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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일 : 2024년 9월 5일
39번째 성지순례는 1.천진암 성지 입니다.
순례를 떠나면서 바치는 기도
† 자비로운신 주님
약속의 땅을 향하여 떠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친척 엘리사벳을 돕기 위하여 길을 나선
겸손 과 순명의 여인 마리아의 발걸음을 인도하셨듯이
지금 길을 떠나는 저희 가족(신 다빗, 김 소화데레사, 신 미카엘)을 돌보시고
안전하게 지켜주시어
목적지까지 잘 도착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또한 주님께서 언제나 저희(신 다빗, 김 소화데레사, 신 미카엘)와
함께 계심을 깨닫게 하시고
길에서 얻는 기쁨과 어려움을 이웃과 함께 나누게 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믿음, 사랑의 생활로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나이다.
아멘.
" 한국 천주교 신앙의 싹이 튼 곳 "
천진암 성지
[수원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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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암 강학당지
강학당터에서 조금 더 올라갑니다.
강학당에서 쓰시던 샘물,
맛있다! 시원하다!
올라오느라 비도오고 습해서 더워서 그랬나? ㅎㅎ
한국천주교회 창립 선조 5위 묘원 오르는 계단
한국천주교회 창립 선조 5위 묘원
선암(選菴)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1760-1801년)
정약종 성현은 조선 왕조 후기에 속하는 시대인 1760년에 서울에 인접한 경기도 광주군 마재(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 마재)에서 진주목사였던 정재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갑술옥 사건(1694) 이후로 관직에서 물러나 정계를 떠나기 시작한 양반 계층인 남인의 계보 속에서 성장하였다. 남인파의 실권은 정약종 성현과 형제들로 하여금 학구생활에 전념할 수 있게 하였고, 결과적으로, 이 가정은 당대로 저명한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성현의 형인 정약전 선생 (1758-1816)과 동생인 정약용 선생(1762-1836)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학자들이었다. 특히 정약용 선생은 학문 연구 생활 중에 천주교 교리를 배웠고, 입교하여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한국 지성사에 있어서 손꼽히는 인물로서 다방면으로 자신의 많은 저서들을 통해서 새로운 사상을 내놓아 오늘날까지도 학계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정약종 성현은 강직한 성품과 함께 뛰어난 통찰력과 꾸준한 탐구력을 지닌 청소년으로서, 시문과 경서에 능통하여 당시의 양반 자제들처럼 과거에 응시, 급제하여 관계에 진출할 수도 있었지만, 이를 포기하고 학문연구에만 몰두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우선 성현은 유교 철학의 주자학과 노장(노자와 장자)의 도가 사상에 심취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주자학이 지나치게 공리공론에 치우쳤고, 도가가 허무맹랑한 사상임을 깨닫고 반발하기에 이르렀다.
때마침 조선 왕조에는 학자들이 부연사들을 통해서 17세기부터 서양문물과 함께 도입된 한역 천주교 서적들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인척 관계를 맺고 있던 남인계통의 신진학자들은 '천진암'이라는 절에 모여, 그들이 탐구한 '천주학'(천주교 교리)의 새롭고도 이질적 종교 사상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전개하면서, '천주학'이라는 학문을 수용하여 '천주교'라는 종교로서 그 신앙을 실천하기에 이르렀다. 19세의 정약종 선생도 위에서 언급한 그의 두 형제들과 함께 '강학회'라고 불리는 이 모임에 참여하여, 교리연구와 함께 녹암 권철신 성현이 정한 규칙적 기도와 묵상의 공동생활에 참가하였다.
정약종 성현은 매우 신중한 청년이었기 때문에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온 이승훈 베드로 성현이 강학회 회원들에게 세례를 주었을 때에 입교를 서둘지 않았다. 그는 좀 더 많은 교리서들을 탐독하면서 신앙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 후에 1786년에 이르러서야 세례를 받았고, 영세 때에 자신의 입교에 있어 망설이던 태도가 성 아우구스티노(354-430)의 회심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여, 이 위대한 성인을 영세 주보로 모셨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성현은 입교한 후로는 경건한 종교인으로서 독실하게 천주교를 신봉하였다. 1791년에 일어난 '신해박해' 때에 많은 친지들이 교회를 떠나고, 가족들이 천주교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약종 성현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천주교를 헐뜯고 신봉을 엄금하였지만 성현은 이러한 문중 박해를 항구한 인내심을 갖고 참아 받으면서, 어버이를 공경하는 마음을 끝까지 간직하여 실천한 동시에 신앙인의 본분도 충실하게 완수하였다. 더 나아가서 자녀들에게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을 심어주어, 훗날에 두 아들은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정약종 성현은 항상 많은 교회서적들을 정독하면서 진지하게 천주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 전념하였다. 당시에 성현과 절친한 사이였던 황사영 선생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정 아우구스티노는 무엇에나 자상하고 세밀하였다. 그는 여러 해를 두고 깊이 학문을 연구한 것이 아주 습관과 성품이 되어 버렸다. 조그마한 교리 한 가지라도 분명하지 않다고 생각될 때에는 침식을 잊고 전심전력하여 그것을 생각함으로 반드시 확실하게 깨닫고야 말았다. 말을 타고 가거나, 배를 타고 있거나, 언제나 묵상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혹시 자기가 통달하지 못하였던 어떤 어려운 점을 누가 풀어주면 마음에 기쁨이 넘쳐흘러 그에게 뜨겁게 감사하였다." 또한 정약종 성현은 자신의 해박한 교리 지식을 갖고서 신자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신앙생활을 격려하면서 돌보아 주었다. 성현께서는 세속사정을 말하는 데에는 어둡고 서툴렀으나 종교적 진리를 연구하여 강론하기를 즐거워하였다. 황사영의 증언에 의하면, "그치고 타일러서, 혀가 굳고 아프게까지 되어도, 조금도 싫증내는 기색이 없었다. 아무리 우둔한 사람이라도 깨닫지 못하는 이가 없었다. 정 아우구스티노는 교우들을 만나면 관례적인 안부 인사를 나눈 후에 곧 교리 이야기를 하여, 하루 종일 다른 사람들은 쓸데없는 말을 끼울 수 없었다. 냉담자나 우둔한 사람이 강론 듣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서운해 하고, 딱하게 여기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다. 사람들이 어떠한 종교 문제들을 질문하여도 마치 호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듯이, 별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말이 줄줄 풀려 나와 끊어지는 일이 없었고, 아무리 연거푸 어려운 문제를 가려내게 하여도 조금도 막히는 일이 없었다." 성현의 논리는 질서정연하여 신자들의 신앙을 견고케 하였고,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마음을 왕성케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광범위한 교리 지식과 함께, 교리 교육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열성을 지닌 정약종 성현은 일반 대중을 위한 두 가지 교리서들을 저술하기로 결심하였다. 첫째, 교리서는 두 권으로 된 "주요교지"로서 이는 한국인이 처음으로 쓴 기초 신학서로 평가받고 있다. 저자는 여러 가지 한역 교리서들을 참고하고 인용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첨부하였다. 그리고 "주요교지"는 종교 진리를 갈구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순수한 한글로서 아주 쉽고 분명하게 해설하여, 무식한 부녀자나 어린이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진 책이다. 더욱이 정약종 성현은 독자들이 생소하고 이질적 문화 요소인 천주교에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당시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교리를 설명하였다. "주요교지"의 내용은 10장 43개의 항목으로 기본적 교리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천주존재의 증명, 천주의 속성, 도교와 불교에 대한 비판, 상선벌악 및 천당과 지옥에 대한 실재, 천지 창조, 천주의 강생과 구속, 예수의 부활과 승천, 원조의 범죄, 영혼의 불멸성, 천주교회 등이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정약종 성현이 사회 신분상으로 양반 특수 계층에 속하는 학자로서 학문에 능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대중을 상대로 한글로 저술한 것은, 그 자신은 당시에 자부심을 갖고 한문을 사용하던 지식층의 특권의식을 버리고, 인간의 평등사상을 터득하고 실천한, 참다운 그리스도교인임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교리서는, 미완성 작품으로서 "성교 전서"이다.
정약종 성현은 천주교의 광범위하고도 방대한 내용의 교리들을 종합하여 순서 있게 체계적으로 해설하여,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저술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저서는 '신유대박해'(1801) 때문에 "절반도 채 초 잡지 못하고, 중단되어 그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그 동안에 정약종 성현은 사교를 믿는다고 해서 주위의 비난을 받았다. 1799년 5월 24일(음력)에 대사간 신헌조가 정약종 성현이 천주교인들의 두목이라는 상소를 임금께 올렸다. 그러나 정약종 성현은 1800년 5월에 그의 동네인 양근에서 박해가 일어나서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이사왔다. 서울에 머물면서 성현은 1795년에 한국에 온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신부와 자주 긴밀한 접촉을 갖고 있었고, 자기 집에 여러 번 모시기도 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정약종 성현의 출중한 교리 지식과 그의 저서인 "주요교지"를 격찬하면서, 이 저서를 신자 교육을 위한 표준 교리서로 승인하여 사용하도록 조처하였을 뿐 아니라, 성현의 교육에 대한 열성에 탄복하여 교리 강습회인 '명도회'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00년 6월 28일(음력)에, 11세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의 계조모인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시행하면서, 자기 가정의 정적에 대한 보복으로 11월(음력)에 이르러 천주교 신자들을 단속하고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교회 박해의 분위기가 점차로 고조되자 정약종 성현은 이미 자신이 천주교의 대표적 인물로 지적되었기 때문에 도저히 박해를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귀중한 성물과 교리서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편지 등을 상자에 넣어 다른 교우 집에 맡겨 두었다. 그러나 1801년 1월 10일(음력)에 김대비가 국왕의 이름으로 천주교를 사악한 종교로 정죄하여 엄금하는 윤음을 발표하였다. 그래서 1월 19일(음력)에 상자를 보관하고 있던 집도 위험하여 집주인은 다시 다른 집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그래서 임대인(토마스)이 나무 장사로 가장하여 상자를 솔잎으로 덮어 짊어지고 거리에 나왔다. 그러나 순시하던 포졸이 짐 모양이 이상하여 국가에서 금지하는 밀도살 쇠고기를 운반하는 것으로 의심하고 임대인을 관청으로 연행하여 상자를 열어보니, 천주교에 관계되는 서적과 물건임을 발견하고 이를 운반자와 함께 포도청에 압송하였다.
