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도 1학기 역사학입문 보고서(독후감)
韓國痛史에 대하여
장성환(09, 역사학과 복수전공)
다른 전공을 하고 있지만 나는 식민지 시대사에 관심이 많다. 가장 재미있는 분야이기도 하고 가장 예민한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더 흥미가 생긴다. 거기에 더해 1학년 때 여름, 겨울 방학때 일본에서 연수 겸 여행을 하고 난 뒤 식민지 시대사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을 선택했다.
한국통사(韓國痛史)는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선생님이 1915년에 태백광노(太白狂奴)라는 가명으로 쓴 책으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등과 함께 민족주의사학의 대표적 저서로 일컬어지는 책이다. 말 그대로 우리나라(韓國)의 아픈(痛) 역사(史)라는 의미로, 1864년부터 1911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자세하게 말하면 흥선대원군의 섭정부터 105인 사건까지의 역사가 기록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한국근․현대사를 공부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꼭 한번은 읽어 봐야 할 책이다.
이 책은 캉 유웨이의 서(序)와 총 3편의 본문 그리고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1편의 1장에서는 한반도의 전체적인 환경을 서술하고 있고, 2장에서는 역사의 대강(大綱)이라는 제목 하(下)에 상고시대인 고조선 시대부터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2편에서는 흥선대원군의 섭정부터 대한제국 성립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고, 3편에서는 105인 사건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결론에서는 발해의 멸망을 예로 들면서, 대한제국의 멸망을 설명하고 있다.
내가 본 책이 원본(原本)의 내용을 그대로 직역(直譯)한 것인지 의역(意譯)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책의 내용을 비판해 가면서, 혹은 Why?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읽었다. 물론 내 입장에서 이 책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다는 것은 철없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릭 프랭크(Erich Frank)는 그의 저서 「철학적 이해와 종교적 진리(Philosophical Understanding and Religious Truth)」에서 역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오직 인간은 자기의 과거를 고려함으로써만 생각하고, 행동하고, 인격을 이룰 수 있다. 여기에서 인간 존재의 역사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역사는 현재를 돌릴 수 없는 과거로 만들고 존재위에 새로운 현재를 가져오는 비판적 행동의 연속이다.
나는 역사관련 서적을 읽을 때마다 의문을 가지고 독서를 했다. 이 책의 내용이 과연 사실일지, 과장이나 축소가 없는지 계속 생각하면서 읽었다. 아무리 박은식 선생이 객관적으로 역사 서술을 했다고 해도, '객관적 의미에서의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박은식 선생이 역사를 왜곡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의문을 가진 것은 합방(合邦)이라는 말이다. 박은식 선생이 이 책을 저술할 때 합방(合邦)이라는 용어를 썼는지, 아니면 출판사에서 일부러 합방(合邦)이라는 말로 편찬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매우 중요한 요소가 숨겨져 있다.
합방(合邦)은 union의 의미로 합병(合倂)과 같은 의미이다. 영구적인 공통목적에 뜻을 모아 합의된 방식으로 주권을 공동 수행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복수(複數)의 국가가 결합하여 하나의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인 예를 들어보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후 남독일과 북독일이 합병하여 형성된 독일제국이 있다.
반면에 병합(倂合)은 annexation의 의미로 한 국가의 영역 전부가 타국에 이전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 피병합국은 병합국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합병국은 그대로 남는다. 즉 A+B=A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반면 합병의 경우 새로운 신국가가 탄생하는 것과는 차이점이다. 즉, A+B=C인 것이다. 따라서 병합은 정복(Conquset)의 의미를 가지는데, 1938년 히틀러가 통치하고 있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것이나, 1940년 소련이 발트3국(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을 병합 한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일본이 쓴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Treaty Regarding the Annexation of Korea to the Empire of Japan)」의 영문판에도 Annexation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일합방(韓日合邦)보다는 한일병합(韓日倂合)이 올바른 표현이며 한일병합(韓日倂合) 100년을 맞이한 올해, 용어의 올바른 사용이 필요하다. 우리 스스로 합방(合邦)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면서 일본이 주장하고 있는 '조선이 일본과 함께 하기를 원했다'는 말에 발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두 번째로 살펴 봐야 할 것은 나라를 잃은 원인을 서구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서구와 같이 스스로 개화되지 못하고, 일본처럼 스스로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약자로서 강자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 사회진화론에 입각하여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점령당할 수밖에 없는 몽매한 국민들의 한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적 역사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박은식 선생 뿐만 아니라 식민지 국가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초기에 가지고 있던 사상이기도 하다. 캉유웨이 역시 이 책을 읽고 스스로 강해져야 하며, 강해지기 위해서는 민족 정신을 끝까지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즉, 민족의 한을 풀기 위해서는 몽매한 우리 민중이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3․1운동 이후 무장독립투쟁을 지켜 보면서 사회진화론적 시각을 버리고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는 민족주의적 시각이 강화되어 역사를 바라보고 있다.
