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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명기 8 : 11 - 17
제목: 광야의 신앙
일시: 2010. 12. 5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나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이스라엘백성들이 던져진 곳은 광야였다. 가나안을 경험하기 전에 그들이 먼저 거쳐야 했던 것은 광야의 삶이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2절) 어떻게 하다 보니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을 광야로 이끄신 것이다. 광야는 어떤 곳인가? 광야는 물도 먹을 것도 없는 결핍된 곳이다. 집도 쉴 곳도 없는 안전하지도 않은 곳이다. 이정표도 방향도 없는 불확실한 곳이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몰아 넣으시어 광야의 신앙을 갖게 하셨을까?
II. 광야의 신앙은 하나님을 기억하게 한다.
광야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한다. 광야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게 하며 추억의 현장이 된다. 이스라엘백성은 광야에서 먼저 무기력한 자신을 만나게 된다. 먹을 것, 마실 것, 쉴 곳, 나아가야 할 방향, 어느 것 하나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거기에 있을 때 이스라엘은 한계에 부딪혔다. 한계에 섰다는 말은 자신의 경계선을 안다는 말이며 자신을 제대로 평가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렇구나 난 여기까지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몰아넣으시면서 의도하신 것은 너희의 한계을 깨달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광야의 때는 엄격히 절망의 때가 아니라, 소망의 때이다. 이때는 육신은 힘들어도 영혼이 깨어있다. 바로 그때 나의 약함을 통해서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시련이 있을 때 나는 포기되며 하나님만이 나의 소망으로 떠오른다. 자신을 의지 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하나님은 나를 포기하는 그 시점에 이르도록 나를 유도하신다. 그것은 벼랑 끝 신앙이다. 벼랑은 내가 포기되는 순간이다. 벼랑 끝에 까지 가지 않았다면 여전히 발을 디딜만한 여지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광야로 몰아가실 때는 우리가 믿고 발을 디딜만한 여지까지 없애신다.
광야는 모든 것이 부재하는 황량한 곳이다.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고 거주할 만한 곳도 없다. 불뱀과 전갈의 위험이 있다. 보장된 것은 없고 불확실한 미래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없어도 있는 것은 하나님이다.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찾은 것은 하나님이다.
탕자의 비유를 보라. 둘째 아들이 아비에게 자기의 분깃을 달라고 하여 아비의 눈을 피해 먼 나라도 떠났다. 거기서 가진 모든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다 허비하였다. 마침 그 나라에 흉년이 크게 들게 되었고 “비로소 궁핍”(눅15:14)하게 되었다. 그에게 재산이 있고 현금이 지갑에 들어있고 아직 팔아 먹을 만한 패물이 있을 때는 궁핍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잃고 궁핍하게 되었을 때 아버지 생각이 나게 되는 것이다. 설주도 평소에는 친구가 많이 생겨 그들 생일파티도 가야하니 돈이 필요해요 농구하는데 안경불편해서 렌즈 해야 되요 등 여러 가지 요청만 하고 끝에 미안한지 그리워요 보고 싶어요 하지만 그것은 형식적이었고 자신이 아파서 학교에 못가니 정말 엄마 아빠가 보고 싶다고 한다.
우리의 궁핍한 광야생활은 모든 것을 다 잃은 장소처럼 느껴진다. 애굽의 마늘과 부추와 고생스럽지만, 그냥 익숙해졌던 그 시절이 생각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었지만, 얻는 것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일이 안되어서, 재산에 손해가 있어서, 건강하지 못해서, 소망하고 바라던 것이 없어서 황량한 인생처럼 느껴지지만 이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 가운데 더욱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고 주님께 매달리고 주님을 의지하게 된 우리의 신앙이 생기고 주님과 더욱 깊은 교제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찾게 된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11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14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18절)라는 표현이 나온다.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광야의 생활을 통해서이다. 하나님과 추억의 장소가 바로 광야의 시절이 되는 것이다.
광야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이스라엘의 전공필수였다. 만나를 먹고 사람이 떡 달라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면 되는구나 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메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명기 8장 3절).
이곳에 있는 우리 유학생들을 보라. 가장 스트레스가 많을 때이다. 혼자 먹는 것 해결 해야지, 재정적인 것도 부담스럽지, 언어도 어렵지, 행정과 계약과 여러 가지 외국에서 사는 것도 스트레스이다. 공부와 학교생활 자체도 쉬운 것이 아니다. 결혼해야지 군에 가야지 한국의 부모님들은 아기 없냐고 생각하지... 모든 이들이 사면초가와 같이 힘든 삶을 산다. 하지만 이 어려운 순간이기에 주님을 더욱 만날 수 있다. 이곳이 추억의 장소이다.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주님과 추억의 장소 광야가 바로 이곳이다.
