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우리는 패션의 본질이 ‘남들과 다른 것’이라 여겨왔다.
패션 광대, 혹은 패션 공작새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등장한 순간, 패션계는 정반대 방향을 향해 돌아섰다.
지극히 평범함을 추구하는 ‘놈코어’ 스타일에 대해.
90년대 <사인펠드> 시리즈로 인기를 끈 코미디언 제리 사인펠드, 그와 늘 한 쌍으로 떠오르는 코미디 작가 래리 데이비드, 클레어 데인즈를 유명 인사로 만든 미국 하이틴 드라마 <My So-Called Life> 속 주인공들, 검정 터틀넥과 데님 팬츠, 뉴발란스 운동화를 유니폼처럼 입고 다니던 스티브 잡스, ‘청청 패션’을 즐기는 버락 오바마…. 이들의 모습을 연상할 때 ‘패셔너블’이라는 단어가 함께 떠오르기는 쉽지 않다. 적어도 작년까지는. 그런데 언제부턴가, ‘놈코어(Normcore)’라는 이름 아래 그들이 패션 아이콘으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도대체 놈코어가 뭐길래?
4월 초, 위키피디아는 ‘놈코어’라는 단어를 새로 등록하며 “동일함에 동조하는 것이 쿨하다고 생각하는 문화적인 트렌드”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이 따끈따끈한 ‘신상 단어’의 반대 개념은 ‘힙스터’라고 제시했다. 무척 아이러니하지만, 한마디로 놈코어는 ‘트렌디한 것을 따르지 않는 트렌드’인 셈. 표준을 뜻하는 ‘norm’과 핵심을 뜻하는 ‘core’의 합성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공상과학 소설가 윌리엄 깁슨이다. 그는 2005년작 <Pattern Recognition>에서 주인공의 옷차림을 이렇게 묘사하며 놈코어 개념을 설명했다. “검정 티셔츠, 동부의 사립 초등학교에 납품하는 브랜드에서 저렴한 가격에 구입한 회색 브이넥 풀오버, 오버사이즈 블랙 리바이스 501!”
공상과학소설 마니아들만 알고 있던 이 단어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지난해 10월, 뉴욕의 트렌드 예측 회사 ‘K-Hole’에서 놈코어를 새로운 경향으로 제안하면서부터다. “놈코어는 ‘다르지 않음’에서 오는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태도다. 남들과 같은 그룹에 속함으로써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나만의 개성을 추구하던 시기를 지나 남들과 똑같은 것이 오히려 쿨하다고 여겨지는 시대가 왔다는 얘기. 케이홀의 주장을 패션의 관점으로 해석한 건 지난 2월, <뉴욕 매거진>이 처음이다. ‘놈코어: 자신이 전 세계 70억 인구 중 하나임을 깨달은 사람들을 위한 패션’이라는 기사가 그것. “최근 소호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과연 젊은 아티스트인지, 혹은 그저 평범한 관광객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동네 쇼핑몰에서 구입한 듯 별 개성 없는 부모님 세대의 패션 아이템들이 실제로 뉴욕에서도 가장 ‘핫한’ 맨해튼 소호에서 인기를 끈다는 내용이었다.
지난 몇 달간 <가디언> <허핑턴포스트> <뉴욕타임스> 등 주요 언론에서 앞다퉈 놈코어를 다루기 시작했다. 또 미국 <보그>는 놈코어 트렌드를 프라다와 마르니의 테바 슈즈만으로 구성된 화보를 통해 세련되게 해석했고(다리아 워보이가 등장한 이달 화보), 영국 <보그>에서는 프레야베하 에릭슨은 나이키 슬리퍼 하나만을 신고 등장했으며, 크리스티 털링턴은 아빠 옷장에서 꺼낸 듯한 커다란 셔츠와 운동복 쇼츠, 슬리퍼 차림으로 화보를 촬영했다. 그런가 하면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서는 ‘#normcore’라고 태그가 달린 사진이 수천 장씩 올라오기 시작했다(@normcore_fashion이라는 인스타그램 계정까지 탄생했다). SPA 브랜드 갭은 발 빠르게 ‘우리는 69년부터 당신을 위해 놈코어 아이템을 만들어오고 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들고 나왔다. 4월 초 기준으로 구글에서 ‘놈코어’를 입력하면 56만 개가 검색되는 상황!
그렇다면 놈코어 패션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아이템들을 말하는 걸까? 여러 매체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물 빠진 청바지, 아디다스 트레이너, 메시 소재 쇼츠, 깨끗한 면 티셔츠, 뉴발란스 운동화, 흰색 나이키 양말, 트레이닝 팬츠, 버켄스탁, 터틀넥 스웨터, 버킷 모자, 혹은 비니, 테바 슈즈, 야구 모자, 피케 셔츠, 클래식한 리바이스 데님, 바람막이 등등! 그야말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우리 모두의 옷장에 한두 개씩은 꼭 있는 아이템. 물론 하이패션 디자이너들은 이를 좀더 ‘패셔너블’하게 해석하고 있다. 드레스로 변신시킨 트레이닝 집업, 트롱프뢰유 피케 셔츠, 야구 모자와 아노락으로 컬렉션을 채운 라코스테, 저지 톱과 쇼츠, 검정 양말과 매치한 플랫 샌들 룩을 다채로운 버전으로 보여준 밴드 오브 아웃사이더스, 스포츠웨어에서 비롯된 옷과 테바 슈즈, 커다란 백팩까지 ‘관광객 룩’의 진수를 보여준 타미 힐피거 등이 대표적인 예(캐주얼한 뉴욕 브랜드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놈코어 스타일로 가득한 올봄 컬렉션을 선보였다). 또 알렉산더 왕의 커다란 니트 쇼츠, 루이 비통의 롤업 데님 팬츠, 마크 제이콥스의 오버사이즈 맨투맨 티셔츠와 러닝화, 마르니의 선캡, 프라다의 워머와 샌들, 발맹의 데님 오버올 등도 놈코어적 아이템이다.
