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세계의 문학》 신인상 당선작
라의 경우 / 안미린
복제되고 다음 날 같다
가가 다에게 고백을 했다
전생에 나는 너를 잡아먹은 적이 있어
나는 외계인이 아니었어?
아니었어
아니었어?
어른이었어,
여자애라면 머리를 돌돌 말아 고정시켰지
노을과 환타가 동시에 쏟아졌을 때 가는 울었어,
다가 나에게 고백을 했다
강제적인 첫 경험들 말야
목이 부러진 인형에 얼굴을 붙여 주는 시간
내와 네의 발음을 구분하는 숙제
색연필을 쏟은 와락 같은 거
색깔이 덜 마른 벽에 대한 불안 같은 거?
옷핀의 구조 같은 거
셀 수 있는 모서리
잔디로 결정된 풀들의 길이
여름의 정글짐
겨울의 정글짐
물을 먹지 않고 마시는 감각과
씨앗 근처의 눈부신 맛
팔을 벌려 납작해지며 벽을 안아 봤던 날
나도 몰래 홀수로 얼음이 얼고
무수해졌어
자기 이외의 생명?
자기 이외의 생명,
메롱하는 것
나는 라에게 거짓말을 했다
네 키와 같은 사람은 거리에 가까워
너와 마주 댄 등은 깊이에 가까워
라는 흔들릴 만큼 웃었다
나는 제외될 만큼 웃었다
꽉 쥔 주먹만 들어가는 장갑이 일곱 개 완성되었다.
흐린 기린 / 안미린
잠시 진화가 멈췄다
얼굴에 남겨진 코를 눌러 봤다
돼지 코가 되었지만 웃지는 않아
동물원이 무너져서 다행이다
동물원이 사라져서 안타까워
어째서일까 아무도 기린을 훔치지 않아
방을 지어 올린다면 방의 가능성
얼룩을 따라 살살 자라날 얼룩이들
천장이 동물원이 될 텐데
천장을 만질 수 있는 건 여전히 강제적인 것과
그 색이 싫어서 불어 터뜨린 풍선
옛날 기린들이 기어올 텐데
흰 색소의 솜사탕을 물고 흐려지면서
다르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가까운 동물원에서
가까운 너희 집으로
멀리서 보면 아름다워서 아무도 몰라보겠지
안녕 안녕 손을 흔들면 내 팔이 아니었다고 내가 흔드는 지진
진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기린 없는 높이로 방의 전등을 갈고
나는 완전한 키가 될 거야
너는 조금씩 네가 될 거야
기린들이 전부 진화했을 때
목은 무늬였다니
우산의 안 / 안미린
깨끗하게 잘린 샴쌍둥이가 가볍게 다툰 후
거울을 반으로 가른다
다른 나라와 틀린 나라 사이로
눈이나 새가 내린다
왼쪽의 아이가 팔을 박박 긁으면
오른쪽의 아이가 잃은 팔에 놀라 알약을 토해 낸다
흔한 종교들은 여름에만 믿고
왼쪽의 아이가 좀 더 건강해진다
일기장은 어쩌지?
오른쪽을 잘라 내며 오른쪽의 아이가
~척하는 습관을 들여야 해
등을 넓게 계산한 스웨터를 뭉치면
둥근 무기들이 감춰질 거야
멀리 피가 묻은 건?
삭제될 거야, 서로의 소매에서 한 명처럼 기도한다면
지도 같은 손금을 겹쳐 미지근한 차원을 만든다면
우리가 악수한다면?
지도 같은 손금을 겹쳐 푸른 미로를 만든다면?
머리와 어깨를 부드럽게 끼워 맞추고 깔깔 웃는 왼쪽
우리는 올 풀리는 시간과
리본을 묶어 주는 기계
녹스는 손톱들을 조심해야 해
겉과 끝의 우산살들
아이의 오른쪽이 시험 삼은 우산을 착 접으면서
멀리의 감각 / 안미린
그 순간 사진을 찍었어야 했는데
너희 집 변기가 무릎부터 뼈가 되는 장면
잘린 나무와 나무 밑동이 동시에 의자가 되었지만
모두가 의자에 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모두가 의자에 앉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의자의 그림자가 사람의 뒷면에 가까워졌다
식탁 의자들은 떼를 지으며 발랄해졌고
흔들의자의 곡선은 안쪽으로 휜 종아리를 달달 외웠지
그네는 의심스러울 만큼 견고했지만
오늘도 세계를 부드럽게 밀어 올렸지만
줄을 잡았던 손바닥에선 철철 흐르는 피 냄새가 났다
끊기는
무너지는
쏟아지는
가라앉는
착지한 순간
반투명 / 안미린
스무 살의 신이 있다
거울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결과물
갓난애 눈물을 굳혀 만든 양초를 잃어버렸어
꿈속의 나와 꿈 밖의 내가 동시에 울기로 한다
눕혀진 거울을 세우던 최초의 시간
한번쯤 울어 보려고 퇴화하는 마지막 감정
나는 꿈 밖의 내게 이름 불렀지
나 자신을 전부 만져 봤던 감각을 기억해?
