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앵자봉 기슭에는 조그만 암자가 하나 놓여 있다. 어느 때인가 없어져 주춧돌만 남았던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암자가 바로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천진암이다.
남한산성에서 광주 시내로 가는 국도 중간쯤에 ‘번내’가 있고 이곳에서 동쪽으로 한참 달려서야 닿을 수 있는 산골인 천진암에는 이제 끊임없는 순례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행렬에 참가한 순례자들 얼굴에는 스스로 신앙을 찾아 나선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선조들에 대한 뿌듯한 자부심이 가득하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온 1784년 봄으로 잡는다. 하지만 그보다 5년이 앞선 1779년 겨울 바로 이곳 천진암에서는 이미 자랑스러운 교회사가 시작됐다.
당시 천진암 주어사에서는 당대의 석학 녹암(鹿菴) 권철신이 주재하는 강학회가 있었다. 권철신 · 일신 형제와 정약전 · 약종 · 약용 형제, 이승훈 등 10여 명의 석학들은 광암(曠菴) 이벽의 참여와 함께 서학에 대한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강학회가 끝날 무렵 이벽이 지은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와 정약종이 지은 "십계명가"(十誡命歌)는 이러한 강학회의 결실을 잘 드러내 준다.
이벽의 권유로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후 가장 먼저 이벽은 그로부터 세례를 받고 마재의 정약종과 그 형제들, 양근의 권철신 · 일신 형제들에게 전교한다. 또 그 해 가을에는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를 입교시키고 수도 한복판에 한국 천주교회의 터전을 마련했다.
한국 교회의 발상지로서 천진암은 교회사적으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잊혀 왔다. 지난 1960년에 와서야 이곳 지명들이 문헌에 근거해 밝혀졌고 마을 노인들의 증언과 답사를 통해 한국 천주교의 요람으로서 천진암의 가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70년대 말부터 천진암 성역화 사업이 급진전되었고 1980년 6월에는 천진암 일대 12만 평의 땅을 매입, 그 초입에 가르멜 수녀원이 문을 열었고 노기남 대주교의 이름으로 그 해 6월 24일 제막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비가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1981년 한 해에는 괄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정약종, 이승훈, 권철신 · 일신 형제의 묘가 이벽의 옆으로 나란히 모셔져 창립 선조 묘역을 이룬 것이다.
1982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사연구원이 설립되었고, 한민족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당 공사가 시작되어 2000년까지 토목공사를 마치고 2020년까지 기초공사를 진행 중이다. 현재는 대성당 터에 야외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돌제대가 마련되어 있다. 2040년까지 골조공사를, 2070년까지 조적공사를, 2079년까지 마감공사를 통해 3만석 규모의 대성당이 위용을 드러낼 예정이다. 그 외에도 1994년 성지 입구에 광암 이벽 선생을 기념하기 위한 광암 성당이 세워졌고, 1999년에는 성모경당 봉헌식을 가졌다. 1992년 박물관 건립 인준 후 1995년 기공식을 갖고 시작한 천진암 박물관은 2011년 건물 공사를 마치고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내부 전시장과 수장고 공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다. 2013년 6월 23일에는 성모경당과 대성당터 중간에 좌대 포함 22m 높이의 '세계평화의 성모상'을 건립해 축복식을 가졌다. 세계평화의 성모상은 모든 국가와 민족의 신앙의 자유와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청동을 이용해 파티마 성모상 형태로 제작하였다.
천진암을 순례할 때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 성지 입구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조금 올라가면 수원교구에서 위탁 운영하는 경기도 청소년야영장이 있다. 입구를 지나 계속 올라가면 실내체육관 옆으로 정하상과 유진길 성인묘역과 창립 선조 가족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정씨 가문에서 최초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정약종의 아들로 양근 지방 마재에서 태어난 정하상 바오로(丁夏祥, 1795-1839년)는 양반 신분을 감추고 어떤 역관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가 살다가 북경에 가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고 성직자 영입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북경까지 9회, 변문까지는 11회나 왕래하며 뜻을 같이 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劉進吉, 1791-1839년)와 함께 로마 교황에게 탄원서를 보내고 북경 주교에게도 서신 등을 보냄으로써 마침내 조선교회가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되고 동시에 조선 독립교구가 설정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3년 6월 30일)]
대감마을과 주어사 - 교회의 요람지
양평 읍내에서 한강을 넘어 광주 곤지암으로 가다 보면 세월 초등학교를 지나 대감마을(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곳에서 좀더 남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 골짜기에 주어말 동네가 있고 그 뒤로 주어사(走魚寺, 여주군 산북면 하품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 높은 산자락이 바로 앵자봉이며, 그 너머에는 유명한 천진암(天眞菴)이 자리잡고 있다. 대감마을은 실학자로 유명한 이익(李瀷)의 제자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아우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이 살던 곳으로, 초기 교회에서 유명한 이벽(요한), 이승훈(베드로), 정약용(요한)이 모두 권철신의 제자였다.
1779년 겨울, 권철신과 제자들이 주어사를 찾은 이유는 대감마을에서 가까운 이곳에 모여 학문을 토론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이때 이벽이 주어사 강학 모임을 찾아가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에 대해 의견을 나누게 되었다. 그 후 이벽은 이승훈을 북경으로 보내 세례를 받고 돌아오도록 했으며, 1784년 가을 무렵에는 이승훈이 전한 교회 서적들을 들고 대감마을로 스승 권철신을 방문하여 교리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런 다음 교회가 창설되자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과 류항검(아우구스티노)이 대감마을에서 권일신에게 세례를 받고 각각 충청도와 전라도로 내려가 복음을 전하게 되었으니, 대감마을과 주어사는 곧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라고 할 수 있다.
앵자봉 너머의 천진암은 일찍이 이벽과 정약용이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였다. 이곳은 1970년대에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고, 1979년에는 경기도 포천에서 이벽의 유해가 이장되었다. 이어 1981년에는 화성군 반월면에서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의 유해가, 인천 만수동에서 이승훈의 유해가, 대감마을 뒷편의 효자봉 자락에서 권철신, 권일신의 유해가 각각 천진암으로 이장되었으며, 1981년 12월에는 경기도 광주 배알미리(현 하남시)에서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성인의 유해가 간신히 수습되어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슬프구나 우리 나라 사람들, 비유하니 주머니 속에 사는 것과 같네.
성현(聖賢)은 만리 밖에 있으니, 누가 이 몽매함을 열어 줄 것인가?
머리 들어 세상을 바라보니, 뜻을 깨달은 이들이 드므네.
모방하기에만 급급하니, 오묘한 것을 가려낼 겨를이 없구나.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시문집 중에서)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