로 위장 양육하였다. 그러나 이 비밀이 탄로가 되어 서자(庶子)임이 밝혀졌다.


  옛부터 나라에 일이 있으면 주민은 서울에까지 참여하지 못하므로 일정한 장소에서 서울을 향하여 절을 하고 나라의 안위를 기원하는 곳이 있었는데 이 마을에서는 선돌에서 북향망배(北向望拜)를 하였다고 한다.

  이범(李範)이 11세때 이 사실을 알고 이곳에 공북석(拱北石)이라 글씨를 써서 각(刻)을 하고 북향망배(北向望拜)에 참여하며 앞으로 커서 나라에 충성할 것을 깊이 간직하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점차 나이가 들어 성년이 되었다. 이범(李範)은 자기의 처질를 알게 되었다. 자기는 서자(庶子)로서 과거에 오를 수도 없고 집안에서도 대우를 받지 못함을 알게 된 것이다. 자연히 세상을 원망하게 되고 모든 일을 올바르게 받아들이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마을의 일들에 방해를 하고 심술을 부리기 일쑤였다.


  아랫마을과 방축마을 중간에 위치한 언구제(석정마을 뒤)의 능선을 잘라 방파제의 물을 넘겨 수로를 만들어 섬암마을의 주맥(主脈)을 끊어 풍수지리설에 의한 마을터를 못쓰게 하고 심술을 부렸다 한다. 이와 같은 심술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 이를 나라에서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항을 조사하기 위하여 파견된 관원이   방축마을에 오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 이범은 관원이 오는 길목인 「이래장등」에 하마비를 세워놓고 그곳에서부터 자기 집까지 화문석(花紋席)을 깔고 영접을 하며 관원을 놀라게 하였다. 또 자기 집에 머무는 동안 아침 저녁 새로운 반상기로 접대하니 관원이 그를 시험하기 위하여 반상기를 모두 방축제에다 던져 버렸다. 그러나 이 사실을 미리 탐지한   이범(李範)은 방죽안에 그물을 쳐 놓아 그릇을 건져내니 관원이 그이 비범한 계략에 놀랐다고 한다.

 후세 이 고장 사람들은 이범(李範)을 기인(奇人)이라 부르고 있다. (이선래)


18. 치마바위(대마면 복평리 월랑산 중턱)


  대마면 복평리 월랑산 중턱에 폭 8m, 높이 5m 가량의 치마를 펼쳐놓은 것 같이 생긴 흰바위가 있는데 이를 치마바위라 한다. 바에 의하면 이 바위가 검은색으로 변할 때마다 나라에 큰 변란이 일어났다 한다. 또 이 바위가 보이는 마을에서는 집을 지을 때 이 바위를 향해서 지으면 그 집에 과부가 생긴다 하여 좌향에 있는 바위를 피해서 짓고 있다.(이복형)


19. 와우(臥牛)영산(묘량면 삼효리)


   와우영이란, 산이 소가 누워있는 형국을 말하는데 그 소뿔은 바위가 되어 있다.


  옛날 부잣집에서 와우영산의 소뿔바위 명당에 묘를 썼다. 이 부잣집은 굉장한 구두쇠였다. 얼마나 구두쇠였던지 중이 오나 거지가 오나 동냥을 기가 막히게 주었다. 어떻게 주는가 하면, 주둥이가 좁은 옹기 병에 곡식을 넣어두고 손가락 두 개로 한번씩 집어 가라고 하였다. 동냥을 하는 사람이 아무리 집으려고 해도 한 두알 정도 밖에 집어지질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도승이 왔다. 그 도승은 주인에게 와우영산의 쇠뿔바위를 깨면 아주 더 큰 부자가 되고, 가문에 벼슬아치가 나오겠다고 말했다. 구두쇠 주인은 그 말에 너무 좋아 그 바위를 석수를 시켜 깨버렸다. 그런데 그 부잣집은 얼마가지 못하고 망하고 말았다 한다. (이옥)


20. 헐루게재


 묘량면(畝良面) 삼학리(三鶴里)서 불갑사(佛甲寺)를 가기 위해 넘는 고개는 시산재와 헐루게재가 있으나 두 고개다 전에는 퍽 험했다.


  시산제는 회산부락 뒤에 도달하고, 헐루게재는 유봉부락 뒤로 빠지는 고개로   옛날에는 그 목이 하도 좁아 오고가는 사람이 마주치면 거의 비켜 설 곳이 없어 서로 껴안고 자리를 비켰다.


  헐루게재는 근래 검문소에서 큰 신작로가 났지만 이 지명과 관계된 전설이 있다.


