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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1월 독서기행
(2025년 1월11일 ~ 2월1일, 신안동 작은도서관)
책읽기는 팔자일 수도
사는 아파트 앞에 있는 조그만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은 다음과 같다.
-『마을버스, 세계를 가다』 : 임택
-『철부지 시니어 729일간 내 맘대로 지구 한 바퀴』 : 안정훈
-『여행의 기술』 : 알렝 드 보통
-『세상에 읽지 못할 책은 없다』 : 사이토 다카시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1』 : 한비야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2』 : 한비야
-『한중록』 : 혜경궁 홍씨
-『79만원으로 세계일주』 : 권용인
-『낭만의 길 야만의 길 발칸 동유럽 역사기행』 : 이종헌
-『페스트』 : 알베르 까뮈
해서 모두 10권이다.
*
『마을버스, 세계를 가다』
-임택 지음/메디치 2017년판
마을버스 ‘은수’와 지은이의 출람지청 세계여행
1
지은이가 세계여행을 하게 된 계기는 단순하다.
-인생 이모작(二毛作)
헤르만 헷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내용처럼 한 번의 인생을 두 번에 걸쳐 사는 것, 세상이라는 굴레에서 살다가 때가 되어 떨치고 나와 자신의 의도한 바를 펼치며 살아가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 여행을 ‘5060세대’를 위해 기획했다고 한다. 2030과 같은 젊은 세대는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이미 자기의 삶의 방식을 분명하게 세우고 뚜렷하게 펼쳐나가는데 비해 과거의 세대들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지배되어온 탓에 그럴만한 기회나 의지가 부족하다고 파악하여 그 길을 열어보고자 시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지은이가 여행길에서 만난 어느 젊은이가 떠오른다. 어렵게 붙은 대학 합격을 포기하고 4년간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세계배낭 여행을 하려고 떠났다는 이야기인데, 떠날 때 비행기 편도 티켓만 준비하고 나머지 비용은 현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완수한다는 계획이라고 밝혔다. 인생을 받아들이고 공부하는 방식에서 과거 세대와는 판이하되 더욱 용기 있고 지혜로운 방식의 소유자가 요즘 세대라는 것을 알고는 신선한 충격에 잠시 빠져든다.
총 677일간의 48개국 방문이라는 여정의 천신만고 끝에 여행을 마친 지은이는 책 말미에 그 여행 결과 ‘도전하는 인생’의 중요성을 깨우쳤는데,
-도전하는 한 언제나 나는 청년입니다.
라고 일갈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이 여행의 이전과 이후로 삶이 갈렸다며 여행 이후 이전보다 활기가 넘치고,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게 되었다고 그 소회를 밝혔다.
2
정년퇴임을 앞둔 마을버스 ‘은수’와 50대에 이른 지은이는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좁은 세계에서의 단순하고 지루한 삶을 벗어나 시골 쥐가 서울로 상경해서 그 발전상에 눈이 휘둥거래진 것처럼, 남북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아프리카를 거쳐 중앙아시아를 돌아오는 긴 여정을 통해 그 일생을 장렬히 마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더 큰 열정을 품은 청년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하여,
-출람지청(出藍之靑)
이 책에서 지은이는 사람을 만나고자 했다. 여행에서 인생을 느끼고자 했다. 고금의 모든 문학작품이나 종교에서 다루고 언급하듯 ‘인생은 한편으로 여행’과 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인생에서 주연인 인간은 잠시 삶에서 머물다가 때가 되면 덧없이 떠나는 ‘나그네’라고 비유했다. 지은이는 이제 진정 나그네가 되어 여행에서 인생을 찾는 ‘역설적’인 삶을 시작한 것이다. 그 노정에서 과감없이 드러나는 인생의 여러 드라마틱한 상황들을 추리고 정리하면 대강 다음과 같겠다.
3
우리는 살면서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그 누군가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그 누군가를 만날지 알 수 없으므로 늘 깨어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마을버스 ‘은수’는 지은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9년 6개월 동안 시민을 실어 나르던 마을버스 본연의 임무를 마치고 바로 폐차되었을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 6개월 전에 지은이를 만남으로서 ‘인생 이모작’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그 행운은 그 직전까지의 살아냈던 삶의 스케일을 능가한 나머지 ‘모든 삶의 정수는 인생의 황혼기에 나타난다’라는 신조어를 만들게끔 한다.
