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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중산층? 사라진 대한민국의 중산층을 찾습니다
이상적인 중산층은 월 515만 원 벌어 341만 원 쓰고 35평형 아파트 소유…
실제는 매달 416만 원을 벌어 252만원을 쓰고, 27평형 아파트에서 살아
통계청이 발표한 국내 중산층 인구는 65%다. 하지만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체감하는 한국인의 중산층 귀속의식은 46%에 불과하다. 왕성한 구매력을 자랑했던 대한민국 중산층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부동산 등 자산 가치 하락, 소득 감소, 삶의 질 저하로 갈수록 입지가 축소돼가는 우리 시대 중산층의 오늘을 들여다봤다.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대한민국 중산층의 주요 자산인 아파트 가치가 하락하자 40~50대 중산층 가정이 급속히 허물어져가고 있다. 1~2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4인 가구에 적합한 중산층 아파트인 30평형대는 집값 상승이 기대되지 않아 투자물로 매력을 잃었다는 것이 부동산 업계의 진단이다.
서울시 성북구의 A뉴타운 지역에 사는 김진영(55) 씨는 지난 1년간 자신에게 닥친 생활의 변화가 지금도 잘 믿겨지지 않는다. 김씨는 지난해 봄, 다니던 회사를 나왔다. 세 달 전에는 소유하고 있던 34평형 아파트를 팔고 24평형 낡은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갔다. 그만한 사연이 있었다.
퇴직 초기, 김씨는 아침마다 아내의 손을 잡고 집 근처 체육공원으로 테니스를 치러 다녔다. 주말에는 쏘나타 승용차를 직접 운전해 교외 나들이도 즐겼다. 꿀맛 같은 여유를 맛보는 것도 잠시, 얇아진 가계 수입을 불평하던 아내 임씨(53)가 인근 프랜차이즈 스테이크 가게에 취업하게 되면서 김씨가 기대했던 행복한 노후는 어긋나기 시작했다.
점심과 저녁 밥상 차리기, 집안 청소, 쓰레기 버리기 등 익숙하지 않은 집안일이 김씨의 차지가 돼버렸다. 집에 있기 싫어서 작은 체인점 창업을 해볼까도 고민해봤지만 창업자의 절반이 3년 안에 망한다는 친구의 얘기를 듣고는 생각을 접었다. 몇 달 뒤, 취직에 목을 매던 큰아들이 그 어려운 관문을 뚫고 기업체 입사시험에 합격했다. 아들이 사귀던 여자친구와 결혼 날짜까지 잡게 되자 신혼집 전세 비용을 마련해주는 일이 발등의 불이 됐다.
김씨 부부는 밤잠을 안자고 궁리하던 끝에 살고 있던 34평형 아파트를 팔기로 하고 인근 부동산에 급매물로 내놓았다. 분양 당시만 해도 중산층을 위한 맞춤형 아파트라며 프리미엄까지 붙었던 아파트는 그새 인기가 추락해 매수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2010년 입주 당시 4억8천만 원까지 올랐던 아파트는 4억2천만 원에 내놓았는데도 찾는 이가 없었다.
김씨는 결국 13층의 전망 좋은 34평형 아파트를 시세보다 1천만 원 싸게 내놓고 나서야 겨우 매수자를 만날 수 있었다. 집을 판 돈에서 전세금을 제외한 차액과 퇴직금 일부를 더해 아들의 신혼 전셋집을 겨우 마련해준 뒤로는 기름값과 보험료라도 아끼자는 아내의 성화에 김씨는 주말이면 사용하던 자동차마저 중고차 시장에 내다팔았다.
