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문학에 별 관심이 없는 한 친구가 나의 시 「나목」을 읽고는 밥 칡을 씹는 것 같다고 했다. 첫 맛은 쓰고 난해하나 읽을수록 달콤한 가루 같은 것이 느껴져서 계속 읽게 된다는 말이었다. 이유는 내가 쓰는 시들이 현대시지만 그 소재는 도시적인 것이 아닌 우리의 향토적 정서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곡이 그렇다. 처음 얼핏 들으면 난해하고 지루한 것 같으나 조금 듣다보면 따뜻하고 달콤한 작곡가의 서정적인 감정선이 느껴진다. 그것은 이곡을 쓴 미로 바즐리크가 20세기의 현대 작곡가지만 본래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한 까닭에 감각은 현대적이지만 곡의 표현형식은 브람스의 음악 같은 전통과 정확성을 느끼게 하는 이유다.
-배홍배
** 곡에 대한 자세한 해설은 영상에 자막으로 입히고, 필요하신 분들을 위해 여상 아래 별도로 올림.
https://youtu.be/CQJRlaOh83w
1931년 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난 미로슬라프 바즐리크의 기본 음악성향은 예술적 표현의 물리학과 서정성에 있다.
수학 및 물리학을 공부한 바즐리크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작품을 접하고 관계의 논리적 규율과 해법을 찾는 감각을 습득한 한편, 그의 성찰적인 서정성을 지향하는 보완적인 표현 방식은 그의 타고난 음악성과 피아니스트로서의 연습을 통해 더욱 강화된 음악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바즐리크는 여러 작품에서 이러한 양극성을 드러내는 가운데 선택된 소재와 전체를 구성하는 데 있어 소재를 다루는 방식 사이의 관계는 극적인 긴장감을 자아내고, 비올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발라드 협주곡(1984)에서 음악적 과정은 선율과 표현, 멜로디와 화성 사이의 관계를 기반으로 다루어진다.
이 같은 요소들은 바즐리크의 개념 속에서 더욱 심오한 차원으로 발전해 나가며, 오케스트라가 기하학적으로 정확하게 서로 겹치는 부분들을 다양하면서도 점진적으로 만들어내는 평면 위에 독주 비올라의 방향이 시작된다.
작곡의 확고한 극적 구성은 화성적 결정화와 그 반전 과정을 추구함과 동시에, 다양하고 위계화 된 관계들의 다원 속에서 객체와 주체의 관계를 드러내는데, 이 작품의 기본적인 표현은 발라드라는 장르가 지닌 극적으로 강조된 의도에 의해 결정된다.
바즐리크의 발라드는 비올라 협주곡들 중에서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동유럽 현대음악 가운데 상당히 개성적인 작품으로 비르투오소적 기교를 과시하기보다는 비올라의 내성적이고 철학적인 음색을 극한까지 탐구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곡은 바즐리크의 후기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초기의 엄격한 현대음악의 어법에서 벗어나 전통적인 서정성과 현대적 기법을 결합하고 있는데, 그의 발라드엔 바흐와 브람스 적 분위기가 드러나며 협주곡이면서도 발라드가 갖는 이야기와 전설, 명상, 그리고 비극적 회상의 느낌을 준다.
이 작품에서 비올라는 첼로의 역할에 머물거나 바이올린을 대신하는 하나의 악기로 쓰이지 않고 이야기하며 노래하고 탄식하며 사색하는 인간의 역할을 하는데, 독주 비올라가 잔잔하게 혼자 말하듯 과거를 회상하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고백하는 대서사시를 이끌어나가는 곡은 서주에서 오케스트라가 출발하는 불안한 화성과 조용한 음향 덩어리 위로 안개 낀 풍경 같은 음향이 서서히 떠오르는 가운데 비올라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어서 비올라는 자유롭게 노래하고 반주 오케스트라는 이야기 주인공의 감정과 기억의 공간을 만들어주며 현악기는 미세한 떨림으로, 목관악기는 짧은 응답으로, 금관악기들은 어두운 울림으로 비올라의 노래를 받쳐준다.
곡은 점점 리듬이 고조되고 오케스트라는 음의 큰 파도를 만들어 비올라를 높은 너울의 끝까지 밀어 올리며 내면의 갈등을 극대화시킨 후 격렬했던 음악은 다시 조용해지면서 비올라가 처음보다는 더 차분한 음색으로 처음의 멜로디를 회상하는데, 이 회상은 처음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 것으로 처음의 질문이 아닌 이해와 체념에 가까운 것이다.
이 작품은 쇤베르크의 12음 기법도 아니며 완전한 무조 음악도 아니고 조성음악도 아닌 바즐리크의 특유의 화성으로 후기낭만의 느낌이 난다.
바즐리크의 관현악법은 비브라폰과 목관과 현악기의 조화로 독주를 압도하지 않고 투명한 음색으로 비올라를 감싸듯 몽환적인 공간감을 만들어내면서도 오케스트라는 비올라를 중심에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어떤 기억이 천천히 떠오르고 사라지는 느낌을 받게 한다.
이 곡은 1984년에 작곡되었지만 결코 난해한 곡은 아니고 들으면 들을수록 친근해지고 감정이 뚜렷해지는 호흡이 긴 음악으로, 동 시대 다른 작곡가들의 비올라 협주곡들처럼 극적이고 외향적인 것 보다는 브람스를 연상시키며 현대적 기법 위에 전통을 섬세하게 구현하는 음악이다.
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난 비올라 연주자 밀란 텔레키는 서정적이고 명상적인 표현과 철학적인 현대음악까지 완벽하게 연주하는 슬로바키아의 대표적 비올라 주자로 1957년 전설적인 슬로바키아 현악 사중주단 창단 멤버로서 참여해 1987년까지 30년간 슬로바키아 콰텟의 비올라 주자로 활약했다.
슬로바키아 콰텟 외에도 브라티슬라바 피아노 사중주단을 비롯해 여러 실내악단과 협연하고 비올라 독주자로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지휘자 리하르트 짐메르(1957년 - )는 슬로바키아 주요 국립 교향악단을 이끌며 정교한 해석력과 리더십으로 잘 알려졌으며, 짐메르의 가문은 음악가와 화가의 명문 집안으로 조부는 피아니스트 요제프 크레샤크, 아버지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얀 짐메르, 어머니는 화가였다.
이런 예술적 집안에서 자란 그는 슬로바키아 국내에 머무르지 않고 독일, 스페인, 헝가리, 프랑스, 쿠바와 일본에 진출해 국제적 감각으로 여러 녹음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