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은 근현대의 시간들을 관통하며, 지역과 지역 사이의 시간적 거리를 단축한다. 길은 지역과 지역 사이를 잇고 물자와 사람의 왕래를 활발하게 한다. 근대 초입에 일제의 설계와 시공으로 완성된 한국의 간선철도는 섬나라인 일본과 대륙을 잇는 병참과 상품수송의 경로였다. 결과적으로 근대와 제국주의를 유입하는 통로이자 더 원활한 물자와 사람의 이동 경로로써 식민지 지배와 수탈을 극대화하는데 이용되었다. 이 간선철도들과 더불어 경기도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1번 국도는 서북단의 신의주에서 서남단의 목포에 이르기까지 498.7킬로미터에 이르는 한반도 서쪽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긴 도로다. 이 1번 국도는 경기도의 개성, 문산, 파주, 고양을 거쳐 서울의 서쪽을 가로지르고, 다시 경기도의 안양, 의왕, 수원, 오산, 평택을 거쳐 천안 쪽으로 빠져나간다. 산업도로라고도 불리는 1번 국도는 물자의 이동 통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는 시간이 곧 돈이니까, 모든 물자를 실어 나르는 자동차의 운전자들은 과속 운행을 상습화한다. 그래서 이 길은 “기계의 비명과 사람들의 삐걱임이 건너간 / 저 속도의 박물관”(이용한, 「1번 국도, 세월」)이다. 자동차들이 과속하는 밤들은 잠 못 드는 자들에게 시름의 사나움에 젖게 하기도 한다. “경기도 의왕 살 때 아파트 단지 바로 아래 / 1번국도, / 화물트럭들의 질주가 사나웠다. / 그게 내 운명의 사나움 같아 시름이 잦았다.”(졸시,「此居」) 낮밤을 가리지 않고 물자가 이동하는 산업도로는 “각자의 산업을 위해 쌩쌩거리는 것들”로 붐비며 그것들이 내는 소음들로 시끄럽다. 그 소리의 힘은 너무 세다. “밤 두세 시의 머리맡에는 / 소리 너무 세다 / 소리의 뒤도 너무 힘세다 // 이 밤중 / 그 어디로 가는 것들이여 / 거칠 것 없는 산업도로를 달리는 것들이여 / 각자의 산업을 위해 쌩쌩거리는 것들이여 / 공중에 날린 접시같이 날아가기도 하는 것들이여”(이진명, 「깃발」) 국도는 지역과 지역을 이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물자와 물자의 오고 감을 활발하게 함으로써 생활양식을 바꾸고 사회변화를 일구는 동인이 되기도 한다. 아울러 지역의 벽에 가로막혀 단절되어 있던 상호접촉과 상호의존의 영역을 확대하며 풍속과 문화의 상호교류가 활발해진다. 인류학적으로 보자면 지표면 위에 뚫린 모든 길들은 사람과 상품과 문화의 이동통로일 뿐만 아니라 문명에 혁신의 기운을 불어넣는 모든 변화의 물결이 유입되는 경로다. 한반도의 남과 북을 잇는 1번국도는 경제성장과 개발시대를 지배한 경제지상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표상이다. 1번국도는 경제지상주의를 떠받치는 상품과 자본의 무한경쟁, 시장의 확장, 소비주의의 유포를 이끄는 첨병이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질주하는 것들로 인해 1번국도는 “속도의 박물관”이 되어버린 것이다. 근대문명의 부산물인 소음과 굉음은 늘 너무 세서 청신경이 여리고 예민한 것들을 압박한다.