포도대장은 상자의 주인이 정약종 성현임을 확인하고, 우선 물건들을 압류하는 동시에 임대인을 구속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때에 어느 친구가 정약종 성현을 방문해서 그의 옷에서 무수한 십자가가 밝게 빛나는 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에, 성현은 대답을 회피하여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것이 정약종 성현이 곧 고통을 받으리라는 전조라고 예측하였는데, 이는 들어맞았다고 한다.
1801년 2월 11일(음력) 아침에, 정약종 성현은 고향 마재에 들렀다가 말을 타고 한양으로 오는 도중에 금부도사가 마주쳐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자신을 체포하러 가는 것이라 추측하고, 하인을 보내어 자기를 잡으러 가는 것이 확실하면 되돌아오라고 알렸다. 성현의 추측은 들어맞았다. 정약종 성현은 곧장 관가로 압송되었다. 그는 심문관 앞에서 압수된 상자가 자기의 것임을 자백하였으나 주문모 신부에 대한 질문에는 침묵을 지켰다. 이때에 성현께서 정부당국에 협조하고 배교하였다면 자기의 목숨은 몰론 그의 가정의 비참한 운명을 구할 수 있었다. 특히 정약종 성현은 자기의 신앙고백으로 재산이 몰수되고, 가족들은 친척들에게까지 버림을 받아 비참한 생활을 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하게 자기의 신앙이 진실됨을 밝히고 오히려 교리를 설명하면서 천주교를 변호하고 정부의 금교 정책이 부당하다고 용감하게 선언하였다. 이러한 호교적 자세는 왕명에 도전하는 불경죄로 단죄되었다. 또한 정약종 성현은 압수된 그의 일기 속에서 세상, 마귀, 육신은 천주교 신자들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 항상 대적해야 하는 세 가지 원수라고 하는 교리내용을 적었는데, 여기서 세상이라는 표현이 정부를 지칭하는 말마디로 간주되어 국가 전복의 모반죄로 정죄되었다. 따라서 2월 25일(음력)에 정약종 성현은 이상의 두 가지 대역부도의 죄로 기소되어 참수형의 선고를 받았다.
정약종 성현이 최필공(토마스)과 함께 감옥에서 나와 함거에 올라 형장으로 갈 때에 성현의 얼굴은 매우 빛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성현께서는 죽는 순간까지도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였다. 도중에 함거를 끄는 사람에게 "목마르다" 하고 외쳤을 때에 사람들이 조용하라고 힐책하자, "내가 물을 청하는 것은 나의 위대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기 위함이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정약종 성현은 큰 소리로 주위의 사람에게 말하기를, "당신네는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은 당연히 할 일이요. 대심판 때에 우리의 슬픈 울음은 진정한 낙으로 변할 것이요."라고 하였다. 형장에 도착 후에도, 정약종 성현은 형구 앞에 앉아 아무런 두려움의 표정이 없이 행복한 기색으로 형구를 들여다보고 나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흠숭하올 천지만물의 대주재이신 분이 당신들을 창조하셨으니, 모두 회개하여 당신들의 근본으로 돌아와야 하오. 그 근본을 어리석게 멸시와 조소거리로 삼지 마시오. 당신들이 수치와 모욕으로 생각하는 그것이 내게는 곧 영원한 영광거리가 될 것입니다." "당신네는 두려워 마시오. 이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당신네는 겁내지 말고, 이 뒤에 반드시 본받아 행하시오." 형리는 정약종 성현의 말을 가로막고 나무 위에 머리를 대라고 하였다. 이 신앙의 증거자는 눈을 뜨고, 얼굴을 하늘로 향하여, 머리를 누이면서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죽는 것이 낫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에 사형 집행인은 겁을 먹고, 자신이 없이 칼을 내리쳐서 목이 절반 밖에 끊어지지 않자, 정약종 성현은 벌떡 일어나 앉아서 보라는 듯이 손을 벌려 십자 성호를 긋고 조용히 다시 처음 자세로 되돌아가 마지막 칼을 받아 2월 26일(음력)에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정약종 성현의 나이는 41세였다. [출처 : 이상 천진암 성지 홈페이지]
만천(晩泉) 이승훈(李承薰) 베드로(1756-1801년)
이승훈 성현은 1756년 서울 반석방에서 당시 대문장가였던 평창이씨 이동욱 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현께서는 학문을 사랑하던 정조 시대에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시파의 선비로서, 일찍이 1779년에 열렸던 천진암 강학회를 통하여 광암 이벽성조에게서 당시 천학이라 부르던 천주교의 진리를 배우게 되었다. 북경 천주교회와 연락을 도모하던 이벽 성조의 명을 받은 이승훈 성현께서는, 동지사로 북경에 가게 된 아버지 이동욱공을 따라 1783년 늦가을 북경 천주당에 가서 세례를 받고 이듬해 이른 봄에 귀국함으로써 국내에서 선교사 없이 한국인들에 의해서 갓 태어난 조선천주교회 발전에 큰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승훈 성현이 북경 사절단에 자기 아버지를 따라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이벽 성조께서는 몹시 기뻐서 즉시 그를 찾아갔는데, 그 시대의 문헌에 의하면 이벽 성조께서 이승훈 성현에게 한 주목할 만한 말은 다음과 같다. "자네가 북경에 가는 것은 참된 교리를 알라고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는 훌륭한 기횔세. 참 성인들의 교리와 만물의 창조주이신 천주를 공경하는 참다운 방식은 서양인들에게는 가장 높은 지경에 이르렀네. 그 도리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것 없이는 자기 마음과 자기 성격을 바로잡지 못하네. 그것이 아니면 임금들과 백성들의 서로 다른 본분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것이 아니면, 천지창조며 남북극 원리며 천체의 규칙적 운행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그리고 천사와 악신의 구별이며, 이 세상의 시작과 종말이며,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며, 죄를 사하기 위한 천주성자의 강생이며, 선인은 천당에서 상을 받고 악인은 지옥에서 벌을 받는 것 등,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사실 종교서적을 아직 많이 접하거나 깊이 연구하지 않아서 천주교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던 이승훈 성현은 이벽 성조의 말씀에 크게 감명을 받아서 책을 몇 권 더 보자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벽 성조께서 가지고 있던 책들을 대강 읽어 보고 나서 기쁨에 넘쳐, 자기로서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자네가 북경에 가게 된 것은 천주께서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코자 하시는 표적일세. 북경에 가거든 즉시 천주당을 찾아가서 서양인 학자들과 상의하며 모든 것을 물어보고, 그들과 교리를 깊이 파고들어 천주교의 모든 예배행위를 자세히 알아보고 필요한 서적들을 가져오게. 삶과 죽음의 큰 문제와 영원의 큰 문제가 자네 손에 있으니, 가서 무엇보다도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라고 했다.
이벽 성조의 이 말씀은 학문의 갈증보다도 종교의 갈증이 그에게 더욱 절실하였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마음을 준비한 것이니, 그에게는 구령대사가 점점 더 유일한 중대사가 되어 갔던 것이다. 이벽 성조의 말씀은 이승훈 성현의 마음 속 깊이 파고 들어갔다. 이승훈 성현은 이벽 성조의 말씀을 대도사님(大道師)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부여된 사명을 완수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승훈 성현은 드디어 1783년 11월 18일 동지사 일행에 섞여서 아버지 이동욱 공을 따라 그 해 말경에 북경에 도착하였고, 북당에 가서 1784년 이른 봄 귀국 전에 드 그라몽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가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리라는 희망으로 베드로란 세례명을 받았다.
즉, 갑진년(1784) 봄에 이승훈 성현은 북경에서 얻은 많은 책과 십자고상과 상본과 성물을 몇 가지 갖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에게 제일 급한 것은 이벽 성조에게 자기 보물의 일부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 동안 날을 세어가며 사신들의 귀국을 몹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이벽성조는 이승 훈 성현이 가져온 많은 서적을 받자마자, 외딴 집을 세내어 독서와 묵상에 전념하기 위하여 들어갔다. 이벽 성조께서는 천주교 진리에 대한 더 많은 논증 방법서적과 중국과 조선의 여러 가지 미신에 대한 더 철저한 반박서적, 7성사의 해설서, 교리문답과 복음성서의 주해, 그 날 그 날의 성인행적과 기도서 등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을 가지고 그는 천주교라는 것이 어떠한 종교인지를 전체적으로 또 세부적으로 대강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책을 읽어 가면서 새로운 생명이 자기 마음속에서 움터 나오는 것을 느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신앙은 이렇게 생장하고 있었고, 신앙과 더불어 자기 동포들에게 하느님의 은혜를 알려주고자 하는 의욕도 커갔다.
