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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화 – 다시 그림이다. >마틴 게이퍼드 지음, 주은정 옯김, 디자인하우스
<봄은 언제나 찾아온다 – 노르망디에서 데이비드 호크니로부터>, 데이비드 호크니, 마친 게이퍼드 지음, 시공아트
나는 왜 그리는가?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어릴 적부터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꼭 해보고 싶었던 그림 공부를 시작한지 1년이 지났다. 초보자가 접근하기 가장 용이한 수채화 수업에 참여해 그저 수업이 재미있어서, 다음 주에 완성해야 할 과제에 집중하면서 그리다보니 연말에는 동아리 전시회에 두 점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떠나지 못하는 질문...
지금까지는 입문의 과정으로 그림의 기본적인 재료와 기초적인 기법을 익히는데 여념이 없었다. 물론 아직도 멀었지만 이젠 슬슬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고민을 시작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의미 있게 나아가지 못하고 시들해질 것이다.
인쇄술, 사진, 영상매체가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이미지가 귀했다. 내 어릴 적 환경을 돌아보아도 그랬다. 그림은 기록이었고 진귀한 볼거리였다. 부유한 집엔 그림이 걸렸지만 가난한 집은 그림 한 점을 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림은 귀한 정보였고 쾌락을 주는 드문 미학적 원천이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이미지 과잉의 시대다. 영상이 문자를 대신하는 시대. 디지털 이미지의 홍수 속에 살아간다. 그렇다면 사진의 시대에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림은 오직 이미지를 해체하는 도발로만 의미가 있는 것인가? 나는 이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왜 그리려 하고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자 하는 것인가? 이 행위가 내 삶과 세계 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우리는 본능적으로 세계를 모방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처럼 우리는 모방의 본능이 있다. 모방을 할 때면 아무리 추한 것도 아름다워진다. 모방된 현실은 현상 너머 본질을 보여준다고 했다. 그래서 모방이 더 진실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모방이 다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기한 인간의 모방 행위의 특질에 대해서 이런 저런 논쟁도 있을 수 있겠지만 분명 이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도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그림을그리고 나도, 여러 사람이 그림을 그리며 즐거워한다. 그려진 이미지가 주는 쾌감은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사진과 그림이 주는 쾌감의 차이. 찍는 행위와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싶은 대상을 직접 대면해서 내 눈으로 관찰하고 그리고 싶지만 그런 환경이 쉽게 제공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사진에 의지하게 된다. 물론 그 전에 미리 그리고 싶은 풍경이나 사물을 친견해서 체험하고 오래 관찰한 후 기억하고 계획하고 사진을 찍고 참고할 수는 있다. 하지만 사진을 보고 그리는 행위가 오래 지속되다 보면 심한 회의감이 들게 된다. 내 눈으로 보는 법을 알고 싶었는데...
또, 나는 무엇을 그리고 싶은가? 내게 매력적인 대상은 무엇인가? 왜 그 대상이 내 시선을 끄는가? 나는 그것을 어떻게 보고 내가 본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사진처럼 똑같이 사실적이고 자연주의적인 방식으로? 그런 정밀한 사진의 복제 같은 방식이 정말로 그 대상을 잘 드러내는 것일까? 그림에서 나의 개성이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나는 어떻게 보는 사람인지 어떻게 자기 이해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뭐... 이런 질문들이 쏟아져나와서 잠시 그림을 멈추고 책을 집어 들었다.
아직 생존해 있는 80대 중반을 훌쩍 넘긴 오늘날 가장 유명한 화가 중의 한 명인 데이비드 호크니 관련 서적을 세 권 읽었다. 그중 호크니의 발언이 있는 책 중에서 내 질문과 관련되는 부분을 옮겨본다. 호크니 역시 그리는 사람으로 평생 이런 질문들과 씨름하며 실험한 화가였다. 추상에도 구상에도 매이지 않고 본인이 본 세계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두 경향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고, 새로운 기술의 발전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 사진, 팩스, 아이폰, 아이패드, 움직이는 영상 등으로 우리가 보는 세계를 가장 잘 표현하기 위해서 유연하게 실험한다. 지금은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시골 작업실에서 나무와 숲과 빛과 물의 흐름을 바라보고 그리면서 평화롭게 자연으로 회귀했다. 아직도 더 잘 보고 더 잘 표현하기 위해 발전하고 있다고 한다.
