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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열전(匈奴列傳)
[1] 匈奴, 其先祖夏后氏之苗裔也, 曰淳維. 唐虞以上有山戎獫狁葷粥, 居于北蠻, 隨畜牧而轉移. 其畜之所多則馬牛羊, 其奇畜則橐駝驢驘駃騠騊駼驒騱. 逐水草遷徙, 毌城郭常處耕田之業, 然亦各有分地. 毌文書, 以言語爲約束. 兒能騎羊, 引弓射鳥鼠, 少長則射狐兔, 用爲食. 士力能毌弓, 盡爲甲騎. 其俗, 寬則隨畜, 因射獵禽獸爲生業, 急則人習戰攻以侵伐, 其天性也. 其長兵則弓矢, 短兵則刀鋋. 利則進, 不利則退, 不羞遁走. 苟利所在, 不知禮義, 自君王以下, 咸食畜肉, 衣其皮革, 被旃裘. 壯者食肥美, 老者食其餘. 貴壯健, 賤老弱. 父死, 妻其後母, 兄弟死, 皆取其妻妻之. 其俗有名不諱, 而無姓字. 흉노는 그 선조가 하후씨의 아득한 후손으로 순유라 하였다. 당요와 우순 이전에 산융과 험윤, 훈죽이 있었는데 북쪽의 황야에서 살면서 치는 가축을 따라 옮겨 다녔다. 치는 동물 가운데 많은 것은 말과 소, 양이었고 특이한 동물은 낙타와 나귀, 노새, 결제, 도도, 탄혜이다. 물과 풀을 쫓아 옮겨 다니며 성곽이나 일정한 거처에서 농사를 짓지 않지만 또한 각기 땅을 나누어 갖고 있다. 문서가 없으며 언어로 약속한다. 아이들은 양을 잘 타며 활을 당겨 새와 쥐를 쏘고, 조금 자라면 여우와 토끼를 쏘는데 식용으로 한다. 장사들은 힘이 활을 당길 수 있고 모두 무장 기병이 된다. 그 풍속은 여유가 있으면 가축을 따라다니며 짐승을 쏘아 사냥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급박해지면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싸워 공격하여 침벌하는데 이는 천성이다. 그들의 긴 병기는 활과 화살이며 짧은 병기는 칼과 짧은 창이다. 유리하면 나아가고 불리하면 물러나서 달아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실로 이익이 있는 곳에서는 예의를 알지 못한다. 임금 이하 모두 짐승의 고기를 먹으며 피혁을 입으며 갖옷을 걸친다. 건장한 자들은 살지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늙은이들은 그들이 먹다 남긴 것을 먹는다. 건장한 자를 귀하게 여기고 노약자는 천시한다. 아비가 죽으면 그 (嫡母 외의) 남은 어미를 아내로 삼고, 형제가 죽으면 모두 그 처를 취하여 아내로 삼는다. 그 풍속은 이름을 부르는 것을 꺼리지 않으며 성과 자가 없다.
[2] 夏道衰, 而公劉失其稷官, 變于西戎, 邑于豳. 其後三百有餘歲, 戎狄攻大王亶父, 亶父亡走岐下, 而豳人悉從亶父而邑焉, 作周. 其後百有餘歲, 周西伯昌伐畎夷氏. 後十有餘年, 武王伐紂而營雒邑, 復居于酆鄗, 放逐戎夷涇洛之北, 以時入貢, 命曰荒服. 其後二百有餘年, 周道衰, 而穆王伐犬戎, 得四白狼四白鹿以歸. 自是之後, 荒服不至. 於是周遂作甫刑之辟. 穆王之後二百有餘年, 周幽王用寵姬褒姒之故, 與申侯有卻. 申侯怒而與犬戎共攻殺周幽王于驪山之下, 遂取周之焦穫, 而居于涇渭之閒, 侵暴中國. 秦襄公救周, 於是周平王去酆鄗而東徙雒邑. 當是之時, 秦襄公伐戎至岐, 始列爲諸侯. 是後六十有五年, 而山戎越燕而伐齊, 齊釐公與戰于齊郊. 其後四十四年, 而山戎伐燕. 燕告急于齊, 齊桓公北伐山戎, 山戎走. 其後二十有餘年, 而戎狄至洛邑, 伐周襄王, 襄王奔于鄭之氾邑. 初, 周襄王欲伐鄭, 故娶戎狄女爲后, 與戎狄兵共伐鄭. 已而黜狄后, 狄后怨. 而襄王後母曰惠后, 有子子帶, 欲立之, 於是惠后與狄后子帶爲內應, 開戎狄, 戎狄以故得入, 破逐周襄王, 而立子帶爲天子. 於是戎狄或居于陸渾, 東至於衛, 侵盜暴虐中國. 中國疾之, 故詩人歌之曰戎狄是應, 薄伐獫狁, 至於大原, 出輿彭彭, 城彼朔方. 周襄王既居外四年, 乃使使告急于晉. 晉文公初立, 欲修霸業, 乃興師伐逐戎翟, 誅子帶, 迎內周襄王, 居于雒邑. 하나라의 도가 쇠락하자 공류는 농사를 관장하는 관직을 잃어 서융으로 변하여 빈읍에서 살았다. 그 후 3백여 년 만에 융적이 태왕단보를 공격하니 단보는 기산 아래로 도망쳐 달아났는데 빈읍의 사람들이 모두 단보를 따라 와서 고을을 이루니 주나라가 섰다. 그 후 백여 년 만에 주나라 서백창이 견이씨를 쳤다. 10여 년 뒤에 무왕이 주를 치고 낙읍(에 수도)을 세우고 다시 풍호에서 살게 되어 오랑캐를 경수와 낙수 북쪽으로 쫓아내었으며 때에 맞춰 조공을 바쳤는데 이를 「황복」이라 하였다. 그 후 2백여 년 만에 주나라의 도가 쇠락하였는데 목왕이 견융을 쳐서 흰 이리 네 마리와 흰 사슴 네 마리를 잡아서 돌아왔다. 이 이후로 황복은 이르지 않았다. 이에 마침내 주나라는 《보형》의 법령을 만들었다. 목왕 후 2백여 년 만에 주유왕이 총희 포사 때문에 신후와 틈이 생기게 되었다. 신후는 노하여 견융과 함께 여산 아래서 주유왕을 죽이고 마침내 주나라의 초확을 취하여 경위 사이에 거처하면서 중국을 침범하고 약탈하였다. 진양공이 주나라를 구원하니 이에 주평왕은 풍호를 떠나 동쪽으로 낙읍으로 천도하였다. 이때 진양공은 융을 치고 기산에 이르렀으며, 비로소 제후가 되었다. 이후 65년 만에 산융이 연나라를 넘어 제나라를 치자 제이공이 제나라 교외에서 싸웠다. 그 후 44년에 산융이 연나라를 쳤다. 연나라가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환공이 산융을 북쪽에서 치니 신융은 달아났다. 그 후 20여 년에 융적이 낙읍에 이르러 주양왕을 쳤는데 양왕은 정나라 범읍으로 달아났다. 처음에 주양왕은 정나라를 치고자 하여 융적의 여인을 맞아 왕후로 삼아 융적의 군사와 함께 정나라를 쳤다. 얼마 후 적후를 쫓아내자 적후는 원망을 품었다. 양왕의 계모는 혜후라 하였는데 아들 자대가 있어 세우려고 하여 이에 혜후와 적후, 자대가 내응하여 융적에게 성문을 열어주었으며 융적은 이 때문에 들어와 주양왕을 깨뜨리고 쫓아내어 자대를 천자로 세웠다. 이에 융적이 혹 육혼에도 살게 되었으며 동으로는 위나라까지 이르러 중국의 나라에 침략하여 포학하게 굴었다. 중국의 사람들이 미워하여 이 때문에 시인들이 노래하기를 「융적 응징해야 하리」, 「험윤 쳐서, 대원에 이르렀네」, 「수레 거창하게 내어, 저 북방에 성 쌓았다네」라 하였다. 주양왕이 이미 밖에 거주한지 4년이 되어 이에 사자로 하여금 진나라에 위급함을 알렸다. 진문공이 막 즉위하였는데 패업을 이루고자 하여 이에 군사를 일으켜 융적을 쳐서 쫓아내어 자대를 죽이고 주양왕을 맞아들여 낙읍에 거처하게 하였다.
[3] 當是之時, 秦晉爲彊國. 晉文公攘戎翟, 居于河西圁洛之閒, 號曰赤翟白翟. 秦穆公得由余, 西戎八國服於秦, 故自隴以西有綿諸緄戎翟䝠之戎, 岐梁山涇漆之北有義渠大荔烏氏朐衍之戎. 而晉北有林胡樓煩之戎, 燕北有東胡山戎. 各分散居谿谷, 自有君長, 往往而聚者百有餘戎, 然莫能相一. 이때 진나라와 진나라는 강국이었다. 진문공이 융적을 물리쳐 하서은과 낙수 사이에 거처하게 되었는데 적적과 백적이라 하였다. 진목공은 유여를 얻었으며 서융의 여덟 나라가 진나라에 복속하였으므로 농산 이서로는 면제와 곤융, 적, 환의 융이 있게 되었고 기와 양산, 경, 칠의 북으로는 의거, 대려, 오지, 후연의 융이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진나라 북쪽에는 임호와 누번의 융이 있고 연나라 북쪽에는 동호와 산융이 있다. 각기 나누어 흩어져 계곡에 거주하였으며 각자 자기네 군장이 있었고, 왕왕 모이면 백여 융족이 있었지만 서로 통일할 수가 없었다.
[4] 自是之後百有餘年, 晉悼公使魏絳和戎翟, 戎翟朝晉. 後百有餘年, 趙襄子踰句注而破并代以臨胡貉. 其後既與韓魏共滅智伯, 分晉地而有之, 則趙有代句注之北, 魏有河西上郡, 以與戎界邊 . 其後義渠之戎築城郭以自守, 而秦稍蠶食, 至於惠王, 遂拔義渠二十五城. 惠王擊魏, 魏盡入西河及上郡于秦. 秦昭王時, 義渠戎王與宣太后亂, 有二子. 宣太后詐而殺義渠戎王於甘泉, 遂起兵伐殘義渠. 於是秦有隴西北地上郡, 築長城以拒胡. 而趙武靈王亦變俗胡服, 習騎射, 北破林胡樓煩. 築長城, 自代並陰山下, 至高闕爲塞. 而置雲中鴈門代郡. 其後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 開之孫也. 燕亦築長城, 自造陽至襄平.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當是之時, 冠帶戰國七, 而三國邊於匈奴. 其後趙將李牧時, 匈奴不敢入趙邊. 後秦滅六國, 而始皇帝使蒙恬將十萬之眾北擊胡, 悉收河南地. 因河爲塞, 築四十四縣城臨河, 徙適戍以充之. 而通直道, 自九原至雲陽, 因邊山險塹谿谷可繕者治之, 起臨洮至遼東萬餘里. 又度河據陽山北假中. 이로부터 백여 년 후에, 진도공이 위강으로 하여금 융적과 화친하게 하자, 융적은 진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백여 년 후에 조양자가 구주를 넘어 대를 깨뜨려 합병하고 호맥에 임했다. 그후 한․위와 함께 지백을 멸하고 진나라 땅을 나누어 가지니 조나라는 대와 구주의 북쪽을 가졌고 위나라는 하서와 상군을 가져융과 경계를 이루었다. 그 후 의거의 융은 성곽을 쌓아 스스로 지켰는데 진나라가 야금야금 먹어치워 혜왕에 이르러 마침내 의거의 25성을 함락시켰다. , 혜왕이 위나라를 치자. 위나라는 진나라에 서하 및 상군을 몽땅 바쳤다. 진소왕 때 의거의 융왕이 선태후와 간통하여 아들 둘을 두었다. 선태후는 감천에서 의거의 융왕을 속여서 죽이고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의거(의 융족)를 죽였다.이에 진나라는 농서와 북지, 상군을 갖게 되었고, 장성을 쌓아 오랑캐에 맞섰다. 조무령왕 또한 오랑캐 복장으로 갈아입고 말 달리며 활 쏘는 법을 익혀 북으로 임호와 누번을 깨뜨렸다. 장성을 쌓고 대에서 음산 아래를 따라 궐에 이르러 요새를 쌓았다. 그리고 운중과 안문, 대군을 설치하였다. 그 후 연나라에 현명한 장수 진개가 있었는데 오랑캐에서 볼모가 된 적이 있어 오랑캐가 그를 아주 신임하였다. 돌아와 동호를 습격하여 깨뜨리니 동호는 천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왕을 저격한 진무양은, 진개의 손자이다. 연나라 또한 장성을 쌓아 조양에서 양평에까지 이르렀다.. 상곡과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두어 오랑캐에 맞섰다. 이때 교화된 전국의 나라는 일곱이었는데 세 나라가 흉노와 국경을 함께 했다. 그 후 조나라 장수 이목 때에는 흉노가 감히 조나라 변경으로 침입하지 못하였다. 나중에 진나라가 6국을 멸하고 시황제가 몽염으로 하여금 십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북으로 오랑캐를 치게 하여 하남의 땅을 모두 거두었다. 황하를 따라 요새를 쌓고 44개의 현성을 쌓아 황하에 임하게 하고 죄수를 옮겨 충당하였다. 그리고 곧은 길을 개통시켰는데 구원에서 운양까지 변경의 산 험한 참호, 계곡을 따라 손을 볼 만한 곳은 고쳤는데 임조에서 시작하여 요동에 이르기까지 만여 리였다. 또한 황하를 건너 양산의 북가를 점거하였다.