얼마 동안 연구한 뒤에 자기 은둔처에서 나온 이벽 성조는 이승훈과 정약전, 약용 형제를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도리이고 참된 길이오. 위대하신 천주께서는 우리나라의 무수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가 그들에게 구속의 은혜에 참여케 하기를 원하시오. 이것은 천주의 명령이오. 우리는 천주의 부르심에 귀를 막고 있을 수가 없소. 천주교를 전파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오."
이리하여 우리나라 선비로서 처음으로 정식 세례를 받게 된 이승훈 성현은 자신을 북경에 파견한 이벽 성조와 그 동지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승훈 성현으로부터 요한 세자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은 이벽 성조는 그 때부터 전교에 나서서, 권철신 형제와 정약종, 약전, 약용 삼형제와 중인이던 김범우 등에게 세례를 주고, 차차 믿는 사람이 늘어감을 보고 서울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선생의 집을 교회로 삼아 이승훈 성현과 함께 최초의 주일행사를 지내게 되었다. 머리에 책건을 쓰고, 집회에 모인 수십 명의 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자신이 처음 창립한 조선 천주교회를 더욱 튼튼히 발전시켜 나갔다.
이와 같이 밖으로부터 어떠한 성직자가 들어와 전교함이 없이 자발적으로 교회를 세우게 된 것은 온 세계의 전교 역사상에 있어서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이때부터 우리 선조들은 서로 교우라고 불러, 엄격했던 그때의 계급제도를 타파하면서, 조상의 신주를 신처럼 모심을 걷어치우고, 언문이라고 불러 업신여기던 한글로써 한문 교리책을 번역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사랑의 복음을 전파하기에 힘썼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세워진 조선 천주교회는 이듬해 1785년 3월에 관헌에게 발각되어 해산되고, 그 집을 교회로 쓰게 하였던 역관 김범우 선생은 잡히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단장으로 귀양 가 2년 후 즉 1787년 정미년 음력 7월 16일에 장독(杖毒)으로 죽으니, 2년 전 을사박해 당시에 순교한 이벽 성조의 뒤를 이어 한국천주교회가 두 번째 바치는 殉敎祭가 되었다. 이리하여 모처럼 세워진 교회가 첫 박해를 받게 되니, 동방의 '베드로'이던 이승훈 성현은 문중의 유림으로부터 또 가정의 형제들로부터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
이 을사박해로 서울의 양반들이 모두 통문을 돌리며 들고 일어나자, 문중의 유림들과 원로들이 연쇄반응으로 일제히 분격하여 일어났으며, 서울 양반들의 영향은 문중으로 가정으로 점점 강도를 더해서 심한 박해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훈 성현의 아버지는 아들이 보는 모든 천주교 책들을 빼앗아 안마당에 쌓아 놓고, 문중대표들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불을 질러 태우게 하니, 이른 바 분서(焚書) 사건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도 이승훈 성현께서는 굴하지 않고 신유박해 때 목이 칼에 떨어질 때까지 신앙 전파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이승훈 성현은 그 처남들과 더불어 글을 닦던 반촌에 집회처를 정하고, 자신과 이단원, 유항검, 최창현, 정약용 등을 함께 신부라 일컬으면서 주일미사 등의 행사를 가졌다. 이러한 임시준성직자단을 만들어 얼마동안 지내는 사이에 그 임시준성직자단 중의 어떤 이가 이러한 직무가 교회법에 잘못되고 어긋나는 것을 알고 난 후, 1789년 10월 북경에 윤유일을 보내어서, 그 제도가 잘못된 것임과 조상의 제사를 지냄도 옳지 못하다함을 알게 되었다. 이러는 사이에, 이승훈 성현은 임금의 특별한 보살핌으로 1789년 33세 때에는 경기도 평택현감이 되었으나, 그는 그 벼슬자리에 나아가서도 천주교 신앙 때문에 공자 위패를 모신 향교의 문묘에 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림의 지탄을 받아 2년 후 그 벼슬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후 다시 조선 교회를 이끌어 가던 이승훈, 권일신 등은 북경 주교로부터 임시준성직자단을 없애라는 지시를 받자, 곧 윤유일을 그곳에 거듭 보내어 정식 신부를 보내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 요청에 따라 북경 주교 구베아는 1794년 12월에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으로 보냈다. 이리하여 주 신부가 이듬해 정월에 서울로 들어와보니, 조선천주교회는 이벽 성조의 창립 이후 임시준성직자단의 활동으로 이미 4000여명의 영세신자를 가진 큰 교회로 성장되어 있었다. 주 신부는 강완숙이라는 여회장의 집에 숨어서 4천명의 교우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때 우리 정부는 외국인 신부가 들어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잡으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최인길, 윤유일, 지황 사바만을 잡아 죽이고 이승훈 성현을 충청도 예산으로 귀양 보냈다. 그러나 주 신부는 다행히 살아서 이후 충청도, 전라도 지방까지 두루 다니면서 전교에 힘쓴 결과 1801년까지에는 많은 수의 교우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정조가 갑자기 그해 6월에 죽고, 그의 계조모이던 벽파의 김대비 정순왕비가 11세의 어린 임금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의 정권을 잡게 되니, 그녀는 그해 12월부터 교인들을 잡기 시작하여 이듬해(1801)에는 삼백여명의 교우들을 죽이는 신유박해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승훈 성현은 체포되자마자 박해자들의 잔인하고 무서운 형벌로 매일같이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신앙을 고백하며 굽히지 않으므로 억지로라도 천주교를 버린다는 소문을 내야만 하는 박해자들은 그의 취조문에 이승훈 성현의 대답이 아닌 자기들의 생각을 추가하여 허위조작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장안의 선비들이 모두 존경하는 대학자 이승훈 성현이 천주교를 버렸다는 소문을 꼭 내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배교 선언자들은 모두 죽이지 않고 살려서 귀양을 보내었으나, 박해자들이 조작한 허위 배교자들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허위조작의 탄로가 새로운 불씨가 되므로, 천주교를 안 하기로 하고 배교한다고 말했다고 허위조작한 후 즉시 처형하였다. 이승훈 성현의 경우, 천주와 교회를 위해서 신앙 때문에 칼에 목이 떨어진 사실을 모든 이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처형되기 직전 최후의 형벌을 참관한 박해자 대표단이 직접 보고한 바를 읽어보자.
즉 성현이 순교하시기 겨우 12일 전인, 그러니까 2월 14일 대사간 신봉조(申鳳朝)는 이승훈 등 3인의 추국 광경을 목도하고 상소하기를, "신이 추국하는 자리에 참석하여 친히 눈으로 보오니 승훈 등 3인은 똑같이 완악한 패기가 서로 서려 있고, 마수(魔手) 이용하기를 상습으로 삼고, 차꼬보기를 초개같이 하고, 형륙에 나아가기를 낙지에 나감같이 하고, 그 단서가 이미 드러났건만 형장(刑杖)을 참으려 굴복치 않고, 사찰이 당장 잡혔건만 죽자 하고 실토치 않으니 천하에 이같이 모질고 흉측한 종류가 어디 또 있으리까?" 하였고, 또 며칠 전 "헌부신계"(憲府新啓)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나오는데 거기도,
"어허, 통탄할 노릇이로다! 가환, 승훈, 약용의 죄여! 칼과 톱 보기를 낙지로 삼고, 이미 대각의 성토가 극률을 청하는데 이르렀건만, 모질게도 움직이지 않고 끝끝내 고치지 않는도다! 지금 이 3인을 치죄하지 않고는 비록 날마다 백 명씩을 베어도 종당 금할 길이 없으리니, 그러므로 이 3인을 먼저 엄히 추국하여 그 정상을 얻어 쾌히 나라의 형법을 바로잡아야 하겠나이다"라고 했다.
서소문에서 칼을 받기 직전 동생 李致薰 공이 따라가서 피투성이가 된 이승훈 성현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형님, 천주학을 하지 않겠노라고 한 말씀만 하시면 상감께서 살려주신다니, 아버님과 조카들과 형수님과 저희들을 생각해서라도 한 말씀만 하시어 우선 목숨을 보전하고 보십시다" 하자, 이승훈 성현은 "무슨 소리냐,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고, 물은 치솟아도 못이 마르면 다하느니라(月落在天水上池盡)" 하시어, 당신의 신앙은 변함없이 하느님께 있고, 세도가들의 칼날은 스스로 소멸될 것임을 말씀하시고, 장엄하게 순교의 칼을 받으시니, 1801년 음력 2월 26일, 양력 그해 4월 8일이었고, 당시 나이는 45세였다. 박해자들이 서둘러 이승훈 성현의 목을 칼로 자른 이유는, 북경에 가서 최초로 영세하고 왔다는 사실 자체를 박해자들이 몹시 미워하였고(in odium fidei), 이승훈 성현의 목을 잘라야 다른 선비들이 천주교를 믿지 않을 것이니 교육상 필요했고, 박해자들 자신이 허위로 조작한 배교문장이나 배교소문이 탄로가 날까 우려했기 때문에 서둘러 참수하게 된 것이다.
광암(曠菴) 이벽(李檗) 세례자 요한(1754-1786년)
이벽 성조는 1754년 경기도 포천군에서, 경주 이씨 이부만 공을 아버지로 청주 한씨를 어머니로,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고, 한 때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검단산 아래 윗두미에서 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원로 대학자 성호 이익 선생께서 어린 이벽을 보고, '이 아이는 앞으로 반드시 아주 큰 그릇이 되리라'고 예언하였다.
