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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설교(8)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 있다 -
마태복음 5장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복 있다 - 그 네 번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저희는 배부를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에게 그들이 복에 있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면서 저희가 배부를 것 - 저희는 의로 채워질(충만할) 것 - 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배부름의 복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있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언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의 예언을 근거로 이것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으로 가서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저희가 배부음의 복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의 선언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린 것은 양식이 없어서이며, 목마른 것은 물이 없어서입니다. 이 양식과 물이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생명이 유지되고 지속되도록 합니다.
‘의’가 의미하는 것에 대한 이해
이 양식과 물이 없으므로 겪는 주림과 목마름을 대신하는 표현으로 ‘의’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의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하면, 단어적인 의미로서는 “올바름, 공정함, 의로움”을 나타내며, 또한 드물지만 ‘선함, 친절, 긍휼’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어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 있다. 저희가 배부를 것이다”가 무엇을 의미하여 주시는 것인지를 제대로 알게 해 주지를 못합니다. 자칫하면 이 ‘의’의 단어적인 의미를 사람이 행하여야 하는 올바르고 공정하고 정의롭게 사는 것에 있는 것으로 알기가 쉬우며, 착하고 친절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에서 의로움이 있는 것으로 알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를 따르는 제자가 주리고 목마름에 있는 의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단어가 지닌 의미가 잘못되고 틀린 것이 아니라, 이 단어가 의미하고 있는 의를 그러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을 말씀하셨을 때의 의는 처음 언급한 바와 같이 구약에 선언된 예언을 근거로 가지고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선언된 예언에게서 이 의가 선언된 의미를 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의입니다. 그리고 이 의는 의로우신 하나님 자신을 가지고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의, 그래서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의를 가지고서 하신 말씀이 아닌 것이죠. 그것은 말입니다.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항상 알고 있으면 언제든지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인이며, 죄인인 사람에게는 의가 없으며, 의를 행할 수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행함으로 의에 이를 수 없고, 그래서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자기 백성을 위한 완전한 의를 자신의 의에 두시고 그 의를 주리며 목마른 자들에게 보내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배부르며 마음에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는다”(사 55:1-2)라고 예언합니다. 그는 또한 “흑암에 있는 백성들이 샘물 근원으로 인도하시므로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사 49:9-10)라고 예언합니다. 이사야가 이처럼 예언한 것은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 솔로몬이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신다”(잠 10:3)라고 예언하였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의인’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자를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방인의 포로가 되어서 고통과 아픔 가운데 있는 주리고 목마른 언약 백성에게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다윗과 맺은 견고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을 회복케 해주시는 풍족한 배부름의 복을 예언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사야는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를 하지 말고 나를 청종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언약 백성이 양식 아닌 것에가 아닌 양식인 것에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그것은 ‘나를 청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사야는 다윗 왕국에 있는 언약 백성에게 그들이 하나님을 청종할 것을 선언하고 있는데, 이는 그에게 그들이 먹어야 할 좋은 것이 있고 그들의 마음이 기름짐으로 즐거움을 얻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 의가 되시는가? 왜 하나님을 의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하나님을 청종하는 것에서 좋은 것을 먹고 그들의 마음이 기름짐으로 즐거움을 얻을 주리고 목마른 상태에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를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은을 자루채로 매달아 주고 온갖 수고를 해서 얻어도 이것이 그들에게는 배부르게 하며 마음에 기름짐이 되는 양식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청종하는 것에 목을 매달고 있는 것은,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에 그들의 주린 배와 목마른 목을 내걸고 있는 것은 거기에서 그들이 배부름을 얻을 것인 하나님이 그들의 의가 되시는 ‘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의가 되시는 그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이것이 있어서 언약백성들이 ‘하나님의 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구약성경의 예언과 신약성경에서의 그 예언의 성취에서 보아 알 수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사야서에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 같이 듣게[떨어지게] 할찌어다. 의를 부어 내릴찌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찌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사 45:8). 여기에 보면, ‘의’와 그리고 이것과 댓구가 되는, 즉 동일한 의미에서 ‘구원’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의를 쏟아내려 부어주고 땅이 입을 열어서 구원을 토해 낼 것은,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나를 들으라.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원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사 46:12-13).
