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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영상문학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옥선
<소재는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1. 소재와 주제
(1) 시를 쓰려면 먼저 확실한 주제를 설정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주제가 정해졌다고 해서 다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주제를 정확하고 충분하게 독자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주제를 구체적인 표현으로 뒷받침하고 입증해주어야 한다. 주제를 뒷받침하여 입증해주고 보다 선명하고 설득력있게 독자에게 전달해 주기 위한 표현의 재료를 소재 또는 제재라 부를 수 있다.
다음 시는 주제와 소재의 차이가 너무 없어 실패한 시이다.
아시아는 밤이 지배한다 그리고 밤을 다스린다
밤은 아시아의 마음의 상징이요 아시아는 밤의 실현이다
아시아의 밤은 영원의 밤이다 아시아는 밤의 受胎者이다
밤은 아시아의 산모요 산파이다
아시아는 실로 밤이 낳아준 선물이다
밤은 아시아를 지키는 주인이요 신이다
아시아는 어둠의 검이 다스리는 나라요 세계이다
-오상순의 <아시아의 마지막 밤 風景> 부분
(2) 좋은 시를 쓰려면 소재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수집하는 일이 필수조건이 된다. 좋은 소재를 축적시키려면 평소의 체험(직접적 삶의 체험, 간접체험, 여행체험, 영상체험)과 독서, 사색 등이 필요하다. 낭만주의 문학에서 거론되는 靈感이라는 것도 평소에 축적된 체험의 창고 안에서 어느 한 개가 찰나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시는 체험이다”라고 했다.
다음 시는 시인의 직접적 생활체험이 시로 승화된 좋은 보기이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인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에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한 쫓기는 새가 되었다
-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
(3) 시가 좀더 깊이 있는 감동과 여운을 획득하려면 직접체험을 상징적 상상력과 결부시켜야 하고, 보다 보편적이고 영속적인 이미지를 암시적으로 그려내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 이육사의 <絶頂>이란 시는 마지막 연의 ‘강철로 된 무지개’라는 표현을 통해 상징적 이미지를 구축함으로 그 좋은 보기가 될 수 있다.
매운 계절의 채쭉에 갈겨
마침내 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2. 소재 선택의 기준
(1) 보편성 : 보편성은 특수성과 반대되는 말이다. 특수성이 개성, 독창성 등을 의미하긴 하지만 그것이 보편성의 테두리 안에서 구현되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다. 눈에 대한 독창적 비유를 구사한다고 해서 밑도끝도없이 “머리에서 비듬이 떨어지듯 눈이 내린다”고 하면 이러한 비유는 보편적 설득력과 감동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다음 김광균의 <秋日抒情>은 보편성의 기준에서만 볼 때는 조금 문제가 있다.
낙엽은 폴란드 亡命政府의 지폐
砲火에 이즈러진
도룬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꾸부러진 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세로팡紙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버레 소래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帳幕 저쪽에
고독한 半圓을 긋고 잠기여간다
독창성이라는 것 때문에 지나치게 특이한 사건이나 상황을 소재로 하기보단 일반적인 죽음. 사랑. 미움. 질투 등의 주제에다 꽃. 나무. 바람. 불. 달. 물 등의 보편적 소재로 시공을 초월한 시를 얼마든지 쓸 수 있다.
다음 서정주의 <冬天>은 사랑이라는 고전적 주제를 초승달에 비유하여 절묘하게 표현함으로 보편성을 획득한 수일한 시이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매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2) 객관성 : 객관성은 확실하고 정확한, 그리고 타당성 있는 소재의 제시를 통해서 얻어진다. 시는 객관성과 논리성을 벗어날 수 있는 장르이긴 하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 전후 모순된 소재를 사용하면 객관성을 잃어버리게 되어 공감을 주기 어렵다.
다음 조향의 <바다의 층계>는 객관적 논리성에 많은 문제가 있다.
낡은 아코디온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뽄뽄다리아>
<마주리카>
<디젤엔진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수화기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다음 김수영의 <폭포>는 자연현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거기에 시인의 독창적 시각을 조심스럽게 대입시킴으로서 상징적 여운까지 획득한 좋은 시이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사이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懶惰와 안정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3) 참신성 : 참신성이란 독창성. 특수성. 개성 등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 말이다. 보편성의 범주를 벗어나는 참신성은 위험하다. 그러나 참신성이 없는 보편적 소재는 진부하다. 보편성의 범위에서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참신한 소재를 설정하여 읽는 이에게 공감을 유발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가 시의 성패를 가름하는 기준이 된다. 참신성을 위해 구체성, 필연성, 서스펜스, 유머, 풍자, 아이러니 그리고 각종 비유가 동원된다.