성조께서는 다섯 살 때에 이미 철이 났고, 일곱 살 때는 경서를 읽었으며, 열아홉살 때, 권상복의 문집을 편찬하면서 '天學考'를 지어 실었고, '상천도(上天道)'라는 글을 지어, 부근에 있는 奉先寺 춘파대에 기증하였다. 스물다섯 살 때, 성호 이익 선생의 학풍을 이으려는 선비들 중 정약전, 이승훈, 권상문 등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였는데, 이때 이미 이벽 성조께서는 천학도리를 아주 깊이 깨닫고, 믿고 있었다. 특히, 천학에 관한 서적들은 현고조부 이경상 공이 소현세자를 모시고 중국에 8년간 있다가 귀국할 때, 아담 샬 신부에게서 천주교 도리를 듣고, 중국인 천주교 신자 5명을 환관으로 데리고 왔었는데, 그 때 가지고 왔던 천주교 책이 집안에 전하여 오던 것이었다.
이벽 성조는 키가 8척이요, 한 손으로 무쇠 백 근을 들 수 있었으며, 풍채가 당당하고, 마음의 자질과 정신적 재능이 뛰어났었고, 특히 언변은 기세 좋게 흐르는 강물에 비할 수 있었다고 한다. 1779년 기해년 음력 섣달, 심산궁곡의 한 절간에서, 학자 권철신 성현이 정약전, 김원성, 권상학, 이승훈, 정약종, 이총억, 정약용, 권일신 등과 함께 강학회를 개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벽 성조께서는 일백여리 눈길을 걸어 권철신 성현이 자주 우거하던 주어사에 밤늦게 도착하였으나, 강학회는 뜻밖에도 앵자산 너머에 있던, 폐허가 다 되어 스님들이 사용하지 않는 천진암 암자에서 열리고 있다하므로, 그 길로 엄동설한인데도 눈에 덮인 앵자산을 넘어 천진암에 이르러 촛불을 밝히시고 학자들과 경서를 담론하셨다. 여러 날 계속된 강학회에서, 학자들은 이벽 성조의 논증으로 천주교 도리를 대강 깨닫고 믿으며, 아는 바를 즉시 실천하였다. 이때 이벽 성조께서는 성교요지를 하필하시고, 천주공경가를 지으셨으며, 정약종은 십계명가를 지었다. 더욱이 칠일마다 주일 하루는 천주공경에 바쳐야 함도 알았으나,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요일이 없었고 또 요일을 아직 몰랐으므로, 음력으로 매월 이레, 열나흘, 스무 하루, 스무 여드레를 주일로 삼아, 온종일 대재와 소재, 파공과 기구, 독경과 잠심으로 지냈다. 이 강학회를 통하여 이벽 성조께서는 천학을 천주교로, 천주학을 천주교로, 즉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키셨다.
1783년 가을, 이벽 성조께서는 몇 해 동안 수차에 걸친 시도와 노력 끝에 마침내 이승훈 성현을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하시며 "자네가 북경에 가게 된 것은 천주께서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코자 하심일세. 북경에 가거든 즉시 천주당을 찾아가서 서양인들과 상의하며 모든 것을 물어 보고, 그 교리를 깊이 배우고, 그 종교의 모든 예배행위를 자세히 알아보고, 필요한 서적들을 가져오게. 삶과 죽음의 큰 문제와 영원의 큰 문제가 자네 손에 달려 있으니,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하고 당부하였다. 이승훈은 이를 대스승의 말씀으로 마음에 새겨, 영세와 성서, 성물 구입 등 부여된 사명을 완수하고 귀국하여, 한국천주교회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1784년 이승훈 성현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귀국하자 이벽 성조께서는 조선천주교회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권철신과 권일신 형제들을 입교시키고, 김범우,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등도 바로 입교시켰다. 요한 세례자 이벽 성조와 이승훈 베드로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이 3명의 학자들은 자기들이 개척한 새 종교를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전파하며, 동포들의 눈에 신앙의 광명을 비추어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 때까지는 복음 전파가 공공연하게 별 지장이 없이 행하여졌다. 이벽 성조께서는 여러 양반들에게도 전교하여 입교시키셨는데, 이에 강력히 반대하는 지성인들과의 토론과 논쟁이 불가피하였다.
고명한 학자로 평판이 높았던 이가환은 천주교에 대한 말을 듣고 "이것은 매우 큰일이다. 저 외국 교리가 이치에 어긋나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다. 내가 가서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토론 날짜가 정해져 두 학자의 친구들과 호사가의 한 떼가 이 굉장한 토론을 참관하려고 이벽 성조의 집에 모였다. 사흘 동안 계속된 토론회는 마침내, 이가환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다.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되다. 그러나 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갖다 줄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같이 말하며, 이가환은 돌아갔고 그때부터 천주교에 관하여 다시는 입을 열지도 전혀 상관하지도 않았다. 두 번째 토론회는 문의현감 이기양과 하였는데 역시 광암 이벽 성조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고, 서울 장안의 선비들은 술렁거리며 이벽 성조께로 쏠리기 시작하였다.
1785년, 을사년 이른 봄, 드디어 최초의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1년간에 걸쳐 약 500명의 입교 영세자를 낸, 이벽 성조의 수제자들이었던 학자들은, 명례방 김범우 선생 집에서 집회를 열고 있었다. 교회예절 거행을 위하여 청색도포로 정장하신 이벽 성조께서 안 사랑 상좌에 벽을 등지고 좌정하시고, 학자들은 이벽 성조 둘레에 무릎을 꿇고, 손에 책을 들고 엄숙한 자세로, 강론과 교리해설을 듣고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1년 전에 북경 천주교회에 파견되었던 이승훈, 대학자이던 사우 거사 권일신, 그 아들 권상문, 정약용과 그 형들인 약종과 약전, 그 외에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지황, 김범우, 이총억 등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기둥과 같은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이 때 추조금리들이 갑자기 들어와, 수색을 하고, 성물과 성서를 몰수해 가는 동시에, 집주인이며 중인 계급인 김범우 선생을 체포하여 가고, 다른 이들은 양반집안의 신분을 가진 학자들이므로 그대로 집에 돌아가라고 하였다. 권일신 성현이 몇몇 양반학자들과 함께 추조판서를 찾아가 김범우와 함께 벌 받기를 청하였으나, 추조판서는 이 양반학자들을 잘 달래다시피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김범우만은 계속하여 모진 매를 때리면서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양반들을 벌하는 방법이 있었으니, 그것은 당시 사회에서 같은 양반들의 문중세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양반집 문중마다 종친회의를 열게 하고 천학을 규탄하는 통문이 서울에 돌려지기 시작하였는데, 서울 4대문 안과 문밖, 그리고, 강상 지역과 강하 지역의 여러 대감집들과 양반집들에게 이 통문을 돌리는 책임자들이 따로 정해졌을 정도였다. 그 중 경주 이씨 문중회의가 가장 혹심한 반발과 무서운 질투로 충만하였다.
그리하여 이벽 성조의 아버지 이부만 공은 문중회의에 번번이 불려가서 수치스러운 모욕과 문책을 당하였다. 아들 이벽 성조의 천학운동을 막든가, 막을 수 없으면 아예 족보를 빼어버릴 터이니, 어디에 가서나 경주 이씨로 행세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족보에서 삭제되면 양반에서 상놈이 되는 것이고, 하루아침에 삭탈관직에 패가망신하는 것이었다. 이벽 성조의 아버지 이부만공은 가뜩이나 성격이 괄괄하고 쉽게 격분하는 무관 기질이었으며, 체면과 위신을 크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사실 당시 한국의 양반들은 거의가 다 그러했다. 이부만공은 아들 이벽 성조를 불러 놓고 달래고, 야단치고, 위협하고, 갖가지 수단을 다 써 가면서 천학운동을 하지 말 것과 집안 어른들을 찾아다니면서 잘못을 빌도록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문중에서는 평창 이씨 집안에서의 이승훈 성현의 사과와 라주 정씨 집안에서의 정약용 등의 사과 소식을 들은지라, 사과조차 하지 않는 이벽 성조의 태도에 대하여 한층 더 격분하였다.
그래서 서울 시내 양반들의 통문이 사방으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규탄 모임과 반대회합이 빈번하여 경주 이씨 문중회의는 더 더욱 격렬하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부만 공은 펄펄 뛰며 발을 굴렸다. 온갖 수단 방법으로도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는 아들의 굳은 마음과 의지를 보고, 마침내 대들보에 노끈을 걸어 목을 매달아 자살을 기도하였다. 이부만 공이 목을 매달게 되자 어머니와 형제들과 친척들과 벗들이 모두 이벽 성조에게 달려들어 아버지의 목매달은 모습을 가리키며 야단을 쳤다. 특히 그 어머니는 아들 이벽 성조에게, "천학이 아무리 좋은 도라지만 아버지를 목매달아 죽게 하는 그런 도를 누가 닦는단 말이냐? 아버지가 목매달아 죽는데도, 그래도 천학운동을 하러 다니겠다는 말이냐?" 하며 애원과 탄식과 절규로 부르짖었다. 이벽 성조께서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사회윤리의 제일로 삼는 때였다. 이벽 성조께서는 우선 아버지의 죽음을 막기 위하여, "그럼 나가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는데, 즉 집안과 문중이 조용히 가라앉을 때까지 좀 고요히 있겠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두 가지 뜻을 가진 말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목을 매달고 있는 이부만 공은 자살기도를 중단하고, 아들이 천학을 하러 다니지 않겠다고 하였음을 문중에 알렸다.