서울에서 뻗어나간 길들은 서울을 동심원으로 감싼 경기도를 거쳐나간다. 경기도가 처한 서울의 위성 지역이라는 지정학적인 운명은 불가피한 바가 있다. 이 말은 경기도의 정체성이 노른자위를 꿰차고 들어앉은 서울의 원심력과 방외를 넓게 둘러싼 바깥 지역들, 이를테면 강원도와 황해도, 그리고 충청남북도의 구심력 사이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만들어졌음을 뜻한다. 서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강 이남의 성남, 분당, 광명, 부천, 안양, 군포, 과천, 수원, 용인이나 한강 이북의 고양, 일산, 파주, 의정부, 서울의 동쪽에 위치한 구리, 남양주 등은 서울의 원심력에 의한 영향을 더 받을 것이고, 경기도 남부의 오산, 여주, 이천, 안성, 평택 등은 저 중앙의 원심력보다는 변방에서 뻗어 나오는 구심력에 의한 영향이 더 크다. 서울 근교에 사는 경기도 사람들 중에는 서울에 직장을 두고 출퇴근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 중에는 마음의 현주소를 잠만 자는 경기도보다는 일상생활의 중요한 시간들을 더 많이 보내는 서울에 두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4. 경기말의 언어지리학
중세 국어가 형성되는 고려 왕조 시대의 표준말은 개성말이다. 왕조 권력이 서 있는 곳이 개성이고, 그곳이 정치와 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했기에 개성과 그 인근의 경기도 지역에서 통용되는 말들이 중심언어로써 여러 지방 말들에 표준적 권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조선 왕조가 들어서며 권력의 중심이 개성에서 서울로 이동하며, 자연스럽게 표준말의 거점 공간도 개성에서 서울로 바뀌지만 서울과 개성은 방언차가 그리 크지 않으며 다 함께 중부 방언권에 속한다. 방언은 지역과 사회계층, 세대에 따라 특화된 언어 현상, 즉 주류 언어에서 갈라져 나온 변이체이자 分化體다. 방언학에서는 이들 방언들은 어휘, 발음, 음성, 음운, 형태, 통사, 의미 등과 같이 일곱 개로 범주화해서 方言差를 측정하고 구획을 나눈다. 언어지도는 이 언어구조상의 차이에 근거해 방언형의 분포를 지리적 경계로 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等語線이다. 등어선은 어휘등어선lexical, 발음등어선pronunciation, 음성등어선phonetic isogloss, 음운등어선phonemic isogloss, 형태등어선morphological isogloss, 통사등어선syntactic isogloss, 의미등어선semantic isogloss 등으로 나눈다. 이 등어선에 의해 방언구획은 보다 또렷해진다. 사회방언학에서는 방언을 둘로 나누는데 古形과 改新形이 두로 쓰이는 병존 방언과 고형도 아니요 개신형도 아닌 두 방언이 결합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제 3의 융합 방언이 그것이다. 경기도와 인접한 황해도와 충청도, 그리고 강원도의 말과 어조의 영향력은 크지만, 지리적으로 먼 거리에 있는 함경도나 평안도 방언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미미한 편이다.