참신한 시적감각과 시인의 예리한 관찰력이 돋보이는 다음 시를 보자.
찬 여울목을 은빛 피라미떼 새끼들이 분주히 거슬러오르고 있다.
자세히 보니 등에 아픈 반점들이
찍혀 있다.
겨울처럼 짙푸른 오후.
-이시영의 <生>
이 고요 속에 어디서 붕어 뛰는 소리
붕어의 아가미가 캬 하고 먹빛을 토하는 소리
넓고 넓은 호숫가에 먼동 트는 소리
-이시영의 <새벽>
잘 익은 대추 한 알이 아침 서리에 뽀얗게 빛나니
부신 하늘을 나는 철새들도 잠시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일직선으로 난다
-이시영의 <비상>
심심했던지 재두루미가 후다닥 튀어올라
푸른 하늘을 느릿느릿 헤엄쳐간다
그 옆의 콩꼬투리가 배시시 웃다가 그만
잘 여문 콩알을 우수수 쏟는다
그 밑의 미꾸라지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봇도랑에 하얀 배를 마구 내놓고 통통거린다
먼길을 가던 농부가 자기 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만히 들여다 본다
-이시영의 <시월>
온다던 비가 드디어 두시부터 오신다
꽃잎 바르르 떨고
잎새 함초롬히 입을 벌리고
그 밑의 자벌레 비로소 편편히 눕자
지구가 한 순간 안온한 꿈에 잠기다
-이시영의 <웅성거림>
모두 이시영의 작품인데 비록 그 길이는 짧으나 그 예리한 직관력이 너무도 돋보이고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것을 아우르는 표현 감각이 푸르게 날 서있는 작품들이다.
3. 소재의 종류
(1) 자연을 소재로 한 시 : 옛부터 시인들이 시의 소재로 자연을 가장 많이 택한 이유는 자연은 우주 질서의 代言者이므로 자연을 통해 우주의 신비와 본질을 파악할 수 있고, 또 인간은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형성해 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늘, 별, 산, 강, 바람, 물, 불, 나무, 꽃, 새 등의 자연적․보편적 심상을 빌려 시인 자신의 인생관, 우주관, 운명관, 도덕관, 심미안 등을 함축적으로 투영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도시생활을 통해 도시 소시민의 생활상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썼으나 그가 죽은 후 절창으로 여겨지는 작품들은 <폭포> <눈> <풀> 등 자연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어제는
산사의 마당에서
제 그림자를 쓸어내고 있는
사람을 하나 만났습니다.
오늘 저녁은 다시
잎 다 떨어진 나무 아래서
제 그림자가
큰 나무의 그림자가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을 하나
만났습니다.
살아 있음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입니까.
생명의 신비란 무엇입니까.
가을은 오고
물결은 높은 가지 끝 별에 부딪는데
나는 아무 아는 것도 없이
저녁산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성선의 <저녁산을 바라보며>
(2) 일상적 사건을 소재로 한 시 : 1980년대 이후 민중시 개념이 새롭게 부각되면서 난해한 시보다 쉬운 일상어로 씌어진 시가 환영받게 되었다. 이는 자신의 일상사 속에서 좀더 진솔하게 시인의 내면을 드러낼 수 있는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시가 시인의 산만한 넋두리가 돼선 절대 안 되고, 시 속에 전개되는 일상적 사건이 전체적 보편성까지 획득한 상징적 사건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러기 위해선 사건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중요하다. 시의 한 행 한 행이 만들어내는 기교의 秀逸함도 중요하지만 시 전체가 주는 ‘총체적 감동’을 노리는 것, 이 점이 일상시의 핵심이다.
地上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 문 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여기는
地上.
憐憫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 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地上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박목월의 <家庭>
(3) 역사적 사실, 또는 인물을 소재로 한 시 :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실 또는 인물에 대하여 시를 쓸 때는 시적대상에 대한 시인 나름대로의 독특한 해석의 시각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박정희는 영웅이다” “허균은 위대한 혁명가이다” 식으로 혁신적인 반론을 편다고 해서 시적 독창성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精深한 공부 뒤 끝에 나름대로 얻은 시적 재해석이 중요한 것이다.
다음의 정일근의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이다.