그러나 문중에서는 이를 신용하지 않고 이부만 공에게 이벽 성조 자신이 직접 문중회의에 나와서 자명소를 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벽 성조께서는 아버지에게 "문중회의에 나가서 천주학을 배척하거나 그만두겠다는 말 대신, 오히려 종친들에게 천주교를 이해시키고 경주이씨 문중이 모두가 먼저 천주를 공경해야 함을 알리고 오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아버지 이부만공은 아들이 천학운동을 그만두기로 했다고 문중에 이미 성급하게 통고한 후였기 때문에 입장이 난처하였다. 이부만공은 아들의 외출을 금지하고, 문중 어른에게 사람을 보내어 아들이 병으로 갑자기 앓아누어서 문중회의에 나가 자명소를 할 수 없으니 이해해 달라고, 예나 지금이나 으레 할 수 있는 핑계를 대는 동시에 아들이 앞으로 천주학을 안 하기로 하였으니 믿어달라고 전하였다.
그러나 문중회의에서는 직접 글로 써서 천주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도록 하라고 요구하였다. 아버지가 아들 이벽 성조에게 붓으로 천주학을 하러 나가다니지도 않을 것이고, 또 천주학을 하지도 않겠다고 써서 종친회에 보내라고 하자, 이벽 성조께서 "령득경신기"라는 글을 지어내니, 이것은 천주 공경의 필요성과 방법과 순서를 간략하게 알리는 내용이었다. 아버지 이부만공은 이 글을 보고 크게 분노하며 이는 내 자식이 아니라고까지 극언을 하였다. 할 수 없이 이부만 공은 아들이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병이 위중하며, 이벽이 이미 천주학을 하지 않기로 하였으니 믿어줄 것을 거듭 부탁하였다.
그러자 종친회에서는 더욱 의심하며 격분하였다. 그렇게 건강하고, 그렇게 활달한 광암 이벽 성조께서 무슨 병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앓는다는 것은 믿을 수 없으므로, 문중회의에서 대표를 보내니 그 대표에게 확약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이부만공은 이벽 성조를 후원 별당에 머물게 하고 출입문에 못을 치고, 집밖에는 새끼줄로 금줄을 매고, 종들을 시켜 지키게 하고는 아들 이벽이 천주학을 하다가 천벌을 받아 열병(속칭 염병)에 걸려서 다 죽어가니 가족들도 전염될까 두려워 출입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때에 천주교 신자들이 이벽 성조를 뵈오러 찾아와도 면회가 불가능하였으니, 아버지 이부만 공은 종들과 졸병들을 시켜서 문전에 발도 들여놓을 수 없다고 강경하게 거절하며 야단을 쳤다.
이벽 성조께서 모든 것이 다되어 때가 이르렀음을 아시고, 목욕하고 깨끗한 의복을 갈아입은 다음, 의관을 바르게 한 후 방안에서 좌정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의관을 바꾸지 아니하며, 잠을 자지 않고, 기도와 묵상에만 전념하셨다. 당시 한국 예의상 부모가 격노한 경우, 자녀들이 며칠씩 식사를 안 하거나 못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천주밀험기 3권이 이때 저술되었다는 설이 있고, 혹은 2, 3개월간이나 문중회의와 겨루면서 집안에 감금당하여 있는 동안에 집필되었다는 설도 있다. 하여간 마지막에 가서 스스로 식음을 전폐하고 고요히 기도에 열중하면서 천주를 생각하고 명상하다가, 단식 15일이 지나자 완전 탈진하여 그 자리에서 운명하시니, 1785년 음력 6월 14일 밤 12시였다고 정학술의 이벽전은 전하고 있다.
그러나 유림과 문중에는, 당시에 한양의 선비들이 천주교로 몰리고 있었으므로 이벽 성조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장차 나라와 사회가 뒤집히게 되고, 경주이씨 문중이 멸문지화를 입는다하여 이벽 성조를 독살하였다는 설이 내려오고 있으며, 1979년 6월 21일 이장 때 시신을 발굴하였는데 시신이 검푸르게 마르고, 치아가 검고 흑갈색으로 변색되어 있음을 보고, 당시 이장위원회의 유해관리 책임자였던 가톨릭의과대학 해부학 주임교수 권흥식 박사도 검시하면서 독살의 가능성을 강조하였었다. 어떻든 이벽 성조께서 신앙을 위하여 순교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벽 성조께서 운명하셨을 때, 양반대가의 집안이므로 사돈 간이던 정약용 선생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은 輓詞를 지었다. "神仙 나라 鶴이 人間世에 내려오사, 神聖한 風采를 보이셨네(仙鶴下人間 軒然見風神), 희고 흰 날개와 깃털, 눈같이도 하얗더니, 닭과 오리 떼들 샘내며 골부리고 미워했었네(羽 皎如雪 鷄鶩生嫌嗔), 울음소리 九重天을 振動시키고, 부르짖던 소리는 風塵世에 出衆하셨었지(鳴聲動九 亮出風塵), 어느덧 가을되어 문득 날아가시니, 애달파 탄식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乘秋忽飛去 空勞人)." 일찍이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이었던 다블뤼 안 주교는 그의 朝鮮殉敎史備忘記 머리말 첫 페이지에서, "진정한 의미의 조선천주교회 역사는 이벽의 저 위대한 강학에서 시작하였다"고 기록하면서, 한국천주교회 창립자 이벽 성조의 역할과 위치를 강조하였으며, 정약용도 "이벽이 수령이 되어 천주교회를 전파하였다"고 기록하였고(李檗首先西敎), 김대건 신부도 조선천주교회 창립에 있어 李檗博士의 역할을 먼저 다루었다.
이암(移庵)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742/51-1792년)
권일신 성현은 1742년 경기도 양평군 양근면 양근리 갈산에서 시암 권암의 5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 형 철신과 함께 당대에 명망이 높은 대학자로서 정조 임금까지도 그를 존경하고 아꼈다고 알려져 있다. 1784년 이벽 성조의 설교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영세할 때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라는 교명을 택한 성현께서는 이벽 성조, 이승훈 성현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이었다. 그 열심과 학식은 이벽 성조의 기대이상이었다. 성현께서는 자신만 천주교를 신봉하는데 그치지 않고 가족 전부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주위의 친구와 친지들에게도 신앙을 전하였다.
이 세 사람, 즉 이벽 요한 세자와 이승훈 베드로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새로이 개척한 진리의 길로 합심하여 나가면서,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한국 백성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하였다. 그리하여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충남의 이존창도 입교시켰다. 그 때부터 내포는 늘 열심한 천주교인들과 훌륭한 순교자들의 못자리가 되어왔다. 전라도에 천주교회를 전하고 튼튼한 기초 위에 세우는 일도 역시 권일신 사베리오에 의해서였다. 유항검을 입교시킴으로써 호남 천주교회는 시작되었다. 아우구스티노라는 본명으로 영세하면서, 유항검의 열성과 항구한 마음은 성현의 지도로 남부 지방 천주교회의 머릿돌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하여 주었다.
1785년 을사년에 형조판서 김화진이 명례방 김범우 선생의 집에서 이벽 성조의 주도로 개최되던 천주교 집회를 주목하다가 수색한 후에, 김범우를 체포하고 성물을 압수하여 갔는데, 이것이 한국천주교에 대한 최초의 박해인 을사박해였다. 성현께서는 이때 집회에 참석했던 여러 양반 자제들과 함께 동교인으로서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형조에 들어가서 김범우를 석방하고 성물을 돌려주기를 강력하게 청하였지만 주인인 김범우만 귀양 가고, 그 외의 양반들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을사박해 이후 명례방 집회는 중단되었고, 신자들의 공동체는 해산되다시피 하였다. 더욱이 한국 천주교회 창립자 이벽 성조께서 문중과 가정의 박해로 순교하시자 활발하게 전교하던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이 최초의 천주교 신도단체와 신도집회를 다시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조동섬 유스띠노와 함께 용문산에 들어가서 침묵과 잠심으로 8일간 자발적인 피정을 하였다.
그 후 대학자였던 권일신 성현을 중심으로 이승훈, 정약용, 정약전 등은 다시 힘을 합쳐 교회활동을 전개하게 되었으며, 이 무렵에 복음전파를 더 쉽게 하고 신입교우들의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하여, 성현께서는 이승훈 성현과 정약용 형제들 및 다른 유력한 신자들과 함께 임시 준성직제도를 정하여 성무를 수행하면서 신자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이승훈 성현께서 북경에서 주교, 신부 등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들이 성무집행하는 것을 보고 왔으므로 이를 모방하여 신자들을 돌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 신도대표들은 천주교 예절서나 교리서에 있는 여러 가지 설명을 읽고 교회의 임시 책임자들을 선정하였다. 지위와 학식과 덕망으로 또 이승훈 성현보다 나이가 14세나 더 연장자인 가장 뛰어난 권일신 성현께서 중심이 되어 일하게 되었고, 이승훈, 이단원, 유항검, 최창현 등 여러 사람이 사제로 선임되었다. 주교 성성식이나 사제 서품식 비슷한 의식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전국 각처를 나누어 담당구역 책임을 맡았으며, 각기 자기 임지로 직행하여 설교하고, 성세와 고백 성사를 주고, 미사 성제를 드리고, 신자들에게 성체를 영하여 주는 등 사목을 시작하였다.