[5] 當是之時, 東胡彊而月氏盛. 匈奴單于曰頭曼, 頭曼不勝秦, 北徙. 十餘年而蒙恬死, 諸侯畔秦, 中國擾亂, 諸秦所徙適戍邊者皆復去, 於是匈奴得寬, 復稍度河南與中國界於故塞. 이때는, 동호가 강하였고 월지가 융성하였다. 흉노의 선우를 두만이라고 하였는데, 두만은 진나라를 이기지 못하여 북으로 옮겼다. 10여 년 만에 몽염이 죽자 제후들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어 중국이 어지러워졌으며 진나라에서 옮긴 변방의 죄수들이 모두 다시 떠나 이에 흉노는 마음을 놓고 다시 조금씩 황하 남쪽을 건너 옛 변새에서 중국과 경계를 이루었다.
[6] 單于有太子名冒頓. 後有所愛閼氏, 生少子, 而單于欲廢冒頓而立少子. 乃使冒頓質於月氏. 冒頓既質於月氏, 而頭曼急擊月氏. 月氏欲殺冒頓, 冒頓盜其善馬, 騎之亡歸. 頭曼以爲壯, 令將萬騎. 冒頓乃作爲鳴鏑, 習勒其騎射, 令曰: 鳴鏑所射而不悉射者, 斬之. 行獵鳥獸, 有不射鳴鏑所射者, 輒斬之. 已而冒頓以鳴鏑自射其善馬, 左右或不敢射者, 冒頓立斬不射善馬者. 居頃之, 復以鳴鏑自射其愛妻, 左右或頗恐, 不敢射, 冒頓又復斬之. 居頃之, 冒頓出獵, 以鳴鏑射單于善馬, 左右皆射之. 於是冒頓知其左右皆可用. 從其父單于頭曼獵, 以鳴鏑射頭曼, 其左右亦皆隨鳴鏑而射殺單于頭曼, 遂盡誅其後母與弟及大臣不聽從者. 冒頓自立爲單于. 선우에게는 태자가 있었는데 이름이 묵특이었다. 나중에 사랑한 연지가 있었는데 작은 아들을 낳았으며 선우는 묵특을 폐하고 작은 아들을 세우려고 하였다. 이에 묵특을 월지의 볼모로 삼았다. 묵특이 월지의 볼모가 되자 두만은 월지를 급히 공격하였다. 월지가 묵특을 죽이려 하자 묵특은 그 좋은 말을 훔쳐 타고 도망쳐 돌아갔다. 두만은 씩씩하다고 여겨 만 기를 거느리게 하였다. 묵특은 이에 명적(소리 나는 화살)을 만들어 그 기병들에게 쏘는 법을 익히게 하고 명하였다. “명적으로 쏜 곳을 일제히 쏘지 않는 자는 참수하겠다.” 조수를 사냥하러 갔는데 명적이 쏜 것을 쏘지 않는 자가 있어 즉시 그를 참하였다. 얼마 후 묵특이 명적으로 그 훌륭한 말을 직접 쏘았는데 좌우에서 혹 감히 쏘지 못하자 묵특은 즉시 훌륭한 말을 쏘지 않은 자를 참하였다. 얼마 있다가 다시 명적으로 그 사랑하는 처를 직접 쏘니 좌우에서 혹 자못 놀라기도 하여 감히 쏘지 못하니 묵특이 또다시 그를 참하였다. 얼마 있다가 묵특이 사냥을 나가서 명적으로 선우의 좋은 말을 쏘았다. 좌우에서 모두 그를 쏘았다. 이에 묵특은 그 좌우가 모두 쓸 만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아비 선우 두만을 따라 사냥하였다. 명적으로 두만을 쏘니 그 좌우에서도 또한 모두 명적을 따라 선우 두만을 죽이고 마침내 계모와 아우 및 대신 가운데 따르지 않는 사람은 모두 죽였다. 묵툭은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
[7] 冒頓既立, 是時東胡彊盛, 聞冒頓殺父自立, 乃使使謂冒頓, 欲得頭曼時有千里馬, 冒頓問群臣, 群臣皆曰, 千里馬, 匈奴寶馬也, 勿與. 冒頓曰, 柰何與人鄰國而愛一馬乎? 遂與之千里馬. 居頃之, 東胡以爲冒頓畏之, 乃使使謂冒頓, 欲得單于一閼氏. 冒頓復問左右, 左右皆怒曰, 東胡無道, 乃求閼氏! 請擊之. 冒頓曰, 柰何與人鄰國愛一女子乎 ? 遂取所愛閼氏予東胡. 東胡王愈益驕, 西侵. 與匈奴閒, 中有棄地, 莫居, 千餘里, 各居其邊爲甌脫. 東胡使使謂冒頓曰. 匈奴所與我界甌脫外棄地, 匈奴非能至也, 吾欲有之. 冒頓問群臣, 群臣或曰. 此棄地, 予之亦可, 勿予亦可. 於是冒頓大怒曰, 地者, 國之本也, 柰何予之! 諸言予之者, 皆斬之. 冒頓上馬, 令國中有後者斬, 遂東襲擊東胡. 東胡初輕冒頓, 不爲備. 及冒頓以兵至, 擊, 大破滅東胡王, 而虜其民人及畜產. 既歸, 西擊走月氏, 南并樓煩白羊河南王. 悉復收秦所使蒙恬所奪匈奴地者, 與漢關故河南塞, 至朝那膚施, 遂侵燕代. 是時漢兵與項羽相距, 中國罷於兵革, 以故冒頓得自彊, 控弦之士三十餘萬. 묵특이 서자 이때는 동호가 강성하였으며 묵특이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였다는 말을 듣고 이에 사신을 보내어 묵특에게 일러 말하게 하고 두만이 당시 가진 천리마를 얻고자하여 묵특이 신하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천리마는 흉노의 보배 같은 말이니 절대로 주지 마십시오.” 묵특이 말하였다. “어찌 남과 이웃한 나라로 말 한 마리를 아끼겠는가?” 마침내 천리마를 주었다. 얼마 후 동호는 묵특이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여 이에 사신을 보내어 묵특에게 말하고 선우의 연지 하나를 얻고 싶다고 하였다. 묵특이 다시 좌우에 물어 보았더니 좌우에서 모두 노하여 말하였다. “동호가 무도하여 이제는 연지까지 바랍니다! 청컨대 치십시오.” 묵특이 말하였다. “어찌 남과 이웃한 나라로 여자 하나를 아끼겠는가?” 마침내 아끼는 연지를 동호에 주었다. 동호의 왕은 더더욱 교만해져서 서쪽을 침범하였다. 흉노와의 사이에는 중간에 버려진 땅이 있는데 아무도 살지 않았으며 천여 리나 되었고 각기 그 변경에 살면서 진지를 세워놓았다. 동호에서 사자를 보내 묵특에게 말하였다. “흉노와 우리 경계의 진지 바깥에 있는 버려진 땅은 흉노가 이를 수 있는 곳이 아니니 내가 가지고 싶소.” 묵특이 신하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신하들 가운데 혹자가 말하였다. “이 버려진 땅은 줘버려도 그만이고 안 줘도 그만입니다.” 이에 묵특이 크게 노하여 말하였다. “땅은 나라의 근본인데 어떻게 준단 말인가!” 여러 주자고 말한 자를 모두 참수하였다. 묵특은 말에 오르며 나라에서 뒤처진 자는 참수하게 하여 마침내 동호를 습격하였다. 동호는 애초에 묵특을 가볍게 보고 대비를 해두지 않았다. 묵특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러 쳐서 동호왕을 대파하여 멸하고 그 백성들 및 가축을 노획하였다. 돌아와서는 서로 월지를 쳐서 쫓고 남으로는 누번과 백양 하남왕을 병탄하였다. 진나라가 몽염을 시켜 빼앗은 흉노의 땅을 모두 수복하고 한나라 관문 안의 옛 하남의 변새와 힘을 합쳐 조나와 부시에 이르러 마침내 연나라와 대군을 쳤다. 이때 한나라 군사는 항우와 맞서고 있어서 중국은 전쟁으로 지쳐 있었으므로 묵특은 스스로 (군비를) 강화시킬 수 있어서 활을 당길 수 있는 군사가 30여 만이나 되었다.
[8] 自淳維以至頭曼千有餘歲, 時大時小, 別散分離, 尚矣, 其世傳不可得而次云. 然至冒頓而匈奴最彊大, 盡服從北夷, 而南與中國爲敵國, 其世傳國官號乃可得而記云. 순유에서 두만에 이르기까지 천여 년 동안 때로는 커졌다 때로는 작아졌다 이합집산을 하면서 오래 되어 그 세계가 전하여짐을 배열하지 못하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묵특에 이르러 흉노는 가장 강대해져 북쪽 오랑캐를 모두 복종시켰고 남으로는 중국과 적국이 되면서 대대로 전해진 나라며 관제의 호칭이 기록되게 되었다 한다.
[9] 置左右賢王․左右谷蠡王․左右大將․左右大都尉․左右大當戶․左右骨都侯. 匈奴謂賢曰屠耆, 故常以太子爲左屠耆王. 自如左右賢王以下至當戶, 大者萬騎, 小者數千, 凡二十四長, 立號曰萬騎. 諸大臣皆世官. 呼衍氏․蘭氏, 其後有須卜氏, 此三姓其貴種也. 諸左方王將居東方, 直上谷以往者, 東接穢貉朝鮮, 右方王將居西方, 直上郡以西, 接月氏氐羌, 而單于之庭直代雲中. 各有分地, 逐水草移徙. 而左右賢王左右谷蠡王最爲大, 左右骨都侯輔政. 諸二十四長亦各自置千長百長什長裨小王相封都尉當戶且渠之屬. 좌우 현왕과 좌우 녹리왕, 좌우 대장, 좌우 대도위, 좌우 대당호, 좌우 골도후를 두었다. 흉노는 현(縣)을 「도기」라 하였으므로 태자를 좌도기왕이라 하였다. 좌우현왕 이하 당호까지 많게는 만 기를 작게는 수천을 거느렸는데 모두 24장이었으며 호칭을 붙여 「만기」라 하였다. 대신들은 모두 관직을 세습하였다. 호연씨와 난씨가 있었으며 그 후에 수복씨가 있었는데 이 세 성은 귀족 씨족이었다. 여러 왼쪽의 왕은 동쪽에 거처하였으며 상곡 쪽으로 나간 것을 마주하여 동으로는 예맥과 조선까지 닿았으며, 오른쪽의 왕은 서방에 살았으며 상군 서쪽과 마주하여 월지와 저, 강까지 닿았고, 선우의 정은 대와 운중을 마주하였다. 각기 땅을 나누어 가졌고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녔다. 좌우 현왕과 좌우 녹리왕이 가장 컸고 좌우 골도후가 정사를 보조했다. 24장은 또한 각기 나름대로 천정과 백장, 십장, 비소왕, 상, 봉도위, 당호, 저거 따위를 두었다.
[10] 歲正月, 諸長小會單于庭, 祠. 五月, 大會蘢城, 祭其先天地鬼神. 秋, 馬肥, 大會蹛林, 課校人畜計. 其法, 拔刃尺者死, 坐盜者沒入其家, 有罪小者軋, 大者死. 獄久者不過十日, 一國之囚不過數人. 而單于朝出營, 拜日之始生, 夕拜月. 其坐, 長左而北鄉. 日上戊己. 其送死, 有棺槨金銀衣裘, 而無封樹喪服, 近幸臣妾從死者, 多至數千百人. 舉事而候星月, 月盛壯則攻戰, 月虧則退兵. 其攻戰, 斬首虜賜一卮酒, 而所得鹵獲因以予之, 得人以爲奴婢. 故其戰, 人人自爲趣利, 善爲誘兵以冒敵. 故其見敵則逐利, 如鳥之集, 其困敗, 則瓦解雲散矣. 戰而扶輿死者, 盡得死者家財. 매년 정월에는 여러 우두머리들이 선우의 정에서 작은 모임을 갖고 제사를 지냈다. 5월에는 용성에서 큰 모임을 갖고 선조와 천지, 귀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가을에 말이 살지면 대림에서 큰 모임을 갖고 사람과 가축의 수를 매기어 조사하였다. 그 법에 칼을 한 자를 뽑으면 사형에 처하였고 도둑을 하다 적발되면 그 집을 몰수하였으며, 작은 죄를 지으면 알형에 처하였고 큰 죄를 지은 자는 사형에 처하였다. 옥에 오래 갇혀도 열흘을 넘지 않았으며 온 나라의 죄수는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선우는 아침에 영채를 나서 갓 떠오르는 해를 보고 절하였으며 저녁에는 달을 보고 절을 하였다. 앉을 때는 장자가 왼쪽에서 북쪽을 향하여 앉았다. 날은 무일와 기일을 최고로 쳤다. 송장을 할 때는 관곽이 있으며 금은으로 꾸미고 갖옷을 입히지만 봉문과 비석, 상복은 없었으며, 가까운 총신이나 첩으로 순장하는 자가 많을 때는 수천 명을 헤아렸다. 거병할 때는 별과 달을 살피는데 달이 차서 한창이면 공격을 하고 달이 이지러지면 군사를 물린다. 싸울 때는 적을 참수하면 술을 한 잔 내리고 얻은 노획물은 그에게 주며 사람을 생포하면 노비로 삼는다. 그리하여 싸울 때는 사람마다 제각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적을 유인하여 적과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데 능하다. 그러므로 적을 보면 이익을 쫓아 새처럼 모여들며, 곤경에 처하여 패하면 와해되어 구름처럼 흩어진다. 싸움에서 전사자를 데리고 오면 전사자의 가산을 모두 가진다.
