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데스다의 기적
요한복음 5:1~15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한 중풍병자의 치유 사건은 오직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기적으로는 세 번째로 기록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에 대하여는 1절에 이렇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시던 중 헤롯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친 후 얼마간 있다가 유대인의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명절이 유월절인지, 아니면 오순절 혹은 수전절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장소는 2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지금도 예루살렘 북쪽에 성 안나 교회 안에 베데스다 연못의 터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순례객들이 그곳을 자주 방문합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양문이라는 성문 곁에 있었는데, 양문은 성전에 드려질 희생 제사용 양들이 판매되던 시장이 가까이 있었던 곳입니다. 베데스다는 '긍휼의 집, 혹은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늘 많은 환자들이 즐비하였는데, 그 이유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이 걸렸든지 다 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곳을 예수님께서 찾아가셨는데, 그곳에서 38년 동안이나 중풍병으로 시달려 고생하던 한 병자를 예수님께서 깨끗이 고쳐주시는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이 베데스다의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 속에는 우리가 명심해야 할 몇 가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로, 인간의 절망적 상태를 생각나게 해줍니다.
2절과 3절을 보면, 당시 베데스다 연못의 상황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베데스다의 연못 주변에는 행각 다섯이 있어서 바람과 비를 피해주고 더위를 피할 그늘이 드리워주는데, 그곳에는 수많은 환자들이 즐비하니 모여 있습니다. 3절에 그 병자들의 모습을 예로 들어주는데, 맹인이 있습니다. 다리 저는 사람이 있습니다. 혈기 마른 사람들이 나옵니다. 어찌 그뿐 이겠습니까? 가쁜 숨을 몰아쉬는 천식 환자들도 있을 것이고, 중풍병 환자나 말 못하는 환자나 귀를 듣지 못하는 환자나 각종 암으로 죽어가는 환자들이 즐비했을 것입니다. 그곳에는 상처 썩는 냄새, 오랫동안 씻지 못하여 나는 악취, 음식 쓰레기 냄새 등이 진동하였을 것입니다. 한편 고통으로 인하여 신음하는 소리, 가족들의 슬픈 울음소리, 옆에 환자와 다투거나 짜증을 내는 소리 등도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오늘날 난민촌과 집단 수용소나 응급실과 중환자실과 암병동 주변의 모습들이 섞여 있는 것이라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들은 날마다 베데스다 연못이 한번씩 물이 움직일 때 그곳에 뛰어들어가는 기적 외에 아무런 희망이 없는 사람들만이 모인 것이니, 그들은 나머지 모든 다른 수단들을 다 사용했음이 분명합니다. 그 동안 많은 재산을 병을 고치는 데 다 써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어서 마지막 희망을 걸고 이곳으로 흘러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마음속에 절망과 슬픔과 분노가 쌓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언제 그 베데스다 연못이 움직일 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그것만을 기다리는 불쌍한 신세가 그들의 상태인 것입니다.
마치 이 베데스다의 연못에 모여든 군상들의 모습은 인간의 실상을 보여주는 현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예기치 않게 병에 걸리지 않습니까? 병원에 가서 고치기도 하지만 때로는 병원의 의사도 손을 쓰지 못한 채 결국 불치의 선언을 받고 암병동으로 옮겨지고 머리카락을 다 깎고 암치료를 받지만 서서히 그 육체가 죽음의 세력 앞에 굴복되어가는 모습을 봅니다. 아름답고 싱싱하였던 피부가 급격히 노화되고, 주름살이 늘어나고 몸이 풍선처럼 불어나거나 아니면 바람빠진 풍선처럼 급격히 줄어들기도 하면서,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져서 판단력이 다 흐려져가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다가 하나 둘씩 죽음을 맞이하여 세상을 떠나가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병원에 종종 가다 보면 그곳에서 우리들은 수많은 병자들이 병실마다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병원 복도를 가거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보면 침상채 수술실로 급하게 실려가는 모습들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수술실 곁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가족들의 슬픈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아담과 하와 이래로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이 급격하게 맞이하거나 평탄하게 맞이하건 간에 어느 정도는 경험하게 되는 인간의 모습들입니다.
그들에게만 닥친 불행이 아니고 어떻게 보면 우리들도 언젠가 그 자리에 있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 중 누가 한번도 병원 신세 지지 않을 자 있습니까? 우리 중 누가 수술실에 들어가지 않을 자 있습니까? 우리 중 누가 자신은 맹세코 절대 암에 걸리지 않는다고 장담할 자가 누가 있습니까? 우리 중 누가 자신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모두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 있는 환자들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불행과 고통, 질병과 슬픔, 죽음의 위협을 고스란히 당하면서 그것과 맞서 싸우나 스스로는 결코 그 불행과 위협을 이길 힘이 아무 것도 없는 무력한 존재가 우리 모두입니다. 아담 이래로 어느 누구도 죄로 말미암은 이 숙명을 불행을 피할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베데스다 연못의 모습은 참으로 불행의 전시장이요 우리 인간 모두의 슬픈 자화상과 같습니다.
