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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대부터 20대까지 소록도 원장
1965년 16대 윤석우 원장부터 1974년 21대 장경식 원장까지
10년 동안 6명의 원장시대는 흔히 말하기를
육.칠십년대라 일컫는 소위 박정희 군사독재시절의 중심이기도 하다.
아름답고 작은섬, 평화로운 섬 소록도에
가슴 아픈 천형의 병을 체념으로 안고 사는 한센병 환우들,
그들은 배고프고 가난해도 그냥 살았다.
주는 대로 먹고 살며 불평불만도 없었다.
6.7십년대 눈부신 발전과 개발로 잘살아 간다는데,
부정과 부패는 왠일인가?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야 하는 원장은 왜 인가? |
▲ 4살에서 15살까지 보육소에서 생활하는 미감아동
미감아동(未感兒童) 의학적 구분은 과현 정당한가?
조그만 어항 속에서
꼬리치는 금붕어야
넌 무슨 잘못이 그다지도 많아
날이 날마다 조그만
어항 속에 갇혀 사니.
직원 자녀들이 다니는 소록도 초등학교와 미감아동(未感兒童)이 다니는 소록도초등학교 갱생분교가 있다.
갱생분교에서 따로 교육을 받고 있는 미감아동들은 부모가 환자라는 이유만으로 벽을 쌓고 따로 마련한 분교를 만들어 격리교육을 시킨다.
이건 어른들의 잘못이고 언젠가는 꼭 개선되어야 할 일이다.
그들의 심정이 일반아동과 격리되어 생활하여야 하는 외로운 처지가, 이상과 같은 시(詩)를 통해 표현되기도 했다.
이 무렵 각 지역 미감아동들의 취학 문제가 사회문제로 대두된 가운데, 소록도의 미감아동에 대한 취학문제도 언론에 크게 보도했다.
국립의료원 윤석우(尹錫宇) 부원장이 16대 소록도 원장으로 부임(1965.1.1일자)하면서 서울 장충초등하교에 다니던 자녀(여상11, 여진6)들도 소록도초등학교에 전학시켰다.
당시 주요 언론들은
-『나환자 마을에 새 역사가..., 원장 두아들 미감학교에 취학, 그릇된 인식 불식(拂拭)』 (1965.4.6 전남매일) -
-『이젠 장벽은 없다. 미감아 멀리하던 적선(赤線)을 지워. 병원장 윤씨의 종용으로 혼합편성』(1965.4.7 서울신문) -
-『미감아는 나환자가 아닙니다. 벗이 될려 애써요』(1965.5.25 조선일보) -
라는 제하의 기사를 보도함으로 원장의 자녀들이 마치 미감아동이 다니는 소록도초등학교 갱생분교에 전학을 한 것처럼 알려졌다.
당시 전국각지에서 신학기 때마다 연중행사처럼 미감아동 취학문제가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비슷한 상황에 있는 소록도를 집중취재 보도한 것이다.
윤 원장은 부임초부터 미감아동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보육소(미감아동 격리보호 기관)의 미감아동을, 직원자녀가 다니는 학교와 통합하여, "이 아이들에게 슬픔 대신 희망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자신의 소신을 평소에도 자주 피력했다.
당시 소록도 초등학교 김갑출(金甲出) 교장은 “나병은 불치병도 아니며 유전병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소록도병원 내에서 아직도 미감아동들을 별도 취학시킨다는 것 자체부터가 모순된 일이다”고 지적했으나, 이 문제는 일부 교과별 통합수업 단계서부터 여러 난관에 부딪혔다.
그러나 환자들은 윤석우 원장의 이런 노력과 김갑출 학교장의 소신만을 언급, 이를 높이 평가한 일면이 있다.(소록도 80년사 발췌)
일찍이 김상태 원장 재임(1948~1954년)시 본인의 자녀 4남매(태언, 우길, 순삼, 가자)를 소록도초등학교에 취학시켰다.
