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행 5장 12-20절
설교제목 : 가둘 수 없는 것
회심의 사건
좋으신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갑작스런 어머니의 소천소식으로 어찌 한 주를 보냈는지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92년의 세월동안 모진풍파를 겪으시고,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10년 넘게 요양원에 계시면서 점점 모든 기억이 소실되고 태어난 아이의 모습 그대로 돌아가셨습니다. 영혼만큼은 평안하시고, 자유하시길 기도하며 어머니를 떠나보냈습니다. 위로해주시고 기도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이자 웨슬리회심 기념주일입니다. 성령강림절은 집단적 그릇인 교회가 성령을 담아내어 교회가 탄생한 날입니다. 한 개체에게 이 성령강림절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성령이 개인 안에서 임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는 유일회적인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넘어서 개체 안에서 계속되는 화육의 과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융은 이에 대하여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는 자들에게 성령의 지속적이고 직접적인 작용은 사실 확장된 화육의 과정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신 아들 그리스도는 장자이며, 그 뒤를 이어 어린 형제들과 자매들이 끝없이 태어날 것입니다... 그들의 비천한 태생(아마도 포유류로부터 발달해 나온)은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되고, 그리스도가 그들의 형이 되는 밀접한 친족관계를 방해하지 않습니다.”[Jung C.G, “Answer to Job”, CW 11, para.658]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태어날 수 있도록 인간은 그에 걸맞은 하나의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담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의식화된 인간, 개성화된 인간이어야 합니다.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삶을 받아드렸듯이, 우리 자신의 개인적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 죽음으로 대변된 신적인 대극의 갈등을 경험하도록 운명지워진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Jung C.G : Symbolic Life, CW 18, para. 1551.]
성령을 담은 개체에게 일어나는 것은 회심입니다. 잘못된 것을 뉘우치는 것이 회심이요,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도 회심입니다. 자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달려가는 삶, 세상의 인력에 이끌려 가는 삶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소명을 바라보는 것으로 전환, 이런 궤도수정이 회심입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의기양양하게 떠난 미국 조지아선교에서 쓰라린 실패를 경험하고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1738년 5월 24일 회심의 사건이 올더스케이트의 집회에 참석했을 때 그에게 일어났습니다.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써 있습니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기도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 경에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다(I felt my heart strangly warmed).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으며,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믿고 있음과, 내 죄를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웨슬리를 가슴 따뜻하게 한 성령의 역사는 그 한 사람을 변화시켰고, 부패한 영국 사회에 새로운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한 사람은 약하지만 성령께서 그와 함께 하시면 한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 주변세계에 영향을 끼칩니다. 한 사람 안에 성령이 함께 하시면 성령은 그를 통하여 아름답고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따뜻하게 하고, 가슴떨리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임하시길 소망합니다.
자기 비움
오순절 성령께서 마가다락방에 모여있던 각 사람 위에 임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설교하였고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신도가 늘어났고,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변화를 일으키자 자연발생적으로 처음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 공동체는 한마음과 한뜻이 되었고,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에게 내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성령은 자신의 소유를 자기 것이라 말하지 않고, 자신을 덜어내고 비울 수 있게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소유는 모든 가치 척도였습니다. 소유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황금이 사람을 미치게 하듯 물질이 우리를 점유하여 사로잡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실 때 우리의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알아차리게 합니다. 그 알아차림 속에서 내가 가진 것, 내가 누리는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며, 주님이 거두어가시면 그것은 바람처럼 흩어질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거두어가실 때 나의 소유라고 주장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가슴속에 차 들어올 때 내 소유도 생명도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이런 자기비움(케노시스)의 정수를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말씀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2:6-8)”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전형입니다. 소유가 유일한 목적이고 목표가 된 세상에서 그 소유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고백하며, 자기를 비워내고 덜어낼 수 있는 인생 여정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사와 표적
성령께서 사도들과 함께하시자 사도들에게 많은 표징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표징을 뜻하는 원어는 세메이온(semeion)입니다. 이 단어는 ‘가리켜 보이는 표’를 의미합니다. 놀라운 일은 테라스(teras)로, 어떤 징후나 조짐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입니다.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난 표징과 놀라운 기적은 뭔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도들의 기적을 통하여 가리켜 보이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표징과 놀라운 일은 그리스도를 포착하게 하는 손가락이 된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런 표징과 놀라운 일을 자신의 능력이나 자랑, 영광으로 차용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시대나 이런 표징과 기사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표징과 기사를 자신의 것으로 전유하여 자기 팽창의 도구로 만드는데 있습니다. 그럴 때 성령의 역사는 악마의 잔치로 둔갑해버립니다. 신성한 힘을 사유화한다면 그것은 이미 마귀의 손아귀에 넘어간 것입니다. 사이비 종파의 행태가 이와 같을 것입니다.
이런 표징과 기사가 일어나면서 백성들 속에 불붙은 변화가 일어나자 성전 기득권자들은 사도들을 불온한 자들로 낙인찍고 예수의 부활을 선전하지 못하도록 옥에 가두고 신문까지 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절대로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하였습니다(4:18). 그러나 사도들은 멈출 수 없었습니다.
표징과 놀라운 일은 사도들의 적극적인 설교를 통하여 드러나기도 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의 존재 자체가 불러오는 영향력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병든 사람들을 거리에 메고 나가서, 침상이나 깔 자리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 그림자라도 드리우기를 바랐습니다.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바랬다는 것은 그 그림자만으로도 치유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와 신뢰 때문이었습니다.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에게 표징과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치료는 기법이 아니나 그 존재의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존재함만으로도 우리와 만나는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그런 인격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둘 수 없는 것
대제사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모두 시기심으로 가득 차서 들고 일어나서 사도들을 급기야는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주의 사자, 천사가 밤에 옥문을 열고 그들을 데리고 나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남김없이 백성에게 전하라고 하였습니다(19-20).
그 어느 것도 사도들을 가둘 수 없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기쁜 소식, 생명의 말씀을 가둘 수 없음을 여실히 드러낸 것입니다. 주의 사자는 인간과 하나님을 연결하는 초월적 기능으로 가로막힌 길이나 강을 지나갈 수 있게 합니다. 인생의 궁지에 몰리고 내가 가진 자원이 바닥나고, 심각한 대극의 갈등 속에 있을 때 그때 초월적 기능이 출현합니다. 그리하여 막힌 것들을 넘어가게 하고 넘을 수 없는 것들을 건너게 합니다. 내가 한계상황으로 갇힌다 할지라도 생명의 말씀, 기쁜 소식은 가둘 수 없습니다. 기쁜 소식이 전해질 수 있도록 초월적인 힘이 끼어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부과된 하나님의 일은 결코 멈출 수 없고, 결코 가둘 수 습니다. 옥에 갇힌다할지라도 하나님은 한계상황을 열어 그 길을 가게 하십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 인생 길을 든든하게 걸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