퇴직 이후 1년여 동안 내핍 생활이 계속되다 보니 어느 정도 살 만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던 김씨의 자신감도 차츰 무너져갔다. “중산층은 무슨? 그저 밥이나 굶지 않고 사는 것을 다행으로 알고 살아야지. 경기가 없어 아파트 값도 떨어지고 아들 장가보내느라 집까지 팔고 보니 그동안 무얼 하고 살았나 싶었어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전셋집도 있고 퇴직금이 남아 있지 않느냐”고 되묻자 그는 “나중에 딸 시집 보내려면 전세금 빼내서 월세로 살든지 남은 퇴직금까지 다 털어야 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장기화된 경기불황으로 중산층의 가계소득이 급속히 줄고 있는 것도 중산층이 사라져가는 또 다른 이유다. 사진은 폐업한 서울 거리의 한 의류점.
30평형대 ‘중산층아파트’의 몰락
김씨의 사례는 사실 서울과 수도권에 사는 중·장년층이라면 누구한테나 익숙한 장면이다. 김씨 집과 이웃한 B뉴타운에 있는 대기업 브랜드의 한 아파트는 32평형이 최근 4억7천만 원에 거래됐다. 4년 전 입주할 때 가격보다 오히려 3천만 원이나 떨어졌다.
“출생률 저하로 1~2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24평형 아파트에 대한 매수자는 간간이 나오지만 4인 가구에 적합한 중산층아파트인 30평형대는 집값 상승이 기대되지 않아 찾는 이가 적다”는 것이 부동산 업계의 진단이다. 사실 l년 전만 해도 김씨는 34평형 아파트와 2억 원이 넘는 퇴직금 등 5억 원 대의 자산을 가진 어엿한 중산층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아내의 수입 외에는 변변한 소득이 없다. 중산층이라는 귀속의식은커녕 길어진 노후를 극성스러운 아내와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 김씨의 사례는 집값 하락으로 몰락해가는 오늘날 중산층의 현실을 보여주는 창이다.
장기화된 경기불황으로 중산층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자영업자들의 가계소득이 급속히 줄고 있는 것도 중산층이 점점 사라져가는 또 다른 이유다. 박성희(42) 씨 부부는 불황기 업종전환에 실패해 거센 파도에 휩쓸린 경우다. 결혼 이후 18년째 서울 구로구 일대에서 터줏대감으로 살아온 박씨 부부는 오랫동안 재래시장에서 마트를 운영했지만 인근에 문을 연 대형 할인마트와 편의점들 때문에 손님이 줄면서 지난해 가을 결국 장사를 접었다.
아파트를 팔고 인근 다세대주택으로 이사한 뒤 남편은 새로운 사업을 해보겠다고 몇 달 째 사람만 만나고 다니더니 결국 사업자금마저 날리고 말았다. 박씨의 남편은 지금은 농장을 경영하는 지인의 소개로 날품팔이라도 하겠다며 지방의 소도시에서 과수원 일을 돕고 있다.
남편은 한 달에 한 번씩 집에 다녀갈 때마다 월급이라며 100만 원 남짓을 내놓고 가지만 그것만으로는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해 박씨는 구로구의 한 중학교에서 방과후교사로, 밤에는 대형 할인마트의 계산원으로 일한다. 그 와중에 다행인지 불행인지 올해 고등학교에 들어간 아들이 자사고(자립형 사립고)에 덜컥 합격했다고 한다. 일반고보다 세 배나 비싼 학비에다 학습교재와 학원비도 비싸서 다른 부모들처럼 제대로 뒷바라지를 하려면 일자리를 하나 더 알아봐야 할 형편이라고 볼멘소리를 한다.
장·노년층, 다시 직업전선으로
박씨 가정의 월 수입은 250만원 정도. 그래도 통계청 기준으로는 중위소득의 50~150% 구간에 해당돼 정부 통계로는 중산층에 속한다. 하지만 박씨는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여기지도 않지만 그런 기준이 있는지조차도 모른다. 동네 마트를 운영할 때만 해도 동네 구의원이 누구인지 지역 생활정치에 관심을 갖기도 했지만 이제는 주변 사람에게조차 별 관심이 없다. 박씨는 “예전에 장사할 때는 네 식구가 별 걱정 없이 살았는데, 지금은 하루하루가 전쟁이나 마찬가지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선거고 투표고 할 여력이 없다”고 푸념하듯 말했다.
