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지 이틀 뒤인 20일, 국민의 정부 시절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입각, 김 전 대통령 임기의 절반(2년 6개월) 가량을 함께 지낸 김성훈 전 장관을 만났다. 가슴에 검정색 ‘근조’ 리본을 달고 나온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농민과 서민, 노동자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가졌던 인물’로 기억했다. 또 장관 재임기간 동안 농업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항상 느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일시 2009년 8월 20일 8시 *장소 서울 강남구 소재 리베라호텔 *진행 본보 홍치선 편집국장
농신보기금 2000억 조성 친환경농업 원년 선포 농·축·인삼협 통폐합 농조 통합·수세 폐지 등 후광(後廣) 선생의 후광(後光)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김 장관... 아마도 내가 마지막 세대일 겁니다. 앞으론 농업농촌농민문제를 뼈 속 깊이 느끼는 대통령이 나오긴 힘들 거요. 농업 문제란 게 직접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힘든 문제인데, 앞으론 더 젊고 도시화된 사람이 대통령이 될테니 말이요. 내가 농민 편에 서서 도울 테니, 내가 있을 때 할 수 있는 대책을 세워보세요.”
김성훈 전 농림부장관은 김 전 대통령이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술회했던 이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히 남아있다며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 갔다.
“90년 대 중반이었을 겁니다. 아태재단에서 북한의 식량사정에 대해 자문해 달라는 요청으로 김 전 대통령을 처음 독대했어요. 그땐 김 전 대통령께서 정계를 은퇴한 때라 부담 없이 북한의 식량사정을 얘기해줬지요. 그리고 다시 제게 묻더라고요. ‘그럼 우리나라 식량문제는요.’라고요. 그래서 제가 ‘우리나라는 더 심각합니다. 북한은 식량자급률이 80% 인데 우리는 35%밖에 되지 않거든요. 다만, 우리는 외화가 있어 식량을 사올 수 있을 뿐이지요.’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김성훈 전 장관의 말을 꼼꼼히 노트에 받아 적으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이후 김성훈 전 장관은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과 동시에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발탁된다.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로 곳곳에서 조문 행렬이 이어지는 가운데 서울 시청 앞 광장에 차려진 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헌화를 하고 있다.
#“지금 농촌에서 줄도산이 일어나 농민들이 야반도주를 하고 있다는데 아세요”
그는 농업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애정과 관심이 각별했다고 말했다.
“대통령께선 내가 소신 있게 농업정책을 펼쳐갈 수 있도록 뒤에서 든든히 지켜 준 후광(後光)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어요. 대통령의 아호인 후광(後廣)과는 좀 다른 의미죠. 농업문제를 풀어갈 때 김 전 대통령과 저는 일종의 교감이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 교감은 1998년 IMF 당시 2000억원을 농신보에 넣어 농업인들의 연대보증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국민의 정부 출범 직후 가장 큰 문제는 IMF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었는데, 당시 농민들도 연대보증으로 인해 한 마을 전체가 줄초상을 치를 정도였어요. 그래서 재경부와 기획예산처를 설득해가며 2000억원을 받아내려 했지만, 농업에 돈을 넣는다고 하면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모두가 반대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김 전 대통령께서 어떤 보고를 받았는지 국무회의에서 저를 대뜸 꾸짖는 거예요. ‘지금 진주 어느 마을에서 농가들이 연대보증 때문에 줄도산이 일어나고 야반도주를 하고 있다는데 알고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바로 ‘한 마을이 아니라 한 달 내 전국적으로 농민들 줄도산이 일어날 겁니다.’라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대통령께서 ‘그럼 무슨 대책을 세워야 될 것 아니냐’고 말했어요. 그제야 경제부처 장관들이 제 말을 따랐고, 2000억원이란 돈이 농신보로 들어갔습니다. 대통령은 농민들을 걱정하는 얘기를 했고, 농림부 장관은 그 힘을 받아 일을 추진한 것이지요. 아무런 각본도 없이 말입니다.” 농업을 생각하는 경제 관료가 없는 상황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힘이 없었다면 이뤄낼 수 없는 일이었다.
#“농림부 장관이라면 당연히 농민 편에서 일해야 되는 것 아니요”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이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힘을 받을 수 있었던 일은 또 있다. 한중 간 마늘분쟁이 일어났을 당시 중국이 우리 쪽에 무역보복 조치로 휴대폰과 폴리에틸렌 수입금지 조치를 내렸을 때다.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은 농림부 장관 때문에 한겺Ⅷ?FTA도, 한겧?TA도 못하고 있다면서 일을 못하겠다고 했어요. 소탐대실이라는 말이지요. 청와대 경제수석도 농림부 장관을 가시로 생각해 교체 얘기까지 나왔어요. 그 때 대통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농림부장관은 그렇게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농민 편에서 일해야 되는 것 아니오.’ IMF 상황에서 미국과의 관계도 생각해야 되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고 저는 감동했습니다.”