세 번째로 내가 의문을 가진 것은 진성여왕에 대한 서술이다. 역사의 대강(大綱)에서 진성여왕에 대해 '무능력 했다', '정치를 잘 못 했다' 와 같이 비판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진성여왕이 과연 무능력한 왕인지 다시 살펴 볼 필요도 있다.
진성여왕과 그 앞의 두 여왕인 선덕, 진덕여왕과 비교를 해 보자. 선덕, 진덕여왕의 경우 문․무 양 측에서 든든한 지원군을 가지고 있었다. 문(文)에서는 김춘추와 알천이 무(武)에서는 김유신과 같이 유능한 사람이 많았다. 반면 진성여왕의 경우 최치원을 제외하고는 난국을 이끌어 갈 능력이 없었다. 진성여왕의 남편인 김위홍도 상대등까지 오를 정도로 능력은 있었지만, 정치인 보다는 예술인적 기질이 강했다. 진성여왕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는 유교의 영향을 받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극에 달한다. 심지어 '어린 미소년들과 함께 유흥을 즐겼다'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이러한 기록이 사실일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해도 남성우월주의와 사대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쓴《삼국사기》를 왜 아무런 비판없이 인용했는지 의문이 든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역사서와는 많이 달랐다. 주로 이덕일, 김병기 등 재야학계 학자들의 책을 많이 읽었고, 학계에서도 강만길 교수님의《고쳐 쓴 한국 근대사》,《고쳐 쓴 한국 근대사》혹은 박노자 교수님의 책을 중심으로 읽었을 뿐이다. 고전으로는 징비록, 발해고에 이은 3번째 책이었다.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느꼈다. 그 시대 사람이 책이라서 그런지 그 시대를 더 잘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역사서에 대한 비판적 이해와 수용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주장한다.
서지사항
제목 : 한국통사(1915 발간/출판사 : 범우사, 2007 3쇄 발행)
저자 : 박은식/ 옮긴이 김승일
저자 소개
저자 : 박은식(朴殷植, 1895~1925)
민족사학자이자 언론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냈다.
황해도에서 농촌 서당 훈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며 호는 겸곡(謙谷) 혹은 백암(白巖, 白岩, 白菴)이며 필명으로 무치생(無恥生) 혹은 태백광노(太白狂奴)라 칭하면서 나라를 잃은 부끄러움을 자조적으로 표현했다.
박은식의 생에는 1기(1895~1897), 2기(1898~1909), 3기(1910~1925)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주자학적 가치관으로 인해 위정척사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2기에는 민중계몽운동에 힘을 쏟았다. 3기는 망명 이후 독립운동과 역사연구에 업적을 쌓은 시기이다.
언론인이자 계몽 운동가로 활발한 활동을 했는데, 황성신문(皇城新問)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동하였고, 한성사범학교 교사, 오성학교와 서북협성학교 교장등을 역임했다.
한일병합이후 중국으로 망명, 동명왕실기(東明王實記),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등을 저술하였고 1915년에 한국통사를 편찬하였다. 그 이후 1920년에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였고, 1924년 임시정부 2대 대통령에 추대 되었다.
그러나 1925년 11월 1일 지병인 기관지염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유해는 상하이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3년 8월 5일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알천 : 신라의 화랑으로 선덕여왕때 상대등을 역임했다. 문무 양 쪽에서 뛰어났으며 덕망이 높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덕여왕 사후 왕위 계승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늙고 병약하다는 이유로 김춘추에게 왕위를 양보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김유신과 김춘추의 세력에 의해 밀려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을 강의하고 있다. 2001년 한국인으로 귀화했으며, 한국어로 쓴 여러 책이나 기고문 등을 통해 토종 한국 사람보다 날카롭게 한국 사회 각 분야의 모순점을 진보주의적 관점으로 지적하고 있으며, 한국사회의 파시즘 경향을 주로 비판하였다. 한겨레 21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명림답부 : 고구려 차대왕·신대왕 시대의 인물로 고구려의 초대 국상(國相)이다. 말단 관리직인 조의(皂衣)로 있다가 165년(차대왕 20년) 쿠데타를 일으켜 차대왕을 폐하고 신대왕을 옹립했다. 172년 한(漢)의 현도태수(玄菟太守)가 이끄는 대군을 좌원(坐原)에서 대파하였다. 179년 9월 11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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