여행 중에는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난다. 자동차가 고장 나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리거나, 낯선 나라의 도둑들에게 돈이 든 지갑과 카메라가 든 배낭 혹은 스마트폰까지 강탈당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한 평생을 살아가다 보면 개인사에서 일어나는 흔한 사례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여행과 인생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여겨진다.
일생을 살아가다 보면 사람도 병약해져 하던 일을 멈추고 병원 신세를 지거나 별별 사기사건에 휘말려 재산을 잃거나 분실하는 일도 더러 일어나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그때 저는 겁에 질려있는 당신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지은이가 파나마에서 미국으로 이동하던 중 국경에서 차량진입 허가를 맡지 못했을 절체절명의 순간에 도움을 주었던 어느 외국인이 한 말이다. 지은이는 이 사람을 천사(天使)라고 보았는데, ‘우연이나 기적’이라고 하는 것들은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도전하며 최선을 다하는 이들에게 주는 보너스(Bonus)라는 생활신념을 지은이 자신에게 굳히게 만든다. 자신이 여행이라는 세계일주 중에 최선을 다한 결과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천사와 같은 이들이 나타나 도와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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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귀중한 물건들을 잃어버려 여행에 큰 타격을 줄 거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게다가 잃어버린 물건들은 실제로 여행을 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우리가 생각보다 많은 짐들을 가지고 다녔다는 생각이 들었다.(본문 중에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재삼 깨닫게 된다. 우리네 삶이란 생명을 얻어 태어나서 죽음을 만날 때까지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 숙명이다. 그 숙명의 노정에서 나 자신 외에 달리 무엇이 더 필요할까. 불필요한 것에 마음을 뺏김으로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며 괴로움과 고통을 불러들이는, 그래서 본문의 내용처럼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짐들을 가지고 그 무게에 지금도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을 나 자신과 주변에서 목도할 수 있다.
-아마 청년들은 모를 것이다. 그들이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가 이후 나의 여행을 몰라보게 바꿔놓았다는 사실을. (본문 중에서)
이탈리아 로마에서 거액의 현금과 카메라가 든 배낭을 도둑맞고 망연자실해 있을 때 네덜란드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러 왔다가 유럽 여행에 합류했던 그의 아들이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아직 은수가 멀쩡하고 아버지가 건강하게 계신데 무엇이 걱정이세요? 여행에 무엇이 더 필요해요?” 이 말에 아버지인 지은이는 힘을 얻는다. 아들은 지은이 자신보다 어린데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불쑥 어느 순간 해주는 것에 감동하고 만다. 마찬가지로 여행 중에 만나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부지불식간에 한 말들이 여행의 타성에 젖어 판단력이 제때에 서지 않던 지은이에게 촌철살인과 같은 영감을 준 것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이런 말로 여행을 종결한다.
-내 여행의 목표는 오직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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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의 길 야만의 길 발칸 동유럽 역사기행』
-이종헌 지음/소울메이트 2014년판
1
집을 떠나 하는 여행에는 여러 종류와 방식이 있다. 이 책과 같이 역사적 유적지를 찾아보는 역사 기행, 종교 성지를 찾아 떠나는 종교 순례, 그리고 인생의 참 의미를 찾아 세계 각국을 떠돌아보는 문화 체험 여행, 그리고 최근에 유행하는 문학과 예술의 배경이 되는 곳을 찾아 작가와 작품세계를 향유해보는 기획 여행이라든지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면 다양하다. 그것뿐인가. 리조트 휴양지나 대형 크루즈 선박을 이용한 휴양용 여행도 있고, 오지 탐험을 목표로 떠나는 여행도 있고, 어느 한 나라를 택해 그곳에서 1달간 생활해보는 여행 등 특별한 즐거움을 찾아 떠나는 여행도 있다.
이 책은 역사 기행의 하나로 유적지를 찾긴 하지만 인류 문명의 찬란함을 느껴보려는 지적체험보다는 어두운 역사의 한 부분을 찾아 현재 문명의 현주소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희구하는 정화적 차원의 여행으로 최근에 시작된 다크 투어리즘(Da가 Tourism)으로 명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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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반도의 세 나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간에 1992년에 내전에서 벌어진 인종청소 및 대량학살 사건을 중심으로 그 원인과 배경을 역사적으로 규명하기 시작하여 주변의 나라인 폴란드, 헝가리, 체코와 슬로바키아, 그리고 오스트리아까지 첨예하게 관계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 시간적 배경은 로마제국부터 시작해서 동서 로마제국의 분리,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 오스만 튀르크의 침공을 거쳐 러시아제국의 남하, 제1차, 2차 세계대전을 절정으로 했다가 20세기 말에 보스니아 내전으로 치닫는 시간대들이다.