천주교회의 성직자 제도를 자세히 모르면서 천주와 교회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선의로 시작한 조선천주교회의 임시 성직자들은 사목적으로 놀랄만한 많은 성과를 거두며 거의 2년여 동안 그 직무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기유(1789)년에 교회 서적의 어떤 구절을 더 자세히 연구한 결과 임시 성직자들에게 의혹이 일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를 중지하면서 북경의 서양 선교사들에게 문의하기로 하였다. 모든 신자들 앞에서 그런 직위에서 일하다가 그만둘 때, 일반의 웃음거리가 될 염려가 있는데도 즉시 그 직위를 버린다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뜻은 올바르고 신앙은 진실하였으므로, 그들은 어떠한 구실로도 성직을 모독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즉시 평신도 자리로 돌아갔고, 그 때부터는 신입교우들을 가르치고 외교인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일에만 전심하였다.
북경 주교에게 문의하는 편지는 이승훈 성현과 함께 신도대표 격으로 권일신 성현 자신이 썼고, 그것을 확실히 전달할 방도를 모색하다가 연례 사신 행차의 자연스러운 기회를 이용키로 하였다. 그러나 중국 천주교회와의 연락이 비밀이어야 하므로 이 위험한 사명을 맡을 만한 유능하고 헌신적인 인물을 찾아내어야만 하였다.
사신 일행에는 천주교 신자가 없으므로 외교인들 모르게 신자 한 사람을 거기에 들여보내도록 해야만 하였다. 이 중요한 사명을 위하여 예비신자 윤유일 바오로에게 눈을 돌렸다. 윤유일 바오로는 여주지방의 양반집 후손으로 권일신 성현의 제자로서 성현에게서 배웠으며, 성격이 온순하고 친절하며, 비밀을 잘 지키므로 계획된 이 사업의 적임자였다. 윤유일은 이 사명을 받은 후 북경주교에게 권일신 성현과 이승훈 성현이 드리는 편지를 가지고 장사꾼으로 변장하여 1789년 그 해 10월에 북경을 향하여 떠났으니, 이러한 일을 주도적으로 지휘하던 사람은 바로 권일신 성현이었다. 즉 이벽 성조 순교 후 제2대 지도자로서 권일신 성현이 신생 조선천주교회를 지도하게 된 것이다.
북경 3천리 길의 여행은 사신 일행 중의 여러 사람이 도중에 병에 걸려 쓰러질 정도로 힘든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공부에만 전심하고, 집안에만 들어앉아 있기만 하여 아무런 여행경험도 없고, 또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하는 여행인지라 윤유일에게는 보통의 피로도 훨씬 더 심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마침내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북경에 도착하여, 곧 주교를 찾아가 자기가 가져온 편지를 전해 드리고 조선에서 일어난 모든 일과 새로 태어나는 조선천주교회의 기쁨과 고민을 아주 자세하게 이야기해 드렸다. 권일신 성현의 심부름꾼으로서 온 윤유일은 북경 교회에 큰 기쁨을 주었다.
어떤 선교사도 들어가지 않은 나라에서 와서, 그 나라에 신앙이 얼마나 기묘하게 보급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이 천주교인의 존재는 선교사들과 특히 구베아(Gouvea)주교에게 가장 놀랍고도 즐거운 손님이었다. 주교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맡기시는 이 새로운 교우들에게 서둘러 사목교서를 썼다. 경술년(1790) 봄에 윤유일은 사신행차를 따라 귀국길에 오르기 전에, 북경에서 영세와 영성체와 견진성사를 받았었다. 이 천상의 도움으로 힘을 얻은 그는 모든 어려운 고비를 교묘하게 벗어날 수 있었고, 의심을 받지 않고 국경을 넘어 아무런 곤란한 문제도 당하지 않고 서울로 돌아왔다. 주교의 회답은 윤유일 바오로가 옷 속에 더 쉽게 감춰서 조선에 들여 올 수 있도록 명주 조각에 쓰여졌었다. 편지를 받을 사람은 이승훈, 권일신 두 성현들이었다. 주교는 우선 천주교 신앙으로 불러 주시는 천주님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에 대하여, 지극히 착하시고 지극히 위대하신 천주께 불멸의 감사를 드리라고 조선의 신입교우들을 권면하였다. 또한 복음의 은총을 보존하기 위하여 필요한 방법을 강구하되, 항구한 마음을 가질 것을 권하였다. 믿을 교리와 천주교 윤리를 간단히 설명하면서 이승훈 베드로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등이 비록 선의라 하더라도 함부로 사제성직을 수행하는 것은 금지시켰다. 신품성사를 받지 않았으므로 미사성제를 거행하지 말아야 하고, 세례를 제외한 다른 성사도 절대로 거행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린 이 답장은 모든 의심을 풀어 주었으며, 우리 학자들은 완전히 복종하는 마음으로 이 편지 내용을 받아들였고, 각자는 성직수행 중단을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주교에게 목자를 보내줄 것을 간청하였다. 목자를 얻기 위한 조선 신입교우들의 간청과 미신숭배, 조상공경 등 몇 가지 어려운 점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하여 북경주교는 학식 있고 열성 있는 선교사들의 의견을 들은 다음 조선 사람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고, 그들에게 신부를 보내 주겠다고 언약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신부의 입국을 준비하고 도울 수 있도록 어느 시기에 어떤 모양으로 그 신부가 국경에 나타날 것인지를 알려 주었다.
이러는 가운데 1791년 전라도에서 뜻밖의 박해가 일어났다.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1785년 을사박해 때는 그 용기와 명성으로 무사하였으나 신해박해(1791) 때는 반대자들의 질투를 더 오래 피할 수가 없었다. 성현의 이름과 학식과 끊임없는 노력이 새로운 교리 전파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모두가 잘 알고 있었으므로, 진산사건을 계기로 하여 홍낙안, 목만중 및 그 밖의 여러 사람이 천주교의 중심적인 두목인 권일신 성현을 지목하여 고발하였다. 그래서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그해 11월에 체포되어 형조로 넘어갔다. 관원들은 성현의 뜻을 변하게 할 수가 없으므로, 여러 차례 고문을 하고, 항구한 신앙심을 꺾기 위하여 갖가지 특별한 형벌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권일신 성현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고, 형리들의 혹심한 고문과 태장 밑에서도 분명히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과 땅에 천신과 사람을 창조하신 위대하신 천주를 섬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무엇을 준다 하여도 주님을 배반할 수 없고 주님께 대한 제 의무를 궐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당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형벌로 인하여 성현의 몸은 처참하게 되었다. 그러나 권일신 성현을 알고 있고, 그 훌륭한 자질을 높이 평가하던 정조왕은 천주교의 반대자들이 요구하는데도 불구하고 성현의 사형 결안에 서명할 결심을 하지 못하였다. 정조왕은 성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써서 설복시켜 보라고 명령하였다. 왕의 명령에 따라 그 전보다도 더 험한 새로운 고문과 유혹이 권일신 성현에게 가하여졌다. 달램, 아첨, 약속, 종용 따위가 우정과 동정이 암시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더불어 차례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형벌과 고문이 가해졌는데, 성현께서는 박해자들의 위험한 달램을 이긴 것처럼 고통도 이겼다. 권일신 성현을 사형에 처할 결정을 내리지 못한 정조왕은 어쩔 수 없이 제주도로 귀양 보내라는 판결을 하게 하였다.