아직은 미명(未明)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竹 露茶)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바다를 건너 우두봉(牛頭峰)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 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 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 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 가는 얼음장 밑 찬물소리에도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 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謫所)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목포, 해 남, 광주 더 멀리 나간 마음들이 봉두난발(蓬頭亂髮)을 끌고 와 이 악문 찬 물소리와 함 께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 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뼈 자옥히 깎고 가는 바람소리 머리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
(4) 주변의 對象物을 소재로 한 시 : 여기서는 편의적으로 자연을 소재로 한 시를 빼고 그보다 더 작고 평범한 물건들, 예컨대 재떨이, 책상, 의자, 개, 파리, 멸치 등을 소재로 한 시를 일컫는다. 흔히 회화적인 이미지의 시로 일컬어지는 것들이 이 범주에 든다고도 볼 수 있겠으나 꼭 시를 쓰는 이의 주관을 배제하고 단순히 객관적인 묘사로만 일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상물을 통해 작자의 상상적 느낌이나 사상을 개진해도 좋다.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장콕토의 <귀>
어쨓든 이런 시는 우선 충실하고 객관적인 묘사법을 연습해야 한다. 섣불리 소재를 확대. 부연하여 거기에 어설픈 사상이나 관념을 투입시켜서는 안 된다. 하지만 다음 묘사만의 김광균의 시는 아무래도 심심하고 허전한 느낌을 주나, 전연옥의 멸치는 대상물에 상상력이 가미되어 효과적인 작시법이 되었다.
향료를 뿌린 듯 곱단한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먼―高架線 위에 밤이 켜진다.
구름은
보랏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다발 장미.
목장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울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김광균의 <뎃상> 부분
한종지의 왜 간장에 몸을 담그고
목마른 침묵 속에
고단한 내 영혼들이 청빈하게 익어 갈 때면
그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없는 두려움에
쓰라린 무릎을 끌어안고
여기는 에미 애비도 없는
서럽고 슬픈 저녁나라더냐
들풀 같은 내 새끼들
서툰 투망질에도 코를 꿰는 시간인데
독처럼 감미로운 양념 냄비 속에 앉아
나는 또 무엇을 잊어버려야 하며
얼마만큼의 진실을 태워야 하는지
-전연옥의 <멸치>
또 다음의 시를 보자. 이세룡의 <성냥>은 우리 주변을 세밀하고 진지하게 관찰해볼 때 찾을 수 있는 흔한 소재의 시임에도 시적 성공을 거두고 있고, 최승호의 <북어>는 세밀하고도 통렬한 더 큰 시적 성공을 거두고 있다.
감옥 속에는 죄인들이 가득하다.
머리통만 커다랗고
몸들이 형편없이 야위었다.
세계를 불태우려고
기회를 엿보는 어릿광대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일생을 감옥에서 보낸다.
-이세룡의 <성냥>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최승호의 <北魚>
(5) 추상적 관념을 소재로 한 시 : 그리움, 사랑, 질투, 행복 등 추상적 관념을 소재로 삼아 창작할 경우가 있다. 이런 소재를 택해서 시를 쓸 때는 소재가 비록 관념적인 것일지라도 시적 표현은 반드시 구체적 이미지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상징적 풍경화를 그려준다거나 상징적 사건의 제시를 통해 관념적 소재가 안고 있는 내포적 의미를 암시적으로 환기시켜주는 방법이 좋다. 다음 유치환의 <그리움>이란 시처럼.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님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역시 유치환의 다음 <행복>이란 시는 상징적 사건의 구체적 제시를 통해 시를 형상화 함으로 러셀이나 알랭이 쓴 <행복론>보다도 우리를 더욱 감동시킨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그리고 다음 김춘수의 <不在>는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과 권태로운 삶의 윤회 속에서 正體性의 不在를 느끼는 시인의 허무감이 잘 형상화되어 있다.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리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
맨드라미, 나팔꽃, 복숭아 같은 것
철마다 피곤
소리없이 져버렸다.
차운 한겨울에도
외롭게 햇살은 靑石 섬돌 위에서
낮잠을 졸다 갔다.
할 일없이 세월은 흘러만 가고
꿈결같이 사람들은
살다 죽었다.
지금까지 시의 소재로 쓸 수 있는 것들을 몇 가지 패턴으로 분류해봤는데 이 밖에도 소재는 수없이 많을 것이다. 종교적인 소재도 있을 수 있고 심리적인 소재도 있을 수 있다. 시를 쓰는 사람은 어떠한 소재든지 요리할 수 있어야 한다. 소재가 갖는 상징적 의미를 파악하여 그것을 주제와 연결시켜 스스로의 개성대로 표현하면 된다. 특별히 ‘시적인 소재’ 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노래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이젠 ‘어떻게’ 노래하느냐가 문제라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