공간적으로는 전 유럽과 중동아시아, 러시아, 그리고 중세에 영향을 끼친 훈족의 침략 이동 경로까지 감안한다면 유로-아시아의 전체 영역으로까지 확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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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비극적인 결말로 장식된 발칸반도의 보스니아 내전은 민족주의와 종교간 첨예한 대결로 비쳐지지만 그 내부를 깊이 들여다보면 궁극적으로는 이웃 나라의 영토쟁취에 대한 과도한 욕심으로 판명되고 있다.
그 과도한 욕심은 몇 백 년간 이웃으로 살을 부대끼며 살았던 여러 민족들을 하루아침에 폭력집단으로 변모시키며 서로에게 총칼을 들이밀어 ‘살육과 약탈’이라는 야만적인 폭력을 감행하게 만들었다.
이것으로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관계된 민족과 국가는 ‘집단적 기억’을 일반인들에게 남겨놓는다. 이것은 끝나지 않는 폭력을 불러들인다. 발칸반도의 되풀이 되는 역사가 그렇고, 중동의 ‘이스라엘’과 주변 인접국과의 관계가 그러하다. 쉬이 잊히지 않는 ‘기억’은 시대가 변해도 상황이 악화되면 또 다시 기억에서 원한과 폭력심을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급기야 전쟁이라는 양상으로 변모하며 이웃에 대한 약탈과 수탈, 지배라는 악의적 양상을 되풀이 한다.
저자는 그래서 아름다운 중세를 보존하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낭만적인 동유럽을 여행하면서 부러워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 다시 재발할지 모르는 폭력으로 그 평화를 끝장내는 야만적 긴장감을 동시에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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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라는 인물의 탄생으로 비로소 인류는 역사의 길로 들어섰다.
(『닥터 지바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문학 작품 속에서 전개된 이 문장이 이번 책 『낭만의 길 야만의 길 발칸 동유럽 역사기행』을 평하는데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적절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인용해서 논해본다.
발칸반도의 보스니아 내전에는 근본적으로 종교상의 차이에서도 기인했다. 각기 정교와 기독교(카톨릭), 그리고 이슬람교의 3개 종교가 각국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중동과 유럽 간의 역사적 오랜 전쟁과 유럽이 서로마와 동로마 체제로 변환되면서 정교와 기독교(카톨릭)으로 분파되면서 생긴 수 많은 갈등과 폭력을 역사적 순간마다 일으켜 왔던 것이다. 그러나 저자도 책에서 밝혔듯이 이 3개의 종교는 그 근본은 모두 같다. 그 시조가 유대교의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각 종교의 가르침에 의해 각자의 신앙 안에서 그들의 하느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 따른다면 이러한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는 발생하기 어려울 것이지만, 그 종교를 정치에 이용한 지도자들과 그 의도 아래 따랐던 국민들의 대중 심리가 영합하며 인접국에 대한 영토야욕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서 역사적 순간마다 파국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닥터 지바고』에서 예수 탄생으로 인류가 역사의 시간으로 접어드는 순간 무지와 야만의 세계에서 도덕과 바른 종교의 세계로 접어들며 비로소 화려하고 찬란한 문명으로 인류가 도약했다는 내용을 피력했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상충되는 현실의 지구촌 세계에서 이제 그런 기대와 희망은 무의미할 정도로 희미해졌다. 그러나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각국의 서로에 대한 원한과 악의적 폭력 사용에 대한 경종은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 또한 그렇지 않은가. 이웃 일본과의 관계가 그러하다. 가까운 식민지 시절부터 과거 왜구들의 침략으로 이 강토가 쑥대밭이 되었던 기억을 잊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우리 또한 역사교과서로 ‘집단적 기억’을 자손대대 승계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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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저자의 바람은 다음과 같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유려한 중세 유적을 보존하고 있는 발칸반도와 주변국이 이번 여행에서 본 것처럼 평화롭고 안정되어 그 땅에서 사는 사람들이 축복 속에 일상을 마음껏 누리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이것 외에 우리 인생에 무슨 의미가 달리 있을 수 있을까. 어려운 철학을 통한 인생의 의미를 되짚지 않더라도 태어나서 살아가는 자연의 생명체 중 하나인 인간들은 태어난 그 자체가 축복이며 즐겁고 기쁘게 한평생 살아가는 것이 그나마 의미이거나 의무거나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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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주머니 저금통
낮에는 집에 아무도 없습니다. 조그만 옅은 하늘색 나무 대문을 지나 중문을 거치면 방 두 개에 지붕 아래 다락이 별도로 나있는 일본식 조그만 집은 사방이 행인이 다니는 길로부터 담벽과 옹기종기 이어진 집으로 둘러싸여 아무도 없는 오후 한가한 즈음이면 적막감도 느낄 수 있습니다.