박씨는 “우리 나이가 되면 돈 벌 만한 데가 많지 않다. 이혼해서 혼자 된 여자들은 노래방 도우미로 다니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나는 자사고에 다니는 아들이 공부를 잘해 아들 보는 재미로 산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자영업자 비율은 OECD국가 평균(15%)보다 높은 30%다. 한때 자영업자였던 박씨 가정의 고난사는 소득감소로 삶의 질이 하락해 몰락한 오늘의 중산층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만하다.
자본주의 대한민국을 떠받치고 있는 우리 시대 중산층 가정이 급격히 몰락해가고 있다. 앞서 소개한 김씨의 경우처럼 50~60대 장노년층은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하락하자 줄어든 가계소득을 보충하기 위해 비정규직이라도 취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박씨 같은 40대 여성이나 전업주부들은 가계소득 감소로 인해 시간제 일자리에 몰린다.
전문가들은 우리 시대의 중산층이 몰락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소득 불균형이 심화됐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사라진 중산층은 부유층보다는 빈곤층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비정규직의 급속한 증가는 우리 사회의 소득불균형을 보여주는 주요한 지표가 된다. 이는 정부가 발표한 통계 수치로도 나타난다. 7월 14일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부가조사’에 따르면 올해 3월 현재 비정규직 근로자는 591만명으로 1년 전인 574만 명보다 17만 명이 늘었다.
1년 사이에 늘어난 비정규직 근로자 10명 중 6명이 55세 이상의 장·노년 여성이다. 이는 한국 자본주의가 한창 성장하던 1970년대부터 왕성하게 경제활동을 해왔던 50~60대 연령층이 경기불황으로 다시 경제활동에 뛰어들고 있는, 고단하고 가파른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뉴타운 입주자였던 김민영씨의 아내 임씨가 전업주부 생활을 하다가 외식업체 스테이크 매장에서 시간제로 일하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이처럼 자녀세대뿐만 아니라 부모세대인 장·노년층까지 다시 직업 전선으로 뛰어들었다고 해도 한번 중산층에서 밀려난 가정이 과거의 소득 수준과 소비생활을 회복하기는 쉽지 않다. 이들이 취업할 수 있는 일자리는 대부분 임금이 낮은 비정규직이고, 물가상승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실질 소득이 크게 늘 수 없는 여건이다.
지난해 8월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중·노년 여성의 자녀세대에 해당하는 대졸 비정규직 근로자는 대졸 정규직 근로자가 받는 월급의 절반을 받는 데 그쳤다. 대졸 정규직원이 월평균 250여 만원을 받을 때 대졸 비정규직은 140여 만원을 받았다. 이 같은 이유로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인식하는 인구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통계청이 발표하는 우리나라 ‘공식 중산층’ 규모는 해마다 늘어간다. 왜 그럴까?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정한 기준인 중위소득만으로 중산층을 정의하기 때문이다. 통계청은 중위소득(전체가구를 소득 순으로 줄을 세웠을 때 한가운데 있는 가구의 소득)의 50~150%를 차지하는 소득계층을 중산층으로 분류하고 있다. 중위소득의 50% 미만은 빈곤층, 150% 이상은 고소득층으로 분류된다.
이 기준에 따르면 우리나라 중산층은 2009년 63.1%에서 2010년 64.2%, 2011년 64.0%, 2012년 65.0%로 점점 높아지고 있다. 통계 수치로만 본다면 전 국민의 65%가 중산층이라는 얘기가 된다. 박근혜 정부가 중산층 70%를 선거 공약으로 내건 이유도 이 수치에 근거하고 있다.