  1백여년 전 한 포수가 삼학리(三鶴里)앞을 지나고 있는데 이 고개에서 사람 살리라는 처녀의 비명이 들려 쫓아갔다. 비명을 지른 처녀는 혼자서 이 고개를 넘다가 목을 지키던 나무꾼에게 붙잡혀 겁탈을 당하게 되어 소리를 쳤으나 당하고 보니 정욕이 살아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무꾼의 땀을 닦아주었다. 처녀를 구하기 위해 쫓아간 포수가 이 꼴을 보고 화가 나 두 남녀를 쏘아 죽이고는 관가에 찾아가 "두 연놈이 헐떡거리고 있어서 죽였다."고 자초지종을 털어놓고 자수한 뒤부터 헐루게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21. 맹자정(孟子亭)(불갑면 쌍운리)


  수은(睡隱) 강항(姜沆)이 일곱 살 되던 해에 불갑면(佛甲面) 쌍운리(雙雲里) 운제부락(雲堤部落)에서는 서당(書堂)에 가는데, 지금의 맹자정 부근에 이르러 맹자책(孟子冊)을 팔러 가는 책장사와 만나게 되었다. 강항이 책 구경을 청하니 처음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거절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끝내 보여줄 것을 청하는 지라 7권으로 된 孟子 한 질을 내주자 처음부터 책장을 넘겨 갔다. 책장수는 옳다 임자를 만났나 보다, 은근히 기대를 했다. 그러나 한 질을 다 넘긴 항은 책장수에게 책을 도로 반환하는 것이었다. 책장사는 맥이 풀리는 지라 항에게 책사기를 권했다. 강항은 "다 외워  버렸으니 안사요." 하는 것이었다. 책장사는 반신반의하며 맹자 한 질의 내용을 물으니, 그때마다 척척이었다. 책장사는 그때야 강항이 보통 아이가 아닌 신동(神童)임을 알았다.


  책장사는 수재(秀才)를 만나면 돈을 받지 않고 주는 옛 예가 있어 그 책을 강항에게 받기를 권했으나 "다 외워버린 책이니 다른 사람에게 팔으라"고 사양했다. 생각다 못한 책장사는 돌아가는 길에 정자나무 위에 책을 매달아 놓고 가버렸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후인들이 그곳을 가리켜 孟子亭이라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는 정자나무가 없어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이에 뜻을 모은 향중(鄕中) 유임(儒林)들이 이를 오래도록 기념하기 위해서 맹자정 대로변에 선생의 기적비를 세웠다. (김달근)


22. 불갑사 참식나무 (불갑사)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 제112호로 지정된 佛甲面 佛甲寺 주변에 자생하는 참식나무는 녹나무科에 속하는 상록활엽교목이다. 잔가지에 털이 없고 녹색(綠色)이며, 잎은   자루가 있고 호생(互生)하며, 단단한 초질(草質)인데 타원이며 전녹(全綠) 양끝이  뾰쪽하고 잎의 표면(表面)은 녹색(綠色)이나 이면은 백색(白色)이다. 엽맥(葉脈)은   3개의 주맥(主脈)이 뚜렷하다. 어린잎은 황갈색(黃褐色)의 털에 덮이고 밑으로 처지나 자란 뒤에는 털이 없어지고 옆으로 퍼진다.


  이 나무는 신경통에 특효가 있다는 귀한나무일 뿐만 아니라 애절한 사랑의 전설을 담고 있다.


  옛날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때 高名한 경운(敬雲)스님이 인도에 유학을 하였다. 하루는 그 나라 王이 온가족과 함께 敬雲스님이 있는 절의 법회(法會)에 참석하였다. 임금을 따라온 진희수(珍稀樹)라는 공주가 경운(敬雲)스님을 보고 한눈에 반하여 이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이를 알아차린 王은 절의 주지에게 敬雲스님을 본국


(本國)으로 추방하도록 하였다. 이별의 슬픔을 가눌길이 없는 공주(公主)는 "來世에서라도 우리의 사랑을 맺자"고 하면서 화분에 조그마한 나무를 한그루 심어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本國으로 돌아온 경운(敬雲)스님은 이 나무를 정성껏 심었다. 이 나무가 백담호(白淡號)라고도 부르는 참식나무이다. (故 이기태)


23. 佛甲寺 대웅전(大雄殿) 창살무늬(불갑사 대웅전)


  佛甲面 佛甲寺 大雄殿은 건물규모는 보잘 것 없지만 각종 조각이 특이하다. 창살무늬는 보기드문 눈송이 설문(雪紋)이고, 대들에서는 용이 기둥을 타고 내려오는  오소리를 쫓는 형국을 하고 있다. 불상위를 덮고 있는 닷집 또한 일품으로 이 대웅전 (大雄殿)의 조각은 건축당시 이름있는 조각가가 찾아와 스스로 일할 것을 자원하여 일했다 한다. 이 조각가는 "내가 조각일을 끝마치는 동안 절대로 부정한 여자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몇 달이 지나도록 나오지도 않고 일만 계속하고 있으므로 밥을 해 나르던 여인이 하도 궁금해 대체 무슨 일을 하나 싶어 문틈으로 엿보았더니 조각쟁이는 그만 피를 토하고 죽고, 그 피는 까치 한 마리가 되더니 멀리 날아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곳 대웅전(大雄殿) 문살 무늬는 병신이 되고 말았으며, 집을 완성하고 그 조각사를 기념하기 위해 불상 뒷켠 벽에 까치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지금도 이 大雄殿벽에는 재미난 까치그림 두 폭이 남아있다. (광주일보 1976. 1. 13)


24. 불갑사 사천왕상(불갑면 모악리)


  천왕문을 지키고 있는 불갑사 사천왕상은 전북 무장의 연기사사 폐사되어 1870년(고종 7)에 설두대사가 불갑사를 중창하면서 연기사에서 불갑사로 옮겨진 것으로 이 사천왕상을 옮기는데 전 군민을 동원하여 도로를 정비하였다고 한다.