지난 1월의 오뜨 꾸뛰르부터 스니커즈에 푹 빠진 샤넬의 칼 라거펠트가 올가을 런웨이를 레깅스와 스니커즈 차림의 ‘대형 마트 쇼핑 룩’으로 채운 것을 보면 놈코어 유행이 가을까지 이어질 전망. 아크네 스튜디오의 커다란 비니, 루이 비통의 니트 레깅스 룩, 맥큐의 데님 팬츠, 라코스테의 후드가 달린 아노락, 랙앤본의 할머니 옷을 연상시키는 니트 집업 등을 보면 라거펠트 외에 동시대 디자이너들 역시 동의하는 분위기다. 좀더 역추적해보면, 셀린의 피비 파일로가 버켄스탁 슬리퍼를 만들던 지난봄부터 이미 예측된 유행 시나리오가 아닐까? 런웨이에서 좀더 흥미로운 사실은 피날레 인사를 날리기 위해 등장하는 디자이너들의 모습. 검정 티셔츠, 봄버 재킷, 데님 팬츠, 나이키 운동화 차림인 알렉산더 왕, 최근 아디다스 ‘삼선 트레이닝 팬츠’를 즐겨 입는 마크 제이콥스, 맨투맨 티셔츠와 쇼츠, 두꺼운 양말에 뉴발란스 운동화를 매치한 밴드 오브 아웃사이더스의 스콧 스턴버그를 떠올려보시라. 그들은 자신의 컬렉션 못지않게 놈코어 룩의 표본을 몸소 보여준 셈.
물론 모두가 놈코어를 하나의 거대한 패션 사조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베니티 페어>는 ‘놈코어가 눈여겨볼 만한 것인가?’란 제목의 칼럼을 통해 이렇게 지적했다. “놈코어는 사실 90년대를 추억하는 패션 피플들의 방식일 뿐, 대중 사이로 숨으려는 개념이 아니다. 애초에 패션을 통해 자기 자신을 표현하려는 사람들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닌가?” 놈코어의 실체에 대한 또다른 해석이다. 다시 말해, ‘남들과 똑같아 보이는 것이 쿨하다’는 깊은 의미를 담았다기보다, 60년대나 80년대 유행이 한 시절을 풍미한 것처럼, 이번에는 90년대 차례가 됐을 뿐이라는 것. <뉴욕타임스>에서는 놈코어를 새로운 패션 운동, 혹은 사회 문화적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인터넷 세상의 언론과 대중이 만들어낸 거대한 농담일 뿐’이라고 전했다.
그렇다면 남들과 다른 모습, 누구보다 눈에 띄는 개성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패션 블로거들의 입장은 어떨까? 맨리펠러(
manrepeller.com)의 린드라 메딘은 자신이 남색 터틀넥, 흰색 오버사이즈 팬츠, 검정 가죽 재킷을 즐겨 입지만, 여기에 평범한 운동화를 매치하는 대신 60년대 할머니를 연상시키는 발레리나 슈즈를 신겠다고 했다. “패션의 재미를 모두 없애버리는 놈코어에 동조하고 싶지 않다”는 것. 또 열두 살 때부터 블로거로 활약한 스타일루키(
thestylerookie.com)의 타비 게빈슨은 “놈코어는 일종의 나체주의 운동과 같은 느낌이다”라며 트렌드로 인정하길 거부했다.
그동안 패션의 본질은 남들과 다른 것으로 생각돼왔다. 화려한 깃털을 뽐내며 구애 활동을 하는 공작새에 패션 피플들을 비유했던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놈코어는 패션의 본질과 상반된다. 매 시즌 런웨이 룩을 그대로 빼입기를 즐기는 안나 델로 루쏘와는 정반대 모습이 폼 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는 거니까. 하지만 이면에는 여전히 패션 피플들의 ‘나는 다르다’는 의식이 있다. 모두 똑같은 모습일 때, 패션을 모르는 사람 눈에는 죄다 관광객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패션을 좀 아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 중 누가 진짜 관광객이고 어느 쪽이 놈코어 룩인지 구분할 수 있을 테니까. 모두가 월드컵을 보며 열광하지만, 그 가운데 축구 규칙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과 같은 의미. 새로운 패션 흐름이든, 그저 전 세계적인 ‘응답하라 90년대’일 뿐이든, 아니면 그저 온라인 세상의 거대한 농담이든, 지금 이순간에도 인스타그램에는 ‘#normcore’를 단 사진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다. 부모님이나 이모, 삼촌이 옷장을 정리한다면 쓸 만한 아이템이 있는지 한 번쯤 눈여겨봐야 한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