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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여행본부 산들여행지회(야등팀) |
1.산 행 지 : 문학산 |
2.산행 일자 : 수요일 오후 7시 00분 |
3.만남 장소 : 선학역 4번출구 앞 |
4.산행 코스 : 길마산 > 삼호현 > 연경산(팔각정) 역순 선학역 |
5.산행 시간 : 초급산행(2시간 소요) |
6.준비물 : 랜턴, 행동식, 식수, 기타 |
7.회 비 : 1,000원(사랑나눔회 후원하기) 뒷풀이는 없음(원할시엔 더치플레이) 사랑나눔 성금모금통장 (기업은행 032-1994-0303 한국사랑나눔회) |
야등 대장 : 해오라 ☏ 010-8349-9673 |
9.산행 지도 |
10.산행지소개 문학산은 인천도호부의 남쪽에 있다하여 남산, 학의 모습과 같다하여 학산 산꼭대기에 봉수대가 있어 봉화둑산이라고 불려왔으며 성산, 배꼽산등의 명칭을 갖고 있는 산이다.문학산은 길마산, 수리봉, 문학산정상, 연경산, 서달산 등이 동에서 서쪽으로 길게 이어져 산맥을 이루고 있어 우리고장 연수구의 지붕이라고 일컬을수 있는 산이다.
문학산(232m)은 이미 기원전부터 우리 역사속에 등장하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건국설화에 비류가 미추홀에 도읍했다는 사실이 전해져오고 있는데 여지도서(與地圖書) 인천도호부 고적조에는 '문학산 정상은 미추왕(비류)의 고도(古都)라 하였고 안정복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문학산위에는 비류의 성기(沸流成基)가 있고 성문의 비판이 아직도 남아있으며 성내에는 비류가 파놓은 우물이 남아있다'고 서술하면서 '동국여지승람에 그것을 기록하지 않은 것을 개탄한다'고 아쉬워했다.
<세종대왕실록>에도 '인천에 성이 있어 이곳을 미추홀고성 혹은 남산고성이라고 불렀는데 성내엔 작은 샘도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렇듯 문학산은 비류백제와 함께해온 인천지역의 성스러운 산이다. 문학산 정상에 처음 비류가 쌓았던 성은 여러차례 보강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1592년 임진왜란때 인천부사 김민선이 성을 수리하여 사민을 거느리고 왜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당시 왜군들은 문학산성 동문밖 1백여보 되는곳에 주둔했는데 수리봉 부근에는 왜적들이 쌓았다는 왜성터의 흔적이 남아있다. 현재 문학산성은 약220m정도가 남아있어 인천광역시 기념물 1호로 지정돼있다. 문학산 정상에는 김민선장군의 영혼을 기리는 사당인 안관당이 있었다. 인천도호부 주변마을 사람들은 매년 두번씩 제사를 올렸으며 일제시대때 안관당이 불타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안관당제를 유지시켜왔으나 문학산 정상에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그 명맥이 끊기고 말았다. |
한국여행사진작가협회 산하 한국사랑나눔회는 봉사활동 단체입니다 회원님들의 성금으로 이루어지며 특히 정기행사를 제외한 모든 행사시에 참석자 1명당 1,000원의 성금을 모아 사랑나눔행사를 진행합니다. 한국사랑나눔회 성금을 기탁하실분은 아래 통장으로 성금을 보내주시면 소중하게 사용하겠습니다. 그동안 소년소녀가장돕기행사, 후원금 전달, 장수사진봉사, 소외계층사진봉사/농촌일손돕기 등 사랑나눔행사를 진행해 왔습니다 많은 협조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사랑나눔회 전용통장 기업은행 032-1994-0303 한국사랑나눔회 한국여행사진작가협회 사랑나눔회 회장 |
학산서원터 | 학산서원은 인천 유일의 사액 서원으로 1708년(숙종 34) 창건 이래 1871년(고종 8)에 단행된 서원정리에 따라 훼철되어 터만이 남게 되었다. 지금은 문학산 터널공사로 인해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고, 인천시립박물관의 협조를 얻어 추정지로 예상되는 자리의 서측편인 현재의 위치에 ‘학산서원터’라는 표지석을 설치하였다. | |
