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60
창작은 자신의 메타언어를 경험하는 일이다
어설픈 시인은 흉내를 내고 노련한 시인은 훔친다고 했다.
이화선은 그의 <생각 인문학>에서 창의성의 키워드로 관찰, 모방, 몰입, 실행, 함께 등 다섯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로버트루트먼스타인의 <생각의 탄생>의 첫 문장도 ‘모든 지식은 관찰에서 시작된다’라고 시작한다.
이들이 제시한 ‘관찰’의 의미는 ‘있는 것을 다르게 보는 법’에 관한 이야기다.
낯선 것들을 관계지울 수 있을 때 별들이 인간이고 돌멩이가 동물이고 구름은 식물이고 바다는 책이고 바람은 꽃이 된다.
그들만이 메타언어를 경험한다.
빈센트 반 고흐도 자신이 본 것을 나중에 창의적, 개념적 재현을 위해 ‘잘 보는 능력’을 갖고 싶어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모든 창의적인 업적의 비밀은 ‘보는 법을 아는 것 knowing how to see’이라 했다.
사실 우리는 근성으로 보고 지나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엄청난 낯선 우주가 들어있음에도 ‘으레 그렇다고 믿어버리고 으레 그렇게 생각하고’ 넘겨버린다.
타성이다.
그래서 주의를 기울인 관찰은 창조가 되고 늘 그렇게 보고 지나치는 타성은 진부함이 된다.
당신은 어떤가요?
늘 익숙한 것만 보고 지나치는 것은 아닌지요?
그럼 늘 만나는 바다는 몇 번 보셨나요?
바라보고, 들어보고, 느껴보고, 뱃길을 보고, 바람의 길을 보고, 반짝임 속에서 그늘과 햇볕도 보고, 계곡도 보고 섬진강 풍경도 보고, 속풍경도 보고 .... 보는 법은 끝이 없다.
잘 본다는 것은 볼 것을 보고 느낄 것을 느끼는 것이다.
잘 본다는 것은 잘 보기 위한 사전지식을 준비하는 등 적극적으로 자신의 일상에 관여하는 일이다.
다르게 보라
뒤집어 보고 물구나무서서 보라
end를 and로 보라
끝을 시작하라
길을 묻듯이 나무와 풀을 헤쳐라
짐승의 숨소리를 들어라
꽃의 그리움을 느껴라
달의 메아리를 들어라
나를 건너 너를 더듬어라
간절하라
간절하면 마음속에 꽃이 피리니
나의 세상이 꽃이리니
나에게 피는 낯선 꽃이 보이리니
이윽고 이름을 버리고 시를 얻으리니 - <낯선 화법> 전문
메타언어는 ‘우리’와 결별하고 ‘자신을 섬긴 자’의 언어다.
자신만의 안목, 시선으로 세계를 보는 자다.
돈키호테는 가진 땅을 팔아 책을 사고, 책을 읽기 위해 땅을 팔고 사냥을 끊은 일은 미치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책으로 단련한 지적 탄력이 커질수록 경계를 넘고 다시 또 넘고 결국은 자신만의 세계로 진입하고 고유한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
자신만의 영역에서 자신만의 눈으로 자신만을 바라보게 되면 황홀경에 빠진다.
모두가 풍차라고 하지만 그에게는 거인이고, 모두가 양떼라고 하지만 그에게는 군대다, 모두가 순례자라고 하지만 그에게는 악당이다.
그의 화법은 메타언어를 경험하는 것이다.
돈키호테는 모든 승리의 원천을 덕으로 보았다.
‘덕’은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힘이다.
자신을 어디론가 건너가게 하는 힘이다.
‘자네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자네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걸세.’
‘너 자신을 알고자 노력하면서 네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눈을 떠야만 한다, 이것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힘든 인식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는 소행성 B612호를 떠나 지구로 여행을 와 상상속의 여러 별을 여행하며 권위적인 왕, 찬사만 일삼는 허영꾼, 술꾼, 사업가, 지리학자, 여우 등 많은 이들을 만난다.
그 많은 이야기 중의 단 한 마디를 찾는다면 뭘까?