국민들이 체감하는 중산층은 이 같은 통계청 수치와는 확연히 차이를 보인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지난해 8월 전국의 20세 이상의 국민 1천 명을 대상으로 전화설문을 한 결과 자신을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46.4%에 불과해 정부 기준과 20% 가까이 차이가 났다. 게다가 정부가 OECD 기준으로 중산층에 해당한다고 분류한 사람의 55%가 자신이 중산층이 아니라 저소득층이라고 답했다.
벚꽃구경을 나온 우리 시대의 평균적인 가족의 단란한 모습. 우리 국민이 기대하는 이상적인 중산층 가정은 매달 515만원을 벌어 341만 원을 쓰고, 가족과 함께 여행하며 매주 12만원 상당의 외식을 즐기는 것이다.
연봉 2100만 원도 6000만 원도 중산층?
국민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중위소득의 50~150%라는 기준으로만 보면 4인 가족 기준으로 연소득 2124만~6372만 원을 받는 사람은 모두 중산층에 속하기 때문이다. 같은 회사의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데, 연봉 2500만 원을 받는 A씨나 연봉 6천만 원을 받는 부장급 간부 B씨나 모두 중산층으로 분류된다는 얘기다. 1인 가구로 기준을 바꿔보면 문제가 더 확연히 드러난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인 가구의 월간 중위소득은 177만 원이다. 이를 기준으로 중위소득의 50∼150%에 해당하는 월 소득은 88만5천~ 265만5천 원이 된다. 여기에서 중위소득 50%에 해당하는 1인 가구, 즉 88만5천 원을 버는 사람은 사실은 중산층이 아니라 차상위계층이나 빈곤층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이처럼 소득만으로 중산층을 산출하다 보면 빈곤층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중산층에 들어가는 일이 생긴다.
그럼에도 통계청은 여전히 OECD 기준이라며 소득만으로 중산층을 산출한다. 이 때문에 통계청이 발표하는 공식 중산층 비중은 해마다 커져가고 반대로 스스로 중산층이라 생각하는 국민들의 체감 중산층 비중은 감소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두 수치(數値) 간의 괴리가 커질수록 사회·경제적 불안과 불만이 확대되고 소비심리도 위축되는 게 당연하다.
이런 현실에 정부도 위기감을 느꼈는지 통계청이 지난해부터 과거와는 조금 다른 통계수치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지난해 통계청은 새로 개발한 분배지표인 신‘ (新) 지니계수’를 적용한 결과를 내놓았다. 통계청은 우리나라의 2012년 신 지니계수가 0.353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OECD 평균치(2010년 조사로 0.314)를 넘는 수치로 34개 회원국 가운데 상위권인 6위에 해당한다. 우리 사회의 불평등이 심화돼 중산층이 감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치다.
통계청이 올해 내놓은 ‘울프슨(Wolfson)지수’도 중산층이 줄었다는 결과를 나타내주고 있다. 울프슨지수가 2011년 0.254에서 2012년 0.256으로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울프슨지수는 중산층의 몰락 정도를 표시하는 지수로 수치가 0에 가까우면 중산층이 늘어나고 1에 가까우면 몰락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수치 그대로만 본다면 저소득층과 고소득층의 비중이 늘었으니 당연히 중산층이 감소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고소득층 수입 국세청 자료 공개돼야”
우리나라의 소득불평등은 위험수위로 치닫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동국대 경제학과 김낙년 교수에 따르면, 한국은 2012년 현재 소득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45%를 차지하는 극심한 소득불균형 국가다. 이는 전 세계에서 소득불균형이 가장 심한 미국(소득 상위 10%가 48.16% 점유) 다음으로 높은 수치다.