한반도 방언의 분화상은 네 개의 축으로 이루어지는데, 개성말이 중심 언어로 자리잡은 중부 방언권과 더불어 동쪽의 동부 방언권, 서남부의 서남 방언권, 동남부의 동남 방언권이 바로 그것이다. 방언 분화에 미치는 영향은 지형적 조건이나 지역의 접근성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의 왕래가 쉬운 평야지대라면 언어들이 쉽게 오가며 뒤섞일 것이고, 사람의 왕래를 가로막는 산악지대는 방언전파의 장애물이 될 것이다. 언어지리학의 측면에서 경기말과 서울말은 겹쳐지는 부분이 적지 않은 것은 두 지역이 사람들의 왕래가 쉬운 인접지역이라는 것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서울과 경기도는 사람과 물자가 집중되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정치와 경제와 문화, 그리고 교통의 중심지가 된 곳이다. 이런 탓에 각 지역의 말씨가 서울과 경기도로 빠르게 유입되고 유입된 말들은 이 지역에서 두루 통용되는 표준 방언의 용광로 속에서 섞이고 녹아들며 새 입말로 태어나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근대를 거쳐 현대로 들어서자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 타지 사람들의 들고 남이 활발해지고 중앙의 표준어들에 지방의 방언들이 상호영향권역에서 말의 음운론적·형태론적·어휘론적 변이들이 뒤섞이면서 새로운 입말들이 나타난다. 특히 6·25전쟁으로 인한 북쪽 피난민의 대거 이동과 산업화가 본격화되는 1960년대 이후 남쪽 농민들의 서울과 수도권 지역으로의 유입은 이 지역의 표준방언과 각 지역의 토박이 방언들이 전파되어 두루 섞이는 현상이 가속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 말이나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의 유동과 변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표준말에서 문장 연결 어미로 쓰이는 ‘고’, ‘거든’, ‘(으)니까’ 등을 서울말에서는 한 문장이 끝나는 나리에 ‘구’, ‘거등’, ‘(으)니깐’으로 쓴다. 1960년대 중반에만 해도 서울사람들이 이런 서울말을 두루 널리 써서 충청도 방언권에 살다가 서울에 갓 온 내 귀에는 무척이나 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즈막에는 이런 서울말씨를 고스란히 간직한 사람을 만나는 일이 매우 드물다. 경기말과 서울말에 “구개음화, 움라우트, 낱말 첫 자음의 된소리 내기” 등이 나타나는 것은 십칠 세기에서 십팔 세기에 걸쳐 호남과 영남 방언에서 보이던 현상들이 북상하여 현대의 경기말과 서울말에 영향을 끼친 예다. 경기말과 서울말은 본디 그것이 갖고 있던 원형을 상당 부분 잃고 지방 방언들에 영향을 받은 개신형의 말들에 그 자리를 내어준다. 대체적으로 서울말과 경기말에 서남과 영남 방언이 끼친 영향에 비해 관동 지역, 함경도, 평안도의 말은 그 영향력이 미미하다.
경기도는 이 지역의 오랜 역사와 더불어 풍부한 물자와 사람만큼이나 문학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한다. 따라서 경기도의 문학지리는 거두고 살필 것도 많다. 우선 이 책에 실린 인물만 보더라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신소설의 주요한 작가로 활동한 이해조(포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근대이행기의 여성 자의식의 그 복잡한 상처를, 현실에서의 자기희생을 통한 과격한 실천으로 온몸으로 밀고 나”간 나혜석(수원), “1922년 나빈 현진건, 월탄 박종화 등과 함께 문예동인지 백조를 창간하여 이념과 양식에 있어 새로운 근대시 운동을 주도”한 시인 홍사용(화성), 해방기에 ‘조선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에 가입해 주로 “빈궁한 현실과 프로계급의 참상, 계급대립과 계급투쟁”을 그려낸 시인 박세영(고양), 한국 창작동화의 선구자로 “동심천사주의의 상대적인 입장에서 시대의 특수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현실 밀착적인 작품으로 아동문학의 기틀을 다진 마해송(개성), 해방기 좌파 문예운동 조직인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에 적극 참여하며 소설과 비평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한 박승극(수원), 이른바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으로 문학사 안에 제 이름을 새긴 시인 박두진(안성), 대중에게 위안을 주는 시들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 조병화(안성), 역사소설에서 큰 성과를 거둔 소설가 유주현(여주), 특히 미군 기지촌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약소국 민중이 겪는 불평등한 현실과 그 상처를 통해 “비정한 현대도시의 물신성과 인간 소외 현상”을 비판한 시인이자 소설가인 박석수(송탄) 등이 있다. 이들 문학지리에 대한 성찰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의 역사와 문화, 그 속사정과 내력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나아가 고장에 대한 자긍심을 키워 지역정 정체성을 강화하는데 기여한다.