둘째로, 주님의 크신 자비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배를 드리고자 하시면 먼저 성전을 찾으셨을 것입니다. 왕궁을 보러 가시려면 왕궁 가까이 가셨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공부하는 학당을 구경하러 가셨다면 랍비 학교를 찾으셨을 것입니다. 활기 넘치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으시려면 예루살렘의 시장도 가볼 만한 곳일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 안에는 천년 도읍지이기 때문에 구경할 만한 유적지도 적지 않게 많이 있어서 예수님께서 구경하고 싶으면 찾을 만한 곳이 적지않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이번 행차 때에 다른 곳보다 이 베데스다 연못을 일부러 찾아가셨습니다. 그 침울하고 고통스러운 절망의 처소에 일부러 찾아가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성에서 가장 냄새나고 소란스럽고 절망적인 장소를 예수님이 찾으신 것은 예수님께서 슬프고 어둡고 낙심과 절망이 가득한 곳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품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슬픔과 고통이 있는 곳, 사람들이 가기 부담스럽고 꺼리는 곳을 마음에 두시고 성령으로 그곳을 찾아가시고 불쌍히 여기사 사람들을 어루만지시고 위로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41편 1절에서 3절까지 나오는 말씀에 보면,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주시나이다”(시 41:1~3)
라고 하였습니다. 병든 자, 낙심한 자, 상처 입은 자, 갇힌 자들을 가까이 하며 그들을 동정하며 위로와 격려와 사랑을 베푸는 자들을 주님께서 복을 주시고 재앙의 날에 건져주시고 병상에 있을 때 고쳐주실 것을 믿으시고, 우리도 자비로우신 주님을 본받아 그러한 자비를 실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주님 자비의 무조건적 은총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의 연못에 가셨을 때 그곳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방문하신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고, 예수님께서도 조용히 그곳을 둘러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중에 서른 여덟 해 동안 병을 앓고 있는 한 병자를 발견하시고 그에게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환자를 깨끗이 고쳐주셨습니다.
여기서 그 환자가 예수님으로부터 병을 고침받는 은혜를 입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 환자가 믿음이 있어서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아예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자기가 병을 고침 받아야 하겠다는 열망이 컸습니까? 그는 그러한 열망도 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그는 “자기를 도와주어서 연못에 밀어 넣어주는 사람이 없다.”라고 말을 했을 뿐, 병을 고쳐보겠다는 의욕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병이 낫지 않고 자기 환경이 절망적으로 변할 때 사람은 침체하게 되고 이렇듯 기대감도 다 사그러져 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면 그가 아픈 중에 깊이 자기 죄를 회개하는 마음을 가졌는가요?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베데스다의 수많은 환자들 중에서 그 삼십 팔 년 된 중풍병 환자를 택하시고 그를 고쳐주신 것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 환자가 그러한 은혜를 입을 만한 공로가 그에게 전혀 없었습니다. 오직 그가 이렇게 은혜를 입은 까닭은 예수님께서 그를 주권적으로 선택하여 그를 고쳐주시기를 기뻐하셨다는 점 외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굳이 한 가지 이유가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 그 연못에 있던 사람들 중에 가장 절망적이고 가장 희망 없는 자라는 점 외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하늘은 스스로 자기를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말들을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도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주어진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 베데스다의 연못의 삼십 팔 년 된 중풍병자의 치유 사건은 그 환자에게 아무런 선한 것이 없음을 말해줍니다. 그 환자의 치유 사건은 아무런 믿음도, 스스로 자기를 고쳐보겠다는 의지도, 예수님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전혀 없는 중에 전적인 조건없이 부어진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도 전적인 선물임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수많은 베데스다의 연못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중에서 택하심을 입은 것은 가장 불쌍한 상태여서였는지 모릅니다. 가장 못나고 가장 약해서 아무런 소망이 없는 자였기 때문에 주님이 택하여 구원해주신 것인지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모를 때부터 주님은 나를 아셨고, 지옥 천국이 있는 지도 모르고 구원받아야 한다는 의미도 모르고 그러한 의지도 없었는데, 주님이 그런 나를 일방적으로 불쌍히 여겨주시고 나를 구원해주셨다는 점입니다. 내가 주님을 찾은 것 아니요 주님이 나 있는 곳에 찾아오셨고, 나를 보셨고 내게 말을 계속하여 걸어주셨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가 정말 새롭게 되기를 원하느냐?”라고 의욕을 갖도록 감동을 주셨고 끝내 나를 고쳐주셨다는 점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는 자비, 이것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주님의 자비요 우리 삶에 베풀어주신 주님의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주권적인 선택으로 날 택해주시고 아무런 조건없는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찬양합시다. 또한 우리도 조건없는 사랑을 받았으니, 주님이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아무런 전제 조건 없는 자비를 베푸는 것을 조용히 실천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러해야 하겠지만, 교회 밖에서도 그들이 믿음을 가진 것을 따지지 말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손을 펴서 돕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넷째, 주님의 크신 능력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삼십 팔년 동안이나 병으로 고생하면서 점점 병이 깊어진 그 환자에게 다가가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환자는 그 말을 듣고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연못에 천사가 임하여 물을 움직여 주기만을 기다리면서 그 못에 자기를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밀어 넣어줄 도울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단지 실낱같은 가능성을 붙들고 있을 따름입니다.