III. 광야는 신앙은 성장을 가져오는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련의 광야생활을 통해서 자기를 찾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축복이었다. 가나안의 축복이었다. 광야는 가나안의 축복을 담을 그릇을 넓히는 과정이었다. 광야는 어떤 곳인가?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15-16절) 물이 없는 곳으로 이끌어서 물을 마시게 하시고 먹을 것이 없는 곳으로 이끄셔서 먹을 것을 주셨다는 것은 시련을 통해서 성장케 하신 것이다. “마침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고통을 받고 좌절하여 멸망당하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는 것이었다. 복을 받기 전, 이스라엘이 경험하여야 할 것이 바로 광야의 무대였다. 믿음은 시련을 먹고 성장한다. 광야의 시련 없으면 성장하지 않는다. 우리의 신앙은 야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어려움이 있을 때에 성장한다. 시험을 제거하면 즉 어려운 것을 제거하면 신앙생활을 하기가 좋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결코 아니다. 더 좋은 환경이 되었다고 예배를 더 잘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의 문제는 무엇인가? 너무 좋은 프로그램, 너무 좋은 설교말씀, 너무 좋은 시설, 너무 좋은 찬양시스템, 너무 좋은 성경교제와 도구... 그것이 좋다보니까 우리는 조금만 헌신해도 되었다. 자동차가 있으므로 신앙생활하기가 더 좋은가? 아니다. 차가 없으면 교회에 못 오는 시대가 되었다. 그전 같으면 한 시간이라도 걸어서 오는데, 차가 생긴 이후로 한 시간 걸어 교회 온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 되었다. 이제는 거리가 멀어도 불평할 수 있다. 주차장이 교회의 성장을 좌우한다. 이제는 하이쭝이 안되어도 불평할 수 있다. 우리의 신앙이 더욱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고 “나를 만족시켜봐”하는 신앙이 되었다.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불평할 수 있는 꺼리가 되었다.
이전에는 100중에 10만 있어도 우리의 신앙이 나머지 90을 커버했다. 그러나 지금은 100이 필요하다면 90은 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은 10만 있어도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신앙의 성장과 신앙의 환경은 반비례한다. 무엇이 신앙의 성장에 좋은 환경인가? 좋은 시설과 프로그램과 시스템이라기 보다 광야가 오히려 신앙의 성장에 좋은 곳 아닐까? 광야는 없는 곳이었다. 모든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이 계셨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고 은금이 풍부하고 육축이 많아 모든 것이 풍부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들의 신앙은 더욱 약해졌다.
쪽집게 과외를 한다고 한다. 그러면 과연 얼마나 많이 알겠는가? 족집게 공부를 한 사람은 당장 성적이 잘 나올 수 있을 수 있지만, 집게로 집어낸 그것만 안다. 수학문제를 풀 때 답을 보고 풀이한 것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러나 스스로 풀려고 하면 한 문제를 풀기도 쉽지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스스로 풀어보아야 나중에 brainstorming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것저것 하다가 답을 발견한 학생은 온갖 세상을 다 안다.
광야생활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과정이었을까? 허비만 하는 잃어버린 시절이었을까? 실수로 길을 잘못 들어 이스라엘역사의 손실의 시간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곳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곳에서 그들은 가나안의 축복을 위한 자격증 라이센스를 취득하고 있었다. 광야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그냥 무의미한 생활이 아니었다. 간증이 넘치는 곳이다.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 알지 못했던 것을 얻게 된다. 우리는 실수니 그 과정이 없었으면 좋았겠다느니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큰 유익이 된다.
예) 할레에서 약학박사 공부를 하던 강원구집사님이 저에게 보여준다면서 자신의 연구실로 초대했다. 쥐심장실험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흰쥐 심장을 꺼내어서 여전히 팔딱거리고 뛰고 있는 심장의 관을 어떤 실험기계 관에다가 연결하고 시약을 집어넣으면 그것이 자료가 되어 그라프로 그려진다. 그러한 실험을 여러 방법으로 무수히 반복하여 데이터를 만들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수집된 데이터를 가지고 치료하는데 더 섬세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떠한 결과를 기대하고 실험을 해도 그렇게 나온 것에 대해서는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험에는 실수가 없다. 그러면서 목사님 비아그라가 어떻게 나왔는지 아세요? 이와 같이 심장혈관협심증치료제를 만들려고 약학박사들이 토끼를 가지고 연구를 하는데 심장에서뿐 아니라, 토끼의 엉뚱한 곳에 효과가 나와서 사람들이 연구하여 발기부전증환자를 치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발명을 할 때 90%이상은 없어지고 10%정도는 제품화 되고 1%정도가 성공하는데, 비아그라는 대 히트를 칠 수 있었다고 한다. 실수를 통해서 말이다. 우리의 인생은 버릴 것이 없다.