내 질문을 가지고 호크니를 만나니... 막연히 예상했던 답변이었지만 실천가의 평생의 모색의 과정과 그 결과물인 그의 그림들, 그의 언술들이 어우러져 생생한 참고가 되었고 조금은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다. 그의 그림을 친견한 적이 없다. 언젠가 호크니의 그림을 꼭 보고 싶다. 요즘 노르망디의 작업들은 명쾌하고 그의 무대 작업들이 매력적이었다.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화 – 다시 그림이다. 마틴 게이퍼드 지음, 주은정 옯김, 디자인하우스
<자연주의의 덫> 중에서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에 미술학도인 호크니가 직면한 곤경은 무엇을 그릴 것인지와 어떻게 그릴 것인지 하는 문제였다.
그는 사진도 찍고 드로잉도 했지만 결국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이 이후로 그의 작품은 자연주의의 덫에서 벗어나 세계를 묘사하는 다른 방법을 찾는데 몰두했다. 그는 카메라 렌즈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묘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호크니 :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계가 사진처럼 보인다고 여깁니다. 나는 사진이 대부분 맞지만, 그것이 놓치고 있는 약간의 차이 때문에 사진이 세계로부터 크게 빚나간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 지점이 내가 찾고 있었던 바입니다.
게이퍼드 : 그렇지만 당신은 1960년대에 회화를 위한 기초로 사진을 이용하지 않았습니까?
호크니 : 맞습니다. 가끔은 그랬지요. 하지만 사진을 통해서는 잘 그릴 수 없다는 사실을 항상 알고 있었습니다. 사진으로는 실제 생활에서처럼 부피감을 느끼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규칙은 없습니다. … 1970년대 초반 파리에서 살 때 막다른 길을 만났다고 느꼈습니다. 몇몇 작품을 포기했고 내팽개쳤습니다. 실제로 당시에는 그저 드로잉만 했습니다. 작업하고 있는 것들에는 무언가 잘못된 점이 있었지요. 나는 그것을 ‘강박적 자연주의’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당시에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사진이 그 문제를 일으킨 겁니다. 나는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덫이라는 점을 발견했고, 나는 그것을 멈추고 싶었습니다. … 이미지에 관심이 있었고, 사진은 많은 사람들이 세계를 보는 방식과 세계의 색채를 나타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사진을 관찰했고 사진에 빠져보기도 했던 것입니다. … 정확히 말해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 자체가 문제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사진과 카메라가 우리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사진은 우리에게 해를 끼치기도 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사진은 우리 모두가 매우 따분하고 비슷한 방식으로 보게 합니다. … ‘파블로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는 세상을 매우 흥미진진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는데, 사진은 너무나 따분하게 보이게끔 하는구나. 그런데도 우리는 모더니즘이 멀어지고자 했던 그 모든 것들을 향해 다시 돌아가고 있다니’하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미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엄청난 수의 이미지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이미지들은 훨씬 더 의심스럽습니다. 그것들은 사실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게이퍼드 : 그렇지만 사진은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호크니 : 우리는 사진이 궁극적으로는 실제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까. 카메라는 기하학적으로 대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보지 않습니다. 부분적으로는 기하학적으로 보지만 또한 심리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내가 저 벽에 걸린 요하네스 브람스의 사진을 본다면, 그 순간 브람스는 문보다 훨씬 더 크게 보일 겁니다. 그러므로 세계를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측정하는 것은 사실이 될 수 없습니다.
게이퍼드 : 그렇다면 주관적이고 심리적으로 본다는 말씀입니까?
호크니 : 그렇습니다. 지금 당신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내 시야에는 당신의 얼굴이 훨씬 더 크게 보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눈은 마음의 일부분이지 않습니까? 이집트 회화에서 파라오는 다른 이들보다 세 배 이상 더 큽니다. 이집트인의 마음속에서는 파라오가 실제로 더 컸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집트의 회화는 진실합니다. 그러나 기하학적 측면에서는 아니지요.
피카소가 나폴리에서 ‘파르제네제의 황소’를 보았을 때 형상들의 손이 실물보다 더 크다는 점을 알아챘습니다. 그 인물들의 행위 때문에 그렇게 표현된 것입니다. 피카소는 손이 거대한 발레 무용수들을 그렸는데, 매우 우아하고 가벼워 보입니다. 피카소는 무용수들이 그와 같이 움직일 때 보는 사람은 그들의 손을 좇아가게 되고, 따라서 보는 이들에게는 손이 더 커 보인다는 점을 이해했던 것입니다.