성현은 이 무서운 형벌과 유혹을 이겨낸 것이다. 성현의 신앙은 굳세고 바르고 정확했다. 감옥에서 나왔을 때 상처가 염려되었으므로 유배지로 떠나기 전에 며칠 동안 서울에 머무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매제 이윤하의 집에서 며칠간 머물며 상처를 치료하고 귀양갈 준비를 하고 있던 성현에게 정조왕은 최후로 끝까지 권일신 성현의 항복을 받으려고 하였다. 왕으로서의 체면도 있고 한편 학자를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서 왕은 형조의 몇몇 관리들을 보내서 권일신 성현의 80여세 된 노모가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것을 환기시켰다. 일단 바다 저편 제주도에 가면 어머니의 임종을 아들로서 보지 못할 텐데, 두고두고 그 가책을 어떻게 견뎌낼 수가 있겠는가 하며 그 효심을 이용하여 억지 배교표시라도 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배교하라는 말만 하면 권일신 성현이 언제나 분개하여 물리쳤으므로, 그 말은 하지 않고 다만 감형을 얻어 좀 덜 먼 곳으로 귀양 갈 수 있도록 왕에게 약간 양보하라고 권고하면서, 권일신 성현께서 강한 반발대신 좀 묵묵하는 기회를 타서 당시 같이 있던 사람들 중의 하나가 서둘러 그가 쓴 문장에다가 배교는 아니나 약간 양보하는 표시로 글자 하나를 더 추가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즉 불완전하고 애매한 글귀를 썼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즉, '서양인들의 종교는 동양의 것과 매우 다르다. 공자와 맹자의 도리는 틀렸고 거짓되다'라는 권일신 성현의 글귀를, "서양의 종교는 공맹의 가르침과 달라서 틀렸고 거짓되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게 만드는데 필요한 '늘 어(於)'라는 글자 하나를 더 넣어야 한다고 박해자들이 주장하자, 형벌과 고문에 지칠 대로 지친 권일신 성현께서는 "나를 가만 내버려두시오. 그거야 당신들이 하고 싶은 것이니, 당신들 하고 싶은 대로 뭘 하든 나와는 상관 없소"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박해자들은 이내 그 글자를 더 넣어서 정조에게 성현의 양보조작보고를 할 수 있는 뜻이 되게 하였다. 관리들은 권일신 사베리오가 굴복하였다고 왕에게 알리며 호들갑을 떨고 헛소문을 냈다. 글자 하나를 가지고 억지 배교자를 만들어서 승리하였다고 자위하는 박해자들의 태도는 실로 가소롭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 핑계로 유배소는 즉시 바뀌어 가까운 예산으로 가라는 명령이 내렸다. 그러나 성현께서는 이미 받은 형벌 때문에 도저히 거기까지 갈 수가 없었고, 1792년 초에 용인군 구성면 구읍의 주막에서 귀양길의 첫날밤에 장독(杖毒)으로 거룩한 순교의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고 전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정조 임금이 권일신 성현을 무척 아꼈고 성현을 살리려는 노력이 너무 대단하였으므로, 이를 질투하고 또 우려한 박해자들은 자객을 뒤따라 보내어 갖가지 형벌로 지칠 대로 지쳐서 초죽음이 된 권일신 성현을 귀양길 첫 주막 밤에 때려서 실신시키고 목을 졸라 죽였다고도 전하는데, 그 이유는 장차 왕이 권일신 성현을 귀양에서 풀어 주거나 또는 권일신 성현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의 세력규합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객으로 하여금 죽였다는 것이다. 어떻든 간에 성현이 신앙 때문에 순교한 것만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 당시 조선 관리들이 자행할 수 있는 온갖 형벌과 유혹에도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였기에 성현께서는 당시 조선 교우들로부터 사후에도 계속 존경을 받았다.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1736-1801년)
권철신 성현은 권일신 성현의 맏형으로 1736년 경기도 양평군 양근면 양근리 갈산에서 태어났다. 조선 건국 공신이며 주자학자였던 권근의 후예로 명문대가의 자손이었던 성현은 5형제가 모두 지식과 덕망으로 유명하였다. 또한 당시 양반이면 누구나 속해 있었던 남인 대가의 자손으로서 성현은 경학과 예학에 있어 당대의 뛰어난 유학자로 경서의 철리와 윤리를 연구하는데 일생을 보냈으며, 일찍이 이벽 성조께서 한국에 천주교회를 창립하기 위하여 주초로 삼고자 선택한 분이셨다. 슬하에 아들이 없어서 동생 권일신의 아들 권상문을 양자로 삼았고, 해박한 학식에 못지않게 덕행이 또한 놀라워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성호 이익 선생의 가르침을 따르는 실학적인 노선을 중시했던 성현의 둘레에는, 훌륭한 제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일찍이 정약전이 예물을 바치며 가르침을 청하고 스승으로 모시고자 하였으며, 정약종, 이승훈, 김원성 등 당대 어진 젊은 선비들이 성현의 주위에 점점 모여들었으므로, 훗날 광암 이벽성조께서는 녹암과 직암 즉 권철신 · 권일신 학자들과 그 주위의 선비들이 천주교에 입교하면 따라오지 않을 이가 없을 것이라 하며 성현을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기초로 삼고자 하였다고 다블뤼 주교가 말할 정도로 당시 한양에서도 매우 명망이 높았다.
1779년 겨울, 성현께서는 정약전이 주선한 천진암 강학회에 지도자 겸 주제 강연자 격으로 참석했었는데, 처음부터 천주교 교리 연구를 위한 모임은 아니었고 흔히 유교학자들을 중심으로 일반적인 학문 연구를 위하여 종종 개최되곤 하였던 그런 모임이었다. 그러나 이 모임에 이벽 성조께서 참여하시면서부터는 유교적인 강학회가 아닌 천주교 교리연구와 일부 신앙 실천의 계기가 되는 강학회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이때 녹암 성현께서도 광암 이벽 성조의 해박한 지식과 명쾌한 논증을 통하여 천주교 교리를 대강 알게 되었는데, 성현의 신분과 사회적 위치로 인해 천주교 신앙을 즉시 실천하지는 않았다.
광암공이 참여한 천주교 교리 논증과 관련된 천진암 강학회에 관한 기록은 자료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자 비망기"에는 1777년 정유년에 강학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정학술의 이벽전에는 1778년 무술년과 1779년 기해년에 강학이 있었다고 쓰고 있으며, 정약용은 1779년 기해년 겨울에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분명한 것은 1779년을 전후하여 광암 이벽의 천주교 교리 논증 강학이 진정한 의미의 조선천주교회 역사의 시작이라는 사실이니, 이는 제5대 조선교구장이던 다블뤼 주교가 그의 저서에서 진솔하게 논파하였고, 김대건 신부도 "조선천주교회 약사"에서 '이벽박사의 위대한 강학'을 한국 천주교회의 자발적인 교회창립의 출발로 적고 있다.
천진암 강학회를 통하여 녹암 권철신 성현께서 이벽 성조로부터 천주교에 관한 논증을 듣고 알고 믿음을 가졌다하더라도 그것과, 이를 즉시 실천하는 문제는 별개의 것이다. 왜냐하면 강학회 당시 연령을 보면 녹암 권철신 43세, 광암 이벽 25세, 이승훈 23세, 정약전 21세, 정약종 19세, 정약용 17세 등이었는데, 권철신 성현께서는 이들 젊은이들과 달리 그리 자유로운 처지가 아니었으니, 이미 저명한 대학자의 위치에 있는 양반대가의 맏아들이었으므로 유교의 관례상 조상 제사를 비롯한 각가지 문제 때문에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는 것은 주저했다기보다도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1784년 가을, 광암 이벽성조께서 말을 타고 양근에 와서 녹암 공을 입교시키고자 10여 일간을 머물면서 토론을 겸한 전도활동을 하였을 때 마침내 동생 권일신 성현의 뒤를 따라 권철신 성현도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입교하기 전에는 망설였지만 입교한 후부터는 온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을 입교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그가 이미 누리고 있던 신망은 많은 선비들로 하여금 "녹암 선생님 형제분들이 믿는 종교라면 믿을 수 있고, 믿어야 할 종교"로 확신하게 함으로써 광암 이벽성조의 선택과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권철신 성현은 직접 나서서 전도활동을 하지는 않았고, 천주교회의 운영에도 결코 직접 관여하지 않으면서, 도를 닦는 고승들처럼 초연하게 기도와 참선을 즐기면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친절하고 관대하게 대했다. 그러나 1785년 을사박해를 시작으로 권씨 가문은 박해 세력의 시기와 질투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본래가 이름 있는 집안이 천주교를 믿자 남들의 비난과 박해도 역시 대단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1791년의 진산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신해박해로 동생 직암 권일신 성현이 모진 형벌과 참혹한 고문 끝에 귀양 길 첫 주막 밤에 뒤따라간 자객에 의해서 거룩히 순교하게 되자, 이 박해로 전라도의 여러 유력한 교우들도 순교하여 천주교회 지도계급의 손실이 컸다. 따라서 아직 남아있던 정씨 집안과 권철신 암브로시오 성현만이 천주교 신앙인으로 존재하는 듯했었다. 이런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현은 직접적인 포교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학문과 기도를 통하여 천주교의 신앙생활을 열심히 실천하였다. 박해자들은 그런 녹암 공을 원수같이 여기고 시기하는 자들의 미움과 원망은 점점 더 심해갔다.
기미년(1799), 박해자들은 터무니없는 일을 꾸며 모함하는 고발을 하였다. 권씨 집안의 자제들도 역시 이에 맞서 대항하여 일이 크게 벌어지게 되었는데, 지방군수가 현명하게 조정하고 정당하게 밝혀내어 박해자들의 모함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박해자들의 간교한 계획은 서울에 있는 반대세력과 결탁하여 더욱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그해 여름, 대사간 신헌조가 권철신 성현과 정약종 성현을 천주교인들의 두목이라 하여 정조 왕에게 상소하였다. 그러나 왕은 상소를 올린 신헌조의 품계를 박탈하고 천학사건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하였다. 박해자들은 다시 경신년(1800) 5월에 다시 왕에게 상소를 올렸는데, "양근 고을에 사학이 아주 성하여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고 믿지 않는 마을이 없는데, 군수는 태평으로 들어앉아 조금도 사찰하지 아니하니 그 군수를 징계해야 합니다." 하고 아뢰었다. 관에서는 그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으므로 양근 군수를 인책 사퇴시켰다. 새로 부임한 군수는 과거지사를 들춰내어 많은 사람들을 체포하였으므로, 녹암 권철신 성현은 서울로 올라가 잠시 몸을 피하였다. 그러자 관가에서는 그의 아들을 대신 잡아다가 가두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벌을 자기가 대신 받겠다고 여러 번 청했으나 군수는 허락하지 않고, 기어코 녹암공을 불러 가려고 하였으므로 사건은 오래도록 결말이 나지 아니하였다. 또한 정조는 천주교에 대하여 비록 몹시 의심하고 두려워하기는 했지마는, 그는 본래 무슨 일이든지 크게 확대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예컨대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사건도 두 나라 사이에 관련되었기 때문에, 만약 일이 드러나면 그 처리가 매우 난처하겠으므로, 1795년 을묘년에 있었던 주문모 신부의 입국으로 인해 일어났던 박해 이후 대신들이 천주교를 엄중히 금하기를 많이 청하였어도 일체를 담당 관리에게 내맡기고 간섭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해박해 등 여러 박해가 모두 은밀한 정조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는 설도 없지 않으니, 짐짓 모르는 체함으로써 교우들의 마음을 늦추어 몰래 주문모 신부를 찾아 암암리에 결말을 지어 버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조왕은 그 계획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 버렸다.