 조선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사천왕상은 목조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거상으로 균형미가 뛰어나고 섬세하고 화려한 조각솜씨를 보여주어 그 예술성을  높이 평가받고 있다.


25. 미륵당(彌勒堂 : 군서면 남죽리 노변)


  군서면 남죽리 노변에 있는 이 미륵당은 지금으로부터 700년전 고려 원종때 진주정씨(晋州鄭氏)의 선비에 의해서 지어졌다. 옛날 군서(郡西)는 숲이었거나 바닷물이 들어오므로 지세가 험악하여 사람들은 지나다니는 것을 꺼려했다.



  정(鄭)선비는 산천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다가 지금의 미륵당 자리에 앉아 산세를 살피다 잠이 들어 꿈을 꾸게 되었다.


「큰 거북이가 숲 밑 바닷가에서 허우적거리며 가고 오지도 못하고 맴돌고 있었다, 선비가 물 속으로 들어가 거북이를 놓아주자 거북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리를 가리키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선비가 물 속에 손을 넣어 보니 큰돌이 있었다.」


  잠에서 깬 선비는 이상히 여겨 꿈에 보았던 곳으로 가 물 속의 큰 돌을 꺼내어 보니 불상(佛像)이었다. 그 불상을 산 위로 옮겨 집을 지어 「미륵당」이라 부르고 지세의 순화와 복을 비는 공을 드렸더니 물이 빠지고 터가 잡히니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후부터 이곳을 지나는 행인들이 무사를 빌며 소원을 말했고, 자손(子孫)이 없는 사람들도 기도를 드려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또 마을에 평안과 제앙 방지를 비는 곳이기도 한다. (심경택)


26. 당산할아버지와 할머니(군남면 반안리 안수마을)


  반안리 안수마을에 있는 당산할아버지와 할머니는 1984년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발간한 <한국성신앙현지조사>에 보고 되어 있어서 민속학적 가치가 이미 알려져 있다. 마을입구에 있는 반안초등학교 안의 우측 담장옆에 있는 당산할아버지는 자연석을 다듬어 만들었다. 1.8m의 원주형 위에 0.35m높이의 모자 모양의 돌을 얹어 놓았는데 원래의 자리는 반안초등학교 관사 터였다고 한다.


 마을주민 고춘석씨 밭에 있는 ‘당산할머니’는 2m높이의 사각형 돌기둥 위에 새모양의 돌을 얹어 놓았다. 정월 보름에는 밑부분에 짚으로 옷을 만들어 입기도 했다고 한다. 매년 정월 보름에 당산할아버지․할머니 순으로 제사를 지낸다. 특히 당산할머니에게 부부가 정성껏 제를 지내면 득남(得男)한다는 속신(俗信)이 전해오는데 실제로 이 마을 김덕규씨도 효험을 보아 득남했다고 한다.


 당산할머니 위에 올려놓은 돌로 만든 새는 서북향을 향해 있다.

 이 새의 머리가 내려오면 마을에 화가 미친다고 믿고있는 주민들은 요즈음은 아예 새의 머리를 콘크리트로 고정시켜 놓았다. 이와 유사한 형태가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서분안 당산과, 동중리의 동문안 당산의 석조형 새가 바로 그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오랜 옛날부터 새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사실을 전해주고 인간의 고난을 극복하도록 인도하는 영조로 인식하여 왔다.


또는 신과 인간의 매개체인 이 새가 농사의 풍요도 가져다 줄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오랜 옛날 청동기 시대부터 농경무늬 문양에 새를 새겼던 것이다.



 마을의 신성불가침 영역인 당산에 지내는 의례는 온정성을 다해 지내야만 효험이 있다. 신과 인간이 만나는 시점에 어찌 부정을 타고서야 존재 할 수 있겠는가? 제관의 선정이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깨끗한 사람이라는 점이 그렇고, 당산에 잡신의 근접을 막기 위해 금줄을 친다거나 황토를 뿌리는 행위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정성껏 준비한 제물 또한 마찬가지이다. 물건값을 깎지 않고 제가 끝난 뒤 신성이 깃든 음식을 나눠 먹음으로써 신의 베품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결국 당산제는 마을을 구성하는 모른 주민들의 북을 얻고자 하는 의식의 표현이자 정성의 절정이라 하겠다.


 반안리 안수마을 할머니당산의 이 새도 주민들의 정성이 지극했던지, 호열자(콜레라)가 유행하여 이웃마을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을 때도 안수마을만은 아무 탈이 없었다고 구전되어 오고 있으니 새의 효험은 지금도 계속되는 모양이다.

(1984년 한국성신앙 현지조사서)


27. 손자바위(군남면 용암리)


  이 전설은 군남면 용암리에 전해 오는 이야기다.