<점점 더 커지는 그림> 중에서
사진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당신에게 공간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사진은 공간이 아닌 그저 표면만을 봅니다. 그러나 공간은 표면보다 훨씬 신비롭습니다. 내 생각에 최종 작품은 보는 이에게 그곳에 존재한다는 감각을 일깨워줄 것입니다.
<더 분명하게 보기> 중에서
모네는 당신이 보다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만듭니다. 반 고흐 역시 그렇습니다. 그는 당신이 주변 세계를 보다 열정적으로 살피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처럼 주변 세계를 보는 것을 즐깁니다.
게이퍼드 : 그렇다면 당신은 시각예술의 목적 중 하나가 바라보게 하는 것, 주의를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군요.
호크니 : 나는 그 점을 좋아합니다. 그림은 그림에 영향을 미치지만, 우리로 하여금 그렇지 않으면 보지 않았을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게이퍼드 :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본다는 것의 핵심은 전적으로 현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먹을 수 있는 것을 발견하게 해주고, 잡아먹히지 않도록 해줍니다. 그렇지만 미술은 그와는 다른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미술은 그 자체를 위한, 즐거움을 위한 비현실적인 관찰인 것입니다.
호크니 : 나는 언제나 바라보기로부터 강렬한 즐거움을 얻습니다. 보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행위입니다. 당신은 신중하게 그 행위를 해야 합니다. 듣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음탕한 눈’이라는 용어를 좋아했습니다. 눈이 극도의 쾌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기억으로 그리기> 중에서
최신작들을 보면서 호크니는 자신 앞에 놓인 것을 그린 것이 아니라 언젠가 본 것을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드로잉과 기억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기억이 인간의 모든 지각과 모든 회화의 한 요인인 것은 분명하다.
호크니 : 우리는 기억과 함께 봅니다. 내 기억은 당신의 기억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같은 장소에 서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같은 것을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각기 다른 요소가 작용합니다. 이전에 어떤 장소에 가본 적이 있는지, 그곳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등이 당신에게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시각이라는 것은 언제나 존재하지 않습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그림을 그리면 눈으로 본 것을 기억하는 시각 기억 능력을 높이는 훈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과 같이 결심해보세요. ‘오늘 아침 거기로 가서 이러이러한 것을 볼 거야.’하고요. 만약 당신이 이를 계속해나간다면, 특히 바라보는 대상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면 이 방법으로 효과를 볼 수 있다 장담합니다. 5분 전의 기억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해집니다.
<서쪽 출구 : 공간 탐구> 중에서
그랜드캐니언은 사진으로 찍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진도 그 실물을 제대로 다룰 수 없습니다. 사진은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즉 하나의 시점에서 셔터를 한 번 눌러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보고 공간으로 지각하는 데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걸립니다.
게이퍼드 : 그렇다면 당신은 회화의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냅니까?
호크니 : 솔직히 말하면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직감적으로 작업합니다. 나는 공식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머릿속에 있기 때문에 측정할 수는 없습니다. 눈은 마음의 한 부분이니까요.
게이퍼드 : 눈이 마음의 한 부분이라는 말은 당신이 보는 공간이 어느 정도는 작가인 자신의 머릿 속에 존재한다는 점을 함축합니다.
호크니 : 나는 항상 회화의 공간에 매료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발명하고 그것이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화가가 하는 멋진 일입니다. 피카소는 확실히 그렇게 했습니다.
게이퍼드 :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하는 일이겠죠.
호크니 : 그 점에 대해 종종 곰곰이 생각해보곤 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공간을 만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한 번에 보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가장 먼저 무엇을 보는가? 그다음에는 무엇을 보는가? 그다음에는? 조너선 밀러가 한 번은 내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공간이 아니라 사물들을 봅니다.”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미지의 힘> 중에서
“사람들은 그림과 조각에서 성적인 자극을 받는다. 그래서 그들은 그림과 조각을 부수거나 훼손하고, 입맞춤하기도 하며, 그 앞에서 울부짖고, 그것들을 향해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또 그것들 때문에 마음이 진정되거나 동요되기도 하며 저항하도록 선동 받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통해 감사를 표현하고, 고양되기를 기대하며, 감동을 받아 가장 극대화된 공감과 두려움을 느낀다.”
요점은 이 모든 것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미지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이미지는 항상 강력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만약 “미술계‘가 이미지에서 멀어진다면 미술계는 주류에서 벗어난 활동이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힘은 이미지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사진은 실제 현실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다.