[11] 後北服渾庾屈射丁零鬲昆薪犁之國, 於是匈奴貴人大臣皆服. 以冒頓單于爲賢. 나중에 북으로 혼유와 굴역, 정령, 역혼, 신려의 나라를 항복시켰다. 이에 흉노의 귀인과 대신들이 모두 복종하여 묵특선우가 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12] 是時漢初定中國 이때 한나라는 막 중국을 평정하여 徙韓王信於代 한왕 신을 대로 옮기고 都馬邑 마읍을 도읍으로 하였다. 匈奴大攻圍馬邑 흉노가 대대적으로 마읍을 공격하여 에워싸니 韓王信降匈奴 한왕신은 흉노에 항복하였다. 匈奴得信 흉노는 한신을 잡자 因引兵南踰句注 이에 군사를 끌고 남으로 구주를 넘어 攻太原 태원을 공격하고 至晉陽下 진양의 아래까지 이르렀다. 高帝自將兵往擊之 고제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흉노를 치러 갔다. 會冬大寒雨雪 마침 겨울에 크게 춥고 눈까지 내려 卒之墮指者十二三, 於是冒頓詳敗走, 誘漢兵. 漢兵逐擊冒頓, 冒頓匿其精兵, 見其羸弱, 於是漢悉兵, 多步兵, 三十二萬, 北逐之. 高帝先至平城, 步兵未盡到, 冒頓縱精兵四十萬騎圍高帝於白登, 七日, 漢兵中外不得相救餉. 匈奴騎, 其西方盡白馬, 東方盡靑駹馬, 北方盡烏驪馬, 南方盡騂馬. 高帝乃使使閒厚遺閼氏, 閼氏乃謂冒頓曰. 兩主不相困, 今得漢地, 而單于終非能居之也, 且漢王亦有神, 單于察之. 冒頓與韓王信之將王黃趙利期, 而黃利兵又不來, 疑其與漢有謀, 亦取閼氏之言, 乃解圍之一角. 於是高帝令士皆持滿傅矢外鄉, 從解角直出, 竟與大軍合, 而冒頓遂引兵而去. 漢亦引兵而罷, 使劉敬結和親之約. 이때 한나라는 막 중국을 평정하여 한왕 신을 대로 옮기고 마읍을 도읍으로 하였다. 흉노가 대대적으로 마읍을 공격하여 에워싸니 한왕신은 흉노에 항복하였다. 흉노는 한신을 잡자 이에 군사를 끌고 남으로 구주를 넘어 태원을 공격하고 진양의 아래까지 이르렀다. 고제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흉노를 치러 갔다. 마침 겨울에 크게 춥고 눈까지 내려 사졸 가운데 손가락이 떨어져 나간 자가 열에 두셋은 되어 이에 묵특은 거짓으로 패하여 달아나며 한나라 군사를 유인하였다. 한나라 군사가 묵특을 추격하자 묵특은 정예병은 숨겨 놓고 병들고 약한 군사만 보여주니 이때 한나라의 모든 군사는 거의가 보병이었는데 32만 명이 북으로 추격하였다. 고제가 먼저 평성에 이르고 보병들은 채 다 이르지도 않았는데 묵특은 정예병 40만 기를 풀어 백등에서 고제를 에워쌌으며 이레 동안 한나라 군사들은 안팎으로 서로 구원하여 식량을 대지 못하였다. 흉노의 기병은 서쪽은 모두 백마였고 동쪽은 모두 이마가 흰 푸른 말이었으며 북쪽은 모두 검은 말이었고 남쪽은 모두 붉은 말이었다. 고제가 이에 사신으로 하여금 가만히 연지에게 재물을 두터이 보내게 하자 연지는 이에 묵특에게 말하였다. “두 임금이 서로를 곤경에 빠뜨릴 수는 없습니다. 지금 한나라 땅을 얻어도 선우는 끝내 잘 거처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한왕도 (도와주는) 신이 있으니 선우께서는 살피십시오.” 묵특은 한왕신의 장수 왕황, 조리와 기약하였으나 왕황과 조리가 또한 오지 않자 한나라와 모략하였다고 의심하였으며 또한 연지의 말을 받아들여 곧 포위한 한쪽 귀퉁이를 풀었다. 이에 고제는 병사들에게 모두 활에 화살을 매겨 밖으로 향하게 하고 포위가 풀린 귀퉁이로 곧장 나가 마침내 대군과 합류하였으며 묵특은 마침내 군사를 끌고 떠났다. 한나라도 군사를 끌고 철수하여유경에게 화친의 조약을 맺게 하였다.
[13] 是後韓王信爲匈奴將, 及趙利王黃等數倍約, 侵盜代雲中. 居無幾何, 陳豨反, 又與韓信合謀擊代, 漢使樊噲往擊之, 復拔代鴈門雲中郡縣, 不出塞. 是時匈奴以漢將眾往降, 故冒頓常往來侵盜代地. 於是漢患之, 高帝乃使劉敬奉宗室女公主爲單于閼氏, 歲奉匈奴絮繒酒米食物各有數, 約爲昆弟以和親, 冒頓乃少止. 後燕王盧綰反, 率其黨數千人降匈奴, 往來苦上谷以東. 이후 한왕신이 흉노의 장수가 되어 조리, 왕황 등과 함께 수차례나 조약을 위반하고 대와 운중을 침탈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진희가 반기를 들고 또한 한신과 함께 모의하여 대를 쳤다. 한나라는 번쾌에게 그들을 치게 하여 대와 안문, 운중의 군현을 다시 빼앗았지만 변경을 나가지는 못하였다. 이때 흉노는 한나라 장수가 가서 항복하는 일이 많아 묵특은 늘 왕래하면서 대의 땅을 침략하였다. 이에 한나라도 두려워하여 고제는 곧 유경에게 종실의 딸을 공주로 받들어 선우의 연지로 삼게 하여 해마다 흉노에게 비단이며 누룩, 먹을 것을 각기 일정량을 보내고 형제로 삼아 화친의 조약을 맺자 묵특이 이에 조금 그만두었다. 나중에 연왕 노관이 반기를 들어 그 무리 수천 명을 데리고 흉노에 항복하여 왕래하며 상곡 이동 지역을 괴롭혔다.
[14] 高祖崩, 孝惠呂太后時, 漢初定, 故匈奴以驕. 冒頓乃爲書遺高后, 妄言. 高后欲擊之, 諸將曰, 以高帝賢武, 然尚困於平城. 於是高后乃止, 復與匈奴和親. 고조가 돌아가시고 효혜제와 여태후 때 한나라가 막 안정되었으므로 흉노는 교만하였다. 묵특은 이에 편지를 써서 고후에게 보내어 망언을 하였다. 고후가 치려고 하자 여러 장수들이 말하였다. “고제께서는 현명하고 용감하였지만 오히려 평성에서 곤경에 처하였습니다.” 이에 고후는 곧 그만두고 다시 흉노와 화친하였다.
[15] 至孝文帝初立, 復修和親之事. 其三年五月, 匈奴右賢王入居河南地, 侵盜上郡葆塞蠻夷, 殺略人民. 於是孝文帝詔丞相灌嬰發車騎八萬五千, 詣高奴, 擊右賢王. 右賢王走出塞. 文帝幸太原. 是時濟北王反, 文帝歸, 罷丞相擊胡之兵. 효문제가 막 즉위하였을 때 다시 화친하는 일을 다졌다. 문제 3년 5월에 흉노의 우현왕이 하남 땅에 들어와 머물면서 상군의 보새(堡塞)의 만이들을 노략질하고 백성들을 살인 약탈하였다. 이에 효문제는 승상 관영에게 기병 8만 5천을 일으켜 고노로 가서 우현왕을 치게 하였다. 우현왕은 달아나 변새 밖으로 나갔다. 문제는 태원에 행차하였다. 이때 제북왕이 반기를 들어 문제는 돌아왔으며 승상의 오랑캐를 치던 병사를 거두었다.
[16] 其明年, 單于遺漢書曰, 天所立匈奴大單于敬問皇帝無恙. 前時皇帝言和親事, 稱書意, 合歡. 漢邊吏侵侮右賢王, 右賢王不請, 聽後義盧侯難氏等計, 與漢吏相距, 絕二主之約, 離兄弟之親. 皇帝讓書再至, 發使以書報, 不來, 漢使不至, 漢以其故不和, 鄰國不附. 今以小吏之敗約故, 罰右賢王, 使之西求月氏擊之. 以天之福, 吏卒良, 馬彊力, 以夷滅月氏, 盡斬殺降下之. 定樓蘭烏孫呼揭及其旁二十六國, 皆以爲匈奴. 諸引弓之民, 并爲一家. 北州已定, 願寢兵休士卒養馬, 除前事, 復故約, 以安邊民, 以應始古, 使少者得成其長, 老者安其處, 世世平樂. 未得皇帝之志也, 故使郎中係雩淺奉書請, 獻橐他一匹, 騎馬二匹, 駕二駟, 皇帝即不欲匈奴近塞, 則且詔吏民遠舍. 使者至, 即遣之. 以六月中來至薪望之地. 書至, 漢議擊與和親孰便. 公卿皆曰: 單于新破月氏, 乘勝, 不可擊. 且得匈奴地, 澤鹵, 非可居也. 和親甚便. 漢許之. 그 이듬해에 선우는 한나라에 편지를 보내어 말하였다. “하늘이 세운 흉노의 대선우가 삼가 황제께서 무양하신지 여쭙습니다. 전에 황제께서 화친의 일을 말씀하셨는데 편지의 뜻이 맞아떨어져 기뻐하였습니다. 한나라 변방의 관리가 우현왕을 모욕하여 우현왕이 청하지도 않고 후의려후 난지 등의 계책을 듣고 한나라 관리와 서로 맞서 두 임금의 맹약을 끊고 형제의 친함이 벌어졌습니다. 황제의 꾸짖는 글이 두 번 이르러 사신을 보내어 편지로 답하였는데 돌아오지 않았고 한나라 사신도 이르지 않았으며 한나라는 그런 까닭에 화친을 하지 않았고 이웃나라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하찮은 관리가 맹약을 어그러뜨린 이유로 우현왕을 벌하여 그로 하여금 서쪽으로 월지를 찾아 깨뜨리게 하였습니다. 하늘의 복과 관리와 군사의 훌륭함, 말의 강한 힘으로 월지를 멸하여 모두 참살하고 항복시켰습니다. 누란과 오손, 오걸 및 그 곁의 26개국을 평정하여 모두 흉노로 삼았습니다. 여러 활을 당기는 백성들이 모두 일가가 되었습니다. 북주가 이미 안정되자 전쟁을 그치고 사졸들을 쉬게 하며 말을 기르고 앞에 있었던 일은 없애고 옛 맹약을 회복하여 변방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여 처음 옛날의 것에 응하여 젊은이들은 잘 자라게 하고 늙은이들은 거처를 편안히 여기게 하여 대대로 평안하고 즐겁기를 바랐습니다. 황제의 뜻을 얻지 못하여 낭중 혜호천으로 하여금 편지를 받들고 청하게 하여 낙타 한 마리와 타는 말 두 마리, 수레를 끄는 말 여덟 필을 삼가 바칩니다. 황제께서 흉노가 변경에 가까이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신다면 잠시 관리와 백성들을 우리 거처에서 멀리 떨어지게 해주십시오. 사자가 이르면 즉시 보내주십시오.」 6월 중순에 와서 신망의 땅에 이르렀다. 편지가 이르자 한나라에서는 공격과 화친 중 어떤 것이 유리한가 논의하였다. 공경들이 모두 말하였다. 선우는 막 월지를 깨뜨린 터라 승세를 타고 있으니 칠 수가 없습니다. 또한 흉노의 땅을 얻어봤자 늪과 진펄이니 살 수가 없습니다. 화친을 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한나라에서 허락하였다.