 옛날 아주 평화스럽고 걱정없이 지내던 마을에 갑자기 흉년이 들어 밥한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어린 아기는 젖을 못먹어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가거나 이사를 가지 못한 사람은 집에서 기르는 가축을 잡아먹었다. 이러지도 못한 사람은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마을에 아주 늙은 노파와 어린 손자가 살고 있었다. 이 노파는 먹을 식량이 없어 참다 못하여 어린 손자를 업고, 마을에서 10리쯤 떨어져 있는 연흥사라는 절을 향해 가고 있었다. 때는 여름이라 햇살이 매우 뜨거웠다. 특히 늙은 할머니인지라 더위를 무척 탔다. 가는 도중 마침 더위를 피하기에 알맞은 바위가 있었다. 할머니는 어린 손자를 업고, 바위로 올라가 쉬었다. 손자도 배가 고파 울고, 할머니도 곧 쓰러질것만 같았다. 그때 할머니가 어린 손자를 보더니 군침을 삼키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어린 손자를 얼른 잡아 먹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 이후로 이 바위는 「손자바위」라 불리게 되었다. (배군자)


28. 왕자터(王子터) 명당(明堂)(법성면 법성포 후장동)


  왕자터 명당은 金氏 집안의 소유인대 법성면(法聖面) 법성포(法聖浦) 뒷쪽 후장동에 있다.  金氏집안은 80여년전 조부모(祖父母)를 그곳에 모셨다.



  옛날 이곳에 가난한 田氏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밭에서 김을 메고 있는데 지나가던 스님이 물을 청하므로 그 부인이 일을 멈추고 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샘에 가서 물을 떠다 주었다. 이 스님은 모든 사람이 중을 괄시하는 세상에서 인정많은 부부를 만났다며, 내가 자리를 보아하니 이 밭 가운데에 묘를 쓰면 자손중에 큰 인물이 날것이라며 떠났다.


  이 田氏 부부는 스님이 일러준 대로 그의 아버지 묘를 이 밭 가운데 썼다. 묘를 쓰고 곧 아들을 낳았다. 이 아이는 낳은 뒤 혼자 두면 잘 놀지만 사람이 있으면 우는 버릇이 있었다. 田氏 부부는 들에 나가며 이웃 노파에게 아기가 우나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오래 되어도 아기가 울지 않았으므로 노파는 가만히 문틈으로 잠자나 그 거동을 살펴봤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갓난아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웃목 그릇에 있는 좁쌀 한 줌을 움켜쥐어 방안에 휙 뿌리는데 그 좁쌀이 모두 병사로 변했다.


 아기는 겨드랑이에 깃이 나 날으며 좁쌀 병사를 이끌고 兵丁놀이를 했다. 깜짝 놀란 이 노파는 田氏 부부가 돌아오자 이 얘기를 하고 앞으로 큰일을 저지를 아기라 했으므로 밭에 있는 그의 아버지 묘를 파 버렸다. 묘를 파자마자 아기가 죽고 그 묘에서는 김이 황소모양으로 피어오르다 사그러졌다고 한다. 이 자리는 훗날 지관(地官)들이 왕자용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명당을 金氏들이 사서 묘를 쓰고 면장(面長)이 나고 그 두 아우는 미국(美國)에 가서 잘 되었다고 한다.


29. 굴비(石魚)의 유래


  영광 굴비는 칠산어장에서 잡힌 싱싱한 조기를 소금에 절여 높은 건조대에서 말린 것이다.

  굴비의 명칭에 있어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영광읍지(靈光邑誌)에는 「석수어(石首魚)」라 기록하고 있고, 進貢편에는 「屈非」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일부 근래 발간물들이 「石魚」라 기록하여 이자겸(李自謙)과 관련짓고 있다.


귀양길은 멀기도 했다.


   "아직도 멀었으냐?"

   "네, 이백여리는 더 가셔야 됩니다."

   "영광이란 땅은 멀기도 하구나."


 이자겸은 귀양길이 지루하고 피곤하기만 했다.

이자겸은 한때 王位를 넘겨다보던 당대의 세도가였다. 그가 이제 심복이었던  척준경(拓俊京)의 배신으로 왕권을 눈앞에 두고 잡혀 인종(仁宗)의 명으로 전라도 영광으로 귀양을 가고 있는 것이다.


  仁宗은 원래 이자겸의 외손자가 되는 동시에 사위이기도 한 것이다.

  그는 고려 6대왕인 예종(睿宗)에게 딸을 바쳐 국구가 되자 득세를 하였고, 예종이 죽은 후 어린 인종이 대통을 이어 등극하자 나라의 대권을 손아귀에 넣고 휘두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이자겸은 또 다른 딸을 인종의 妃로 삼아 예종, 인종 두 대에 걸쳐 국구가 되었다. 그러자 이자겸은 은근히 왕위를 넘겨다보는 욕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챈 금찬(金粲), 안보린(安甫麟), 지록연(智祿延) 등이 상장군 최탁(崔卓), 오탁(吳卓), 권수(權秀), 고석(高碩) 등과 함께 이자겸 타도 거사를 일으켜 대궐로  쳐들어갔으나 오히려 이자겸의 심복인 척준경에게 모두 피살당하고 말았다. 이자겸과 척준경은 대궐을 불사르고 임금을 감금하여 꼼짝도 못하게 했다.


이자겸은 더욱 야심을 노골적으로 나타내서 인종을 독살하려고 했다. 이에 인종은 겁을 먹고 왕위를 이자겸에게 넘겨준다는 칙서를 내렸으나 이자겸은 주위가 두려워서 감히 받지를 못했다. 그러나 이자겸이 야심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할 즈음, 이자겸의 무모한 행패를 보다 못한 군기소감인 최사전(崔思全)이 이자겸의 왼팔인 척준경을 매수하여 이자겸을 치게 한 것이다. 자기의 심복이 배신을 하자 이자겸은 마침내 각오를 하고 소복을 입고 대궐로 들어왔다. 척준경은 곧   이자겸을 포박하여 역적죄로 문초를 했다. 그러나 왕은 외조부요, 장인인지라  차마 죽이지 못하고 전라도 영광으로 유배를 명한 것이다. 이리하여 당대의 세도가인 이자겸을 일시에 죄인이 되어 영광땅에서 외롭게 세월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이자겸이 영광에 당도해 보니 어촌이라서 각종 생선이 풍족했다. 그중에서는   앞바다에서 잡히는 조기는 특히 맛이 좋았다. 그런 영광에선 조기를 잡아 간을 해서 돌에 지질러서 물기를 뺀 후 말려 두었다가 일년 내내 먹는 것이었다.