“내 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사 51:5).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웠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사 56:1).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라”(사 61:10).
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에서 보게 되듯이,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구원과 동의어인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름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필요로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으로 주림이 채워져야 하고 목마름이 해소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같이 쏟아내려 부어져야 하고, 땅이 갈라짐으로 그 입을 열어 물을 토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이죠. 하나님의 구원에 의한 의가 임하지 않고서는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느니라”(렘 2:22)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잿물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을 수 있고 비누로 우리의 죄를 말갛게 할 수가 있다면 그리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나 잿물로, 비누로 날마다 씻을지라도 결코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인된 사실이 없어지지 않으며, 그 죄인의 타락한 부패한 죄성은 그의 본능과 본성에서 언제나 발휘가 됩니다. 우리의 죄는 주홍같이 붉은데, 이렇게 우리의 주홍같이 붉은 죄는 사람의 어떤 행위로도, 그래서 매일같이 드리는 사람의 어떤 제사로도 없앨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죄가 흰 눈 같이, 그리고 양털 같이 희고 깨끗하게 씻김이 되는 것은 우리의 행위와 그 어떤 제사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자가 되시기 때문이요, 그 구원이 되시는 것에서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입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죄로부터의 유일한 구원이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의에 있습니다. 다른 데서는 구원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의로만 우리의 구원이요 의가 됩니다. 이것 외에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있게 하는 양식이 없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
그런데 죄에서 구원하여 죽음에서 생명에 있게 하는 이 유일한 양식이 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서 주어져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양식을 내려주시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결코 주림과 목마름으로부터 배부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어떤 자인가 하면, '의에 주리며 목마름에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에 우리가 있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의의 채움[온전함], 그 충만인 배부름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그 의로 배부를 것임
예수님은 말이죠. 자신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제자에게 이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복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왜냐하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예수께서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오시기까지에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던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항상 기근과 기갈에 있었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으면서도 마냥 죄만 드러내며 죄 가운데 그냥 있었던,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하나님의 의가 단 한 방울이라도 자신의 혀에 적셔져서 서늘함만이라도 느끼게 했으면 하는 갈망이 배고픔을 갖게 하고 목마름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애써 구하고 찾습니다.
예수님은 그 배고픔과 목마름에 있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에게,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그 의를 기대하며 그 기다림의 간절함으로 있는 제자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양식이요 생수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 곧 성육신은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지금 자신들을 무리들로부터 분리하여 따로이 산 위에 데리고 와 함께 하시며 말씀을 주시는 예수님과 같이 있음에서 그들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양식을 보아야 하고, 목마름을 시원케 해주고 있는 생수를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이제 양식이 없어 기근이 아니요 갈함이 아니라 여호와이신 하나님이 없어 기근과 기갈에 있었는데, 그래서 끊임없이 죄로부터의 구원을, 의를 구해지고 찾아질 수 있기를 갈망함에 있는데, 그들에게 있어야 할 양식이, 생수가 함께 하고 있으며, 이것을 먹고 마심에 있는 그들 속에서는 그분으로부터 다시는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는 생명의 양식과 생명의 물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제자는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구원받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요, 따라서 천국이 그들의 것입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에게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는 너희는 복 있다”고 말입니다. “너희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 있어왔으나, 이제 너희는 더 이상 배고픔과 목마름의 괴로움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이 너희를 더 이상 괴롭히며 고통을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배고픔에 있어왔고 목마름에 있어왔던, 그렇게 너희에게 없어왔던 그것이 이제는 너희와 함께, 그것도 항상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는 항상 배부름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너희는 복 있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까닭에,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습니다”(시 32:1).