당시 병원약사 계장을 지낸바 있었던 최정일 씨의 증언에 의하면 “장남 태언 씨와 차남 우길 씨는 소록도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상태 원장의 뜻이 미감아동과 일반 자녀의 통합교육을 염두에 두기까지는 뜻이 미치지 못한 부분이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나환자 2․3대들이, 소위 미감아(未感兒)라는 이름으로 겪는 삶의 수난사는 현재까지도 사회 곳곳마다에서 들씌워있던 수많은 차별과 모멸은 이루 헤아릴 수 가 없다.
오로지 병든 죄 밖에 없는 부모의 불행을 그 후손에까지 멍에를 씌워 주는 우리 사회의 모진 풍토에 대해 같은 하늘아래 함께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깊이 뉘우치고 사죄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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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원 50주년 기념비
개원기념일 “소록도의 3.8선이 트이는 날”
그 동안 간소화되었던 개원기념일 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키로 하여, 평소에는 전염병지역이라 하여 철조망을 치고 제한하던 병사지대를 이날 만큼은 자유롭게 출입하여 구경하도록 크게 배려했다.
인근 주민들은 개원기념일을 “소록도의 3.8선이 트이는 날”이라며 일손을 놓고 관광에 나섰다.
운동장은 환자들의 경기를 관람하기 위한 구경꾼들로 장사진을 이루었고, 환자들은 오랜만에 다른 외지 사람들을 역으로 구경하기에 바빴다.
눈썹이 없는 여자 환자들은 눈썹을 곱게 그렸고,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환자들도 이날 만은 수갑을 풀고 나오는 은전(恩典)을 누렸다.
환자들의 응원전은 상대마을을 은유하는 응원가를 부른다. 소록도 7개리로 구분하여 익살스럽게 전주(前奏)삼아 불렀던 응원가를 소개한다.
- 건강이 많아서 조무원 발탁이 잘되는 ‘감투 잘쓰는 장안리’ -
- 마을 대항 경기 때마다 트집을 잘 잡는 ‘오기 많은 신생리’ -
- 으슥한 곳이 많고 남녀 결합이 잘되는 ‘연애 잘하는 남생리’-
- 좋으나 궂으나 남의 마을 앞에 왈가왈부하지 않는 ‘있으나 마나 동생리’ -
- 지리적 북풍이 많이 닿는 다고 ‘바람 많은 구북리’ -
- 전망 좋은 경관으로 직원지대를 인수 받았다고 ‘경치 좋은 서생리’ -
- 부자유 고참 환자가 많아 비평을 잘 하는 ‘말 많은 중앙리’ -
등의 노랫가사로 서로의 흥을 돋궈가며 응원전을 펼쳤다.
윤석우 원장이 기념행사를 치른 2개월 후인 1965년 7월 31일 소록도에 부임한지 7개월 만에 떠나게 된다.
부임하기 전부터 나이지리아 주재 W.H.O 고문관으로 내정되어 있었기에 원장직을 사임하고 가족과 함께 해외로 떠났다.
그의 갑작스런 이임은 소록도 미감아동이 다니는 분교와 통합문제 등이 남아 많은 미련과 아쉬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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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원 50주년 기념행사 및 체육대회(1966.5.17일)
부정 사건들과 맞물린 개원 50주년 행사
원장이 공석 중에 부식구입 입찰에 따른 부정사건이 발생하여 각 신문이 앞 다투어 이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관련 업자와 직원들이 수배되거나 구속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의 연속이었다.
1965년 9월 27일, 약 2개월 동안 공석 중이던 원장에 국립익산병원 정정모(鄭正謨)원장이 전임 발령되면서 분위기 쇄신에 전력을 다쏟았다.
새해를 맞으며 원장은 환자위주로 병원을 운영 하겠다는 부임 초의 각오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일시 폐지되었던 ‘통장제도’를 다시 실시하게 된다.
이 제도의 보완으로 ‘조무원 처무규정’을 제정 공포하고 박종일 씨를 통장으로 임명, 조무원 280명을 발령하니 바야흐로 ‘환자자치시대’가 열렸다.