[17] 孝文皇帝前六年, 漢遺匈奴書曰: 皇帝敬問匈奴大單于無恙. 使郎中係雩淺遺朕書曰, 右賢王不請, 聽後義盧侯難氏等計, 絕二主之約, 離兄弟之親. 漢以故不和, 鄰國不附. 今以小吏敗約, 故罰右賢王使西擊月氏, 盡定之. 願寢兵休士卒養馬, 除前事, 復故約, 以安邊民, 使少者得成其長, 老者安其處, 世世平樂. 朕甚嘉之, 此古聖主之意也. 漢與匈奴約爲兄弟, 所以遺單于甚厚. 倍約離兄弟之親者, 常在匈奴. 然右賢王事已在赦前, 單于勿深誅. 單于若稱書意, 明告諸吏, 使無負約, 有信, 敬如單于書. 使者言單于自將伐國有功, 甚苦兵事. 服繡袷綺衣繡袷長襦錦袷袍各一, 比余一, 黃金飾具帶一, 黃金胥紕一, 繡十匹, 錦三十匹, 赤綈綠繒各四十匹, 使中大夫意謁者令肩遺單于. 효문제 전 6년에 한나라에서 흉노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였다. “황제가 삼가 흉노의 대선우께서 무양하신 지 문안드립니다. 낭중 혜호천으로 하여금 짐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우현왕이 청하지도 않고 후의려후 난지 등의 계책을 듣고 두 임금의 맹약을 끊고 형제의 친함이 벌어졌습니다. 한나라는 그런 까닭에 화친을 하지 않았고 이웃나라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하찮은 관리가 맹약을 어그러뜨린 이유로 우현왕을 벌하여 서쪽으로 월지를 찾아 깨뜨리게 하여 모두 평정하였습니다. 전쟁을 그치고 사졸들을 쉬게 하며 말을 기르고 앞에 있었던 일은 없애어 옛 맹약을 회복하고 변방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여 젊은이들은 잘 자라게 하고 늙은이들은 거처를 편안히 여기게 하여 대대로 평안하고 즐겁기를 바랐습니다.’라 하였습니다. 짐은 그것을 매우 가상히 여기니 이는 옛 성주의 뜻입니다. 한나라와 흉노는 형제가 되기로 맹약하여 선우에게 매우 두터이 예물을 보냈습니다. 약속을 저버려 형제의 친함이 벌어지도록 한 것은 늘 흉노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현왕의 일은 용서하기 전에 있었으니 선우께서는 깊이 벌하지 마십시오. 선우께서 글의 뜻에 동의하시면 여러 관리들에게 분명히 알리어 맹약을 저버리지 않게 하시어 신의가 있으면 삼가 선우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사자가 말하기를 선우께서 친히 거느리고 나라를 쳐 공을 세워 전쟁의 일로 매우 고생하셨다고 하였소. 천자의 복장인 수겁기의와 수겁장유, 금겁포 각 1벌, 비여 1개, 황금 장식 요대 1개, 황금 서비 1개, 수놓은 비단 10필, 비단 34필, 붉은 두꺼운 비단, 푸른 비단 각 40필을 중대부 의와 알자령 견으로 하여금 선우께 보내게 합니다.”
[18] 後頃之, 冒頓死, 子稽粥立, 號曰老上單于. 그 뒤 조금 있다가 묵특이 죽고 아들인 계육이 즉위하였는데 노상선우라 불렀다.
[19] 老上稽粥單于初立, 孝文皇帝復遣宗室女公主爲單于閼氏, 使宦者燕人中行說傅公主. 說不欲行, 漢彊使之. 說曰: 必我行也, 爲漢患者. 中行說既至, 因降單于, 單于甚親幸之. 노상계육선우가 막 즉위하자 효문황제는 다시 종실의 여공주를 선우의 연지로 보냈는데 환관 연나라 사람 중항열에게 공주를 수행하게 하였다. 열은 가려고하지 않았는데 한나라에서 억지로 보냈다. 열이 말하였다. “기필코 저를 보낸다면 한나라의 근심이 될 것입니다.” 중항열은 이르자마자 바로 선우에게 항복하였으며 선우가 그를 매우 가까이하여 총애했다.
[20] 初, 匈奴好漢繒絮食物, 中行說曰: 匈奴人眾不能當漢之一郡, 然所以彊者, 以衣食異, 無仰於漢也. 今單于變俗好漢物, 漢物不過什二, 則匈奴盡歸於漢矣. 其得漢繒絮, 以馳草棘中, 衣袴皆裂敝, 以示不如旃裘之完善也. 得漢食物皆去之, 以示不如湩酪之便美也. 於是說教單于左右疏記, 以計課其人眾畜物. 처음에 흉노가 한나라의 비단과 음식을 좋아하였는데 중항열이 말하였다. “흉노의 인구는 한나라의 한 군도 당할 수 없지만 강한 까닭은 의식이 다르기 때문이니 한나라를 우러르지 마십시오. 지금 선우께서 풍속을 바꾸어 한나라 물건을 좋아하시는데 한나라 물건이 20%를 넘지 않아도 흉노는 몽땅 한나라에 귀속될 것입니다. 한나라의 비단을 얻어 초원과 가시밭을 달리면 옷과 바지가 모두 찢어져 해질 것이니 털옷과 갖옷의 완전함만 못함을 보여줍니다. 얻은 한나라의 음식을 모두 버리시어 낙농 제품의 편하고 맛있음보다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이에 중항열은 선우 좌우의 사람에게 기록하는 것을 가르쳐 인구와 가축을 헤아려 세금을 부과하게 하였다.
[21] 漢遺單于書, 牘以尺一寸, 辭曰皇帝敬問匈奴大單于無恙, 所遺物及言語云云. 中行說令單于遺漢書以尺二寸牘, 及印封皆令廣大長, 倨傲其辭曰天地所生日月所置匈奴大單于敬問漢皇帝無恙, 所以遺物言語亦云云. 한나라가 선우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한 자 한 치의 간독을 썼는데 “황제가 삼가 흉노의 대선우께서 무양한가 안부를 묻는다” 하고 보내는 물건 및 말을 어쩌고저쩌고 적었다. 중항열은 선우에게 한나라에 편지를 보낼 때 한 자 두 치의 간독 및 봉인을 모두 넓고 크고 길게 하도록 하였으며 말도 거만하게 “천지가 낳고 일월이 둔 흉노 대선우가 삼가 한나라 황제께서 무양하신지 안부를 묻는다”라 하고 보내는 물건과 말을 어쩌고저쩌고라 하게 하였다.
[22] 漢使或言曰, 匈奴俗賤老. 中行說窮漢使曰, 而漢俗屯戍從軍當發者, 其老親豈有不自脫溫厚肥美以齎送飲食行戍乎? 漢使曰, 然. 中行說曰, 匈奴明以戰攻爲事, 其老弱不能鬥, 故以其肥美飲食壯健者, 蓋以自爲守衛, 如此父子各得久相保, 何以言匈奴輕老也 ? 漢使曰, 匈奴父子乃同穹廬而臥, 父死, 妻其後母, 兄弟死, 盡取其妻妻之. 無冠帶之飾, 闕庭之禮. 中行說曰, 匈奴之俗, 人食畜肉, 飲其汁, 衣其皮. 畜食草飲水, 隨時轉移. 故其急則人習騎射, 寬則人樂無事, 其約束輕, 易行也. 君臣簡易, 一國之政猶一身也. 父子兄弟死, 取其妻妻之, 惡種姓之失也. 故匈奴雖亂, 必立宗種. 今中國雖詳不取其父兄之妻, 親屬益疏則相殺, 至乃易姓, 皆從此類. 且禮義之敝, 上下交怨望, 而室屋之極, 生力必屈. 夫力耕桑以求衣食, 築城郭以自備, 故其民急則不習戰功, 緩則罷於作業. 嗟土室之人, 顧無多辭, 令喋喋而佔佔, 冠固何當? 한나라 사신 중에 혹자가 “흉노의 풍속은 늙은이를 천대한다.”고 하였다. 중항열이 한나라 사신에게 추궁하였다. “그런데 한나라의 풍속에 수자리 서러 종군하여 출발하려는 자에게 그 노친네가 어찌 스스로 따뜻하고 두터운 옷을 벗어주고 살지고 맛있는 음식을 주어 수자리 서러 가는 자를 보내지 않습니까?” 한나라 사신이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중항열이 말하였다. “흉노는 분명히 진공하는 것을 일삼는데 그 노약자들은 싸울 수 없으므로 살지고 맛있는 것을 건장한 자에게 먹고 마시게 하는 것이 아마 스스로 지키는 것이라 생각할 것이며 이렇게 하여야 부자간에 각기 오래도록 보전할 수 있으니 어째서 흉노가 늙은이를 경시한다고 말하오?” 한나라 사자가 말하였다. “흉노는 부자간에 곧 같은 천막에서 잠을 잡니다. 아비가 죽으면 그 남은 어미를 아내로 삼으며, 형제가 죽으면 그 아내를 모두 취하여 아내로 삼습니다. 관모나 띠의 장식이나 조정에서의 예법 같은 것도 없소.” 중항열이 말하였다. “흉노의 풍속은 사람이 가축의 고기를 먹고 그 젖을 마시며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습니다. 가축은 풀을 먹고 물을 마시느라 수시로 옮겨 다닙니다. 그러므로 급한 일이 있으면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익히고 여유가 있으면 사람들이 일이 없음을 즐기어 약속이 가벼워 행하기가 쉽습니다. 군신 관계가 간이하여 한 나라의 정치가 한 몸과 같습니다. 부자와 형제가 죽으면 그 아내를 취하여 아내로 삼는 것은 종족의 성을 잃음을 싫어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흉노는 비록 어지러워도 반드시 종족의 후대를 세웁니다. 지금 중국이 비록 겉으로는 그 부형의 아내를 취하지 않지만 친속 관계가 더 멀어지면 서로 죽이고 심지어 곧 성까지 바꾸는 것은 모두 이런 데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의가 흐트러져 상하가 서로 원망하며 집을 짓는 것은 극도에 이르러도 사는 힘은 반드시 다하게 됩니다.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써 의식을 추구하며 성곽을 쌓아 스스로 대비하므로 그 백성들은 다급할 때 전쟁을 익히지 않으며 여유가 있을 때는 일을 하느라 지치게 됩니다. 아, 흙으로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하지 말고 설령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고 옷을 번듯하게 입으며 관을 쓴들 실로 어찌 감당하겠는가?”
[23] 自是之後, 漢使欲辯論者, 中行說輒曰, 漢使無多言. 顧漢所輸匈奴繒絮米糱, 令其量中, 必善美而己矣, 何以爲言乎? 且所給備善則已, 不備, 苦惡, 則候秋孰, 以騎馳蹂而稼穡耳. 日夜教單于候利害處 이 이후로 한나라 사신이 변론을 하고자 하면 중항열이 그 즉시 말하였다. “한나라 사신은 말을 많이 하지 마시오. 한나라에서 흉노에게 보내주는 비단과 쌀, 누룩을 그 양에 맞게 하고 반드시 좋고 훌륭하게 하면 될 따름이지 어떻게 말을 하겠소? 또한 줄 것을 갖추고 좋으면 그만일 따름이며, 갖추지 않고 실로 질이 나쁘면 가을에 익기를 기다려 말을 달려 그대들의 농작물을 짓밟을 따름이오.” 밤낮으로 선우에게 유리한 점과 해로운 점을 가르쳤다.
[24] 漢孝文皇帝十四年, 匈奴單于十四萬騎入朝那蕭關, 殺北地都尉卬, 虜人民畜產甚多, 遂至彭陽. 使奇兵入燒回中宮, 候騎至雍甘泉. 於是文帝以中尉周舍郎中令張武爲將軍, 發車千乘, 騎十萬, 軍長安旁以備胡寇. 而拜昌侯盧卿爲上郡將軍, 甯侯魏遫爲北地將軍, 隆慮侯周竈爲隴西將軍, 東陽侯張相如爲大將軍, 成侯董赤爲前將軍, 大發車騎往擊胡. 單于留塞內月餘乃去, 漢逐出塞即還, 不能有所殺. 匈奴日已驕, 歲入邊, 殺略人民畜產甚多, 雲中遼東最甚, 至代郡萬餘人, 漢患之, 乃使使遺匈奴書. 單于亦使當戶報謝, 復言和親事. 한나라 효문황제 14(B.C. 166)년에 흉노 선우의 14만 기가 조나와 소관을 침입하여 북지의 도위 앙을 살해하고 백성들과 축산물을 노략질함이 매우 많았으며 마침내 팽양에까지 이르렀다. 기습병으로 하여금 회중궁에 들어가 불태우게 했으며 척후 기병이 옹의 감천궁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문제는 중위 주사와 낭중령 장무를 장수로 삼아 수레 천 승과 기병 10만을 징발하여 장안 곁에 주둔하게 하여 오랑캐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리고 창후 노경을 상군 장군으로 삼았으며 영후 위속을 북지장군으로, 융로후 주창을 농서장군으로, 동양후 장상여를 대장군으로, 성후 동적을 전장군으로 삼아 대대적으로 전차와 기병을 일으켜 가서 오랑캐를 쳤다. 선우는 변경 안에 달포를 머물다가 떠났으며 한나라는 변경 바깥까지 쫓아갔다 곧 돌아왔는데 사살한 자가 있을 수가 없었다. 흉노는 날로 이미 교만해져 해마다 변경을 쳐들어왔으며 백성을 죽이고 가축을 약탈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운중과 요동이 가장 심하였고 대군은 만여 명에 이르렀다. 한나라는 근심하여 이에 사신을 보내어 흉노에게 편지를 보내게 했다. 선우 또한 당호로 하여금 보답하게 하고 다시 화친의 일을 말하였다.