하지만 정부는 이 같은 지니계수나 울프슨지수 수치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몇몇 경제학자는 “지금 나타나는 신 지니계수나 울프슨수치로만 본다면 정부가 고소득층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는 정책을 처방해야 하기 때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중산층 지표와 관련한 이같은 해묵은 논란을 끝내기 위해서는 고소득층의 정확한 소득이 파악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유경준 한국개발연구원(KDI)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정확한 중산층 통계가 나오기 위해서는 고소득층의 개인소득에 대한 국세청 자료가 공개돼야 한다. 그래야 정확한 중위소득 파악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통계청의 수치로는 정확한 국민의 소득 파악이 안 되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 때문에 새로운 중산층 기준을 정할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학계에서도 소득 중심의 기존 OECD지표에 삶의 질, 학력, 사회적 지위, 문화향유 등을 모두 고려하는 다층적인 중산층 지표를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이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특히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 국민은 소득수준뿐만 아니라 소유 자산, 여유로운 생활과 삶의 질, 사회적 기여와 시민의식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자신의 중산층 귀속 여부를 판단해왔다는 데서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을 가져 왔다. 정부도 이러한 흐름을 받아들여 한국개발연구원, 한국보건사회연구원, 한국조세재정연구원 등과 공동으로 합리적인 중산층 기준 정립방안을 논의해 발표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그 결과를 내놓지는 않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국민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중산층의 기준은 어느 정도일까? 참고할 만한 의미 있는 자료가 있다. 지난 6월 12일 현대경제연구원 이준협 연구위원은 전국 성인 남녀 817명에게 ‘당신은 중산층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져 그 결과를 분석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 국민이 기대하는 이상적인 중산층(4인 가족)의 모습은 매달 515만 원을 벌어 341만 원을 쓰고, 35평짜리 주택(3억7천만 원)을 포함해 6.6억 원 상당의 순자산을 보유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매주 12만 원 상당의 외식을 즐기면서도 사회적 약자를 위해 소득의 2.5%를 기부후원하고 무료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중산층이라고 보았다.
우리나라 중산층들의 현실 모습은 매달 416만 원을 벌어서 252만 원을 쓰고, 27평짜리 주택을 포함 3.8억 원 상당의 순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매달 6만 원 상당의 외식을 세 차례 즐기고 사회적 약자를 위해 소득의 1.1%를 기부후원하며, 1년에 3.1회 무료봉사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현대경제연구원 조사의 중요한 흐름은 국민들이 중산층 귀속감의 기준으로 소득이나 자산뿐만 아니라 삶의 질이나 사회·문화적 권리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조사에서 응답자들이 “가끔은 사회봉사도 하고 기부도 약간 하는 생활이 이상적인 중산층의 생활”이라고 응답한 것도 이 같은 흐름을 반영한다. 생활의 여유와 삶의 질 향상에 대한 욕구는 중산층 귀속감이 강한 고소득자들도 매우 목말라하는 대목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부동산 경기 부양이 성공하지 못할 경우 한국의 중산층은 더욱 급속한 붕괴의 길을 걷게 될 수 있다.
매달 416만 원을 벌어 252만 원 지출
서울 송파구의 주상복합아파트에 사는 한상준(42) 씨 부부가 그런 경우다. 올해 결혼 10년차로 두 아이를 둔 한씨 부부는 맞벌이를 해서 한 달 수입이 700만 원쯤 된다. 하지만 매달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찮다. 아파트 대출금 이자로 150만 원, 두 자녀의 교육비로 꼬박 150만~200만 원이 들어간다.
한씨의 아내는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대학교 졸업 때까지 자녀 1명을 교육하는 데 1억~2억 원이 투자돼야 한다는 극성 아줌마 부대의 말을 듣고 나서는 남는 돈은 교육비에 쓰려고 모아두고 있다고 한다. 그가 유별난 것은 아니다. 지난 10년간 우리나라 40대 연령층 가구의 소득 가운데 14%가 교육비로 지출됐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요즘 부모들은 자녀에게 올인하는 게 대세다.
하지만 한씨 자신은 정작 자녀에 대한 교육보다 아내와 아이들과 자연을 찾거나 가족과 함께 공연을 관람하고 문화생활을 즐기는 것에 더 목말라 한다. 그는 “내일 모레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된다고 하는데 삶의 여유를 누리지 못하고 사는 데 무슨 선진국이고 중산층이냐?”고 반문했다. 남보다 소득이 많다고 해도 제대로 삶의 질을 누리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불만이 묻어났다.
