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마음
눅 15:20-30
아버지의 한이 없는 사랑을 그림으로 표현한 많은 화가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최고는 17세기 네델란드가 낳은 가장 대표적인 화가인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1669)가 그린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이라는 작품일 것입니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가 인생에 가장 힘든 시기에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젊은 나이에 큰 명성을 얻은 화가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30세에 아들 하나가 죽고, 33세와 35세에 연이어 큰 딸과 작을 딸까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러다가 2년 후인 37세에는 사랑하는 아내까지 잃고, 그의 곁에는 아들 하나만 남게 됩니다. 그 후에 재혼하여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얻게 되지만, 그 아들마저 먼저 세상을 떠나고 새로 얻은 아내도 일찍 세상을 뜨고 맙니다.
그러다가 그가 죽기 1년 전에 첫째 부인과 사이에서 낳은 마지막 아들마저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 삶의 여정을 거치면서 렘브란트는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위로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인생의 큰 고통과 쓰라린 경험을 하다가 그의 인생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만이 안식을 누리는 길임을 깨닫게 되고, 이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이 더욱 유명해진 이유 가운데 하나는 20세기 최고의 영성신학자인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이 그 그림과 같은 제목의 책을 쓰면서부터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에 있는 예르미타시 미술관에 가서 이 그림을 보았는데, 그는 이 그림 앞에 의자를 갖다놓고 이틀 동안 이 그림을 감상하며 깊은 사랑의 관계를 성찰했다고 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 그림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버지는 매일같이 아들이 돌아올 그 길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눈이 짓물러 멀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눈에는 초점이 없습니다.
시력을 상실한 노인은 눈이 멀기까지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말해줍니다.
아들을 감싸고 있는 아버지의 두 손은 서로 다릅니다. 왼손은 힘줄이 그대로 드러난 투박한 손인데 이 손은 아버지를 상징하는 것이고, 오른손은 매끈한 손으로 자상하고 부드러운 어머니를 상징합니다.
아버지의 강함과 어머니의 부드러움을 이 두 손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탕자의 왼발은 신발이 벗겨진 채 상처투성이이고, 오른발의 신은 다 망가져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삶이 얼마나 가난에 찌들어 고달팠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입니다.
탕자는 겉옷은 없고 오직 속옷만 입고 있는데, 그것은 옷이라기보다는 헝겊을 두룬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죄수와 같이 삭발한 탕자의 머리는 스스로 죄인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들의 얼굴 모습은 마치 어머니의 뱃속에 머물고 있는 태아의 모습과도 흡사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돌아갈 아버지의 품이라는 것입니다. 헨리 나누웬은 자신의 모습이 바로 이 탕자와 다르지 않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아버지의 품에 안긴 아들은 한쪽 귀를 아버지의 가슴에 대고 있습니다. 왜 탕자는 자신의 한쪽 귀를 아버지의 가슴에 대고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그는 아버지가 가슴으로 말씀하시는 사랑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을 가슴에 품은 아버지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듣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한단다.’하는 아버지의 심장소리를 듣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 소리가 들렸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품에 안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그 안아주시는 가슴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속삭이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입니다. ‘내가 너를 오랫동안 기다렸노라.’고 말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이란 그림을 감상하면서 마지막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작은 아들을 닮는 것이 아니라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아 안아주시는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탕자의 삶을 넘어서 그 탕자를 사랑하시고 기다리시고 용서하시고 안아주시는 아버지의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2절)
돌아올 분깃을 가리키는 헬라어 ‘에피발로 메로스’는 유산을 뜻합니다. 당시 유대의 풍습으로 볼 때 세상을 떠나지도 않은 부모에게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과 상식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요구였습니다.
십계명의 제5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했고, 출 21:17에는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했는데 죽지도 않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아버지를 죽은 자로 취급하는 것으로 인정되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어떻게 합니까?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둘째만이 아니라 맏아들에게까지 나누어주었습니다.
상속 받은 둘째가 그 돈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여 다 낭비하고 맙니다. 사업하다 실패한 것도 아니고 창기와 함께 허랑방탕하며 써버렸으니 이건 용서할 수 없습니다.
때 마침 흉년이 들어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살면서 돼지를 치지만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그것마자도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 때 탕자의 마음속에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17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탕자가 어려울 때 생각나는 아버지는 풍족하신 아버지였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품꾼들조차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업한다고 부모의 노후대책까지 가져가지 마십시오.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이 습관화되어 부모가 기어 다녀도 부려먹는 자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마음껏 의지해도 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둘째 : 회복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22,23절)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혔습니다. 이것은 죄를 탕감해 주는 것뿐만 아니라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를 회복시키는 행위입니다.
손에 가락지는 도장으로서 물질에 대한 권리를 의미합니다. 또 신을 신겼습니다.
이젠 아들이지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들은 품꾼의 한 사람으로 봐달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모두를 회복시켰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어서, 아버지 아들로서 일컬음을 받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지만,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과 손가락지를 끼우고, 송아지를 잡아서 그를 존귀한 자신의 아들로 받아 주십니다.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서 살 때에, 그를 진정으로 존귀하게 대했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아들임을 깨닫고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는 그를 자신의 아들의 존귀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아버지의 아들로서 존귀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서 아버지의 자녀임을 깨닫고 올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두다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한 일은 아버지께로 돌아간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되 더 열심히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심은 모든 것들이 결실을 맺여 30배 60배 100배가 됩니다. 그래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도 합니다.
셋째 : 아들의 권리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것이로되”(31절)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에, 그것을 보고서 불평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28절)
바로 아버지의 첫째 아들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염소새끼 하나 잡아 주지 않았는데,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아들에게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셨다고 불평을 합니다.
이에 아버지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그 잃어버린 재물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죽었다고 여겼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고, 마땅한 일은,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