5. 장소와 비장소
모든 되새겨 볼 만한 가치 있는 시들은 그 안에 의미를 머금은 지도를 품는다. 그 시의 모태가 되는 상상력을 낳고 키운 실존의 자리, 즉 지리적 장소가 숨어 있다는 뜻이다. 실존의 자리는 피동적 영역이 아니라 사람의 의도와 계획, 의미 있는 활동들로 채워지며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는 장소다. 에드워드 렐프는 “인간은 도시, 마을, 집을 건축하고 경관을 만들어냄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의미의 패턴과 구조를 창조한다.”고 말한다. 어떤 시들은 그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어떤 시들은 그것을 속으로 숨긴다. 장소들은 사회적 소통과 관계가 이루어지는 경험의 받침대이자 거점이다. 사람은 장소와의 깊은 관련을 통해서 개인의 정체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얻고 독립된 인격체로 성장하는 존재다. 그런 점에서 사람은 저마다 제가 낳고 자란 장소들을 증언하는 물적 증거들이다. 예를들어 김명인의 「동두천」 연작을 읽어보자.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리는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驛頭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
발 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미에 부딪혀 와 끼얹는 바람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안으로 굽혀지는 마음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 이제 벗어날 수 없어도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면서
김명인, 「동두천 1」
경기도 북부 지역에 위치한 동두천은 6·25전쟁 전에는 그저 하나의 땅덩어리에 지나지 않은 곳이었다. 1952년에 미군 제 7사단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들어앉으면서 동두천은 미군 주둔 도시로 급조되었다. 미군을 상대로 하는 관광홀과 기지촌 같은 특수 유흥업소들이 들어서며 그 전에는 보잘것없던 시골 마을들이 겉으로는 번화한 도시로 빠르게 변모한 것이다. 동두천은 전후 特需와 함께 미군들이 뿌리는 달러가 밑불이 되어 일으킨 경제활동으로 돌아가는 도시지만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양색시와 건달들이 꾀고, 덩달아 마약과 범죄가 극성을 부리는 미국의 변방도시의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동두천에 붙은 ‘리틀 시카고’라는 이름은 그런 속사정을 대변한다. 청년교사가 되어 동두천에 부임한 시인 김명인은 「동두천」연작을 통해 동두천에서 나고 자라는 아이들의 어두운 미래를 짚고, 이곳에서 몸부비며 살아가는 이들의 막막한 심정을 몇 개의 표상적 이미지에 담아낸다. 삶을 찾아 이곳에 흘러온 사람들은 대개는 뜨내기들일 터인데, 저의 고단한 삶이 부려진, 그래서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지는 낯선 동두천은 “캄캄한 어둠 속”이거나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이고, “배고픈 고향”과 동일시되는 장소다. 아울러 동두천은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 /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바닥이다. 미군을 따라간 아이들은 문맥으로 미루어 보건대 혼혈아일 가능성이 높다. 동두천에서 드물지 않은 혼혈은 가난과 차별의 표식이다. 가난과 차별의 표식을 갖고 태어난 그들이 미국이라는 저 낯선 곳으로 등 떠밀려 간다고 해서 행복해질 거라는 보장은 없다. 청년화자는 “......무엇이 /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고 묻고 있지만, 그 물음은 대답이 필요없는 물음이다. 그것은 물음이기보다는 제 운명의 결정권이 자기 아닌 그 무엇의 손에 쥐여 있다는데 대한 깊은 탄식이다. 그 물음의 주체는 동두천에 부임해 와서 조국이 처한 비참한 처지를 새롭게 인식한 청년시인이지만, 아울러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등 떠밀려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야 하는 “우리”라는 복수의 주체다. 