#“깻잎·상추에서 농약이 검출됐다는데 국민들이 뭘 안심하고 먹어요?”
친환경 농업이 본격적으로 정부 정책으로 육성된 것도 국민의 정부 시절이다. 김성훈 장관은 취임 첫해인 1998년을 ‘친환경 농업의 원년’으로 선포했다.
“1998년 가락동에서 깻잎과 상추에서 잇따라 농약이 검출됐습니다.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채소였는데, 그 때 대통령께서는 ‘농림부 장관은 뭘 안심하고 먹어요?’라고 물으며 ‘국민들도 나하고 똑같이 불안할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은 친환경유기농업입니다’라고 말했고, 그 해 제3회 농업인의 날에 ‘친환경 유기농업의 원년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예산은 줄여야 되는데 친환농업과와 농산물품질관리원을 만들고, 특히 직불제를 도입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의 농업에 대한 애정이 이심전심으로 통했으니 가능한 일입니다.”
#“젖소송아지값이 5만원까지 떨어졌다는데 대책이 뭐요”
이 뿐 아니다. 김성훈 전 장관이 취임했을 당시는 젖소 송아지 가격이 폭락해 문제가 되고 있었다. 김 전 장관이 사료 수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한미국대사관을 방문, 이야기를 나누던 때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지금 젖소 송아지 가격이 5만원까지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3만원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럼 대책을 내야 될 것 아니오.’
‘예산이 없습니다. 축산발전기금도 바닥 난 상태입니다. 대안은 농협 상호금융자금을 빌려 송아지를 사면되는데 정부가 민간의 돈을 빌리는 것은 불법이니 실무 국장들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김 장관의 소신대로 일을 처리 하세요.’
전화를 마친 김 장관은 바로 비상회의를 소집, ‘대통령께 품신해 시행하는 것이니 장관직을 걸고 젖소 송아지 가격 안정대책을 시행 하겠다’며 농협 상호금융자금으로 젖소를 수매하게 된다.
#“방역은 가혹할 정도로 엄중하게, 보상은 상상 이상으로 후하게”
2000년 구제역이 터졌을 때도 김성훈 전 장관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을 또렷이 기억했다. “당시 파주에서부터 충주까지 구제역이 발생했는데 대통령께서 업무보고를 받고는 ‘방역작업은 농민들에게 가혹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엄중하게 해 달라. 하지만 보상은 농민들 상상 이상으로 후하게 해야 된다’고 말씀 하시는 겁니다. 이 말로 군 당국까지 가축방역에 나서게 됐고, 농가들은 돼지새끼 한 마리당 6만원을 보상받았습니다.”
여기에 농지개량조합·농지개량조합연합회·농어촌진흥공사 등 물 관련 3개 기관의 통폐합과 농·축·인삼협중앙회의 통합도 국민의 정부시절 일어난 농업계 큰 변화 중 하나. 김성훈 전 장관은 “장관이 추진한다면 내가 뒤에서 지원해 줄께”라는 김 전 대통령의 말에 힘을 얻어 조직 통폐합을 이룰 수 있었다고 전했다.
“농조와 농조연합회, 농진공을 통합하고 농축협중앙회도 통합하겠다고 보고하니 저항이 있을 것이라고 대통령께서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꼭 해야 되는 일이라면서 만날 때마다 추진상황을 묻곤 했습니다. 결국 농조와 농조연합회, 농진공을 통합했고 농업기반공사 현판식 때 수세를 폐지하겠다고 선언했죠. 이후 2단계로 농축인삼협중앙회 통폐합을 완수하면서 농림부는 국민의 정부에서 내세운 선거공약과 개혁을 완수한 유일한 부처가 됐습니다.”
#“농업문제는 시장논리로만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농민들이 이문을 남길 수 있게 정부가 도와야지요”
김대중 전 대통령은 “농업문제를 시장경제 논리로만 풀 수 없다”는 얘기를 종종 했다고 한다. “대통령께서는 농업문제는 시장경제 논리로만 풀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시장논리로 풀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부터 해결해 농민들이 이문을 남길 수 있게 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국가와 정부가 해결해야 된다는 것이 그분의 농업관입니다. 다섯번의 사형 선고와 망명생활, 가택연금을 당하면서도 그분이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농민과 서민, 노동자의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농민과 서민, 노동자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김성훈 전 장관은 “지금의 농정엔 소농과 가족농을 살리는 농업정책이 없다”면서 쌀 대북지원에 대해서도 “인권의 문제를 정치로 풀고 있다”고 지적했다. 평소 민주, 민생, 민권을 강조했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 어쩌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처럼 앞으론 ‘농업문제를 뼈 속 깊이 느끼는 대통령’이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슴으로 농업문제를 바라봤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마음은 온 국민과 농민들의 가슴속 따뜻한 햇살로 자리 잡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