  이자겸은 왕이 부럽지 않은 호화스런 생활을 했으나, 조기 말린 것은 처음 먹어 보았다. "허어, 그거 맛이 좋다. 돌에 저질러서 말리니 석어(石魚)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노라. 과연 영광의 굴비 는 일미로다." 하고, 왕에게 진상을 했다.


  굴비를 처음 먹어보는 인종은 매우 좋아하며,


  "영광굴비는 과연 별미로다. 매년 진상토록 하게 하라." 고 분부를 했다.


  이로부터 영광굴비는 일약 유명해졌으며, 이후 고려 조정에서는 또한 굴비를 멀리 원나라에 진상을 했으며 그후 이조때에 이르러서도 명나라와 청나라에 매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영광굴비를 별미로 여겼으며, 고려 조정에서 보낼 때 한문으로 고기 이름대로 石魚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후 영광 굴비는 상감께 진상되는 고기라 하여 유명했던 것이다. (광주일보 1976. 7. 1)


30. 장군정(將軍井)(법성면 법성포 인의산 중턱)


  將軍井은 法聖面 法聖浦 인의산(仁義山) 중턱에 있다. 이곳은 우물 탓인지 힘센 장사가 많이 났다. 옛날 이곳에는 8장사(將士)가 있었다. 인접 고을에 힘깨나 쓰는 壯士가 있어서 소문에 듣는 法聖장사들과 힘을 겨뤄보고 싶었다. 동짓재를 넘어  法聖을 내려다보니 길가에서 한 장정이 따비질을 하고 있으므로 "아무개 장사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일을 멈춘 그는 보통사람은 두손으로 들기도 힘든 따비를 지팡이 마냥 한손으로 들어 저 아래집 이라고 가리켰으므로, 장사를 만나기도 전에 그는 이곳 사람들은 장사로 이름이 나지 않더라고 저 정도 힘은 쓰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어 벌써 기가 꺾였다. 그는 장사집을 찾아가 수인사를 하고 힘내기를 하러 왔다고 했다. 法聖사람들은 이처럼 남자만 힘이 센 것이 아니라 여자도 힘이 세어 1백여년 전에

살았던 정(鄭)인조의 어머니는 지금 사람들 여섯명이 들 수도 없는 차돌바위를 치마폭으로 싸다가 노두를 놓아서 지금도 홍사거리에 남아있다고 한다.

(광주일보 1976. 7. 10)


31. 칠산바다와 조천(朝天)땅(임자도~위도)


  칠산(七山)바다는 영광(靈光) 굴비를 잡는 주 어장이다. 임자도(荏子島)에서 전라북도 위도에 이르는 영광 서해바다를 이르는 말이다.


  전설은 해안에서 안마도(鞍馬島)까지 육지로 조천땅이었는데 바다가 되고 말았다는 얘기가 중심이다.


  칠산바다에는 자그마치 일곱 고을이 있었다. 이 고을에 서씨(徐氏) 성(姓)을 가진 사람이 살았다(인동장씨(仁同張氏)라는 설도 있다). 하루는 남루한 차림을 한 과객이 집에 들렀다. 원래 인심 좋은 사람이라 하룻밤 잘 대접하였더니 이 손님이 떠나며  "내가 드릴 것이 없어 신세만 지고 떠납니다만, 내 말을 허술히 들어 넘기지 않는다면 아주 중요한 말씀 한 마디를 들려 드리겠습니다."고 말했다. 서씨가 그 말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앞으로 이 칠산고을이 바다가 될 터인데 그 시기는 저 산위에 있는 돌부처의 귀(코라는 설도 있다)에서 피가 흐른 뒤가 될 것입니다."라고 일러 주었다.



 서씨는 이 과객의 말이 너무나 엄청난 얘기였으므로 곧이 듣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범상해 뵈지 않은 과객이라는 생각을 했던 터라 명심해 두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매일같이 산에 올라 그 돌부처에 무슨 변이나 일지 않았나 살피며, 이 얘기를 가까운 이웃들에게 얘기를 곧이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사람들 중에는 매일 산에 올라가 돌부처를 살피는 서씨를 미쳤다고 까지 말하였다.