개원 50주년의 대행사를 병원에만 의지했던 과거의 관행을 버리고, 환자들 스스로를 위한 축제로 결의하여 행사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자주적인 노력이 시작되자 의외로 외부의 협조자가 늘어났다.
시나리오 작가 김경(金卿)씨가 서울에서 모은 많은 도서를 기증하였으며, 이 시기에 젊은 환자의 애환을 그린 투병기 ‘그대 옆에 가련다’ 라는 영화가 만들어져 개봉되기도 했다.
개원 50주년 기념행사 계획은 첫째날 기념식과 대운동회, 둘째날 전국의 한센인 가족체육대회, 마지막 셋째날 예술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본관 앞에 개원 50주년기념(開院五十週年記念)을 새긴 기념비를 세웠으며, 당일인 1966년 5월 17일 오전 9시를 기해 신형식 국회의원, 정희섭 보사부장관, 김보현 전남지사 등의 귀빈을 맞아 팡파르(Fanfare)가 울려 퍼진 가운데 성대하게 치뤄졌다.
개원 50주년 기념행사가 끝나자 전년도 '부식납품 부정사건'(65.9월)에 대한 환자들의 의구심과 언론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면서 병원에 대한 각종 불평과 유언비어까지 나돌아 불신이 극에 달았다.
결국 7월 31일부터 8월 14일까지 감사원 감사를 실시하여, 26건의 비위 사실이 밝혀지자 신문에 8차례 보도되어 소록도병원의 명예가 크게 실추되었다.
이 사건으로 정정모 원장은 무혐으로 풀려났으나, 부정사건 등의 복잡한 사정으로 인하여 1년을 채우지 못하고 1966년 9월 1일자로 발령을 받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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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미안재단’의 공적을 기리는 공적비(1971년 건립)
‘다미안재단’ 협정 및 차윤근 원장 재임
1966년 9월 1일, 6년여의 세월이 흐른 후 개인자격으로 두 번째이며, 역대 18대로 부임한 차윤근 원장의 입성은 그 의미와 뜻이 다르다.
1964년 11월에 내한한 인도주재 W.T.O 나병 고문관인 벨기에의 어머레이크 박사가 병원을 방문하여 나환자들의 재활수술을 위한 의료 원조를 제의 하였고, 병원은 이를 즉각 수락함으로써 이들이 먼저 의사와 간호사를 파견하여 환자들을 간호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 보건사회부는 1966년 4월15일 벨기에 ‘다미안재단’과 향후 5년간 우리나라 구라(求癩)사업 지원에 대한 협정을 체결하게 되었고, 보사부 차윤근 보건국장과 와인가르트 재단 이사가 전문7조로 된 협정서에 서명했다.
이 협정이 체결되자 오스트리아 간호사 3명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천주교의 ‘그리스도왕 시녀회’ 소속 수녀로 회칙에 따라 수녀복을 입지 않고 평상복으로 활동한다.
벨기에의 ‘이다크라센스’ ‘안마리가이’ 간호사는 함께 아프리카 콩고의 나환자촌에 정착하여 젊음을 바쳤으며, 특히 ‘안마리가이’ 간호사는 오빠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하는 불운을 겪는 등 우리나라와는 슬픈 인연을 맺고 있다.
나환자를 극진히 돌보다가 자신도 한센환자가 되어 일생을 바친 다미안 신부의 정신에 따라 창설된 ‘다미안재단’은 세계 여러 곳에서 한센인을 돌보아 왔으며, 소록도병원에 파견된 이들도 헌신적인 활동을 했다.
차윤근 원장은 ‘다미안재단’ 과의 협정에 따라, 제일 먼저 병력지 작성에 착수하게 된다.
‘다미안재단’ 의사 반드로겐과 그의 간호사들의 협조를 얻어 4,300여명의 환자들을 7개월에 걸쳐 검진을 하는 동안, 겨울철에는 대부분 부자유 환자들을 수진(受診)하느라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에 상응한 성과도 있었다.
검진을 마친 후 몇 가지 불합리한 사례를 들어 보건사회부에 건의했다.