중문 앞으로 난 단칸방에 부엌 하나인 집에는 매일 김치를 담궈 시장에 내다 파시는 자매 할머니들이 사시는 곳으로 내다파는 김치를 다 팔아야 돌아오시는 탓에 늘 저녁이 되어야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옵니다. 할머니가 늦게 돌아오셔서 저녁 삼아 만들어 드시는 국수는 얼마나 국물 맛이 좋은 지, 가끔 “철아!” 하고 부르셔서 한 그릇 주시며 “너희 할머니 잡숫게 갖다드려라.” 하시는데, 가져온 국수를 나의 할머니는 조금만 드시고 이내 곁에서 말똥말똥한 눈으로 바라보는 손자인 나에게 주시곤 했지요. 그러면 나는 얼른 받아들고 ‘후루룩’ 소리를 내며 국수와 국물을 순식간에 먹어치우곤 했는데, 시장에서 파는 싱싱한 갖은 조개를 넣어서 그런지 어린 나조차 감칠맛을 느낄 정도였답니다. 그런 김치 파는 할머니 집은 그래서 오후면 늘 비어 있었고, 저희 집으로 말하자면 낮이면 담 너머 좋은 양옥에 사시는 친척집으로 할머니는 늘 마실가시고 어머니는 옷을 만드는 보세공장에 다니는 탓에 역시 비어 있답니다. 난 형제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저와 마찬가지로 누나, 동생들 모두 집근처 동네에서 친구들과 열심히 노는 탓에 집은 비어 있는 경우가 많았지요.
나는 열 살입니다. 저는 장기와 만화를 좋아합니다.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편을 갈라 공으로 축구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지만, 때때로 친구들을 모을 수 없는 날에는 집근처에 사는 정호라는 친구 집에 찾아가 장기를 뚜며 놀거나, 호주머니에 아침에 아버지께서 출근하시며 주시고 간 동전이 아직 남아 있으면 집에서 조금 떨어진 대로변에 있는 만화방으로 갑니다.
만화는 너무 재미있어요. 주인공이 가면을 쓰고 악당들을 혼내주는 부분을 볼라치면 너무 통쾌해서 페이지가 너무 빨리 넘어가지 않을까 초조해하기도 하고, 남은 분량이 얼마 남지 않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만화책을 그만 꽉 붙든 채 아쉬움으로 젖어있기도 합니다. 전쟁 만화는 더 재미있고요, 아흔아홉 개의 여의주를 찾으면 저주가 풀려 잃어버린 부모님과 왕국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혼자 모험을 떠난 주인공의 연작 시리즈는 결코 놓쳐본 적이 없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화방을 지나며 가게 창에 붙은 ‘오늘 들어온 만화책’을 보면 연작이나 나중에 나오면 꼭 보겠다고 다짐한 책들의 표지가 눈에 들어오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애절하게 손짓을 하지만 하필 그때마다 난 주머니에 돈이 없답니다.
아버지, 어머니와 여자 형제들이 함께 자는 우리 집 작은 방에는 어른 키만한 농이 하나 있답니다. 그 농을 열면 아침에 자고 일어나 갠 이불들이 차곡차곡 들여져 있지요. 그리고 눈을 조금만 크게 뜨고 들여다보면 그 개켜진 이불더미 옆으로 은행에 근무하는 삼촌이 가져온 조그만 저금통이 하나 있답니다. 삼 색줄이 붙은 복주머니 모양의 저금통이랍니다. 그런데 이 저금통이 꽤 무거워졌어요. 저녁마다 아버지께서 남은 동전을 넣어두신 탓이지요. 난 이 저금통이 가끔 생각났어요. 그건 만화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꼭 봐야할, 아니 꼭 보고 싶은 만화가 만화방 밖 창에 붙은 날이면 어느 날부터 작은 방 농에 들어있는 저금통이 생각났어요.