하지만 베데스다 연못의 물을 움직이게 하는 치유의 본체이신 분이 바로 자기 앞에 계신 예수님이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물에 넣지 않고도 얼마든지 고쳐주실 수 있는 의사이심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말을 듣고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의 말씀은 세 마디였습니다. 일어나라! 네 자리를 들어라! 걸어가라!
이 세 마디는 이 사람에게는 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삼십 팔년 동안 굳어져버린 몸이 어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나이까지 많이 들어버리고 근육이 다 풀려 버린 그가 어찌 자리를 들 수 있겠습니까? 삼십 팔년 동안 한번도 일어나 본적도 없는 그가 어찌 계속 서서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9절에 보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에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한 즉시 그 사람은 중풍병에서 해방되어 완전한 기력을 회복하여 이처럼 일어나 자리까지 손에 들고 힘차게 걸어가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의 연못가에서 가장 오랫동안 질병으로 고생한 분을 찾아가 그 병이 깊은 것을 보시고 그를 고쳐주신 까닭도 그의 능력이 심히 크심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삼십 팔년이나 되는 오랜 중풍병자와 같이 종종 우리에게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뛰어넘을 수 없는 난관이 있습니다. 개인과 가정의 고통스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충동적인 분노 기질이나 질투나 허영이나 물질적인 탐욕의 욕망일 수 있습니다. 혹은 음주 습관이나 도박 중독이나 흡연 중독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어떤 사람이나 물질에 대한 그릇된 집착일 수 있습니다. 혹은 과거의 깊은 상처와 씻을 수 없는 어떤 상실의 아픔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본인 마음에 병이 되고 자신과 가족과 이웃의 불행과 슬픔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을 극복해야만 참된 자유와 행복과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는 그것을 고쳐보려고 애를 쓰고 수고하고 힘써보아도 소용 없습니다. 그래서 자포자기하고 절망과 낙심의 눌려 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 삼십 팔 년 된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가 만지시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가 말씀하시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인정할 그 때에 와서 만져주십니다. 내 손을 들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라고 말씀 드릴 때 그분이 내 삶을 접수하십니다. 내 모든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주십니다.
때로는 주님께서 우리 문제를 천천히 바꿔가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완벽하게 바꾸어가신다는 점입니다. 죄의 문제도 주님이 이길 힘을 주셔서 점점 힘을 얻고 이겨가게 해주시고, 기질의 문제도 점점 바뀌어 주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 자유케 해주십니다. 도박 중독으로 이 돈 저 돈 정신없이 끌어들여서 수십 년을 도박판을 전전하던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더니 완전히 달라져서 기도하는 사람, 전도하는 사람으로 달라집니다. 최근 국민일보에 역경의 열매에 간증한 개그맨 출신 배영만 전도사가 도박으로 망했다가 믿음으로 살아난 주인공입니다.
참으로 주님은 자비로우십니다. 그리고 크신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단지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길 뿐 아니라 우리를 고쳐주기시기에 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안된다. 내 남편은 절대 안변한다. 내 자녀는 절대 안 고쳐진다.”라고 체념하지 맙시다.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주님께 맡기고 매달립시다. 내 힘으로 안되는 것을 인정하고, 전능자이신 완전한 의사이신 주님께 도움을 청합시다. 반드시 주님은 우리를 고쳐주시고 우리가 맡기는 모든 문제를 놀랍게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주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
“주님이 해결치 못할 문제는 없다.”