[25] 孝文帝後二年, 使使遺匈奴書曰, 皇帝敬問匈奴大單于無恙. 使當戶且居雕渠難郎中韓遼遺朕馬二匹, 已至, 敬受. 先帝制, 長城以北, 引弓之國, 受命單于, 長城以內, 冠帶之室, 朕亦制之. 使萬民耕織射獵衣食, 父子無離, 臣主相安, 俱無暴逆. 今聞渫惡民貪降其進取之利, 倍義絕約, 忘萬民之命, 離兩主之驩, 然其事已在前矣. 書曰, 二國已和親, 兩主驩說, 寢兵休卒養馬, 世世昌樂, 闟然更始, 朕甚嘉之. 聖人者日新, 改作更始, 使老者得息, 幼者得長, 各保其首領而終其天年. 朕與單于俱由此道, 順天恤民, 世世相傳, 施之無窮, 天下莫不咸便. 漢與匈奴鄰國之敵, 匈奴處北地, 寒, 殺氣早降, 故詔吏遺單于秫糱金帛絲絮佗物歲有數. 今天下大安, 萬民熙熙, 朕與單于爲之父母. 朕追念前事, 薄物細故, 謀臣計失, 皆不足以離兄弟之驩. 朕聞天不頗覆, 地不偏載. 朕與單于皆捐往細故, 俱蹈大道, 墮壞前惡, 以圖長久, 使兩國之民若一家子. 元元萬民, 下及魚鱉, 上及飛鳥, 跂行喙息蠕動之類, 莫不就安利而辟危殆. 故來者不止, 天之道也. 俱去前事, 朕釋逃虜民, 單于無言章尼等. 朕聞古之帝王, 約分明而無食言. 單于留志, 天下大安, 和親之後, 漢過不先. 單于其察之. 효문제 후원(後元) 2년(B.C. 162)에 사신을 보내 흉노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였다. “황제가 삼가 흉노의 대선우께서 무양하신 지 문안드립니다. 당호 저거 조거난과 낭중 한료에게 짐의 말 2필을 보내게 하였는데 이르면 삼가 받아주시오. 선제의 규정에 장성 이북은 활을 당기는 나라로 선우의 명을 받으며, 장성 이내는 관대를 한 나라로 짐이 또한 다스린다고 하였소. 만민이 경작하고 베 짜고 활을 쏘아 사냥하며 입고 먹게 한다면 부자간에 떨어지지 않고 군신이 서로 편안히 여기어 모두 흉포하고 거스르는 자가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 듣자하니 사악한 백성들이 공격하여 빼앗는 이익이 내림을 탐하여 의리를 저버리고 맹약을 끊어 만민의 목숨을 잊고 두 임금의 좋은 감정을 이간질하였지만 그 일이 이미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하오. 보내신 서신에서 말하기를 ‘두 나라가 이미 화친하여 두 임금이 기뻐하여 전쟁을 그치고 군사를 쉬게 하며 말을 길러 세세대대로 창성하고 화락하여 안정되게 다시 시작하였습니다.’라 하여 짐이 매우 가상히 여겼습니다. 성인은 날로 새로워지며 새롭게 고쳐 다시 시작하여 늙은이를 쉬게 하고 어린 아이를 자라게 하여 각기 그 수령을 보호하여 그 천수를 누리게 할 수 있습니다. 짐과 선우는 모두 이 도로 말미암아 하늘의 뜻에 순종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겨 대대로 전하고 끝없이 베풀어 천하에서 다 편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습니다. 한나라와 흉노는 이웃한 대등한 나라로 흉노는 북쪽 땅에 처하여 추워 숙살의 기운이 일찍 내리므로 관리에게 명하여 선우에게 차조와 누룩, 금과 비단, 솜과 다른 물건들을 매년 일정량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천하는 크게 태평하고 만민들은 즐거워하여 짐과 선우는 그들의 부모입니다. 짐이 지난 일을 쫓아 생각해보니 하찮고 자잘한 일이었고 모신들의 계책에 실수가 있었으나 모두 형제의 기쁨을 이반시키기에는 부족합니다. 짐이 듣건대 하늘은 한쪽만 덮어주지 않고 땅은 치우치게 실어주지 않는다고 하였소. 짐과 선우는 모두 지난날의 자잘한 사정을 버리고 함께 큰 길을 걸으며 지난날의 나쁜 점은 버리고 장구함을 도모하여 두 나라 백성이 한 집안 사람인 것처럼 되게 합시다. 선량한 백성들이 아래로는 물고기와 자라에 미치고 위로는 나는 새에 미치기까지 기어 다니고 주둥이로 쉬며 꿈틀거리며 다니는 무리들까지 편하고 이로운 곳으로 나아가고 위험하고 위태로운 것을 피하지 않음이 없게 하고자 하오. 오는 것을 그치지 않게 함이 하늘의 도입니다.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리도록 합시다. 짐은 오랑캐로 달아난 백성을 풀어주고 선우는 장니 등에 대하여 말하지 말아주오. 짐이 듣건대 옛날의 제왕들은 맹약은 분명하고 식언을 하지 않는다 하였소. 선우께서는 유념하시면 천하가 크게 평안해질 것이며 화친한 다음에는 한나라가 과실을 먼저 범하지는 않을 것이오. 선우께서는 살피시기 바라오.”
[26] 單于既約和親, 於是制詔御史曰, 匈奴大單于遺朕書, 言和親已定, 亡人不足以益眾廣地, 匈奴無入塞, 漢無出塞, 犯今約者殺之, 可以久親, 後無咎, 俱便. 朕已許之. 其布告天下, 使明知之. 선우가 화친에 맹약하자 이에 어사에게 명하였다. “흉노의 대선우가 짐에게 서신을 보내어 화친이 이미 정하여졌다고 말하였으며, 망자가 인구를 더하거나 땅을 넓히기에는 부족하므로 흉노는 변경 안으로 쳐들어오지 않고 한나라는 변경 밖으로 나가지 않으며 지금의 맹약을 어긴 자는 죽여서 오래도록 친할 수 있게 하여 후환이 없게 하면 모두에게 좋을 것이다. 짐이 이미 허락하였다. 천하에 포고하여 분명히 알도록 하라.”
[27] 後四歲, 老上稽粥單于死, 子軍臣立爲單于. 既立, 孝文皇帝復與匈奴和親. 而中行說復事之 . 4년 뒤 노상계육선우가 죽고 아들인 군신이 선우로 즉위하였다. 즉위하자 효문황제는 다시 흉노와 화친하였다. 그리고 중항열이 다시 그를 섬겼다.
[28] 軍臣單于立四歲, 匈奴復絕和親, 大入上郡雲中各三萬騎, 所殺略甚眾而去, 於是漢使三將軍軍屯北地, 代屯句注, 趙屯飛狐口, 緣邊亦各堅守以備胡寇. 又置三將軍, 軍長安西細柳渭北棘門霸上以備胡. 胡騎入代句注邊, 烽火通於甘泉長安. 數月, 漢兵至邊, 匈奴亦去遠塞, 漢兵亦罷. 後歲餘, 孝文帝崩, 孝景帝立, 而趙王遂乃陰使人於匈奴. 吳楚反, 欲與趙合謀入邊. 漢圍破趙, 匈奴亦止. 自是之後, 孝景帝復與匈奴和親, 通關市, 給遺匈奴, 遣公主, 如故約. 終孝景時, 時小入盜邊, 無大寇. 군신선우 즉위 4년 만에 흉노는 다시 화친을 끊고 상군과 운중을 대대적으로 침입하였는데 각기 3만 기였으며 대량으로 살인과 약탈을 자행한 후에 떠났다. 이에 한나라는 세 장군으로 하여금 북지에 주둔하게 하였으며 대군에서는 구주에 주둔하고 조나라에서는 비호구에 주둔하게 하였으며 변경을 따라 또한 각기 굳게 지키며 오랑캐에 대비하게 하였다. 또 세 장군을 두고 장안의 서쪽 세류와 위수 북쪽 극문과 패상에 주둔시켜 오랑캐에 대비하였다. 오랑캐의 기병이 대군의 구주 변경으로 쳐들어오자 봉화를 올려 감천과 장안까지 통하였다. 몇 달 만에 한나라 군사가 변방에 이르자 흉노는 또한 먼 변새로 떠났고 한나라 군사도 철수했다. 한 해 남짓 뒤에 효문제가 돌아가시고 효경제가 즉위하자 조왕수가 이에 몰래 흉노에 사람을 보냈다. 오나라와 초나라가 반기를 들고 조나라와 함께 모의하여 변경으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한나라가 조나라를 에워싸고 깨뜨리자 흉노 또한 그만두었다. 이 이후로 효경제는 다시 흉노와 화친하여 관문과 시장을 교통시켰으며 흉노에게 (재물을) 보내주었고 공주를 보내어 옛 맹약과 같이 하였다. 효경제의 제위가 끝날 때까지 이따금 소규모로 쳐들어와 변경을 약탈한 적은 있어도 크게 쳐들어오지는 않았다.
[29] 今帝即位, 明和親約束, 厚遇, 通關市, 饒給之. 匈奴自單于以下皆親漢, 往來長城下. 지금의 황제가 즉위하여 화친의 약속을 분명히 하고 후대해주었으며 관문과 시장을 교통시키고 넉넉하게 (재물을) 대주었다. 흉노는 선우 이하 모두 한나라와 친하게 지냈으며 장성의 아래를 왕래하였다.
[30] 漢使馬邑下人聶翁壹奸蘭出物與匈奴交, 詳爲賣馬邑城以誘單于. 單于信之, 而貪馬邑財物, 乃以十萬騎入武州塞. 漢伏兵三十餘萬馬邑旁, 御史大夫韓安國爲護軍, 護四將軍以伏單于. 單于既入漢塞, 未至馬邑百餘里, 見畜布野而無人牧者, 怪之, 乃攻亭. 是時鴈門尉史行徼, 見寇, 葆此亭, 知漢兵謀, 單于得, 欲殺之, 尉史乃告單于漢兵所居. 單于大驚曰, 吾固疑之. 乃引兵還, 出曰, 吾得尉史, 天也, 天使若言. 以尉史爲天王. 漢兵約單于入馬邑而縱, 單于不至, 以故漢兵無所得. 漢將軍王恢部出代擊胡輜重, 聞單于還, 兵多, 不敢出. 漢以恢本造兵謀而不進, 斬恢. 自是之後, 匈奴絕和親, 攻當路塞, 往往入盜於漢邊, 不可勝數. 然匈奴貪, 尚樂關市, 嗜漢財物, 漢亦尚關市不絕以中之. 한나라는 마읍의 사람 섭옹일로 하여금 금령을 어기고 물건을 내어 흉노와 교역하게 하였는데 거짓으로 마읍성을 판다고 하여 선우를 꾀었다. 선우가 그 말을 믿고 마읍의 재물을 탐하여 이에 십만의 기병을 가지고 무주의 변새로 쳐들어갔다. 한나라는 마읍의 곁에 30여 만의 군사를 매복시켜놓고 어사대부 한안국을 호군으로 삼아 네 장군을 호위하여 선우를 치려고 매복하였다. 선우가 한나라 변경으로 들어와 마읍에서 백여 리 못 미친 곳에서 가축이 들에 널려 있는데 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이에 봉수정(烽燧亭)을 공격하였다. 이때 안문의 위사가 순찰을 돌다가 적을 발견하고 이 봉수정에 몸을 숨기자 한나라 군사의 계책을 알아채고 선우가 잡아 죽이려 하자 위사는 이에 선우에게 한나라 군사가 있는 곳을 일러바쳤다. 선우가 크게 놀라 말하였다. “내가 의심한대로구나.” 이에 군사를 끌고 돌아갔다. 나서면서 말하였다. “내가 위사를 얻은 것은 하늘의 뜻이니 하늘이 너에게 말하게 하였도다.” 위사를 ‘천왕’으로 삼았다. 한나라 군사는 선우가 마읍에 들어오면 풀기로 약정하였는데 선우가 이르지 않아 한나라 군사는 얻은 것이 없었다. 한나라 장군 왕회의 부대는 대군을 나서 오랑캐의 치중을 치려했는데 선우가 돌아갔고 군사가 많다는 말을 듣고 감히 나가지 않았다. 한나라는 왕회가 군사작전의 주동자였는데도 진공하지 않았다 하여 왕회를 참수하였다. 이 이후로 흉노는 화친을 끊고 요로의 변새를 공격하여 왕왕 한나라의 변경을 쳐들어와 노략질하였는데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흉노는 탐욕스러워 여전히 관문에서 장사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한나라의 재물을 좋아하였으며 한나라 또한 여전히 관문의 장사를 끊지 않아 손상을 입었다.
