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타키나발루의 아침
보르네오의 코타키나발루다. 지루하게 기다리고 시달리며 한밤중에 입국수속을 마치고 짐을 챙겨 가이드와 함께 공항 밖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어둠 속에 머뭇거리는 사이 갑자기 후끈한 열기가 덮쳤다. 순간 여기는 더운 나라, 상하(常夏)의 나라가 퍼뜩 스쳐 지나갔다. 숙소에서 방부터 배정받았다. 단 둘이 쓸 방인데 무려 40평도 넘지 싶을 만큼 보통 방의 두 배는 되었다. 거실에는 큼지막한 소파와 대형 티브이가 놓여있고 구석에 화장실까지 있다. 그에 못지않은 침실에도 대형 티브이가 놓여있고 한국방송 전용채널로 방송도 되었다.
옆으로 동네 목욕탕 같은 커다란 목욕조가 있고 안쪽에 샤워실과 화장실을 두어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하였다. 둘이 쓰기에는 겁 없이 호화로운 방이다. 얼핏 창 너머로 내다보이는 정원에 거대한 풀장이 들어왔으며 바다로 이어지고 있어 경관이 빼어난 곳임을 직감했다.
쉼 없이 시간은 흘러 밤은 점점 깊어가고, 잠시 눈을 붙였나 싶은데 동이 훤히 튼다. 바깥이 밝아온다. 커튼을 젖혔다. 바로 턱 밑으로 수로를 겸한 연못이다. 비단잉어 같은 고기들의 여유로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설렘 속에 자연스럽게 발길을 바깥으로 나서게 한다. 무엇보다 숙소에 개인금고가 준비되어 있어 직접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여권이나 귀중품을 넣어둘 수 있어서 좋다. 여행 중에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이 행여나 여권을 분실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걱정거리를 덜어주니 좋다. 안심하고 홀가분하게 외출할 수 있어 좋다. 코타키나발루에는 아직 영사관이 없어 여권을 분실하면 수도인 쿠알라룸푸르까지 가야하는데 여권이 없으니 비행기를 이용할 수 없다. 많은 경비를 들여가며 시일이 오래 걸리고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보다 안전한 개인 금고를 이용할 수 있으니 도움이 된다.
코타키나발루에서 맞는 첫 아침이다. 새벽시간이라 조용하다. 문을 열고 건물 밖을 나서는 순간 대뜸 후끈한 열기가 달려든다. 온실도 이만하면 나무들이 살맛 날 것이다. 밤새워 열대야이상으로 훅훅 달구고 있었을 터인데 실내에서는 에어컨이 작동하여 느끼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금이라도 전기를 아껴보려고 틈만 있으면 에어컨은 말할 것도 없고 선풍기도 켰다 껐다 하는데, 이곳은 대부분이 건물 내부 전체를 24시간 에어컨을 풀가동하여 바깥 날씨와는 상관없이 늘 시원한 공간을 확보하고 더위를 잊고 지내는 것을 당연시 한다. 연못에는 수면에 연잎도 눈에 띈다. 나무가 우거진 정원이다. 야자수도 있다. 12층 거대한 건물의 3층 방안에서 커튼을 젖히고 가로등 속으로 내려다보던 모습과는 다르다. 정열적인 빛깔의 꽃들이 피어 생글거린다. 오로지 드나드는 손님들을 위해 늘 준비하고 있지 싶다.
하나 같이 처음으로 대하는 남국의 열대성식물이다. 어느 것은 닭 벼슬 같이 선명하면서도 육감적으로 생겼다. 부지런한 텃새가 일찍 일어나 감미롭게 지저귄다. 생음악으로 새소리를 들어가며 다소 들뜬 마음 때문인지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녀도 낯가림을 하지 않는다. 밤사이 새로운 손님이 왔다고 속삭이다 인사를 하나 보다. 비록 전부 알아듣지는 못해도 계속 지저귀다 보면 이방인으로 조금이라도 알아듣고 비록 해석은 다를지 몰라도 감미롭게 들리며 마음 편안하고 즐겁게 다가오는 것을 보면 그래도 눈치가 있듯 귀치가 있나 보다. 수백 명이 사용할 수 있는 풀장이다. 잘름잘름 훤히 들여다보인다. 숙박하면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시퍼런 바다다. 풀장 곁을 지나 바다로 간다. 작은 섬 몇 개가 움직임을 주시하며 건너다보고 있다. 섬에서 섬을 보고 있지만 이곳은 섬이라기보다 대륙과도 같다.
보르네오는 덴마크령 그린란드와 남태평양의 뉴기니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 큰 섬으로 남한면적의 7.5배나 된다. 저 멀리까지 바다가 들어온다.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였지만 가시거리에서 더는 벗어나지 못하고 수평선이라는 선을 길게 긋고 하늘과 바다는 하나가 된다. 바다가 저리 푸르니 경쟁하듯 하늘도 저토록 푸른가 보다.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마음속까지 젖어 푸른 물이 드는 것 같다. 바다와 수평선, 블랙홀 같은 하늘이다. 하늘에 몇 개 새하얀 구름을 지도 속의 섬과 같이 그려놓고 출렁대는 바다처럼 구름을 자꾸 밀쳐낸다. 이곳에도 형식상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는 있다고 한다. 그러나 늘 덥다고만 여길 뿐, 쉽게 느끼지를 못하지만 오래 살다보면 그 의미를 알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테가 없을 만큼 큰 온도 차이는 거의 없다. 지금은 봄철에 해당한다. 그래서 꽃이 많은가 보다.
우기에 3일쯤 계속해서 햇빛을 보지 못하면 온도가 다소 내려가는데 너무 춥다고 야단법석에 병원은 감기환자로 북새통을 이룬다고 한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지만 어느 해인가 보통 때 온도가 35도인데 26도 이하로 내려갔었나 보다. 당국에서 한파주의보까지 내려졌다. 추위에 떨며 학교는 많은 결석생으로 휴교를 하였다고 한다. 너무 추워 거리에는 사람들이 없고 상가는 일찍 문을 닫거나 아예 문을 열지 않았다. 우리가 느끼는 26도는 적당기온을 넘어 다소 덥게 느껴져도 이곳에서는 춥다. 우리가 춥다고 여기는 영하 이하로 느낀다. 온도가 10도 안팎 차이가 날 만큼 갑자기 떨어지면 생활하는 데는 실로 엄청난 차이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겨울에 0도의 날씨와 영하 9도의 날씨를 겪어보면 어렵지 않게 해답을 얻을 수 있어 이해가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생활습관에 따라서 적응성도 다른 것이다.
보르네오 중간지역으로 적도가 지나간다. 적도는 위도의 기준선으로 설정된 0도이고 이곳 코타키나발루는 적도의 북쪽 근교로 북위 6도쯤 된다. 우리나라 중간에 38선이 있음을 상기하면 그 위치를 대충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한여름의 날씨를 연상해봄도 괜찮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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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적도 인근, 35도의 위력이 만만치 않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