갑옷바위 | 옛날 어떤 장군이 인천에 난리가 나면 이곳을 구원해 준다고 하며 이곳 바위 밑에 갑옷과 투구를 숨겨놓았는데, 금기로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곳의 안관당을 지키는 당지기(일명 무당)는 호기심에 그 바위 안에 숨겨놓은 장군의 갑옷을 확인하려 했고, 바위를 깨뜨리기 위해 몰래 도끼로 바위를 내리치는 순간 그만 벼락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바위의 중간이 깨져버리면서 갑옷도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 |
술바위 | 옛날 이 바위에는 신기하게도 술이 나왔다고 전한다. 지나가는 길손이 사모지 고개에 접어들어 쉬어 갈 때 바위에서 여인이 나와 술 석 잔을 권하고 들어갔다고 한다. 이때 술 맛이 기가 막히게 좋았지만 딱 석 잔만 마실 수 있었다. 어느 날 이 근처를 지나던 중이 술 석 잔을 비우고 욕심을 부려 더 마시려 하자 여인은 사라지고 그 이후로 다시는 술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 |
삼호현 | 4세기경 백제에서 중국으로 출항하는 배를 댄 곳이 연수구에 위치한 한나루(능허대)였고 문학산 사모지고개(삼호현)는 그곳으로 가는 주요 교통로였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을 배웅하는 가족들이 ‘잘다녀오시오’ 세 번 인사하며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하여 삼호현이라 했는데 이후 사모지 고개로 바뀌었다고 한다. | |
문학산성 | 문학산 정상부분에 있는 돌로 만든 산성으로, ‘미추홀 고성’, ‘남산성’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동사강목』과『여지도서』에 의하면 문학산은 백제 미추왕의 도읍지로 돌로 만든 산성의 터가 있고, 성안에 비류정이라는 우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상의 봉우리를 돌로 둘러싸며 성벽을 두른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내성이 100m, 외성이 200m로 성 안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현재는 정상부에 군부대가 들어서고, 대부분의 성벽이 붕괴되어 그 모습을 모두 볼 수는 없으나, 일부 구간은 등산객의 안전과 원형보존을 위해 보수해 놓았다. | |
길마산 전망대 | 문학산 다섯 봉우리 중 길마산에 있는 전망대로 문학경기장, 인천향교, 인천도호부청사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 |
산신우물 | 이 우물을 '산신(産神) 우물'이라고 하는데, 우물에 대해서 예로부터 전해 오는 전설이 있다. 즉, 이 우물에 가서 치성을 하면 태기가 없던 사람도 아기를 얻게 되므로 사람들이 '산신 우물'이라 일컬어 왔던 것이다. | |
인천도호부청사 | 인천에 도호부가 설치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초기 학자이자 명신(名臣)인 강희맹(姜希孟)이 쓴 (인천부) ‘승호기(陞號記)’에 1424년 이미 객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최소한 그 이전에 도호부가 설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인천도호부에는 부사의 집무처인 동헌(東軒), 내동헌(內東軒) 등 15~16동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는 현재는 문학초등학교 교정에 객사와 동헌 일부만 보존되어 있다. 현재의 위치에 재현한 건물들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화도진도(花島鎭圖)』를 근거로 객사, 동헌, 공수 등 7동의 건물을 복원한 것이다. | |
인천향교 | 인천향교는 『신증동국여지승』에 최항(1409~1474)의 향교) 중수기(重修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세조대 이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향교의 주요 건물로는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와 중국 성현의 위패를 모신 동·서무, 교육생들의 강당인 명륜당, 유생들의 처소인 동·서재 등이 있다. 병자호란 때 인천향교는 불타 없어지고 위패만 간신히 모시다가 숙종 27년(1702년)에 지금의 향교모습으로 다시 지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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