IV. 광야는 좋은 시절이 와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한다.
광야를 거치지 않고 쉽게 주면 교만해 진다. 17-18절을 보라. “...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만일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100세에 아들을 주시지 아니했으면 약속의 아들인지 아니면 내가 젊어서 아이를 잘 낳은지 혼동하게 될 것이다. 왜 굳이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점령하게 될 때 엿새 동안 여리고 성을 한바뀌를 돌고 마지막 7일째는 7바퀴를 돈다음에 나팔을 불고 소리를 지르라고 했을까? 엉뚱한 방법으로 그 강한 성 여리고를 무너뜨린 것이다. 왜? 만일 막강화력을 갖다 대었으면 우리 군사가 많아서라고 말할 것이다. 기드온도 마찬가지이다.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괴롭히자 전쟁에 참가할 이스라엘의 젊은이들 수만명이 지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300명의 용사만을 사용하셨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사람의 힘에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로 주시지 않고 광야를 거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셨으니 교만치 말고 겸손하라는 메시지이다. 하나님은 반복하여 너를 낮추시고 시험하셨다고 하신다.
이스라엘이 낮아지고 겸손하게 될 때 가나안 땅에서 얻게 되는 은금과 육축과 소산물을 귀하게 여기고 감사하게 된다. 목이 말라봐야 물을 감사할 것이고 배가 고파봐야 만나를 감사하게 먹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듣기만 하거나 관람만 시키신 것이 아니라, 경험하게 하셨다. 듣기만 하면 10%남고 보기만 하면 30%, 그러나 경험해보면 80%이상을 습득할 수 있다. 바닥을 경험하지 않으면 감사할 줄 모른다.
예)이곳 테아터에서 솔리스트로 있던 송윤진자매가 있다. 모든 것을 다 마치고 신랑과 결혼하여 한국에 살기로 결정하였는데 신랑이 아내될 윤진자매를 모시러(?) 왔다. 여러 일을 머물다가 돌아가는데 가는 날이 마침 주일 오후 2시경 비행기여서 그들은 예배를 드리고 점심도 들지 못하고 바로 공항으로 갔다. 교회에서 작별을 했다. 그런데 교회에서 식사 후에 누가 내게 여권을 가져다 준다. 보니까 신랑의 여권이다. 지금 남은 시간은 한시간 남짓, 이미 체크인 하는 곳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어디서 놓쳤을까 잃었을까를 고민할텐데 싶어서 저는 식사도 않고 다른 일은 뒤에 맡겨놓고 공항으로 달려갔다. 쏜살같이 가니 체크인 하는 쪽으로 갔는데 사람이 없다. 공항 서비스에 갔나 아니면 공항경찰에 갔나 싶어 몸을 돌이키는데 저편에서 오고 있다. 어디서 물어보고 당황해서 그러나 싶다해서 얼른 가서 바로 여권을 주니 “어 내 여권이 왜 거기에 있지”라고 한다. 교회식구가 이것을 화장실 근처에서 주어 내게 주길래 급하게 가지고 달려왔노라고 했다. 그랬더니 “고마워요”하면서 지금 체크인을 하려던 참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고마워했는가? 했다! 그러나 얼마나? 쬐끔! 그것도 약간의 형식이었다. 저는 “목사님 너무 고마워요. 지금 이일을 어쩌나 싶어 당황하고 울고 싶고....” 너무 고마워요... 이렇게 말하기를 바랬는데... 조금 맥이 빠졌다. 괜히 일찍 달렸어. 조금 늦게 올 것을... 왜 하나님은 우리를 바닥에 까지 가게 하실까? 진지하라고 말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한 산에서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는 숙제를 주실 때 모세가 예스라고 하면 하나님이 “알았다 네가 예스라고 했으니 합격!”이라고 하지 않았다. 조금 더 갔다. 이튿날 아침 장작을 나귀에 싣고 사환을 데리고 채비하면서 나서는 아브라함에게 “됐다 그 정도면”이라고 말하지 않으셨다.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의 나무를 쌓을 때 하나님이 스톱시켰다면 그만큼 감사하고 그만큼 경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다 내려간 그때까지를 기다리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나안을 주시기 전에 광야의 삶을 경험케 하시는 것은 더욱 주님께 감사하고 우리의 가진 것을 귀히 여기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다.
V. 12월 첫 주이다. 지난 한해를 잊어버리고 살지는 않았는가? 지난 한해도 광야의 생활이었다. 지나온 세월이 한 순간도 주 안에서 무의미하지 않다. 광야의 신앙에서 주님과 더 깊이 교제하고 그분을 기억하고 가나안을 기대하면서 축복을 쌓을 그릇을 더욱 넓히며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한해의 마지막 달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