그 날은 오후 집 내부의 벽 판자 사이로 스며든 빛과 먼지가 뒤엉켜 마치 영화관의 영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듯한 빛줄기처럼 영롱하게 작은 방 앞을 비추고 있었지요. 난 어느 날 오후처럼 밖에서 같이 놀아줄 친구도 없고, 장기를 뚜러 친구의 집도 찾아가기가 싫어(친구 집에는 사나운 개가 있어 놀러갈 때마다 친구의 도움 없이는 들어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이리저리 무기력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작은 방 앞으로 스며든 오후 빛들 사이를 먼지들이 뒤엉키며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들을 보다보니 갑자기 저금통이 생각나며 만화책이 떠올랐지 뭐에요. 난 부리나케 작은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누가 볼세라 살그머니 농문을 열었답니다. 그러자 노란색 복주머니 저금통이 눈에 확하고 들어왔지요. “딸랑딸랑”, “철거덕”, “딸랑딸랑”, “철거덕”. 저금통을 두 손으로 들고 흔들어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에요.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며 두 다리가 떨렸지만 난 멈추지 않았어요. 아니, 멈출 수가 없었어요. 이제 이 동전들이면 난 만화방에서 보고 싶은 만화를 마음껏 볼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어린 마음에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었어요. “…….” 누군가 집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어요.
*
어머니였다. 내 기억 속의 그 날, 어머니께서는 여느 때보다 조금 일찍 집으로 오셨던 것이다. 내가 들고 있던 저금통을 슬그머니 농속의 원래 자리에 다시 집어넣고 작은 방문을 열었을 때 정지 문을 막 나서시는 어머니의 조그만 등이 보였던 것이다. 내 얼굴은 저금통에서 돈을 빼내느라 벌겋게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고, 집을 나가시는 어머니를 뒤따라 나도 얼른 밖으로 뛰다시피 나갔다. 대문을 나간 나는 텅 빈 집을 뒤로 한 채 대로변에 있는 만화방을 향해 달려내려 갔고 어머니는 내내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향기-1』
*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정영목 옮김/이레 2010년판
보기(see)에 대해 고찰하는 시간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나간다. (이 책, <여행을 위한 장소에 대하여>장에서 인용)
여행은 삶의 또 하나의 확장이다. 역사적으로 인류가 걸어온 길을 들여다보면 크게 유목민과 정주민으로 나눈다. 하지만 보다 근원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유목민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먹을 것을 찾아 떠돌아다니던 인류는 어느 순간 밀이나 벼 등이 지정된 지역에서 풍부하게 자라나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그 후부터 식량 사정이 해결되면서 정주를 고려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류의 내면에는 오랜 유목민의 피가 잠재적으로 자리잡았을 것으로 여겨지며, 오늘날까지 그 오랜 관습의 하나로 여행이라는 행위가 지속되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어떨까. 물론 이후 수많은 민족의 정주문화 형태가 자리잡았음에도 지구상에는 여전히 일부 유목민족의 생활형태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여행 그 자체에 내재된 인류 생활의 근간의 하나로 여전히 지속되고 있지만 오늘날 변화된 삶의 형태에서 그 여행이라는 어쩌면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특별한 행위 속에 다른 어떤 특별한 의미가 내포되어야 한다는 시각을 펼치고 있다.
-왜 여행을 하는가
-여행을 통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여행의 궁극적인 행위 안에는 어떤 특별한 요소가 가미되어야 하며, 그러할 때 여행은 보다 풍부해지고, 우리 삶을 어떻게 풍요롭게 만드는가
등에 대한 철학적이고도 심미적인 사고를 해보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좀 더 특이한 면을 이 책에서 찾아본다면 여행에 관한 작가 본인의 깊은 사유와 더불어 이전의 유명한 작가(아니면 작가의 문학작품)나 화가를 등장시켜 자신이 직접 관련 여행지를 돌아봄으로서 서로 비교하는 기회를 만듦으로서 독자로 하여금 여행에 관해 풍부한 간접적 체험과 더불어 여행이 제공하는 깊은 감성의 세계로 젖어들게 한다.