누군가에 의해 등 떠밀려 동두천에 부임한 청년교사와, 뜨내기 동두천 주민과, 가난과 차별의 표식을 갖고 태어난 혼혈아들이 “우리”라는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연대에 있다. 그들은 “월급 만 삼천 원을 받”는 스물 세살의 초임 교사, “태어나서 죄가 된 고아들”, “우리들이 악쓰며 매질했던 보산리 포주집 아들들”이다(「동두천 2」). 형편과 처지가 제각각인 이들을 “우리”라는 연대로 묶는 것은 동두천이라는 척박한 현실에 기대 삶을 꾸린다는 공통점과 그리고 이 척박한 삶의 자리가 빚어내는 “더러운 그리움”이다.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그 아이 혼혈아인
엄마를 닮아 얼굴만 희었던
그 아이는 지금 대전 어디서
다방 레지를 하고 있는지 몰라 연애를 하고
퇴학을 맞아 고아원을 뛰쳐나가더니
지금도 기억할까 그 대 교내 웅변 대회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 마디 말
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
나는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
일곱 살 때 원장의 姓을 받아 비로소 李가든가 金가든가
朴가면 어떻고 브라운이면 또 어떻고 그 말이
아직도 늦은 밤 내 귀가 길을 때린다
기교도 없이 새소리도 없이 가라고
내 詩를 때린다 우리 모두 태어나 욕된 세상을
이 强辯의 세상 헛된 강변만이
오로지 진실이고 너의 진실은
우리들이 매길 수도 없는 어느 채점표 밖에서
얼마만큼의 거짓으로나 매겨지는지
몸을 던져 세상 끝끝까지 웅크리고 가며
외롭기야 우리 모두 마찬가지고
그래서 더욱 괴로운 너의 모습 너의 말
그래 너는 아메리카로 갔어야 했다
국어로는 아름다운 나라 미국 네 모습이 주눅들 리 없는 合衆國이고
우리들은 제 상처에도 아플 줄 모르는 단일 민족
이 피가름 억센 단군의 한 핏줄 바보같이
가시같이 어째서 너는 남아 우리들의 상처를
함부로 쑤시느냐 몸을 팔면서
침을 뱉느냐 더러운 그리움으로
배고픔 많다던 동두천 그런 둘레나 아직도 맴도느냐
혼혈아야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아이야
김명인, 「동두천 4」
이 도시의 경제활동이 미군의 달러경제에 예속되어 있고, 더불어 이 도시의 외관이 속화된 아메리카의 변방을 모방하고 있기 때문에 동두천이라는 지명은 넓은 의미에서 아메리카의 屬地에 대한 환유이다. “떠돌아와서 먼저 자리잡아도 / 뿌리 없긴 마찬가지인 사람들처럼 그곳에서도 우리들은 / 뜨내기였다”(「동두천 3」) 고향이 “영혼적 구성물의 총체”(빌헬름 딜타이)에 수렴되는 뜻있음의 장소라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이익 군집체를 이루고 뜨내기로 들고 나는 타향이란 실존과 유리되어 겉도는 뜻없음의 장소다. 동두천은 삶의 뿌리를 着根할 수 있는 혈연과 지연으로 얽힌 향촌이나 향토와는 거리가 멀다. 동두천은 토박이들이 삶을 일구고 사는 고향의 표상이 될 수 없는 곳이다. 그 말은 동두천이 뜨내기로 흘러왔다가 다시 뜨내기로 어디론가 흘러나가는 삶의 임시 경유지라는 뜻이다. 우연과 비합리의 복합체로 탄생한 뜨내기는 그 내면적 본질에서 실향인이다. 타향이라는 공간의 정치문화적 유동성과 가변성을 신체에 새기고 사는 존재들인 실향인은 언제라도 떠날 준비를 하고 산다. 고향 바깥을 떠돈다는 점에서 실향인은 유태인이나 아르메니아인이나 팔레스타인인, 그리고 재일조선인과 마찬가지로 디아스포라이다. 시인은 이 디아스포라의 세계 속에 방치된 또 다른 디아스포라들에 주목한다. 그들은 바로 “배고픔 많다던 동두천 그런 둘레나 아직도 맴도”는 고아와 혼혈아들이다. 그들은 어쩌다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 합중국, 그 식민지 모국인의 유전자를 받고 태어났지만, 이 디아스포라의 세계 속에서도 한 번 더 내쳐진 존재들이다. 아메리카라는 울타리 저 바깥으로 내팽개쳐지고, 다시 그 울타리의 변방의, 순수혈통에 의해 그 순수성이 보증되는 “단일 민족”의 신화가 만든 울타리 바깥으로 내침을 당한다. “단일 민족”의 신화 속에서 단일 민족 구성원과 다른 혼혈인들의 피부색은 인종주의적 열등의 표식이다. 그 열등의 표식 때문에 이들은 이중의 유배, 이중의 내침을 당한 것이다. 시인의 명명법에 따르자면 동두천은 “태어나 욕된 세상”의 이름이다. 태어나 욕된 동두천을 실존의 자리로 삼은 자들의 주된 정서는 “무력감과 부끄러움”(김치수)이다. 그것을 다시 시인의 용어로 바꾸자면 “더러운 그리움”이다. 그것의 출처는 강대국의 주둔군에 빌붙어 삶을 꾸려야 하는 동두천 사람들의 처지에 깃든 비루함과 한심스러움이 아니라 제 운명의 결정권이 스스로의 실존적 판단과 선택에 있지 않다는 인식이다.