[31] 自馬邑軍後五年之秋, 漢使四將軍各萬騎擊胡關市下. 將軍衛靑出上谷, 至蘢城, 得胡首虜七百人. 公孫賀出雲中, 無所得. 公孫敖出代郡, 爲胡所敗七千餘人. 李廣出鴈門, 爲胡所敗, 而匈奴生得廣, 廣後得亡歸. 漢囚敖廣, 敖廣贖爲庶人, 其冬, 匈奴數入盜邊, 漁陽尤甚. 漢使將軍韓安國屯漁陽備胡. 其明年秋, 匈奴二萬騎入漢, 殺遼西太守, 略二千餘人. 胡又入敗漁陽太守軍千餘人, 圍漢將軍安國, 安國時千餘騎亦且盡, 會燕救至, 匈奴乃去. 匈奴又入鴈門, 殺略千餘人. 於是漢使將軍衛靑將三萬騎出鴈門, 李息出代郡, 擊胡. 得首虜數千人. 其明年, 衛靑復出雲中以西至隴西, 擊胡之樓煩白羊王於河南, 得胡首虜數千, 牛羊百餘萬. 於是漢遂取河南地, 築朔方, 復繕故秦時蒙恬所爲塞, 因河爲固. 漢亦棄上谷之什辟縣造陽地以予胡. 是歲, 漢之元朔二年也. 마읍의 군사(軍事)가 있고 5년째 되던 해 가을에 한나라는 네 장군으로 하여금 각기 만 기를 거느리고 오랑캐의 관문과 시장을 치게 하였다. 장군 위청이 상곡을 나서 용성에 이르러 오랑캐의 목을 베고 사로잡은 것이 7백 명이었다. 공손하가 운중을 나섰으나 얻은 것이 없었다. 공손오가 대군을 나섰으나 오랑캐에게 패하여 7천여 명을 잃었다. 이광이 안문을 나섰는데 오랑캐에게 패하여 흉노가 이광을 사로잡았으며 이광은 나중에 도망쳐 돌아오게 되었다. 한나라는 공손오와 이광을 가두었으며 공손오와 이광은 서인으로 속량되었다. 그 해 겨울에 흉노가 수차례나 변경으로 쳐들어와 노략질하였는데 어양이 더욱 심하였다. 한나라는 장군 한안국을 어양에 주둔시켜 오랑캐를 방비하게 하였다. 그 이듬해 가을에 흉노의 2만 기병이 한나라로 쳐들어와 요서 태수를 죽이고 2천여 명을 노략질해갔다. 오랑캐는 또 들어와 어양태수의 군사 천여 명을 패퇴시키고 한나라 장군 한안국을 에워쌌는데 한안국은 당시 천여 기가 거의 다해가던 차에 마침 연나라의 구원병이 이르러 흉노는 이에 떠났다. 흉노는 또 안문에 쳐들어와 천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이에 한나라는 장군 위청에게 3만 기를 거느리고 안문을 나서게 하고 이식에게는 대군을 나서게 하여 오랑캐를 쳤다. 참획(斬獲)한 오랑캐가 천여 명이었다. 그 이듬해 위청은 다시 운중을 나서 서로 농서에 이르러 하남에서 오랑캐의 누번과 백양왕을 쳐서 오랑캐를 참획한 것이 수천 명이었고 소와 양은 백여 만이었다. 이에 한나라는 마침내 하남의 땅을 빼앗고 삭방에 성을 쌓았으며 옛날 진나라 때 몽염이 쌓은 요새를 다시 손을 보아 황하를 따라 견고하게 하였다. 한나라는 또한 상곡의 구석진 현 열 개를 버려 오랑캐에게 주었다. 이 해는 한나라 원삭 2년(B.C. 127)이었다.
[32] 其後冬, 匈奴軍臣單于死. 軍臣單于弟左谷蠡王伊稚斜自立爲單于, 攻破軍臣單于太子於單. 於單亡降漢, 漢封於單爲涉安侯, 數月而死. 그 후 겨울에 흉노의 군신선우가 죽었다. 군신선우의 아우 좌곡여왕 이치사가 스스로 선우로 즉위하여 군신선우의 태자 어단을 쳐서 깨뜨렸다. 어단은 도망쳐 한나라에 항복하였으며 한나라에서는 어단을 섭안후에 봉하였는데 몇 달 만에 죽었다.
[33] 伊稚斜單于既立, 其夏, 匈奴數萬騎入殺代郡太守恭友, 略千餘人. 其秋, 匈奴又入鴈門, 殺略千餘人. 其明年, 匈奴又復入代郡定襄上郡, 各三萬騎, 殺略數千人. 匈奴右賢王怨漢奪之河南地而築朔方, 數爲寇, 盜邊, 及入河南, 侵擾朔方, 殺略吏民其眾. 이치사선우가 즉위한 그 해 여름에 흉노의 수만 기병이 쳐들어와 대군태수 공우를 죽이고 천여 명을 노략질하였다. 그 해 가을에 흉노는 또 안문으로 쳐들어와 천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그 이듬해에 흉노는 또 다시 대군과 정양, 상군으로 쳐들어왔는데 각기 3만 기였으며 수천 명을 노략질하였다. 흉노의 우현왕은 한나라가 하남을 빼앗고 삭방에 성을 쌓은 것을 원망하여 수차례나 침범하였으며 변경을 약탈하고 하남에까지 들어와 삭방을 침범해 소요를 일으키고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한 것이 매우 많았다.
[34] 其明年春, 漢以衛靑爲大將軍, 將六將軍, 十餘萬人, 出朔方高闕擊胡. 右賢王以爲漢兵不能至, 飲酒醉, 漢兵出塞六七百里, 夜圍右賢王. 右賢王大驚, 脫身逃走, 諸精騎往往隨後去. 漢得右賢王眾男女萬五千人, 裨小王十餘人. 其秋, 匈奴萬騎入殺代郡都尉朱英, 略千餘人. 그 이듬해 봄에 한나라는 위청을 대장군으로 삼아 여섯 장군에 10여만 명을 거느리고 삭방과 고궐을 나서 오랑캐를 쳤다. 우현왕은 한나라 군사가 이를 수 없다고 생각하여 술을 마시고 취하였는데 한나라 군사가 변경을 6,7백 리 나서 밤에 우현왕을 에워쌌다. 우현왕은 크게 놀라 몸을 빼내어 도망쳐 달아나 그 정예 기병들은 곳곳에서 뒤따라 떠났다. 한나라는 우현왕의 무리 남녀 1만 5천 명과 비소왕 50여 명을 잡았다. 그 해 가을에 흉노의 기병 1만이 쳐들어와 대군의 도위 주영을 죽이고 천여 명을 노략질하였다.
[35] 其明年春, 漢復遣大將軍衛靑將六將軍, 兵十餘萬騎, 乃再出定襄數百里擊匈奴, 得首虜前後凡萬九千餘級, 而漢亦亡兩將軍, 軍三千餘騎. 右將軍建得以身脫, 而前將軍翕侯趙信兵不利, 降匈奴. 趙信者, 故胡小王, 降漢, 漢封爲翕侯, 以前將軍與右將軍并軍分行, 獨遇單于兵, 故盡沒. 單于既得翕侯, 以爲自次王, 用其姊妻之, 與謀漢. 信教單于益北絕幕, 以誘罷漢兵, 徼極而取之, 無近塞. 單于從其計. 其明年, 胡騎萬人入上谷, 殺數百人. 그 이듬해 봄에 한나라는 다시 대장군 위청을 보내어 여섯 장수와 군사 10여만 기를 거느리고 이에 다시 정양 수백 리를 나서 흉노를 쳤는데 수급과 참수를 한 것이 무릇 1만 9천여 급이며 한나라 또한 두 장군과 군사 3천여 기를 잃었다. 우장군 건은 몸이 빠져 나올 수 있었지만 전장군 흡후 조신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흉노에 항복하였다. 조신은 옛 오랑캐의 소왕으로 한나라에 항복하여 한나라에서 흡후에 봉하였으며 전장군으로 우장군과 함께 나누어 행군하다가 단독으로 선우의 군사를 만나 전멸되다시피 한 것이다. 선우는 흡후를 잡자 자차왕으로 삼아 그 누이를 아내로 삼게 하고 함께 한나라를 도모하였다. 조신은 선우로 하여금 더 북쪽으로 사막을 가로지르게 하여 한나라 군사를 유인하여 지치게 하여 극도에 달했을 때 빼앗아야 하며 변경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선우는 그 계책을 따랐다. 그 이듬해에 오랑캐의 기병 만 명이 상곡으로 들어와 수백 명을 죽였다.
[36] 其明年春, 漢使驃騎將軍去病將萬騎出隴西, 過焉支山千餘里, 擊匈奴, 得胡首虜(騎)萬八千餘級, 破得休屠王祭天金人. 其夏, 驃騎將軍復與合騎侯數萬騎出隴西北地二千里, 擊匈奴. 過居延, 攻祁連山, 得胡首虜三萬餘人, 裨小王以下七十餘人. 是時匈奴亦來入代郡、鴈門, 殺略數百人. 漢使博望侯及李將軍廣出右北平, 擊匈奴左賢王. 左賢王圍李將軍, 卒可四千人, 且盡, 殺虜亦過當. 會博望侯軍救至, 李將軍得脫. 漢失亡數千人, 合騎侯後驃騎將軍期, 及與博望侯皆當死. 贖爲庶人. 그 이듬해 봄에 한나라는 표기장군 곽거병으로 하여금 만 기를 거느리고 농서를 나서 언지산을 천여 리 지나 흉노를 치게 하여 오랑캐의 수급 8만여 개를 얻고 휴도왕의 제천금인을 깨뜨려 얻었다. 그 해 여름에 표기장군은 다시 합기후의 수만 기와 함께 농서와 북지로 2천 리를 나가 흉노를 쳤다. 거연을 지나 기련산을 공격하여 오랑캐의 수급 3만 여 명 및 비소왕 이하 70여 명을 얻었다. 이때 흉노 또한 대군과 안문으로 쳐들어와 수백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한나라는 박망후 및 이광 장군으로 하여금 우북평으로 나가 흉노의 좌현왕을 치게 하였다. 좌현왕은 이장군을 에워싸 4천은 됨직한 병사가 거의 다 죽었는데 죽인 오랑캐 또한 맞설 수 있는 수를 넘었다. 마침 박망후의 구원군이 이르러 이장군은 벗어나게 되었다. 한나라는 수천 명을 잃었으며 함기후는 표기장군이 기약한 날보다 뒤처져 박망후와 함께 사형에 해당하였으나 서인으로 속량되었다.
[37] 其秋, 單于怒渾邪王休屠王居西方爲漢所殺虜數萬人, 欲召誅之. 渾邪王與休屠王恐, 謀降漢, 漢使驃騎將軍往迎之. 渾邪王殺休屠王, 并將其眾降漢. 凡四萬餘人, 號十萬. 於是漢已得渾邪王, 則隴西北地河西益少胡寇, 徙關東貧民處所奪匈奴河南新秦中以實之, 而減北地以西戍卒半. 其明年, 匈奴入右北平定襄各數萬騎, 殺略千餘人而去. 그해 가을에 선우는 혼야왕과 휴도왕이 서방에 머물면서 한나라에 수만 명이나 죽고 포로로 잡힌 것에 노하여 불러서 죽이려 하였다. 혼야왕과 휴도왕은 두려워하여 한나라에 항복하기로 하여 한나라는 표기장군으로 하여금 가서 그들을 맞게 하였다. 혼야왕은 휴도왕을 죽이고 그 무리를 함께 거느리고 한나라에 항복하였다. 모두 4만여 명이었는데 10만이라 불렀다. 이에 한나라는 이미 혼야왕을 얻었으니 농서와 북지, 하서에는 오랑캐가 더욱 줄어들어 관동의 빈민을 옮겨 빼앗은 흉노의 하남과 신중국으로 옮겨 채우고 북지 서쪽의 수졸을 반으로 줄였다. 그 이듬해에 흉노는 우북평과 정양에 각기 수만 기로 침입하여 천여 명을 죽이고 약탈한 후 떠났다.
[38] 其明年春, 漢謀曰翕侯信爲單于計, 居幕北, 以爲漢兵不能至, 乃粟馬發十萬騎, 私負從馬凡十四萬匹, 糧重不與焉. 令大將軍靑驃騎將軍去病中分軍, 大將軍出定襄, 驃騎將軍出代, 咸約絕幕擊匈奴. 單于聞之, 遠其輜重, 以精兵待於幕北. 與漢大將軍接戰一日, 會暮, 大風起, 漢兵縱左右翼圍單于. 單于自度戰不能如漢兵, 單于遂獨身與壯騎數百潰漢圍西北遁走. 漢兵夜追不得. 行斬捕匈奴首虜萬九千級, 北至闐顏山趙信城而還. 그 이듬해 봄에 한나라에서는 상의하기를 “흡후 조신이 선우에게 계책을 내어 사막의 북쪽에 머물면서 한나라 군사가 이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라 하였다. 이에 말을 먹이고 10만의 기병을 징발하였으며 사적으로 짐을 지고 말을 따른 자가 모두 14만 필이었는데 양식과 치중은 거기에 넣지 않았다.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으로 하여금 군사를 반씩 나누어 대장군은 정양을 나서고 표기장군은 대군을 나서게 하여 모두 사막을 가로질러 흉노를 치게 하였다. 선우가 그 말을 듣고 치중을 멀리 띄워 놓고 정예병을 가지고 사막 북쪽에서 기다렸다. 한나라의 대군과 하루 접전을 벌였는데 마침 날이 저물고 큰 바람이 일어 한나라 군사는 좌우의 날개를 풀어 선우를 에워쌌다. 선우 스스로 전세가 한나라 군사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여 선우는 마침내 단신으로 씩씩한 기마 수백과 함께 한나라의 에움을 무너뜨리고 서북쪽으로 도망쳐 달아났다. 한나라 군사는 밤이라 추격할 수 없었다. 가면서 흉노를 참하고 죽이면서 1만 9천의 수급을 베고 북으로 전안산 조신성에까지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39] 單于之遁走, 其兵往往與漢兵相亂而隨單于, 單于久不與其大眾相得, 其右谷蠡王以爲單于死, 乃自立爲單于, 真單于復得其眾, 而右谷蠡王乃去其單于號, 復爲右谷蠡王. 선우가 도망쳐 달아나자 그 군사들은 곳곳에서 한나라 군사와 서로 섞여 선우를 따랐다. 선우는 오래도록 그 부하들과 만날 수가 없어 우곡여왕은 선우가 죽었다고 생각하여 이에 스스로 선우로 즉위하였다. 진짜 선우가 다시 그 무리를 찾자 우곡여왕은 이에 선우라는 칭호를 버리고 다시 우곡여왕이 되었다.
[40] 漢驃騎將軍之出代二千餘里, 與左賢王接戰, 漢兵得胡首虜凡七萬餘級, 左賢王將皆遁走. 驃騎封於狼居胥山, 禪姑衍, 臨翰海而還. 한나라 표기장군은 대현으로 2천여 리를 나가 좌현왕과 접전을 벌여 한나라 군사가 오랑캐를 참수하고 사로잡은 것이 모두 7만여 급이나 되었고 좌현왕의 장수들은 모두 도망쳐 달아났다. 표기장군은 낭거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고연산에서는 땅에 제사를 올린 후 한해까지 임하였다가 돌아왔다.