여행의 출발인 동기(기대와 호기심)에서 시작하여 여행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주변의 풍경(시골과 도시, 풍경이 주는 숭고함)과 에술적인 감상(눈을 열어주는 미술, 아름다움의 소유)을 거쳐 귀환에 이르러서는 일상과 여행 사이의 간극에 내재된 인간들의 무딘 시각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것으로 여행의 참된 의미와 제대로 된 의식을 일깨움으로서 말 그대로 ‘여행의 기술’을 제공한다.
-나는 보는 것이 그림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나는 학생들이 그림을 배우기 위하여 자연을 보라고 가르치기보다는, 자연을 사랑하기 위하여 그림을 그리라고 가르치겠습니다.
(존 러스킨, 이 책, <아름다움의 소유에 대하여>장에서 인용)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가 보게 되는 많은 아름다움-여러 다양한 자연의 외관이 주는 경이로움과 아름다움, 여행지에서 만나게 되는 인간의 문화 유적지와 예술 작품 등-에 대해 반응하는 여행자들에 대한 심미안을 깊고 넗히려는 작가의 의도하에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미술 평론가이자 사상가인 존 러스킨(1819~1900)을 책 속으로 초대해서 인용한 문장이다.
여행은 삶의 많은 다양한 형태 중 하나라는 의견에 동의한다면 여행 또한 삶을 사랑하여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토대 위에서 간직해야 할 덕목으로 여행에서 보는 다양한 삶과 자연을 사랑하는 방법으로서 시각을 갖추어야 한다는 의견으로 새겨들을 필요가 있겠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그의 철학적인 시각으로 많은 다양한 책을 저술했는데, ‘남녀간의 연애’를 철학적인 시각으로 풀어낸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특이한 작품으로 오래전에 만난 인연으로 그를 늘 주목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이 책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을 발견해 정독함으로써 그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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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벽두, 1월의 독서가 끝나고
년초 벽두에 애석하게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많이 슬펐다. 애도 기간을 한 달 정도 가졌다.
-여행을 자주 다니시나 봐요.
책을 반납하러 도서관에 갔더니 대출담당 사서가 반납한 책들을 보더니 하는 말이다.
-여행을 많이 못 다니니 이런 여행에 관한 책을 많이 읽지요.
그렇다. 난 여행을 자주 다닐 형편이 못 된다. 지금 맡고 있는 일도 그렇고 체질과 천성이 일상을 툭툭 털고 배낭 하나 둘러멘 채 훌쩍 여행을 나서는 성격이 안 되기 때문이다.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라는 경구가 있다. 여행에 소극적인 대신 앉아서 하는 여행인 책읽기를 많이 한다. 가만히 따져보니 나의 독서 이력은 초등학교 3학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실 뒤에 마련된 학급 문고에서 동화책을 빌려 열심히 읽던 일, 멀리 집안 친척 집에 있던 ‘세계소년소녀명작선집’을 틈만 나면 찾아가서 빌려 읽던 일 등이 그해부터 본격적이었던 걸로 회상되니, 어언 반세기에 가까운 것이다. 책을 통한 여행을 참 많이도 했다. 상상력의 세계와 역사의 세계, 그리고 현지의 형편을 알리는 여행 서적을 포함한 여러 종류의 서적 등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세계 여행을 참 오랜 시간 한 것이다.
어머니를 애도하느라 일부러 마음 편하게 여행에 관한 서적을 집중적으로 골랐던 것 같다. ‘한비야’의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은 모두 4권으로 되어 있어, 다음번에 3, 4권을 더 읽기로 했다. 그리고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다른 책을 모두 읽고 마지막 무렵에 읽었는데, 시간도 촉박했고, ‘혜경궁 홍씨’가 덤덤하게 자신의 지난 생을 돌아보는 문체에서, 어린 나이에 입궐하는 회상부분에서 진한 슬픔이 전달되며 마음에 큰 공명을 일으켰는데, 이건 꼭 다시 빌려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다 못 읽었다는 이야기).
‘인생은 나그네의 길’이라는 대중가요도 있고,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와 관련한 시작품도 있다. 우리들 모두가 잠시 다녀가는 곳이 이곳 이승의 삶이라는 것은 인류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삶인 것 같다. 저자들이 찾아간 세계 곳곳에서 ‘손님’이자 ‘나그네’로서 받는 대접이 곡진한 것을 보면 말이다. 아울러 이번 독서기간에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대한 위로를 많이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