입에 넣어 봤던 꼬리의 길이를 가늠해?
투명의 반대말이 뭐게?
스무 살의 신이 있어
빛으로 빛을 비추는 짓 한다
그림자가 검정색 인형에게 이름을 줬다 빼앗았을 때
눈물처럼 눈알이 떨어졌을 때
다음은 네 차례야
충분해진 촛불을 끄고
케이크에 얼굴을 푹 박아 줄 차례
안미린 시인
1980년 서울 출생. 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당선소감]
어쩌다 오물이 묻으면 두 번 반 절하고 싶던 시집들, 다시 읽고 싶어서 잊고 싶던 시들, 시가 좋았지만 저 자신이 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외계인의 가능성을 흠모하지만, 외계인의 피부를 가질 수는 없듯이 말이에요. 밤중에 소식을 들었습니다. 스스스 일어나 묘지로 향했습니다. 맨손으로 비석에 쌓인 밤 먼지를 털어 냈습니다. 12시였으니까 그들 중 두 명쯤 부스스 일어나 스르르 축하해 주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지금 여기는 미국이지만, 언어를 배우기보다 어떻게 하면 계속 모를 수 있을까 골몰해 왔습니다. 모르는 언어란, 알아듣지 못한다는 묘한 안도감이란, 오래도록 앓고 있던 이명을 마침내 잠재워 주었으니까요. 이 시들은 겨우 고요한 시간, 오전의 생생한 묘지에서 쓰인 것입니다. 혼잣말을 해도 손끝은 언제나 따뜻했습니다. 없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살아 있었어도, 우리가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묘지의 외국인들에게 고맙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에겐 살아 있으므로 한 명 한 명 만나서 감사를 드릴게요.
계속 시를 쓰겠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매끄러운 사람이 되겠습니다. 계속계속 시를 쓰겠습니다. 외계인의 완성된 눈망울을 가질게요.
[심사평]
"안미린의 시들은 자유로운 어법 그 자체였다. 과감하게 생략하고 비약하고 가로질렀다. 말맛이 탱글탱글 살아 있었다. 시선은 다이내믹하게 줌인과 줌아웃을 했다. 그럼에도 행간에 계절의 지나감과 경험했던 감각들의 애틋함이 다소곳이 숨겨져 있었다. 언어로는 힘주지 않아 경쾌했고 감수성에는 깊이가 있어 묵직했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구절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풀처럼 심어 두곤 했다. 신뢰감 이상을 맛보았달까. 이런 신인이 이제 새로이 시인의 세계에 진입하여 우리의 동료가 된다는 사실에 설렜다."
―심사위원 김소연 시인 심사평 중
심사위원 : 김소연・김수이・김행숙
[심사 경위]
올해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향한 응모자들의 뜨거운 열의와 성원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해를 거듭할수록 응모작의 수가 급증하여 《세계의 문학》 편집진들은 그 양적, 질적 성장으로 인해 어느 때보다 큰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심사에 임했다. 2012년 제6회 <세계의 문학 신인상〉 시 부문에는 275명의 응모자가 2967편의 작품을, 소설 부문에는 350명의 응모자가 786편의 작품을, 평론 부문에는 5명의 응모자가 10편의 작품을 투고하였다. 심사 진행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예심과 본심위원의 특별한 구분 없이, 심사위원들의 1차 독회를 거쳐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을 다시 교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응모 편수가 적은 평론 부문은 바로 본심으로 넘겼다. 소설 본심은 2월 6일, 시 본심은 8일, 그리고 평론 본심은 14일에 민음사 회의실에서 진행하였다.
예심을 통과하여 본심에 오른 작품 / 시 부문
김 선_ 「우리들의 회의」 외 9편
김해선_ 「꼽추」 외 9편
박수지_ 「개의 날」 외 10편
안미린_ 「라의 경우」 외 9편
이경진_ 「수사반장」 외 9편
이상협_ 「사진 감광사」 외 9편
임지은_ 「토요일의 지느러미」 외 9편
임 현_ 「벌레들」 외 9편
정 순_ 「참새」 외 9편
조다희_ 「뒤뜰에 뱉어 놓은 신드롬들의 악상」 외 14편
최형욱_ 「연주가 시작되려는 순간」 외 9편
한인준_ 「게스트 하우스」 외 9편
—《세계의 문학》2012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