‘당신은 중산층입니까?’ 조사를 총괄한 현대경제연구원 이준협 연구위원은 “중산층의 삶의 질이 향상돼야 사회갈등도 줄어들고 경제발전도 가능해진다. 정부가 삶의 질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중산층 가정이 빠듯한 생활비 속에서도 여유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사교육비 및 주거비 부담을 완화하고, 가족·동호인과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문화·스포츠 인프라를 구축해야 하며,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회봉사 활동과 기부후원에 대해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연구위원은 또 “중산층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약자와 타인을 위한 봉사가 곧 자신의 삶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는 시민의식을 배양하고, 정부의 중산층 통계가 국민의 생각과 일치하도록 중산층의 기준을 새로 정의해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생각하는 체감 중산층을 확대하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을 주문했다.
정부 통계로는 전 국민의 65%가 중산층이지만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느끼는 국민은 46.4%에 불과하다. 소득만을 기준으로 하는 정부통계는 차상위계층이나 빈곤층도 중산층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최경환 경제팀, 중산층 늘릴 수 있을까
‘중산층(middle class)’은 국가적으로는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면서 사회 안정의 근간이 된다. 때문에 건강한 중산층의 성장이 국가 발전의 기본이다. 중산층의 가계소득이 늘어나야 내수도 진작되고 경제의 주름살도 펴진다. 경제학자들은 중산층의 중요성에 대해 “중산층은 부유층과 빈곤층의 갈등을 완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고, 구매력을 가진 소비계층으로 경제발전에 기여할 수 있으며, 그 비율이 높을수록 소득분배의 불균등이 완화되는 등 경제·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또한, 정부의 중산층 정책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중산층이 위축되거나 붕괴되면 민주주의 근간까지 위협하기 때문이다. 중산층은 21세기 들어 소득이나 삶의 질은 물론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시민의식에까지 연관된다. 따라서 정부가 소득 증대와 가계부담 경감, 다양한 재산 형성을 할 수 있는 정책으로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중산층 기반강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학계와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정부도 이 같은 여론에 귀를 막고 있는 건 아니다. 박근혜 정부 2기 경제팀 사령탑을 맡은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7월 7일 인사청문회 답변에서 “중산층 소득을 높이기 위한 대책을 구상 중”이라고 밝혔다. 최 경제팀이 중산층의 자산 가치를 올리기 위한 방법으로 추진하는 대표적인 대책은 부동산 규제완화다. 특히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 때 은행에서 담보가치를 인정해 주는 LTV(주택 담보대출 인정비율)를 수도권과 지방 등 지역에 관계없이 70%로 높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집값이 5억 원이라면 LTV가 50%일 경우 2억5천만 원을 은행에서 대출받을 수 있지만 LTV가 70%로 높아지면 3억5천만 원까지 빌릴 수 있어 주택 구매자가 1억 원을 더 대출받을 수 있다. 이처럼 LTV를 완화시켜 내수경기를 활성화하겠다는 게 최경환 경제팀의 계획이다. LTV 뿐만 아니라 DTI(총부채 상환비율) 규제완화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이 같은 조치가 경기를 활성화시키고 중산층을 늘릴 수 있을까? 현재 시장(市場)은 최 경제팀의 조치를 반기는 흐름이다. 하지만 경실련은 “LTV 규제를 완화하면 빚을 내서 집을 샀다가 깡통주택을 소유하게 되는 대출자가 부지기수로 늘어나 금융부실을 더욱 키울 수 있다”고 우려한다. 최경환 경제팀의 경기부양으로 중산층 70% 공약을 달성해 사라진 중산층들이 돌아올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최 경제팀의 부동산 경기 부양이 성공하지 못할 경우 한국의 중산층은 더 급속히 붕괴의 길을 걷게 되리라는 점이다. /나권일 2014.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