“사막이 아름다운 것 사막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 있어 그래”
내 속의 우물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를 궁금해 하는 내게 “비밀 하나 알려줄게. 아주 간단한 건데, 마음으로 봐야 더 잘 보이는 거야.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라고 귀띔해준다.
그래서 서문에 “어른들도 다 한때는 어린애들이었어. 하지만 그걸 기억하는 있는 어른은 썩 드물다”라고 밝혀두지 않았던가?
니체는 ‘어린이는 인간이 도달해야할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고 했다.
명나라 사상가 이탁오는 ‘인간이 탁월해지려면 반드시 동심을 회복해야한다’고 했다. 어린이는 사람의 처음이고 동심은 마음의 처음이다. 동심이야말로 세상의 처음을 보고 느끼고 열 수 있게 한다.
이처럼 나름의 뜻을 이룬 사람들은 자신만의 메타언어를 갖는다.
그것은 사람들마다 각자 다른 생각의 문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갖는 생각의 문법을 탐구하는 일은 큰 의미가 있다. 자신의 문법이 갖는 문제점을 깨달은 사람은 좋은 방향으로 생각을 바꾸고, 더 나아가 행동까지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마음은 그대로 볼 수 있는 마음이다
어린이는 어린이다. ‘아직 덜 된 어른’이 아니다.
첫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호기심 가득한 마음이다,
똑똑똑,
탯줄을 벗고 뿌리의 집으로 흘러들 시간이네요
톡톡, 비의 햇살로 튀어 올라요
더 깊은 잠속에 들어야 해요
꿈결에 하늘하늘 잠자리 날개짓의 바람소리가 들려요
맑은 물소리가 찰랑대요
꼼지락대는 고사리 손 잎이 보여요
웅크린 새우잠 속에 뛰쳐나온 숨소리도 들려요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된 햇살이 보여요
보일 듯 말 듯 들릴 듯 말 듯
새근새근 꽃피는 꽃씨의 잠이에요 -신병은 <꽃씨의 잠> 부분
동심이야말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만나고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안목이다.
양복 입은 남자의 몸통과 얼굴이 분리된 르네 마그리트의‘순례자’앞에서 “아저씨가 출근하는데 바빠서 얼굴을 놓고 갔나 봐”라는 아이의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아이스크림처럼 유리잔에 구름을 소복이 담은‘심금’을 보고 나서 “우리도 구름 한 잔 할까?”웃으며 말하는 친구와 전시회를 나설 때 일상의 케케묵은 먼지는 날아가 버린다.
정물화를 그려야 할 미술시간에 사과 한 알 대신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를 그리는 아이는 선생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
“나는 나 이전에 그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던 방식으로 생각한다“고 했던 마그리트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메타언어, 메타생각이 상상력으로 가는 힘이 된다.
류진은 진실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상상력이라면 상상력은 얽힌 듯 보이는 현실을 명쾌하게 만든다고 했다.
감씨 속에 들어있는 봄바람, 연두빛 잎새, 감꽃, 쐐기, 반짝이는 봄햇살, 주렁주렁 매달린 감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다면 우리 삶의 본질 그 자체는 언제나 열려있음을 알 수 있다.
메타언어는 시인이 발견해낸 시적 의미다,
박영희 ‘접기로 한다’
아내에게서 받은 서운하고 괘씸한 마음을 접기로 한다 지폐도 반으로 접어야 넣기 편하다.
괴씸한 마음 서운한 마음을 접는다. 종이비행기도 그렇고 종이배도 접어야 날고 띄울 수 있다.
이생진 ‘벌레 먹은 나뭇잎’ -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
메타언어는 언어의 동종교류와 이종교류를 통한 자기만의 말을 경험하는 일이다.
말의 맛, 무늬, 향기로 메타언어의 경험적 무늬를 찾아가는 일이다.
알고보면 좋은 시들은 한결같이 사소한 것들에서 깨달음을 찾은 것들이다.
이 모든 게 알고 보면 ‘들여다보는 힘’의 결과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세상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것이 없다 (毋不敬)
모든 것이 신비롭고 경이로워 존경의 대상이다. 작은 풀꽃 한송이에도 우주가 있음을 알게 된다.
통찰, 통섭이다.
그리고 상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