우리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어디에 사는가를 따져 묻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지역이라는 지표 공간이 장소 정체성이 형성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역은 한 사람에게 인성, 취향과 관습, 정치적 성향과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핵심적인 부분이다. 우리가 소비하는 무수히 많은 장소들, 그리고 삶의 거점으로서 경험하는 지역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규정하고 제약하는 핵심적 요소 중의 하나다. “장소가 허락하는 행위만을 했을 때, 우리는 정상적인 인간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장소가 인간의 삶을, 나아가 자아 정체성까지도 형성할 수 있는 요소인 것이다.” 산다는 것은 장소를 겪는다는 뜻을 함축한다. 우리는 장소 속에서 타인과 더불어 사는데, 그 핵심은 그 안에서 일과 소통을 통해 하나의 공동체로 연대하며 의미의 상호주관적 관계로 묶여 있다는 뜻이다. “개인은 자신의 공간의 중심에 있는 자신의 장소에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개인도 그들의 지각 공간과 장소를 가진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은 이런 자신과 타인들의 공간과 장소들이 전체 사회 및 문화 집단의 지속적이고 어느 정도 합의된 생활 공간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장소의 정체성은 그 장소에 사는 사람들의 의도·계획·선택들이 축적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김명인의 「동두천」연작시편들은 장소의 정체성이 실존의 핵심적인 외부성으로 개인의 자아 정체성 형성에 개입하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장소들은 사람의 내면에서 경험의 심원한 중심으로 작용하며, 역사와 시대정신이 발현하고 순환하는 토대 공간이다. 최남선은 이미 한 세기 전에 그의 저술에서 “조선의 국토는 산하 그대로 조선의 역사이며 철학이며 시대 정신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지도는 지구 표면의 지리적 형상과 자연, 그리고 인문현상을 기호로 평면에 도상화한 것이다. 지도는 현실의 공간적 범역성, 혹은 의미로서의 장소를 드러내는 상징화의 한 형식이지만, 장소가 그것 위에서 이루어진 사회의 역사와 더불어 뜻을 갖는다는 점에서 존재의 지리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시의 지리학은 이제 수원이나 강화, 인천, 양주와 같이 유서 깊은 내력을 지닌 실재의 장소들을 넘어서서 비장소, 무장소들로 무한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징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이 황병승이다. 황병승의 시적 주체들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들이다. 이 분열된 주체들, “여성과 남성, 죽은 것과 산 것, 이미 떠난 자와 아직 떠나지 않은 자, 아버지와 아이, 말과 밥, 친구와 누나, 심지어 엄마와 나의 경계를 넘어 트랜스”(김혜순) 하는 존재들인데, 이들이 사는 곳은 지도상에는 표기되지 않는 가상공간, 디스토피아, 무장소다. “여장남자 시코쿠”가 손에 들고 있는 지도는 현실 저 너머의 부조리한 세계의 지도, 잡종성의 혼재가 낳은 상상력으로 그려낸 “시코쿠의 맵”, 혹은 “앨리스의 맵”이다.
