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성대전의 패배 이후 유방은
수하(隨何)를 이용해
경포를 회유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한신을 시켜 도망친 위표를 물리치게 하고, 이후 하북으로 진군하여 개별적인 활동을 하게 지시했다. 팽성대전 이후 기세를 보자면 단박에라도 한군을 부셔버릴 수 있을 법한 초군이었지만 의외로 한군을 시원하게 몰아내지 못했고 한군은 거의 1년 동안 형양에서 초군을 막아내었다.
그러나 초군이 한군의 군량을 끊어버리게 되자 한계에 봉착했고 BC 204년 5월, 형양은 거의 함락 직전이 되었다. 유방은 이때문에 심하게 우려스러워 하면서 항우에게 강화 요청을 하고, 형양의 이서 지역을 경계로 하여 초나라와 한나라의 국경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범증은 유방이 위험한 인물이니 강화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항우는 더욱 강하게 형양을 공격했다.
이 무렵, 유방은
진평(陳平)을 수하로 삼았다. 여러 장수들은 진평이
형수와
간통을 한 색마이며,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작자라고 욕을 퍼부었지만 진평과 면담을 해본 유방은
되려 진평에게 후한상을 내리고 호군중위의 벼슬에 임명했다. 그 진평은 이 위기상황에서 하나의 계책을 내놓았는데, 이간책을 사용해 항우와 범증의 사이를 약화시키자는 것이다. 사실 방법 자체는 간단했다. 유방은 항우의 사자가 한군의 진영에 오자, 일부러 으리으리하게 대접을 했는데, 정작 사자를 만나자 깜짝 놀라는 체하며 "어, 우린 범증의 사자가 온 줄 알았는데 항우의 사자구만?" 이런 소리를 하며 대접한 음식을 모조리 빼앗고는(……) 그냥 평범한 음식을 내준 것이다. 그런데 항우는 이런 간단한 수작에 넘어가 범증을 의심했고, 격분한 범증은 항우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범증은 곧 몸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하지만 범증이 죽었어도 포위망은 풀어지지 않았다. 진평은 2천여명의 여자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 눈속임을 하고,
기신(紀信)은 진짜 유방은 탈출시키고 스스로 유방 행세를 하여 성 밖으로 나가 초군에 항복했다. 속임수에 당한것을 깨달은 항우는
기신을 불태워 죽였다.유방은 우선 관중으로 들어가 세력을 다시 추스린 후 항우와 재결전 하기 위해 동쪽으로 나아갔다. 이때, 원생(袁生)이라는 인물은 유방에게 충고를 했다.
"한과 초 두 나라는 형양성을 사이에 두고 몇 해를 대치해 왔으나 한나라는 항상 수세에 몰렸습니다. 원컨대, 왕께서 무관(武關)으로 나가시면 항우는 필시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달려올 것입니다. 그럴 경우 대왕께서는 해자를 깊이파고 보루를 높이 올려 지키신다면 형양과 성고 일대의 백성들과 군사들은 모두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이 한신 등에게 명하여 하북의 조(趙), 그리고 연(燕)과 제(齊)를 평정하도록 하게 하십시오. 그때 형양으로 들어가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신다면 초군은 우리의 양동 작전에 대비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며 그 전력은 분산되어 그 틈에 한나라 군사들은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다시 한 번 겨룬다면 틀림없이 초나라를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유방이 남쪽으로 이동해서 형양에 대한 압박을 풀고, 그 사이에 한신은 북방을 평정하게 하자는것. 이에 따라 유방은 완성(宛城)과 섭(葉)에서 경포와 주둔하며 항우의 주의를 끌었다. 항우는 이에 유방과 결전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유방은 도전에 응하지 않았고, 그 사이
팽월은 뒤치기를 시전해 항성(項聲) 및 설공(薛公) 등의 장수를 격파해서 항우를 성가시게 했다. 항우의 주위가 팽월에 쏠리는 사이 유방은 성고에 입성했다.
그런데 항우는 순식간에 팽월의 군대를 격파하고는 다시 형양으로 나아가
주가(周苛)와
종공을 모두 죽이고
한왕 신은 사로잡았으며, 성고를 포위했다. 성고가 풍전등화의 상태에 놓이자 유방은
하후영과 함께 둘만 간신히 도주했고, 의지할 수 있는
한신의 군단으로 도망쳤다.
이 당시 한신은
장이와 함께 상당한 세력을 이끌고 있었다. 유방이 한신의 군영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이었다. 처음에 한나라의 사자라고 자신의 이름을 대고 성벽으로 들어온 유방은, 곧바로 장군의 인수(印綏)와 부절(符節)을 손아귀에 넣고, 순식간에 인사배치를 끝내 그 병력을 완전히 자신의 통제 하에 놓았다. 이때 한신은,
잠 자고 있었다.
유방이 눈 깜짝할 사이에 군대의 지휘관을 강탈하는 동안, 한신은 장이와 함께 꿈나라 여행을 떠나고 있던 중이었다. 자고 일어나 보니 느닷없이 유방이 있자 한신은 경악했고(……) 유방은 장이에게는 조나라를 지키게 하고, 한신은 조나라의 상국으로 삼아 즉시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보통 역사에서 군대의 지휘권을 가진 장수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많고, 역으로 군주가 군사력이 전무하다면, 결국 그 장수의 파워에 휘둘리다가 비명횡사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니, 보통은 이런 시나리오가 일반적인데, 이때 유방은 미역국 마시듯이 순식간에 한신의 지휘권을 자기에게 가져왔고, 잠 자고 있던 한신은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털렸다.(……)
한신과 유방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인데, 이후로도 한신은 잠 자다가 창졸간에 군대를 빼앗긴 이때처럼, 이상할 정도로 유방에겐 약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