  이 고을에는 짐승을 잡아 파는 백정이 살고 있었다. 그는 평소 남의 얘기를 잘 듣지 않고 미신같은 것은 아예 외면하면서 짓궂은 짓을 잘 하였다. 그는 동네에 사는 서씨가 산 위에 있는 돌부처의 귀에서 피가 흐르는 날 칠산고을이 바다가 된다는 소리를 하면서 매일처럼 산에 올라가 그 돌부처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나 살핀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 백정은 서씨를 골려줄 양으로 서씨 몰래 산에 올라가 그가 잡은 짐승의 피를 귀나 코에 발라 놓고 내려와 서씨의 거동을 살폈다. 산에 올라갔던 서씨가 혼비백산 하여 마을로 뛰어 내려오며 "돌부처 귀에서 피가 났다. 바닷물이 밀려오기 전에 빨리 높은 산으로 올라가자"고 외쳤다. 이를 지켜보던 백정은 "저 영감 내가 어쩌나 보려고 고기피를 돌부처에 발라 놓았더니 저 소동치는 꼴을 보라"며 비웃는 태도로 동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서씨는 그가 믿은 대로 짐을 꾸려 가족을 이끌고 높은 산으로 달려 올라갔다.


  이 소동은 이 고을 원님에게까지 알려졌다. 이속(吏屬)들은 미친 서영감을 잡아다 민심을 현혹시킨 죄로 곤장을 때려 주자고 간했다. 그러나 이 고을 원님은 보는 것이 있었던지 주위에 와 있는 관속들의 상을 살펴보더니 "그 영감 말이 옳으니 살고 싶은 자는 빨리 산으로 오르라" 이르고는 바삐 영감님이 오른 산으로 달려갔다. 이것을 본 이방관속들은 "우리 고을 원님도 미쳤다"고 비웃었다.


 서영감이 가족을 이끌고 얼마쯤 산을 올랐는데 천지가 개벽하듯 천둥이 치며 비가아졌다. 뒤돌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원님이 내달아 따라 오르고 있었는데 이미 그가던 고을은 바닷물이 밀어닥쳐 물 속에 잠기고 있지 않는가, 서영감은 가족을 재촉해 산으로 달려 올라갔다. 산중턱에 이르니 한 소금장수가 소금 지게를 괴어놓고 앉아 있으므로 빨리 산으로 오르자고 재촉했다. 그랬더니 이 소금장수가 가로되 "영감, 걱정마오! 바닷물은 이 지게발목 바로 밑까지 차고 그칠 것이니 더 오를 필요없소"라고 말했다.


  서영감은 달려 올라가다 자신있게 말하는 이 소금장수의 말이 이상했으므로 되돌아서 발밑에 차오르던 바닷물을 바라 보았더니 이게 웬일인가, 그렇게 노도처럼 뒤미쳐 차오르던 바닷물이 칠산 일곱 고을을 삼키고 소금장수 지게 밑에 닿아 잠잠히


평소의 바다와 같아지지 않는가. 사방을 둘러보니 살아남은 사람은 자기 가족과 고을 원님, 그리고 소금장수 뿐이었다. 사람들은 살아 남은 지점이 염산면 야월리 가음산(歌音山)(260m)이라고 말하고 있다.


32. 각시섬 = 각씨도(角氏島)


  각시섬은 무안(務安) 해제(海際) 대사리(大士里) 건너 6km지점에 있는 낙월군도(落月群島)중 한 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영광(靈光) 낙월면(落月面) 임병리(壬丙里)에 속하는데, 사실 임병도(壬丙島)는 각시섬의 작은 도(島)이면서도 이곳 섬을 대표하고 있다. 지도상에서는 한문으로 각씨도(角氏島)라 표기되어 있고 섬이 둘이기 때문에 큰 섬은 대각씨도(大角氏島), 작은 섬은 소각씨도(小角氏島)라고도 표기하고 있다.


  大士里 백학산(126m)에서 바라보면 북방으로 낙월(落月)과 중간거리에 있는 임병도 (壬丙島)는 겨우 8정(町)가량으로 1가구가 살고 있지만 소각씨도(小角氏島)는 17町가량으로 7가구가 살고, 대각씨도(大角氏島)는 37町 가량으로 15가구가 살고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영광 낙월(落月)에 속하지만 사실상 이 섬은 여객선마저 다니지 않는 섬이라 지체도선으로 해제(海際)로 건너 다닌다.


  동경(東經) 126。 14‘, 북위 35。 28’ 사이에 있는 큰 각시섬과 작은 각시섬은   각각 거리가 1km가량이며, 큰 각시섬의 해발은 85m, 작은 각시섬의 해발은 39m이다.


 이 두 섬은 해제(海際) 백학산 밑에서 날씨가 나쁠 때 바라보면 女子의 모습으로도 변하고 병풍으로도 변하는 등 변화가 무쌍하다.


 이 두 섬이 각시섬이란 이름이 붙은데는 애틋한 비연(悲戀)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무안(務安) 해제(海際) 백학산(白鶴山) 밑 갯마을에는 금슬이 좋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편은 고기잡이를 다녔고, 부인은 해초(海草)를 따며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행복했던 이 가정에 비운이 닥쳐왔다.


  남편이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버린 것이다. 부인은 사랑하는 남편을 구하기 위해 백학산을 오르내리며, 갖가지 약초를 캐다 달여 먹이고 인근에서 영험하다는 의원은 고루 찾아다녔으나 효험이 없이 날로 악화되어 갔다.