어둠이 내리는 호수에 발을 담그고
우리는 읊조린다, 조지아.....비의 조지아......
기우는 나무 곁에서 흩어지는 바람 속에서
덫에 걸린 고양이처럼 서서히 오그라드는 귓바퀴처럼
조지아...... 오우 조지아, 라고.
서른 살, 우리는 비 내리는 조지아에 살고 있었다
마을 주변에는 나무 숲 호수가 있었고
우리는 그것들을 그냥 나무 숲 호수라고 불렀다 이름을 지우고
뻔뻔스럽게 우리는 서로에게 안녕 자네 이 사람, 인사를 건넸다
오우 조지아, 꼬집고 때리고 발가벗겨 모욕을 주고 싶었으나
다정한 입술을 내밀어(독사에게나 물려 뒈져버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서로의 손등에 입 맞추었다 쯔으읏 쯔으으읏........ 풀숲에 얼굴을 감추고
밤새도록 귀뚜라미들이 혀를 차는 비의 조지아,
앙금들, 우리의 첫 인사는 시작되었고
좋았다, 마을 주변을 건들거리며 보내는 날들
우리는 조금 늦게 철이 들었고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분명하다는 것은
의심할 게 없다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게 싫었다, 아버지
조지아를 더욱 조지아답게 ! 아버지의 아버지가
아버지에게 그것을 보여주었고 죽을 때까지 물고 늘어졌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의심했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게 좋았다.
때때로 빗줄기가 사라지는 조지아의 밤, 그런 날이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숲에 들어가 불을 놓았다
불길이 구름의 모양을 천천히 변화시키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무도 서로를 추궁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저지른 일이므로. 제발 조지아, 젖은 머리칼이 약간
얼굴을 가렸을 뿐
좋았다, 숲의 나무들은 때가 되면 다시 자랄 것이고
지나가는 구름은 빗방울은 언제나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미지근한 맛으로 우리는 우리의 꾸물거리는 혀가
맛대가리 없는 빵처럼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듯한 착각에 빠졌고
어린애들처럼 진창에 착착 발을 구르며 기분을 표현했다.
........비의 조지아, 빗줄기는 또다시 퍼붓고
우리는 동시에 젖은 외투를 머리 위로 끌어올리며
어서 들어가 머리나 좀 말리게 이 사람아, 동시에 돌아섰다
(산 채로 내던져져서 독수리 밥이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숨기고)
목소리.......심장의 힘찬 박동과.......다정히 건네는 악수......
경건함이 배인 발걸음...... 조용히 미소,
그것들이 마치 끝없는 길과 같아서
어딘가에 있을 당신에게로 이끌어줄 수 있다면
극서들이 마치 눈앞에 펼쳐진 지도와 같아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이 있는 곳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다면
서른 살, 우리는 비 내리는 조지아에 살았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조금씩 서로를 닮아가며 이도 저도 아닌 첫 인사의 추억을 나눠 가진 채
(이빨을 죄다 펜치로 뽑아버릴 걸 그랬지, 역시 그런 속마음을 감추고)
거무죽죽한 빛깔의 혀를 내밀어 처음 느꼈던 그 비의 맛, 그저
좋았다, 밤에도 낮에도 언덕을 오를 때에도 숲길을 지날 때에도
우리는 읊조린다, 덫에 걸린 고양이처럼
서서히 오그라드는 콧잔등처럼
조지아..... 오우 조지아, 라고. 기억할 수 없는 순간까지
우리는 비 내리는 조지아를 떠돌았다.