천주교를 믿던 남인학자들에게 관후하여 일말의 광명을 주었던 정조 임금이 1800년에 승하하자, 정조 왕에게 원한을 품었던 김 대왕대비인 정순왕후와 기회를 만난 노론 벽파의 박해자들은 신유박해를 일으켜서 암브로시오 녹암 권철신 성현과 아우구스티노 선암 정약종, 베드로 만천 이승훈 성현 등 남인 학파 양반들을 전부 소탕하기로 작정하였다. 항상 집에서 학문연구와 신앙생활에 전심하며, 통문과 공문으로 자기를 몹시 욕하는 것도 도무지 상관하지 않고 의연히 기도생활을 하던 녹암 공은 왕에게 자신을 모함하는 나쁜 고발서나 진정서가 올라가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박해가 일어날 때마다 교우들이 형벌에 이기지 못해 배교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가련한 사람들, 참 애석도 하다. 저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반생의 업적을 무익하게 만들고, 고통으로 의당 받게 될 영광을 잃는도다." 하면서 탄식하였었다. 마침내 성현도 1801년 음력 2월 11일 경에 체포되시니, 재판관들 앞에 끌려 나가서도 천주교와 그 신앙 실천에 관해 용감하게 변호하였다. 형벌을 당하면서도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매우 조용하고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그래서 직무상 그 심문을 참관해야 하였던, 가장 철저한 원수 중의 한 사람이 법정에서 나오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형벌과 심문을 당할 때에 다른 죄인들은 몹시 당황하는데, 권철신 공만은 마치 잔칫상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 같았소."
박해자들은 65세의 신선과 같은 대학자를 형조에서 형벌하면서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참혹히 때려 마침내 음력 2월 25일 모진 매질아래 순교하시게 하니, 성현과 천주교회에 대한 그들의 증오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권철신 성현께서는 광암 이벽 성조의 부인이었던 柳閑堂權氏 言行實錄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다.
광암 이벽 성조 독서처 지
다시 내려 와 오른쪽 길 천진암 가르멜 수녀원으로 갑니다.
가르멜 수녀원 옆 길
천진암 가르멜 수녀원
한국천주교회 창립사연구원은 직원외 출입금지.
가르멜 수녀원에서 20M쯤 내려가면 왼쪽으로 정하상 바오로 묘역 가는길이 있다.
참고로 맑고 시원한 날이 아니면 성지 주차장 오른쪽 길 청소년야영장으로 차량을 이용 하시는게 좋습니다.
비 오고 습한 날 오르막 길을 1.2Km 산길을 오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국 돌아오는 길은 청소년야영장 도로 길따라 내려 옴.
드디어 조선교구 설립자 묘역 입구까지... 성 정하상 바오로 께서 반겨 주신다.
성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1791-1839년)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또는 아우구스티노)는 선조 때부터 당상 역관을 지내온 중인 계급의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심이던 그는 20세 이전에 이미 유식하다는 평판을 들었지만, 세상의 영광과 쾌락을 제쳐두고 오로지 진리를 탐구하는 데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10년 이상이나 불교와 도교를 통하여 인간과 세상의 기원 및 종말을 깨우치려고 노력하던 중, 당시 훌륭한 양반집의 많은 학자들이 천주교를 믿는다 하여 죽임을 당하니 즐거운 낯으로 죽는다는 말을 듣고는 천주교야말로 참된 종교라고 여겨 천주교에 관한 책을 구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자기 집 장롱에 바른 헌 종이에 영혼, 각혼, 생혼이란 글자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그것을 떼어 앞뒤를 맞추어 보니 그것이 곧 “천주실의”(天主實意)라는 책임을 알았다.
그때 그는 정귀산이란 이가 천주교를 연구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를 찾아가 교리를 물어 보았으나, 정귀산은 대답하기를 피하고 서울에 사는 홍 암브로시우스(Ambrosius)를 소개해 주었다. 유진길은 곧 홍 암브로시우스를 찾아가 교리를 배우고 교리서를 얻어 보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그는 천주교의 모든 계명을 충실히 지켜나가기 시작하였다.
당시 정하상은 동료 교우들을 모아 선교사 영입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래지 아니하여 그는 정 하상 바오로(Paulus)를 알게 되어 1824년에 정 바오로와 함께 사신의 역관으로 들어가 북경으로 갔다. 그는 구베아(Gouvea) 주교로부터 아우구스티누스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조선에 선교신부를 보내달라고 간절히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자 이듬해인 1825년에는 정하상, 이여진 등과 함께 로마 교황께 청원서를 올려 조선교회의 딱한 사정을 알리고 하루 빨리 신부를 보내주시기를 간청하였다. 이 편지 덕분에 1831년 9월 9일자로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고, 이어서 선교사들도 입국하게 되었다. 1833년에 중국인 유 파치피코(본래 이름은 余恒德) 신부가 입국하고, 뒤를 이어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 그리고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각각 입국하게 되었다.
그래서 복음의 씨앗이 움틀 무렵 새로운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는 교회의 주요 인물이었으므로 즉시 체포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형제와 친지가 찾아와 배교를 강요했으나 그는 “나 때문에 당신들이 고초를 당할 것을 생각하니 대단히 마음이 괴롭지만, 천주를 안 뒤에 그분을 배반할 수 없으며 육신의 사정보다도 내 영혼의 구원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니 당신들도 나를 본받아 교우가 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포장이 그에게 “신부가 숨어 있는 곳을 대라”고 하자 그는 “서양 선생들이 우리나라에 오신 것은 오직 천주의 영광을 현양하고 사람들에게 십계명을 지키게 해서 영혼을 구제해 주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이 도리를 전하여 죽은 후에 지옥의 영원한 괴로움을 면하고 천당에 올라가 끝없는 진복을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훌륭한 교를 전하려고 생각하면서 어찌 스스로 나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만약 명예와 돈과 쾌락을 구하려면 무엇 때문에 훌륭하고 돈 많은 고국을 버리고 죽음을 무릅쓰면서 9만 리 먼 곳에 있는 이 나라에 왔겠습니까? 그들을 맞아들인 자는 바로 저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결국 그는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숨어 있는 곳을 말하지 않은 죄로 주리형과 줄톱질형을 받았다. 이리하여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정하상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치명하였다. 때는 1839년 9월 22일이요,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이상 가톨릭 성인사전]
성 정하상(丁夏祥) 바오로(1795-1839년)
성 정하상 바오로(Paulus)는 남인 양반의 후예로 경기도 양근 지방 마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씨 가문에서 최초로 신앙을 받아들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이며, 1801년에 그의 맏아들 정철상 카롤루스와 함께 순교하였고, 어머니 유 체칠리아는 1839년 11월 순교하였다. 아버지가 순교할 때에 그는 겨우 일곱 살로 그의 모친과 누이 정 엘리사벳(Elisabeth)과 함께 풀려났다.
그러나 가산이 모두 몰수당하자 살길이 막연하여 경기도 양근 지방 마재에 있던 그의 숙부인 정약용 요한에게 의지하고 살았다. 그러나 숙부가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 가 있던 때였으므로 외교인 친척들로부터 천대와 냉대를 받았지만, 바오로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기도와 교리를 배웠다. 하지만 외교인들 틈바구니 속에서는 신자의 본분을 지키기가 어려워 20세 때에 서울로 올라와 조증이 바르바라(Barbara)의 집에 머물면서 목자 없는 조선교회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교회 재건을 모색하였다.
그는 함경도에 귀양 가 있던 한학자 조동섬 유스티아누스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양반 신분을 감추고 어떤 역관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가 살다가 북경에 가서 성세와 견진과 성체 성사를 받고 주교에게 성직자 한 분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북경까지 9회, 변문까지는 11회나 왕래하였다.
그는 유진길, 조신철 그리고 강진에 유배 가 있는 삼촌 정약용의 자문과 후원으로 끊임없이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로마 교황에게 탄원서를 보내는 한편, 북경 주교에게도 서신 등을 보냄으로써 마침내 조선교회가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되고, 동시에 조선 독립교구가 설정되었다. 마침내 그는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모셔 들이고,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범 주교까지 모셔 들여 자신의 집에 모셨다.
앵베르 주교는 바오로가 사제가 되기에 적당하다고 여겨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던 중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주교를 피신시키고 순교의 때를 기다렸다. 이때 그는 체포될 경우를 대비하여 “상재상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은 조선교회 최초의 호교론이다. 그는 이 속에 박해의 부당성을 뛰어난 문장으로 논박했기 때문에 조정에서까지 이 글에 대하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1839년 7월 11일, 포졸들이 바오로의 집에 달려들어 그와 노모 그리고 누이를 잡아 포도청에 압송하여 바오로와 4대 조상까지의 이름을 명부에 올리고 옥에 가두었다. 이튿날 상재상서를 포장대리에게 주니 사흘 후 문초를 시작하였다. 바오로는 무서운 고통을 강인하게 참아나갔고 배교하라고 엄명하였으나 거절하자 옥에 가두었다. 며칠 뒤에 다시 끌려나와 톱질 형을 받아 살이 떨어져 나가고 골수와 피가 쏟아져 나왔다. 또한 그는 샤스탕과 모방 신부의 은신처를 대라고 했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그 후 두 신부가 자수한 다음 또 심문을 받고 세 차례의 고문을 받았다. 그리하여 1839년 9월 22일, 서양 신을 나라에 끌어들인 모반죄와 부도의 죄명으로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정하상 바오로의 큰 형 복자 정철상 가롤로(1781?~1801)
묘역에서 조금 내려가면 바로 청소년야영장 실내체육관 이다.
비가 내리는 마지막? 여름을 즐기는 건가 두껍비가 "두껍 두껍" 한다.
순례책에 인증날자는 지난 주, 그래도 왔다 갔으니 바꾸지 않고 인증샷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