  시름에 잠겨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던 어느날 이곳 갯마을에 사는 이웃 노파는 이 댁을 위로한 뒤 "옛부터 저섬에 선약(仙藥)이 있긴 하지만…. "하고 중얼거리지


않는가?  이 소리에 귀가 번쩍 띄어 새댁은 "할머니 정말인가요. 그 약(藥)이 어떻게 생겼다던가요." 라며 가르쳐 줄 것을 애원했다. 그러나 이 노파는 얼른 입을 떼지 않으며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그 애원이 너무 간절하므로 "이 사람아 저 섬에 갔다 살아온 사람이 없다네. 그래도 가르쳐 달라고 할 텐가"고 되물었다. 오직 사랑하는 남편을 구하고자 하는 일념뿐이었던 이 각시는 "내 정성을 하늘이 안다면 내가 죽지을 것이요. 정성이 부족하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죽은들 남편을 위해서라면 여한이 없습니다."며 졸랐다. 노파는 "할 수 없지. 그러나 나를 원망하지는 마소"하며 만병에 닿는다는 마을앞 섬의 선약초(仙藥草)를 설명해 주었다.


  남편을 살릴 수도 있다는 희망에 들뜬 이 색시는 집에 돌아가 미음을 쑤어 남편 머리맡에 놓고 "아주 좋은 약이 있다는 곳을 알았으니 좀 늦더라도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는 불귀도(不歸島)라는 마을앞 섬을 향해 떠났다. 이 섬에 도착한 여인은 섬을 찾고 헤매던 끝에 벼랑에 있는 약초 한 뿌리를 발견했다. 하느님께 감사하며 이 약초에 손을 댄 순간 사방에서 스르르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웬일인가! 수십마리의 뱀(독사, 구렁이)들이 몰려오는가 싶더니 피할 겨를도 없이 재빠른 놈에게 그의 하체를 물리고 말았다. 무인고도에서 뱀에 물린 그녀는 비명을 지르고 까무라 치고 말았다. 얼마 뒤 그녀는 의식을 회복했으니 이미 그의 하체는 그 자신이 보기에도 징그러운 구렁이로 변해 있었다. 몸은 구렁이로 변했어도 남편을 살리고자 했던 그의 일념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가 마을 앞 섬으로 약초를 구하러 떠나고 며칠이 지났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머리맡에 남겨둔 미음도 다 마시지 못하고 섬을 바라보며 애처롭게 부인을 부르다 죽어갔다. 이 날은 먹구름이 끼고 바다에 안개가 끼는 등 날씨가 변했다.녀가 약초를 구하러 떠난 섬이 섬 건너 마을에서 보니 마치 생전의 그녀 얼굴마냥 변해 보였다. 사람들이 나와 그 이상야릇한 전경을 보고 있자니 섬에서 무엇인가가 헤엄쳐 오고 있지 않는가. 가까이 오자 그것이 커다란 구렁이임을 발견하고 모두 마을로 돌아가 숨었다. 구렁이는 입에 이상한 풀잎을 물고 그의 남편이 죽어있는 백학산(白鶴山) 산마루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 가는게 아닌가. 이 날 밤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이튿날 날이 밝고 마을사람들은 어제 건너왔던 구렁이가 죽은 남편의 집을 빠져 나와 섬으로 건너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뒤늦게 앓아 누운 백학산 산마루 젊은이를 생각해 냈다.


  마을 사람들이 뛰어 나가보니 남자는 죽어있고 그의 곁에는 어제 구렁이가 물고온잎이 놓여 있었다. 이를 본 노파는 그 구렁이는 필시 불귀도(不歸島)에 건너간 색시였을 거라며, 자신이 그 섬에 선약(仙藥)이 있음을 가르쳐 주었노라고 털어놓았다.


사람들은 이 남자를 산마루에 장사지냈다. 장사를 지내자 멀리 불귀도(不歸島)가  너울너울 춤을 추듯 보였다. 그리고는 슬픈 여인의 모습으로 변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부터 각시섬이라 불렀다. 그 섬에 사람들이 들어가 지금은 농사짓고 고기 잡으며 산다. 논은 없지만 밭이 7정(町), 해조류 생산도 괜찮고 고기도 잘 잡힌다. 이곳 섬사람들은 이 섬 위에 각시堂을 모시고 매년 정월 큰 제를 지내 그 원혼을 달래고 풍년들기를 빈다. 각시섬의 남편이 살았다는 백학산(白鶴山) 밑 마을 이름은 지금도 한(恨)을 남긴 곳이라 해서 한아치라 부른다.


33. 안마도(鞍馬島) 산봉(山峰)(안마도 동촌마을)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전(1780년) 안마도(鞍馬島) 동촌(東村)마을에 살았던 申氏 할머니의 꿈에 "나는 나라 장군인데 한번도 출전을 못해서 이곳 북쪽 산너머(현 당너머) 선창가에 와 있으니, 나를 이곳 산봉우리에 묻고 매년 설날이면 농악을 쳐 제를 지내 달라"고 했다.


  이상한 꿈에서 깨어난 신씨 할머니는 이 사실을 동네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 말을 들은 동네사람들이 그곳으로 가 보았더니 선창가에 이상한 상자(궤짝)하나가 있었다. 그속에는 1m이상 되는 긴 여자 머리털과 큰 주머니(중국 주화가 들어 있었음)와 철마(鐵馬) 2匹 (큰 주먹 보다 조금 큰) 등이 있었다.


  동네사람들은 신씨 할머니의 꿈을 좇아 산봉우리에다 큰 항아리를 땅에 묻고 이 상자를 넣어 두었다. 또 주위에 동백나무를 심고 당산봉우리라 이름하였다. 해마다 설날에는 이곳 섬 주민들은 안마도 동촌(東村)마을을 큰아들, 신기(新基)마을을 둘째아들, 월촌(月村)마을을 막내딸로 정해 이 마을의 액운과 재앙을 없애 달라고 지성으로 빌었다.