「적절한 치료 가능한 환자를 의료 조무원 등의 집도로 많은 불구자를 발생시키는 일」
「빠른 시일에 완치 될 수 있는 환자를 D.D.S 등 주치의와 의약보급 부족으로 장기화 되는 일」
「나환자가 격리 되어야 할 병원에 일반인이 섞여있다는 점」
이에 대한 보건사회부측의 해명은 옹색한 변명으로 일관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968년 9월 16일 런던에서 개최된 제9차 국제나학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차 원장은 그 복명서를 소록도 연보에 소상히 보고했다.
역대 원장으로 재직 중 국제나학회에 참석하고 전원생에게 연보(年譜)를 통해서나마 알림으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재원자중 젊은 청년들을 모아 간담회를 갖기도 했다.
이렇게 환자들과 원장의 격의 없음이 실효를 거두었는지, 직원들의 비위를 거슬렀음인지, 그 후 직원들 간에는 오연(傲然)을 피웠다고 빈축을 사기도 했다.
차윤근 원장은 이런 일이 발생한 몇일 후 1969년 5월 5일자로 ‘가족계획연구원’ 원장으로 전보되었다.
차 원장의 재임시 원행정은 후일 역사의 정당한 귀취(歸趣)에 따라 시시비비가 가려 지겠지만, 1960년 6월 3일, 1차 이임에 대해 크게 아쉬워하는 원생이 별로 없었음은 아이러니(irony) 하다.
나병원 일원화 정책에 따른 김웅식(金雄植)원장 부임
1969년 5월 1일자로 보건사회부 김웅식(金雄植)만성병 과장이 19대 원장으로 부임한다.
그는 서울의대 출신으로 수도의대에서 약 6년간 교편생활을 하다가 1961년 국립 칠곡병원 의무과장으로 나계에 처음 투신하게 된다.
이 무렵 정부가 "국립소록도병원을 재외 한 전국 나병원을 패쇄 하라"는 ‘일원화계획’이 가시화 되면서부터, 원생들의 입지가 점차 좁아지며 항상 불안한 상태에 놓였다.
이에 각 육지의 정착지 대표들은 “차라리 한 많은 소록도병원을 폐쇄하고 서울 가까운 곳에 현대적 설비를 갖춘 중앙나병원을 세워 줄 것”을 요청했으나, 정부에서는 이를 일축하고 오히려 소록도병원의 기능을 확대하여, 나환자 관리의 중추적 역할을 한다는 방침을 발표한다.
이런 상황에서 원장의 사소한 움직임에도 원생들은 예민하게 움직인 가운데, 김 원장 부임과 동시에 맞게 되는 금년의 5.17개원 행사는 그 의미가 깊다.
몇해 동안 간단한 기념식만 지내오던 생일행사를 금년에는 좀 성대하게 거행하자는 원생들의 희망에 따라, 즐거운 축제를 열게 해서 환자들 스스로 자축하도록 충분히 배려했다.
이날 개원기념식에 참석한 고흥출신 서민호(徐珉濠)국회의원은 여러 내빈들과 함께 ‘테이프커팅’을 마치고 금일봉과 ‘나의 옥중기’를 증정했다.
그가 문예실 방명록에 "신념은 모든 것을 극복하고 좋은 결과를 가져 온다"라는 내용의 문구를 남겼다.
1970년대를 맞으며 김웅식 원장은 짧은 기간으로, 병원실정도 제대로 파악 못한 체 3월24일자로 국립마산병원장으로 전임발령을 받고 떠났다.
진시왕이 공과대학을 나와서 만리장성 쌓았나?
제20대 조창원 원장은 18대 차윤근 원장과 함께 역대 두번째 재임원장으로 부임한 셈이다.
1960년대 초반, 육군대령 군의관 신분으로의 소록도병원장은‘오마도 간척공사’ 에 얽힌 ‘애환의 사연’에 따라 전에 언급(7회)한 바 있었기에, 주로 1970년대 초반에 활동한 기록이다.