매체와 기술이 어떤 종류의 그림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좌우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움직이는 이미지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보다 더 심오한 측면은 공유된 경험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이미지의 주요 공급자가 교회였습니다. 종교 기관들이 공공의 구경거리인 건축과 종교의식을 제공해주었습니다. 그 후 교회는 서서히 그 사회적 권위를 잃었습니다. 그 뒤로 이미지는 매체라고 알려진 것을 통해 배포되었습니다. 신문계의 거물, 영화사 소유주, 기자 그리고 영화와 tv프 로그램 감독이 모든 사람들이 모든 이미지를 지배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또 다른 엄청난 변화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 오래된 이미지 배포자들이 권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미지를 만드는,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미지를 배포하는 새로운 기술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기술이 대중매체를 도입했지만 그것을 제거하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월드게이트를 담은 아홉 개의 화면> 중에서
이 로드 픽쳐가 세계에 대한 더 크고, 더 안은 그림을 향한 호크니의 탐구의 종착점이 될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의 연구는 계속될 것이다. 세계에 대한 완벽한 그림, 즉 우리가 세계 안에서 볼 수 있고 세계에 대해서 느끼는 모든 것을 우리가 세계 속에서 움직이고 세계를 응시하는 방식으로 포착한 그림은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탐구는 그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무수히 많은 것들을 깨닫게 해준다. 호크니가 그 일을 단념하지는 않을 것 같다.
봄은 언제나 찾아온다 – 노르망디에서 데이비드 호크니로부터
데이비드 호크니, 마친 게이퍼드 지음, 시고아트
1975년 호크니는 마침내 자연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돌파구는 한 편의 시, 윌리스 스티븐슨의 1937년작 <푸른 기타를 치는 남자>에서 비롯되었다. 시의 1연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남자는 기타 위로 몸을 숙였다.
신통찮은 양털 깎은 남자. 그날은 초록빛이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당신은 푸른 기타를 갖고 있소
당신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연주하지 않는군요.“
남자는 대답했다. ”사물의 모습은 푸른 기타 위에서 바뀝니다.“
처음에는 그 시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상상력을 노래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두 번째 읽을 때에는 한층 분명해졌습니다 그 시는 또한 피카소에 대해서, 대상을 변형시키는 상상력에 대해서, 그러니까 보는 방식에 대해서 노래합니다. 나는 그 시에서 영감을 받아 드로잉을 몇 점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 이 드로잉들은 20점의 컬러 애칭 판화로 이루어진 작품집으로 발전했다. 시를 그래도 옮긴 삽화는 아니다. 어쨌든 스티븐스의 시는 이야기를 갖고 있지 않다. 호크니의 판화는 자신이 핵심적이라고 여기는 것과 그를 ’흥분시킨다‘고 생각되는 것으로 유희한다. 다시 말해 시의 상상력은 세계와 우리가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을 변형시킬 수 있고 또는 적어도 색을 경험하는 일반적인 방식을 변형시킬 수 있다. 호크니의 판화는 세상을, 상상의 영역이건 실제 장소이건 간에 바라는 대로 채색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유희한다.
호크니는 투명성을 주제로 다룬 17세기의 시를 즐겨 인용한다.
“유리의 표면을 보는 사람은
유리를 주시할 수도 있고
원한다면 유리를 관통해 볼 수도 있다
그러고 나면 천국을 보게 되리라.”
나는 항상 조지 허버트의 이 시를 대단히 좋아했습니다. 유리 표면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리를 볼 때 유리를 관통해 볼 수는 없지만 그 다음 단계에서 유리를 관통해서 볼 것인지 여부를 눈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특히 유리에 먼지가 끼어 있다면 유리를 한참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다음에 유리를 관통해 보면 더 이상 먼지를 보지 않게 되죠. 나는 유리를 그린 그림을 사랑합니다.
본질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장소가 아니라 그곳을 보는 사람이다. 장소가 어디든 그곳은 세계의 일부이므로 시간과 장소의 법칙이 여전히 적용될 것이다. 해가 뜨고 지고 달도 뜨고 질 것이다. 특정한 빛이나 특정한 색조가 예술가를 매료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 만이 매혹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반 고흐처럼 철도교나 아를의 공원에서 영감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연과 유리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일이죠. 우리는 자연과 별개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입니다. 이 상황은 때가 되면 끝날 겁니다. 그다음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배웠습니까? ... 삶에서 유일하게 진정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음식과 사랑입니다. 나와 강아지 루비에게 그렇듯이 바로 그 순서대로입니다...예술의 원천은 사랑입니다. 나는 삶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