  이때 당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상징으로 큰 대통나무 2개(길이가 50m, 반지름 6cm, 가로 12m)에 동백나무가 잎을 꽂은 다음, 흰 광목천으로 대통나무 전체를 감아 내리고 천 끝에는 긴 머리털과 큰 주머니를 단다. 이 대통나무를 모시는 사람은 대나무 하나에 2명씩 4명인데, 목욕재계하고 제사를 주관하게 된다.


  제물(祭物)로는 깨끗한 집의 수소를 잡아 올린다. 매끈이(끼니)마다 밥을 차려 놓고 농악으로 제를 지낸다. 제물(祭物)을 바친 후 치는 농악은 동촌마을에서 치고, 당산봉우리에 가 당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상징인 대통나무를 모시고 내려와서 섣달 그믐날 밤과 초하루까지 잔다. 초이튿날은 둘째 아들인 신기마을에서 농악을 치면서 동촌으로 가서 신(神)을 모셔와 밤을 샌다. 초사흘날은 막내딸인 월촌으로 모시고 가  하룻밤을 잔다. 초나흗날은 3개마을 농악대가 전부 합세하여 큰 집 동촌(東村)으로


모신후 그곳에서도 하룻밤을 더 잔다. 초닷새 날은 당산봉우리에 올라가서 神을 당항아리에 모신 후 대통나무 2개만 가지고 내려와 동촌마을에서 다음해까지 정중히 모셔둔다.


  옛날에 당산봉우리쪽에다 소변을 하거나 침을 뱉으면, 성기와 입술이 부었다고 한다. 한번은 송이도(松耳島) 사람들이 배를 타고 「철마」를 당산봉우리에서 훔쳐가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움직이지 않자, 당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노여움을 사서 그런다고 뉘우치고 제자리로 갖다 놓았다 한다.


  이러한 당제사는 '68년까지 이어 왔으나, 당봉우리에 해군기지가 설치'(69년)되면서 부터 제(祭)를 지낼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안마도(鞍馬島)는 정월과 6월, 연 2회에 걸쳐 동촌(東村), 신기(新基), 월촌(月村) 주민들이 주가 되어 산제(山祭)와 당산제 (堂山祭)를 지내고 있다.


34. 쌍복(福)바위(낙월면 상낙월리 뒷산)


  낙월면(落月面) 상낙월리(上落月里) 그리 높지 않은 뒷산 모퉁이에, 풍파에 시달리고 파도에 씻기어 그 옛날의 슬픔을 간직한 바위가 사방에 흩어져 있다.


  쌍福바위 중 하나는 山중턱에 솟아 있으며, 하나는 해면을 바라보며 슬픔에 젖은 듯, 조용히 앉아 있다. 이 두 바위는 현대인의 조각으로는 흉내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 바위에 얽힌 얘기는 다음과 같다.


  마을에 서로 장래를 약속하여 정혼한 두 쌍의 男女가 사랑에 젖어 있었다. 그즈음 두 남자 모두 때가 되어 나라의 부름을 받고 한 男子는 육군(陸軍), 한 男子는 수군 (水軍)으로 입영하게 되었다. 마을사람들의 전송과 女人들의 무운장구를 비는 애처로움을 뒤로하고 군에 입영하였다.


  육군으로 입영한 男子는 며칠이 멀다 하고 소식을 전하여 女人의 외로움을 달래 주었고, 그 여인 또한 소식이 올 때마다 목욕재계하고 정성들여 무사함을 기원하였다. 水軍으로 입영한 男子는 떠난 지 몇 년이 되도록 소식이 없어 女人은 정성들여 치성을 하지 않았다. 그후 난리가 평정되어 군사들은 모두 귀가하기 시작했다. 두 여인은 밤낮없이 선창에 가서 사랑하는 정혼자의 귀가만을 기다리는데, 두 男子중 육군에 입영하였던 男子만이 튼튼하고 건장한 몸으로 귀향하였다. 水軍으로 입영한 男子는 전사통지서만이 女人에게 날아왔다.


  水軍의 女人은 자기의 치성이 부족하여 전사하였다고 생각하여 뒷산 해면 福바위에 올라가 막막한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말았다. 父母들은 불쌍한 딸의 시체를 인양하여 바다가 보이는 산중턱에 안장하였다.


  그러나 정혼자를 따라가겠다는 女人이 산마루에 있게 되어 혼백은 언제나 정혼자 곁으로 가기를 염원하였다. 하루는 父母의 꿈에 나타나 "아버님 불효자식을 용서  하시소! 지아비는 바다에 있는데 어찌 저는 산에 있을까요. 바다에서 영혼이나마 서로 만날 것이오니 저를 무덤에서 파 관(棺)과 함께 그동안 혼수감으로 준비한 가위, 인두, 상자, 장롱 등을 바다에 띄워 주시소"하고 애원하였다. 깜짝 놀란 아버지는 딸의 선몽대로 하여 관과 함께 혼수감을 바다에 던졌다.


  이때 바다에 던진 가위, 인두, 상자, 농, 관 등이 상낙월(上落月)산과 해면에 바위가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故 이기태)

 

자료 : 2003 영광군 문화관광해설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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