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에 있으므로 죄의 모든 형태로부터 자유합니다. 죄가 그들을 정죄하지 못하며 죽음의 심판에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이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4)라고 말했으며,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6-17),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2-24).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로 오신 분으로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이룹니다. 우리가 들은, 사도를 통해서 전해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그를 믿는 사람이면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죄로부터의 구원에서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그 모두에 하나님의 의가 미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항상 하나님의 의의 채움, 곧 의의 충만으로 있습니다.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원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의에 주리고 목마름’에서 또한 항상 ‘하나님의 의’의 충만에 의한 만족에 있습니다. 우리 육신이 완전한 구속을 입기까지는 그 육신의 욕망이 분출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오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에 늘 의를 필요로 하는 주림과 목마름에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셔서 그 의의 채움이 되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저희는 그 ‘의의 배부름’에 있습니다. 이는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희의 배부름으로의 완전한 성취자로서 저희에게 배부름의 계속적인 성취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수가성에서의 한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으며, 디베랴 바다<갈릴리 바다[호수]> 건너편의 들판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후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셔서 자신을 이곳까지 찾아 나온 무리들에게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생명의 물을 마셔 목마름이 없으며 생명의 떡을 먹어 주림이 없는 하나님의 의를 입는 것은 이 생명의 물이요 생명의 떡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이 보내신 자인신 줄 내가 참으로 알았습니다”는 믿음에 있게 한 사람이요(요 4:42), 그래서 “영생의 말씀이 주께만 있으며, 우리는 주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심을 믿습니다”는 고백을 이끌어내시는 믿음에 있게 한 예수님의 제자입니다(요 6:68-69). 이들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에게도 예수님이 생명의 물이요 생명의 떡으로 제공되지 않으며, 따라서 이들 속에서는 영생하도록 솟아나오는 물이 없으며, 영생하도록 다함이 없는 양식이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말이죠. 예수님이 제공하시는 물과 떡을 먹고 그 물이 지니고 있으며 양식이 지니고 있는 생명을 한 번 맛 보았을 뿐이며 그 맛을 계속적으로 즐기려고 하여 또 다시 구할 뿐이지 그것에 의한 배부름으로 결코 있지를 못합니다(요 6:34). 그러니 이들은 언제까지든지 예수님의 곁을 맴돌 뿐이지 이것을 그만두고 더 깊은 진리를 배우는 자리에로 나아가지를 못합니다. 세례와 성령의 은사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초보 진리에만 매여 이것이 지닌 맛을 즐길 뿐이지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에 있지를 못합니다(히 6장). 그래서 예수님을 떠나 있습니다(요 6:66). 항상!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가져다 주는 “ ‘의’의 주림과 목마름”에 있게 하여서 그들의 주이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과 항상 함께 하게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저들에게 주림과 목마름으로부터의 배부름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이러한 의의 주림과 목마름을 가지며 의를 갈망함이 오늘의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게 이끌려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그의 유일한 의로 의롭다 함을 받고 있는 은혜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그 의의 배부름으로 복 있음
그런 우리는 의의 채움의 결과로 따르는 행복이 수반됩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그에게 날마다 베풀어주는 구원의 의를 날마다 기뻐하며 그 즐거움으로 행복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날마다 구원의 의를 날마다 공급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잠깐입니다. 아주 잠시 동안의 잠깐입니다. 이제 곧, 인자가 오시는 날이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고전 2:9)인 영원한 세계의 천국에서 “우리가 그와 같을”(요일 3:2) 것이며, 그때 우리의 죄는 날마다 하나님의 의의 채움으로 있어야 할 주림과 목마름이 영원히 해결되어 “더 이상 주리지 않고, 더 이상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에게 선언하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참으로 복 있습니다. 예수께서 선언하신 그 배부름의 성취에 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