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김 영 희
아침을 먹고 난 후 커피를 내려 마시며 시선을 마당으로 돌린다. 잔디를 깎은 지 10여 일밖에 안 됐는데 그사이 자라서 다시 깎아야 할 것 같다. 추석 명절에 식구들이 다녀가며 집 안팎을 수리하고 잔디도 깎아주었다. 아들 2박 3일, 남편 3박 4일, 딸과 사위 3박 4일, 언니네도 1박 2일 집에 와서 지내고 갔다. 명절이나 제사 등 집안 대소사를 같이 지내는 나의 가족이다.
십여 년 전 지금 살고 있는 시골로 이사를 왔다. 귀촌을 꿈꾸며, 구미 인근에 집을 구하러 여기저기 다리품을 팔며 많은 집을 보러 다녔다. 대부분 시골집이 낡고 훼손이 심한 상태로 빈집으로 남아 있어 딱히 마음에 드는 집이 없었다.
부동산 중개인의 소개로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둘러 봤다. 중개인이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서 “지금 볼 집은 2층 전망이 너무 멋진 집입니다. 아마 그 전망을 보면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라고 했다.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 좁은 골목길을 돌아서자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특이한 이층집이 나타났다. 대문에 들어서자 마당에는 다 쓰러져 가는 헛간이 답답하게 집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1층엔 노부부가 살다가 얼마 전에 두 분 다 돌아가시고 지금은 빈집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거실 가득 들어오는 밝은 햇살이 마음에 들었다. 낡고 허름한 오래된 집이었지만, 햇살이 창으로 환하게 쏟아져 들어와 따뜻하게 느껴졌다. 집안을 대충 들러보고, 이 집을 사게 되면 대대적인 수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2층으로 올라갔다.
2층 계단은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받아 위험해 보이기까지 했다. 작은 장독대를 지나 발코니에 올라간 순간 숨이 멈출 것 같은 풍광이 펼쳐졌다. 왼쪽에는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누워 있는 것 같은 모습의 부드러운 산 능선과 파란 하늘이 맞닿아 있고, 오른쪽으로는 작은 능선이 어우러져 있는 금오산의 정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느 미술관에 전시된 수묵화 한 점을 보는 듯했다. 멋진 풍경을 눈에 새기며 2층 내부를 보았다.
2층은 외형만 갖추고 있을 뿐 내부 공사를 하다가 중단한 채 오랜 시간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되어 있었지만, 집안 어디에서나 창을 통해 숲과 나무가 보이는 풍경이 맘에 쏙 들어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이유 없이 바로 계약을 하였다.
오래된 시골 주택의 가격은 건물값은 안 받고 땅값만 받는다고 한다. 대지가 넓지 않아서 아주 저렴한 가격에 집을 사게 되었다. 그 노후 된 주택을 1층만 수리하는데 거의 구매한 집값 정도가 수리비로 들어갔다. 수리 과정이 힘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기도 해서, 2층 수리는 엄두도 못 내고 이사 들어와 4년 정도 살았다.
가끔씩 식구들이 다 같이 모여 생활하자니 욕실이 하나밖에 없는 1층만으로는 너무 좁고 불편했다. 한번 리모델링한 경험을 바탕으로 2층을 수리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남편은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둘밖에 안 되는데 굳이 돈 들여 수리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대를 하였다. 1층 수리할 때 형부가 맡아서 해 주셨기에 2층도 형부에게 부탁하였다. 수리할 동안 숙식 제공에 공사 보조 역할은 당연히 내 몫이었다.
집은 식구뿐 아니라 누구라도 와서 맘 편히 쉬어 갈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2층은 평범한 가정집이 아닌 한적한 시골에 풍경 좋은 손님방처럼 꾸며서 식구든, 친구든 누구라도 와서 편히 쉬고 충전할 수 있는 그런 장소로 만들었다. 나의 취향에 따라 공간을 나누고 창문과 문의 위치를 정하고 작은 소품 하나하나 열심히 인터넷에 찾아서 꾸미고 완성하였다.
수리 후 몇 년 동안 많은 친지와 지인이 다녀갔다. 바비큐나 백숙을 해 먹기도 하고 더러는 자고 가기도 했다. 내 집에 와서 쉬고 간다는 생각으로 성심껏 챙겼다. 주인으로서 작은 정성으로 대접한다는 것이 맘처럼 쉽지 않았다. 한 번씩 다녀갈 때마다 내가 감당해야 할 수고가 만만치 않았다. 몇 년이 지나니 방문객들도 뜸해졌다.
남편은 직장 때문에 멀리 가 있고, 아들도 취직해서 다른 도시에 살고 있어 지금은 새소리와 마당 지키기에 바쁜 강아지 보리의 소리만 요란하다.
지난해 시월에 딸이 결혼하고 제주도로 떠났다. 결혼 당시만 해도 섬으로 딸을 보내며 자주 못 볼 것 같아 많이 서운했었다. 그런데 딸이 병원 진료나 친구들 결혼식 참석 등의 여러 이유로 비행기 타고 집에 오는 일이 잦아졌다. 딸과 사위가 집에 올 때마다 멀리 가 있는 식구들이 집으로 모인다. 그렇게 모이면 서로 2층에서 지내려고 치열한 눈치 싸움을 벌인다. 사위는 백년손님이라는 말이 있듯이 언제나 딸 부부의 승리로 끝난다.
한 사람이 사는데 얼마만큼의 공간이 필요할까? 사춘기 시절 내 방이 너무나 갖고 싶었다. 엄마랑 같이 사용하던 큰 방 중간에 떡하니 장롱을 옮겨 놓아 나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그런 엉뚱한 가구 배치는 상상도 못 했던 엄마였지만 크게 나무라지 않고 인정해 주었다. 작은 나만의 공간에 조명을 만들어 설치하고 작은 카세트 라디오를 두고 무한한 상상력의 날개를 펼쳤다. 그 후 스무 살 무렵에 드디어 세입자가 나가게 되었고 내방이 생겼다. 그 방을 오롯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외출할 때면 조카들이 들어와 내 물건을 건드리는 것이 너무 싫었기에 올케언니 눈치를 보면서도 방문을 잠그고 다녔다. 그토록 나의 공간에 대한 애착 아닌 집착이 강했다.
지금도 수시로 1, 2층을 오가며 가구 배치를 바꾸고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에 큰 기쁨을 갖는다. 점점 안 좋아지는 관절과 허리 통증으로 전에 보다는 덜 바꾸지만, 여전히 새롭게 다시 만들어지는 그 공간을 사랑한다.
4박 5일 추석 명절 내내 조용하던 집에 식구들이 다 모이니 북적북적했다. 2층이 있어 이제 많은 사람이 집에 와도 크게 불편하지 않게 지낼 수 있어 좋았다. 남편에게는 잡채, 딸에게는 김치찌개, 아들에게는 묵은지 감자탕, 사위에게는 두부찌개 등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었다. 밥을 해 먹이느라 늦은 더위에 땀 흘리며 주방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함께한 가족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 여겨졌다.
우울할 때 먹으면 위로를 주는 음식, 아플 때 먹으면 바로 힘이 되는 음식이 있는 것처럼 집이 사랑하는 식구들에게 그런 공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언제쯤 또다시 식구가 다 같이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을지 그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