“의사가 무엇을 알아서 간척공사를 하느냐”라고 공격 할 때 마다
“나는 진시왕이 공과대학 나와서 만리장성 쌓았느냐?” 고 반문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재부임 제 일성(一聲)은 ‘오마도 간척사업’에 대한 애착과 분노가 재부임 인사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업무가 시작되자 원장실을 치료본관으로 옮겨 미감아 문제를 처리했다.
미감아 보육소를 폐지하여 사회에 연고자가 있는 경우는 즉각 퇴거시키고, 원내에 부모가 있는74명은 돌려보냈다.
이로 인해 언론에 보도되어 조 병원장에 대한 사회의 비판이 비등 했으나, 그의 지론은 초지일관(初志一貫) 변함이 없었다.
그의 미감아동에 관한 3대 원칙은 다음과 같다
- 미감아동 보육소 운영의 경제성 손실 -
- 미간아동 감염 사례가 전무한 학자들의 주장 -
- 자기 자식은 반드시 자기 부모가 키워야 하는 천륜 강조 -
그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아직도 보류상태인 셈이다.
조 원장이 드물게 개인적인 심경을 직접 토로(吐露)한 사실이 있어 참고로 남긴다.
서울대학교 김홍식(金洪植) 은사가 “해방 전에는 소록도 나병원을 일인(日人)의사가 맡고 있었는데, 해방도 되었으니 사명감에 불타는 젊은 의사가 한번 가볼만 하지 않겠느냐”라는 권유로 소록도에 갈 것은 결심하고, 5.16사건 직후 부임한다.
아내가 “그런 사지(死地)에 어떻게 들어가느냐?”며 반대했으나, 아내는 결국 인술의 참뜻을 이해하고 동행해 주었다.
처음에는 꺼림직 했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여가선용으로 동생리 선창을 찾아 낚시를 즐겼으며, 소록도에 지천으로 널린 각종 고목의 뿌리를 활용한 목공예 취미에 몰두하기도 했다.
조 원장은 1972년 3월 6일에는 국립공보관에서 전시회를 가져 뿌리공예 분야에 일가견을 인정받기도 했다.
또한 개인 조창원의 인간적인 진면(眞面)을 확인할 수 있는 분이기도 하다.
1974년 1월 24일, 조창원 원장은 <전남매일신문>사가 제정한 제1회 전남지역개발 ‘대웅상(大熊賞)’ 복지공로 분야를 수상하게 되었으나 호사다마(好事多魔)랄까, 동년 2월 초 수상을 앞두고 ‘돼지사건’ 이라는 뜻하지 않는 투서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조창원 원장 이하 관련 간부들이 대거 횡령, 상납 등 갖가지 혐의로 구속되자, 연일 일간 중앙지 등이 대서특필로 보도했다.
21대, 장격식 원장 20여일 부임
조창원 원장이 1974년 2월 19일자로 면직되자, 장경식(張慶植) 보사부보건국장이 승진하여 21대 원장으로 부임한다.
장 원장은 각부 서장의 재임명 등 의욕적인 업무에 임했으나 불과 20일여일 만에 3월 8일자로 노동청으로 떠났다.
이로써 1916년 개원 이래 58년 동안 20명의 원장이 재직함에, 일제치하의 29년 동안은 5명의 일본인이, 해방이후 29년은 15명의 우리나라 원장이 재임 한 셈이다.
그들 원장들 가운데 명예롭게 소록도를 떠날 수 있었던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었던가?
많은 원장들이 직․간접적인 책임을 지고, 혹은 누명을 쓰거나 정치적 상황으로 물러났던 사건들이 해방 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음은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이다.
이런 격변(激變)의 와중에도 11년 9개월 23일의 장기근속을 정년퇴임이라는 꽃으로 마무리한 22대 신정식(申汀植)원장의 선정 일화 등은 따로 언급할 필요가 있음이 충분하다.
※ 다음호는 신정식 원장 편으로 주변의 일화나 자료가 있으면 <아리랑신문>사에 제보 바랍니다.
/이 송 형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