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건너야 만나는 강이 있다. 쉬지 않고 꿈틀거리는 푸른 몸뚱이 속에 내 날개를 구겨 넣은 이무기가 살고 있는 강이다. 내 푸른 꿈, 이제는 단풍들어 누렇게, 붉게 변해버린 내 푸르렀던 꿈들도 함께 요동친다. 흐르다가 비늘이 생기면 바다에 가 닿는 잠들지 못하는 영혼들까지 다 따라 들어 뒤척이는 강. 작은 물방울조차 지느러미 꼬리가 되어 숨은 날갯짓을 불러내느라 물살을 거스른다. 강을 빛나게 하는 건 거슬러 오르는 물의 몸짓이다. 푸른 날개가 구겨져 숨어 있는 이무기의 덜 깬 꿈이다. 끝나지 않는 꿈이다.
꽃밭
-정재숙
사랑하는 사람 하나
꽃씨처럼 가슴에 품으면
눈길 닿는 데마다 꽃이 핀다.
저 먼 달에도
이제 지천으로 꽃 핀다.
잘이라는 말
-정재숙
잘,
잘,
잘,
잘이라는 말의 깊이에 이르자면
터럭 끝만큼도 어림없겠지만,
구멍 뚫린 그물코로 빠져나간
검푸른 시간 다 주워 와도
한 올도 기워낼 수 없는 거리지만
그래도 가슴이 꽉 차 올라
잘 지내시는지요.
밤을 살다
-정재숙
밤은 강에서 금방 건져 올린 물고기다.
은빛 비늘 번쩍이며
펄쩍펄쩍 뛰어 오르는
필사의 춤이다.
등골 타고 흐르는 떨림
반쪽으로도 밤을 빛내던 달이
강으로 풍덩 뛰어든다.
순간 번쩍 한 줄기 빛으로 탄다.
오늘밤도 축복이겠다.
집집마다 폭죽처럼 터져 나오는
저 불빛.
이런 날이 왔다
-정재숙
이제
우리 사랑은
마지막 남은 고기 한 점 같은 것.
노릇노릇 잘 굽힌 거
연하고 즙이 졸졸 흐르는 거
골라가며 먹기 바쁘다가
딱 한 점 남은 순간
이제 이건 사랑을 걸고도 모자라
결사적으로 그대 몫이다.
꿈을 쉬다
-정재숙
내 맘 속 깊은 곳
들여다보는 눈길 하나 기억하며
꿈이 끝난 잠 속에
오래 누울 것이다.
구름 위에 뜬 하늘을 쳐다보느라
발끝에 있는 오늘을
제대로 밟아 본 일 없었던 허물
껍질로 벗어놓고
이젠 꿈꾸지 않을 것이다.
깊이 잠들어 잊혀 질 것이다.
벗어놓은 껍질을 보고
누가 나를 기억해 준다면
그게 바로 오늘을 사는 일이라고
속삭여 줄 것이다.
초록 바람, 너 아니었니
-정재숙
잎눈 꽃눈 다 잠긴 홀연 어느 날 아침 매화나무 가지에 날아와 노래하던 새 너 아니었니 춤추는 달그림자로 잠긴 창문 흔들어놓고 간 거 너 아니었니 꾸다만 꿈속 꽃향기로 나를 껴안고 간 뜨거운 손길 너 아니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