[41] 是後匈奴遠遁, 而幕南無王庭, 漢度河自朔方以西至令居, 往往通渠置田, 官吏卒五六萬人, 稍蠶食, 地接匈奴以北. 이 후로 흉노는 멀리 달아나 사막의 남쪽에서는 흉노의 정이 없어졌다. 한나라는 황하를 건너 삭방에서 서로 영거까지 곳곳에 도랑을 틔우고 둔전을 두어 관리와 사졸 5,6만 명이 조금씩 갉아먹어 땅이 흉노 이북과 맞닿게 되었다.
[42] 初, 漢兩將軍大出圍單于, 所殺虜八九萬, 而漢士卒物故亦數萬, 漢馬死者十餘萬. 匈奴雖病 , 遠去, 而漢亦馬少, 無以復往. 匈奴用趙信之計, 遣使於漢, 好辭請和親. 天子下其議, 或言和親, 或言遂臣之. 丞相長史任敞曰, 匈奴新破, 困, 宜可使爲外臣, 朝請於邊. 漢使任敞於單于. 單于聞敞計, 大怒, 留之不遣. 先是漢亦有所降匈奴使者, 單于亦輒留漢使相當. 漢方復收士馬, 會驃騎將軍去病死, 於是漢久不北擊胡. 처음에 한나라의 두 장군이 대대적으로 출병하여 선우를 에워싸고 죽인 오랑캐가 8,9만이었으나 한나라 군사 가운데 죽은 자도 또한 수만이었으며 죽은 한나라 말이 10여 만 마리였다. 흉노가 비록 다쳐 멀리 떠났지만 한나라 또한 말이 적어 더 이상 갈 방도가 없었다. 흉노는 조신의 계책을 써서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좋은 말로 화친을 청하였다. 천자가 논의에 부치니 혹자는 화친하자고 하고 혹자는 신하로 삼자고 하였다. 승상 장사 임창이 말하였다. “흉노는 막 격파되어 곤경에 처하였으니 외신으로 삼아 변경에서 조현을 하게 할 만합니다.” 한나라는 선우에게 임창을 사신으로 보냈다. 선우는 임창의 계책을 듣고 크게 노하여 붙잡아놓고 보내지 않았다. 이에 앞서 한나라도 항복한 흉노의 사자를 데리고 있었는데 선우도 문득 한나라 사자를 억류시켜 서로 맞불을 놓았다. 한나라가 바야흐로 다시 군사와 말을 거두어들일 무렵 마침 표기장군 곽거병이 죽어 이에 한나라는 오래도록 북으로 오랑캐를 치지 않았다.
[43] 數歲, 伊稚斜單于立十三年死, 子烏維立爲單于. 是歲, 漢元鼎三年也. 烏維單于立 , 而漢天子始出巡郡縣. 其後漢方南誅兩越, 不擊匈奴, 匈奴亦不侵入邊. 몇 년 만에 이치사선우가 재위 13년 만에 죽고 아들인 오유가 선우로 즉위하였다. 이 해는 한나라 원정 3년(B.C. 114)이었다. 오유선우가 즉위하자 한나라 천자는 비로소 나가 군현을 순행하였다. 그 후 한나라는 바야흐로 남으로 양월을 토벌하느라 흉노를 치지 않았는데 흉노 또한 변경을 침입하지 않았다.
[44] 烏維單于立三年, 漢已滅南越, 遣故太僕賀將萬五千騎出九原二千餘里, 至浮苴井而還, 不見匈奴一人. 漢又遣故從驃侯趙破奴萬餘騎出令居數千里, 至匈河水而還, 亦不見匈奴一人. 오유선우 즉위 3년에 한나라가 이미 남월을 멸하고 옛 태복 하를 보내어 만 오천 기를 거느리고 구원으로 2천 리를 나서 부저까지 이르렀다가 돌아왔는데 흉노는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한나라는 또 옛 종표후 조파노로 하여금 만여 기를 거느리고 영거로 수천 리를 나서 흉하수까지 이르렀다가 돌아오게 하였는데 또한 흉노를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다.
[45] 是時天子巡邊, 至朔方, 勒兵十八萬騎以見武節, 而使郭吉風告單于. 郭吉既至匈奴, 匈奴主客問所使, 郭吉禮卑言好, 曰, 吾見單于而口言. 單于見吉, 吉曰. 南越王頭已懸於漢北闕, 今單于即能前與漢戰, 天子自將兵待邊, 單于即不能, 即南面而臣於漢. 何徒遠走, 亡匿於幕北寒苦無水草之地? 毋爲也. 語卒而單于大怒, 立斬主客見者, 而留郭吉不歸, 遷之北海上. 而單于終不肯爲寇於漢邊, 休養息士馬, 習射獵, 數使使於漢, 好辭甘言求請和親. 이때 천자가 변경을 순행하였는데 삭방에 이르러 18만의 기병을 훈련시켜 무용을 보이고 곽길로 하여금 선우에게 은근히 알리게 하였다. 곽길이 흉노에 이르자 흉노의 주객이 사행의 목적을 물었는데 곽길은 예를 낮추어 좋은 소리로 말하였다. “내 선우를 만나 친히 말하겠습니다.” 선우가 곽길을 만나보자 곽길이 말하였다. “남월왕의 목이 이미 한나라 북궐에 걸려 있습니다. 지금 선우께서 진격하여 한나라와 싸울 수 있으면 천자께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변경에서 기다릴 것이며, 선우께서 싸울 수 없다면 곧 남면하여 한나라의 신하가 되십시오. 어찌 한갓 멀리 달아나 도망쳐 사막 북쪽의 매우 춥고 물과 풀도 없는 땅으로 숨습니까? 이렇게 하지 마십시오.” 말이 끝나자 선우는 크게 노하여 즉시 (곽길을) 접견한 주객을 참수하고 곽길을 억류시켜 돌려보내지 않고 북해의 위로 옮겨버렸다. 그리고 선우는 끝내 한나라의 변경을 침범하려하지 않고 군사와 말을 쉬게 하고 길렀으며 활쏘기와 사냥을 익히고 수차례나 한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감언이설로 화친을 청하였다.
[46] 漢使王烏等窺匈奴. 匈奴法, 漢使非去節而以墨黥其面者不得入穹廬. 王烏, 北地人, 習胡俗, 去其節, 黥面, 得入穹廬. 單于愛之, 詳許甘言, 爲遣其太子入漢爲質, 以求和親. 한나라는 왕오 등으로 하여금 흉노를 살피게 하였다. 흉노의 법에 한나라 사신은 부절을 몸에서 없애고 얼굴에 먹실을 넣은 자가 아니면 (선우의) 천막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왕오는 북지 사람으로 오랑캐의 풍속에 익숙하여 부절을 버리고 얼굴에 먹실을 넣어 천막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선우가 그를 좋아하여 허락하는 체하면서 달콤한 말로 그 태자를 한나라로 들여보내어 인질로 삼고 화친을 청하겠노라고 하였다.
[47] 漢使楊信於匈奴. 是時漢東拔穢貉朝鮮以爲郡, 而西置酒泉郡以鬲絕胡與羌通之路. 漢又西通月氏大夏, 又以公主妻烏孫王, 以分匈奴西方之援國. 又北益廣田至胘雷爲塞, 而匈奴終不敢以爲言. 是歲, 翕侯信死, 漢用事者以匈奴爲已弱, 可臣從也. 楊信爲人剛直屈彊, 素非貴臣, 單于不親. 單于欲召入, 不肯去節, 單于乃坐穹廬外見楊信. 楊信既見單于, 說曰, 即欲和親, 以單于太子爲質於漢. 單于曰, 非故約. 故約, 漢常遣翁主, 給繒絮食物有品, 以和親, 而匈奴亦不擾邊. 今乃欲反古, 令吾太子爲質, 無幾矣. 匈奴俗, 見漢使非中貴人, 其儒先, 以爲欲說, 折其辯, 其少年, 以爲欲刺, 折其氣. 每漢使入匈奴, 匈奴輒報償. 漢留匈奴使, 匈奴亦留漢使, 必得當乃肯止. 한나라는 양신을 흉노에 사신으로 보냈다. 이때 한나라는 동으로 예맥과 조선을 점령하여 군으로 하였으며 서로는 주천군을 두어 호와 강이 통하는 길을 끊었다. 한나라는 또 서로 월지, 대하와 교통하였고 또 공주를 오손왕의 아내로 시집보내어 흉노의 서쪽 원국을 떼어놓았다. 또한 북으로 영토를 더 넓혀 현뢰까지를 변경으로 삼았는데도 흉노는 끝내 감히 뭐라 말하지 못하였다. 이 해에 흡후 조신이 죽어 한나라의 집정자는 흉노가 이미 약하여져 신하로 복종시킬만하다고 생각하였다. 양신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뻣뻣하여 굽히지 않는데다가 애초에 대신이 아니어서 선우가 가까이 하지 않았다. 선우가 불러들이려고 하였는데 부절을 버리려 하지 않아 선우는 이에 천막 밖에 앉아서 양신을 만났다. 양신이 선우를 찾아보고 말하였다. “화친하시고자 한다면 선우의 태자를 한나라의 인질로 보내십시오.” 선우가 말하였다. “옛 조약이 아니오. 옛 조약에 한나라는 늘 옹주를 보내고 비단과 먹을 것을 일정량 보내어 화친을 하였고 그러면 흉노도 변경을 어지럽히지 않았소. 지금 곧 옛 조약과 반하여 우리 태자를 인질로 삼으려 하니 거의 가망이 없을 것이오.” 흉노의 풍속에 한나라의 사신이 왕이 총애하는 귀인이 아니고 유생이라면 유세하려는 것으로 여겨 그 말을 꺾었으며, 나이가 어렸으면 척살하려는 것으로 여겨 그 예기를 꺾었다. 한나라 사신이 흉노로 들어올 때마다 흉노는 번번이 보상하였다. 한나라가 흉노의 사자를 억류시키면 흉노도 한나라의 사신을 억류시켜 반드시 상응하는 행동을 하고서야 그만두었다.
[48] 楊信既歸, 漢使王烏, 而單于復讇以甘言, 欲多得漢財物, 紿謂王烏曰. 吾欲入漢見天子, 面相約爲兄弟. 王烏歸報漢, 漢爲單于築邸于長安. 匈奴曰, 非得漢貴人使, 吾不與誠語. 匈奴使其貴人至漢, 病, 漢予藥, 欲愈之, 不幸而死. 而漢使路充國佩二千石印綬往使, 因送其喪, 厚葬直數千金, 曰此漢貴人也. 單于以爲漢殺吾貴使者, 乃留路充國不歸. 諸所言者, 單于特空紿王烏, 殊無意入漢及遣太子來質. 於是匈奴數使奇兵侵犯邊. 漢乃拜郭昌爲拔胡將軍, 及浞野侯屯朔方以東, 備胡. 路充國留匈奴三歲, 單于死. 양신이 돌아오자 한나라는 왕오를 사신으로 보냈는데 선우는 다시 아첨을 하며 달콤한 말로 한나라의 재물을 많이 얻고자 하여 왕오를 속이어 말하였다. “내 한나라로 들어가 천자를 뵙고 대면하여 형제의 맹약을 맺고자 하오.” 왕오가 돌아와 한나라에 알리자 한나라는 장안에 흉노의 집을 만들어주었다. 흉노가 말하였다. “한나라가 귀인을 사신으로 보내지 않으면 내 진실된 말을 하지 않을 것이오.” 흉노는 그 귀인을 한나라에 이르게 하였는데 병이 들어 한나라에서 약을 써서 낫게 하고자 하였지만 불행히도 죽고 말았다. 한나라는 노충국에게 2천석의 인끈을 차고 사신으로 가게 하여 이에 운구를 호송하였는데 수천 금이 나가는 두터운 장례를 치러주고 “이는 한나라에서 귀인이다”라 하였다. 선우는 한나라가 자신의 귀한 사자를 죽였다고 생각하여 이에 노충국을 억류시켜 돌려보내지 않았다. 여러 가지 말한 것은 선우가 다만 빈말로 왕오를 속인 것이며 한나라로 들어가거나 태자를 인질로 보내올 뜻은 조금도 없었다. 이에 흉노는 여러 번이나 기병으로 하여금 국경을 침범케 하였다. 한나라는 이에 곽창을 발호장군에 임명하여 착야후와 함께 삭방 이동 지역에 주둔하게 하여 오랑캐에 대비하였다. 노충국이 흉노에 억류된 지 3년째 되던 해에 선우는 죽었다.
[49] 烏維單于立十歲而死, 子烏師廬立爲單于. 年少, 號爲兒單于. 是歲元封六年也. 自此之後, 單于益西北, 左方兵直雲中, 右方直酒泉燉煌郡. 오유선우는 재위 10년 만에 죽었으며 아들인 오사려가 선우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려서 아선우로 불렸다. 이 해는 원봉 6년(B.C. 105)이었다. 이 이후로 선우는 더욱 서북쪽으로 가서 왼쪽의 군사는 운중과 대치하였고 오른쪽은 주천, 돈황군과 대치하였다.