다섯째, 은혜받은 자의 책임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이 고침받은 중풍병자가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고침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전에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 때 마침 예수님께서도 그 성전에 들어가셨다가 그 사람을 만나시고 그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말씀은 참으로 그 중풍병자의 병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그 중풍병자가 38년 전에 중풍병에 걸리게 된 원인이 바로 죄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병이 죄 때문에 생기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하실 일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병을 허락하시기도 한다고 말씀해주신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중풍병자의 경우에는 그 병의 원인이 바로 죄의 문제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 죄가 무엇이었는지는 주님과 그 사람만이 아는 비밀입니다. 그 중풍병자는 자기 병의 원인이 바로 그 죄의 문제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채 38년 동안 지내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은 채 그 때까지 왔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적이며 전적인 자비를 베풀어주사 그 병을 완전히 고쳐주신 것입니다. 이제 그 고침받은 중풍병자는 그 나이가 60세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겠지만, 그 기질상, 그 성품상 다시 범죄할 수 있는 위험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이 귀한 경고를 아끼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그를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다시 죄를 범하면 더 심한 것이 생길 수 있기에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다시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38년 동안이나 고생했던 그 중풍병보다 더 심한 것이란 어떤 것일까요? 여하튼 어떤 질병이든지 더 고통스럽고 더 비참한 질병이겠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더 심한 것은 지옥에서 겪는 고통이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받은 후에 그 은혜를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세상과 마귀와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우리가 은혜받은 후에 곧장 시기하며 우리에게 달려들어 그 은혜를 도적질하려고 이리 저리 시험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받은 후에 더욱 깨어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를 괴롭혀 왔던 그 고질적인 질병의 원인이 되는 그 죄가 다시 세력을 얻어 또 다시 우리를 넘어뜨리지 않도록 정말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큰 은혜를 주님으로부터 받았다고 곧장 인간으로서의 연약한 기질이 다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받은 후에도 자신이 여전히 연약한 존재임을 기억하고 깨어 기도하며 은혜 중에 성장하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단지 은혜를 유지하는 것에만 머물지 마십시오. 더 큰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받은 은혜를 마중물 삼아서 주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에게 헌신하는 삶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은혜가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이지만 그 은혜를 지켜가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은혜 중에 더 풍성한 은혜를 사모하며 성정하는 것은 은혜받은 자의 축복이며 특권이며 영광입니다.
그 나은 중풍병자에게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자상한 사랑의 심정으로 날카롭게 경고해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한평생 실망시키지 말고 도리어 베풀어주신 예수님의 은헤에 보답하여 더욱 그를 만족시키고 기쁘게 해드리는 성숙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으로 베데스다의 연못에 모여 있는 수많은 병자들은 인간의 절망적 상태를 생각나게 해줍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 주님이 찾아오셔서 그들 중에 가장 절망적인 사람을 향하여 아무런 조건없는 크신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께서 그 능하신 능력으로 그를 완전히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고쳐주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문제도 예수님께서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그 크고 넓고 넘치는 자비와 그의 놀라운 능력을 믿고 우리 모두 용기를 냅시다. 염려와 근심을 버립시다. 그에게 모든 문제를 맡깁시다. 우리의 모든 상처와 아픔과 고통도 다 맡깁시다. 주님이 우리를 만지실 때, 우리의 문제와 상처를 만지실 때에, 어떤 노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던 문제들이 완전히 해결될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우리 삶의 문제들 저변에 혹시 죄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죄가 우리 문제의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죄를 살펴서 주님 앞에 내려놓읍시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우리 양심이 주님 앞에서 거리낌이 없도록 그것들을 주님 앞에 용기를 내어 내어놓을 때 주님은 기꺼이 죄를 사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들을 기꺼이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은혜를 많이 받았더라도 다시 죄를 범한다면 더 심한 것이 생길 수 있다는 주님의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은혜를 은혜 되게 잘 지켜갑시다. 은혜를 도적질당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한평생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더 열심히 주를 위하여 헌신함으로 달려갑시다. 그리하여 주님이 은혜 주신 것을 기뻐하고 만족할뿐더러 우리에게 예비하신 더 많은 은혜들을 즐거움으로 우리에게 더해주실 수 있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생각하건대, 베데스다 연못은 교회의 상징입니다. 주님은 베데스다의 연못에 즐비한 많은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곳에 찾아오셔서 살펴보시고 그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풀어주셔서 그들을 고쳐주신 것처럼, 지금도 주님의 교회를 찾아오셔서 자비와 능력을 베풀어주시고 계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우리에게 물으시며, 치료해주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나 같이 오랫동안 앓고 있는 이 병도 고침받을 수 있나요?
나같이 믿음 없는 사람도 은혜받을 수 있나요?
나같은 사람도 삶에 변화받을 수 있나요?
나의 기구한 삶의 운명도 바뀔 수 있나요?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아무런 조건을 걸지 않고 그토록 희망 없던 삼십팔년 된 그 중풍병자를 깨끗이 고쳐주신 것처럼, 주님은 우리들에게도 크신 자비와 놀라운 능력을 베풀어주시며 우리의 영혼과 몸과 삶에 이렇게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은혜의 기적이 이 시간 우리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472장 네 병든 손 내밀어라,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 찬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