황병승, 「비의 조지아」
황병승 시의 지리학에 나오는 지명들은 조지아, 대야미, 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 요코하마와 같은 곳들인데, 이곳들은 실제 장소가 아니라 실재계와 상징계의 중간 어디쯤 모호한 곳에 있는 가상 공간들이다. 황병승의 상상세계는 주체들의 성 정체성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뒤틀려 있는, “게이, 드랙퀸, 트랜스젠더, 크로스드레서들로 넘쳐나는 이 ‘퀴어’의 세계”며, 여장남자와 사성장군과 성전환자와 쥐와 도마뱀과 검은 염소 등등이 모호하게 뒤엉켜 있는 한마디로 “이질 혼재”의 세계다(이장욱). 아마도 매일 살인 잔혹극이 벌어지는 이 “이질 혼재”의 상상세계에서 가장 정상적이고 온건한 서정성을 보여주는 시가 「비의 조지아」일 것이다. 이 서정시의 주체는 “서른 살, 우리는 비 내리는 조지아에 살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 조지아는 상상세계에나 존재하는 “앨리스 맵”에 표기된 지명이다. 조지아에도 비가 내리고 나무들이 자라지만 이곳은 현실에는 없는, 다시말해 장소정체성을 갖지 않은 비장소, 무장소다. 이 무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실존은 타자에 대한 증오와 무관심으로 특징지워진다. 조지아는 “덫에 걸린 고양이”의 실존이 내던져져 있는 디스토피아다. 이 음습한 도시의 거리를 떠도는 황병승의 시적 주체들은 타자에 대한 거부를 “산 채로 내던져져서 독수리 밥이나 되었으면” 하거나 “이빨을 죄다 펜치롤 뽑아버릴 걸 그랬지” 하는 속마음으로 드러낸다. 우리시에 새겨진 무수히 많은 한국인의 심상 공간들, 서울, 부산, 대구, 수원, 인천, 광주, 대전과 같은 대도시는 물론이고, 전주, 강진, 해남, 목포, 장흥, 마산, 구미, 김천, 울산, 안동, 영주, 통영, 진주, 경주, 춘천, 강릉, 정선, 공주, 논산, 강화, 여주, 이천, 안성, 홍성, 서산..... 등과 같은 중소도시들은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의 연속성 안에서 살아 있는 장소들이다. 이런 장소들은 정서적 안정과 평화, 그리고 평온함의 근거다. “우리가 뿌리내린 장소와, 그리고 사물이 제자리에 제대로 있을 때 느껴지는 빛·소리·느낌의 향기는 평온함의 근원이다.” 그러나 황병승의 시에 등장하는 무장소들은 경험과 기억의 연속성을 갖지 못한 곳, 다시말해 장소의 지속성에 대한 감성이 부재하는 개념적 지리들이다. 아마도 현대세계는 사람들을 더 많은 무장소들로 내몰 것이다. 무장소들로 가득한 황병승의 상상세계가 뜻 있는 것은 그것이 장소들로부터 소외되는, 혹은 장소의 진정성을 갖지 못한 채 떠도는 탈현대적 삶의 비극적 징후들을 선취하고 있는 까닭이다. 실존이 무장소의 지리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진정한 장소와 자아가 결합하여 만드는 장소의 정체성이 부재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장소의 정체성을 갖지 못한 삶은 곧 자아의 정체성이 고갈된 공허하고 메마른 삶이다. 미래사회는 점점 더 많은 무장소의 지리 속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지리학자의 우려 섞인 경고의 목소리를 의미심장하게 새기며 경청해야 할 것이다.
의미 있는 장소와 관련 맺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뿌리 깊은 욕구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욕구를 무시하면서 무장소의 힘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장소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환경이 되고 말 것이다. 이와 달리, 우리가 장소 욕구에 반응하기를 원하고 무장소를 초월하고자 한다면, 인간 경험의 다양성을 반영하고 강화하는, 인간을 위한 장소가 있는 환경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 두 가지 가능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개연성이 있을지, 아니면 아예 다른 가능성이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무장소의 지리가 될 것인지, 의미 있는 장소들의 지리가 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도 온전히 우리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