[50] 兒單于立, 漢使兩使者, 一弔單于, 一弔右賢王, 欲以乖其國. 使者入匈奴 , 匈奴悉將致單于, 單于怒而盡留漢使. 漢使留匈奴者前後十餘輩, 而匈奴使來, 漢亦輒留相當. 아선우가 즉위하자 한나라는 사자 둘을 보냈는데 하나는 선우를 조문하고 하나는 우현왕을 조문하여 그 나라를 괴리시키려 하였다. 사자가 흉노에 들어가자 흉노는 모도 선우에게 데려갔다. 선우는 노하여 한나라 사자를 모두 억류시켰다. 한나라가 흉노에 억류된 것이 전후로 10여 무리였는데 흉노가 사자를 보내오면 한나라도 바로 억류시켜 맞불을 놓았다.
[51] 是歲, 漢使貳師將軍廣利西伐大宛, 而令因杅將軍敖築受降城. 其冬, 匈奴大雨雪, 畜多飢寒死. 兒單于年少, 好殺伐, 國人多不安. 左大都尉欲殺單于, 使人閒告漢曰, 我欲殺單于降漢, 漢遠, 即兵來迎我, 我即發. 初, 漢聞此言, 故築受降城, 猶以爲遠. 이 해에 한나라는 이사장군 이광리로 하여금 서로 대원을 치게 하고 인우장군 공손오로 하여금 수항성을 쌓게 하였다. 그 해 겨울에 흉노에 눈이 크게 내려 가축들이 많이 굶주리고 추워서 죽었다. 아선우는 나이가 어려 살육을 좋아하여 백성들이 많이 불안해하였다. 좌대도위가 선우를 죽이고자 하여 사람을 시켜 물래 한나라에 알리게 하였다. “내 선우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하려는데 한나라가 머니 군사를 보내와 나를 맞아주면 내 바로 떠날 것이오.” 처음에 한나라는 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수항성을 쌓았지만 그래도 멀다고 생각하였다.
[52] 其明年春, 漢使浞野侯破奴將二萬餘騎出朔方西北二千餘里, 期至浚稽山而還. 浞野侯既至期而還, 左大都尉欲發而覺, 單于誅之, 發左方兵擊浞野. 浞野侯行捕首虜得數千人. 還, 未至受降城四百里, 匈奴兵八萬騎圍之. 浞野侯夜自出求水, 匈奴閒捕, 生得浞野侯, 因急擊其軍. 軍中郭縱爲護, 維王爲渠, 相與謀曰, 及諸校尉畏亡將軍而誅之, 莫相勸歸. 軍遂沒於匈奴. 匈奴兒單于大喜, 遂遣奇兵攻受降城. 不能下, 乃寇入邊而去. 其明年, 單于欲自攻受降城, 未至, 病死. 그 이듬해 봄에 한나라는 착야후 파노로 하여금 2만여 기를 거느리고 삭방 서북쪽으로 2천여 리를 나가 준계산까지 이르렀다가 돌아오게 하였다. 착야후가 이미 기약한대로 이르렀다가 돌아왔는데 좌대도위는 출발하려던 차에 발각되어 선우가 그를 죽이고 좌방병을 보내어 착야를 쳤다. 착야후는 행군하면서 수천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돌아오다가 수항성에서 4백 리가 못 미치는 곳에서 흉노의 군사 8만 기가 그를 에워쌌다. 착야후는 밤에 직접 물을 찾으러 나섰는데 흉노의 척후병이 착야후를 사로잡고 곧장 급히 그 군사를 들이쳤다. 군중에서는 곽중이 호군이었고 유왕이 거솔이었는데 서로 상의하여 말하였다. “여러 교위들이 장군을 잃으면 죽임을 당할 까 두려워하여아무도 돌아갈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전군이 마침내 흉노에게 항복하였다. 흉노의 아선우는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기병을 보내어 수항성을 공격하였다. 함락시킬 수 없자 이에 변경을 침입하였다가 떠났다. 그 이듬해에 선우는 직접 공격하여 성의 항복을 받아내려 하였는데 채 이르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53] 兒單于立三歲而死. 子年少, 匈奴乃立其季父烏維單于弟右賢王呴犁湖爲單于. 是歲太初三年也. 아선우는 재위 3년 만에 죽었다. 아들이 나이가 어려 흉노는 이에 그 계부인 오유선우의 아우 우현왕 구리호를 선우로 세웠다. 이 해가 태초 3년(B.C. 102)이었다.
[54] 呴犁湖單于立, 漢使光祿徐自爲出五原塞數百里, 遠者千餘里, 築城鄣列亭至廬朐, 而使游擊將軍韓說長平侯衛伉屯其旁, 使彊弩都尉路博德築居延澤上. 구리호선우가 즉위하자 한나라는 광록대부 서자위를 오원새로 수백 리 내보냈는데 멀리는 천여 리까지 이르렀으며 작은 산성과 여러 초소를 쌓아 여구에까지 이르렀으며 유격장군 한열과 장평후 위항으로 하여금 그 곁에 주둔하게 하였고 강로도위 노박덕에게는 거연택 가에 성을 쌓게 하였다.
[55] 其秋, 匈奴大入定襄雲中, 殺略數千人, 敗數二千石而去, 行破壞光祿所築城列亭鄣. 又使右賢王入酒泉張掖, 略數千人. 會任文擊救, 盡復失所得而去. 是歲, 貳師將軍破大宛, 斬其王而還, 匈奴欲遮之, 不能至. 其冬, 欲攻受降城, 會單于病死. 그 해 가을에 흉노가 정양과 운중으로 대대적으로 쳐들어와 수천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으며 여러 2천석의 고을을 패퇴시키고 떠났는데 가는 길에 광록대부가 쌓은 작은 산성과 초소를 무너뜨렸다. 또한 우현왕으로 하여금 주천과 장액으로 쳐들어가게 하여 수천 명을 약탈하였다. 마침 임문이 격퇴하고 구원하여 얻은 것을 모두 다시 잃고 떠났다. 이 해에 이사장군이 대원을 깨뜨려 그 왕을 참수하고 돌아왔다. 흉노는 차단하려고 하였지만 이를 수 없었다. 그 해 겨울 수항성을 공격하고자 하였는데 마침 선우가 죽고 말았다.
[56] 呴犁湖單于立一歲死. 匈奴乃立其弟左大都尉且鞮侯爲單于. 漢既誅大宛, 威震外國. 天子意欲遂困胡, 乃下詔曰. 高皇帝遺朕平城之憂, 高后時單于書絕悖逆. 昔齊襄公復九世之讎, 春秋大之. 是歲太初四年也. 이 해가 태초 4년(B.C. 101)이다. 구리호선우는 재위 1년 만에 죽었다. 흉노는 이에 그 아우인 좌대도위 저제후를 선우로 세웠다. 한나라가 대원을 토벌하자 위세가 국외에 떨쳤다. 천자는 마침내 오랑캐를 곤경에 빠뜨리고자 하여 이에 명을 내려 말하였다. “고황제는 짐에게 평성의 근심을 남기셨고 고후 때는 선우의 편지가 매우 도리에 어긋났다. 옛날에 제양공은 구세의 원수를 갚아 《춘추》에서는 이를 칭찬하였도다.” 이 해가 태초 4년(B.C. 101)이다.
[57] 且鞮侯單于既立, 盡歸漢使之不降者. 路充國等得歸. 單于初立, 恐漢襲之, 乃自謂我兒子, 安敢望漢天子! 漢天子, 我丈人行也. 漢遣中郎將蘇武厚幣賂遺單于. 單于益驕, 禮甚倨, 非漢所望也. 其明年, 浞野侯破奴得亡歸漢. 저제후선우가 즉위하자 항복하지 않은 한나라 사신을 모두 돌려보냈다. 노충국 등이 돌아오게 되었다. 선우는 갓 즉위하여 한나라가 기습할까 두려워하여 이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는 아이이니 어찌 감히 한나라의 천자를 바라겠는가! 한나라의 천자는 나의 어른 항렬이다」라 하였다. 한나라는 중랑장 소무를 보내어 선우에게 예물을 두터이 주었다. 선우는 더욱 교만해지고 예가 매우 교만하여졌으니 한나라가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 이듬해에 착야후가 흉노를 격파하여 도망쳐 한나라로 돌아오게 하였다.
[58] 其明年, 漢使貳師將軍廣利以三萬騎出酒泉, 擊右賢王於天山, 得胡首虜萬餘級而還. 匈奴大圍貳師將軍, 幾不脫. 漢兵物故什六七. 漢復使因杅將軍敖出西河, 與彊弩都尉會涿涂山, 毋所得. 又使騎都尉李陵將步騎五千人, 出居延北千餘里, 與單于會, 合戰, 陵所殺傷萬餘人, 兵及食盡, 欲解歸, 匈奴圍陵, 陵降匈奴, 其兵遂沒, 得還者四百人. 單于乃貴陵, 以其女妻之. 그 이듬해에 한나라는 이사장군 이광리로 하여금 3만 기로 주천을 나서 천산에서 우현왕을 치게 하였는데 오랑캐의 수급 만여 개를 얻어 돌아왔다. 흉노는 이사장군을 크게 에워싸 거의 벗어나지 못하였다. 한나라 군사는 10에 6,7은 죽었다. 한나라는 다시 인우장군 공손오를 서하로 나가게 하여 탁야산에서 강노도위와 만났는데 얻은 것이 없었다. 또한 기도위 이릉으로 하여금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거연의 북쪽으로 천여 리를 나가게 하여 선우와 만나 교전을 벌였는데 이릉이 살상한 흉노는 1만여 명이었으나 군사와 식량이 다 떨어져 해산하여 돌아가게 하려 하였지만 흉노가 이릉을 에워싸 이릉은 흉노에 항복하고 그 군사는 마침내 전멸하여 돌아올 수 있었던 자는 4백 명이었다. 선우는 이에 이릉을 귀하게 여겨 그 딸을 (시집보내어) 이릉의 아내로 삼았다.
[59] 後二歲, 復使貳師將軍將六萬騎, 步兵十萬, 出朔方. 彊弩都尉路博德將萬餘人, 與貳師會. 游擊將軍說將步騎三萬人, 出五原. 因杅將軍敖將萬騎步兵三萬人, 出鴈門. 匈奴聞, 悉遠其累重於余吾水北, 而單于以十萬騎待水南, 與貳師將軍接戰. 貳師乃解而引歸, 與單于連戰十餘日. 貳師聞其家以巫蠱族滅, 因并眾降匈奴, 得來還千人一兩人耳. 游擊說無所得. 因杅敖與左賢王戰, 不利, 引歸. 是歲漢兵之出擊匈奴者不得言功多少, 功不得御. 有詔捕太醫令隨但, 言貳師將軍家室族滅, 使廣利得降匈奴. 2년 뒤 다시 이사장군에게 기병 6만과 보병 10만을 거느리게 하여 삭방을 나서게 하였다. 강노도위 노박덕은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이사장군과 만났다. 유격장군 한열은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오원을 나섰다. 인오장군 공손오는 만 기와 보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안문을 나섰다. 흉노는 듣고 그 가솔과 자산을 모두 여오수 북쪽으로 옮기고 선우는 10만 기를 가지고 여오수 남쪽에서 기다리다가 이사장군과 교전하였다. 이사장군은 이에 해산시켜 끌고 돌아오면서 선우와 연이어 10여 일을 싸웠다. 이사장군은 그 가족이 무고로 멸족당하였다는 말을 듣고 이에 무리와 함께 흉노에 항복하였으며 귀환할 수 있었던 사람은 천 명 중 한둘일 따름이었다. 유격장군 한열은 성과가 없었다. 인우장군 공손오는 좌현왕과 교전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이 해에 흉노를 치려고 나간 한나라 군사는 공의 많고 적음을 이야기할 수 없었는데 공이 (실에) 상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조칙으로 태의령 수단을 체포하였는데 이사장군의 일가족을 멸족하도록 말하여 이광리가 흉노에 항복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60] 太史公曰:孔氏著春秋, 隱桓之閒則章, 至定哀之際則微, 爲其切當世之文而罔褒, 忌諱之辭也. 世俗之言匈奴者, 患其徼一時之權, 而務讇納其說, 以便偏指, 不參彼己;將率席中國廣大, 氣奮, 人主因以決策, 是以建功不深. 堯雖賢, 興事業不成, 得禹而九州寧. 且欲興聖統, 唯在擇任將相哉! 唯在擇任將相哉! 태사공은 말한다. 공자가 《춘추》를 지을 때 은공과 환공 사이는 (기록이) 분명한데 정공과 애공 사이에는 간략하였으니 당세에 가까운 문장이라 기릴 수 없어서 기휘한 말이기 때문이다. 세속에서 흉노를 말하는 자들은 한때의 권세를 구하는 것만 근심하여 그 말을 아첨하여 받아들이는 데만 힘쓰느라 편한 대로 한쪽만 가리켜 피아를 고려하지 않았으며, 장수들은 중국이 광대한 것만 믿고 기세를 떨쳤으며 임금은 그대로 정책을 결정하여 이 때문에 공을 세움이 깊지 않았다. 요임금은 비록 현명하였지만 사업을 흥기시켜 이루지 못하였는데 우를 얻어 구주가 편안해졌다. 또한 제왕의 실마리를 흥기시키고자 하는 것은 오직 장수와 재상을 택하여 임명하는 데 있도다! 오직 장수와 재상을 택하여 임명하는 데 있도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선생님.
대단한 자료입니다.
감사합니다~
조만간 대역본으로 출간할 예정으로 있습니다. 그때 많이 사랑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