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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표선리에 대한 최초의 설촌은 이제로부터 약 600년전 고려 말 충렬왕 무렵에 지금의 <웃말개미 >에 설촌하고, 마을 이름을 촉지리(燭旨里)라 했다는 설이 있다. 웃말개미는 지금 흥아레미콘 공장이 들어선 표선리 2821번지 일대를 이름인데 이 부근에는 지금도 담굽에 대나무들이 자라고 일부 밭에서는 조개껍질이나 사금파리들도 나온다. 웃말개미란 그 어원부터가 위에(上) 있는 말(마을)을 이름이고, 개미란 개마, 즉 고원(높은 언덕)이란 뜻으로 해석되어 여기 오래 전에 마을이 있었으리라는 추측을 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지금 이 부근은 과수원이나 잡초지로 변해있고, 여기에서 이렇다할 물적증거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후 옮겨 왔다고 전해지는 <안가름 >에서 조사팀은 지난 연말에 신석기 시대의 유물인 돌도끼 1점을 찾아내었고 최초의 포제단이라는 제주민속촌 상류의 <고분쟁이 동산 >에서는 [곽지(郭支) 1식] 토기편 여러 점을 찾아내는 성과를 얻었다. 이런 사실은 이미 도내의 일간지들이 보도한 바('96. 1. 24일자)있는데 그 내용에 따르면 '표선면 표선리 마을 안에서 2천년 전에서 1천7백년 전 사이에 쓰였던 돌도끼와 무문토기 조각들이 발견돼 당시에도 이 지역에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 이 기사는 또 '표선면 사무소 서쪽 100m 지점(속칭 : 안가름) 현순화 할머니(70)의 과수원에서 발견된 돌도끼는 잘다듬어진 것이었으며 무문토기 편은 황갈색의 점토에 가는 모래가 섞인 [곽지 1식] 토기의 조각으로 기원후 300년까지 도내 주민들이 사용했던 것들'이라고 부연하고 있다.
이같은 무문토기는 과거 천미천(川尾川)을 끼고 이 마을과 가까운 성산읍(城山邑) 온평리(溫坪里) 혼인지의 동굴 속에서도 발견된 바 있는데 이번에 표선리에서도 찾아내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제주대박물관의 강창화 연구원은 "동굴유적에서 무문토기가 발견된 것은 일시적 거주의 흔적으로 볼 수 있지만 밭에서 출토됐다는 것은 당시 그곳에서 집을 짓고 살았다는 추정을 할 수 있게 한다."고 했는데 실제로 <안가름 >이라는 밭은 아직도 옛날의 주거형태를 엿볼 수 있어 발굴조사의 필요성이 있는 장소이다. 어쨌든 이번 유물·유적들의 발굴은 표선지역의 설촌연대를 훨씬 옛날로 올려놓은 셈이 되는데 <남추곶 >의 나무를 베어내어 9만여 평의 표선해수욕장을 하루밤 사이에 메워버렸다는 이 마을 <설맹디할망 >의 전설과 함께 지대한 관심사로 남게 되었다.
<안가름 >에서 뿐만 아니라 표선면사무소 정문에서 길을 건너 동편의 <뒷가름 >의 과수원에서도 조선시대의 자기 파편들은 지금도 무수히 나오고 있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안가름·뒷가름이 마을의 중심지가 될 무렵 속칭 '상뒤(鄕頭)동산'을 경계로 그 동쪽을 영남리(永南里), 서쪽을 左善里(좌선리)라 하였는데 경민장 1인이 치리(治理)하였으나 두 마을 간에는 수시로 파쟁과 갈등이 빚어져 오다가 한일합방과 동시에 表善里(표선리)로 통합되어 면소재지가 되었다고 한다. 한일합방 당시 경민장은 고봉백(高奉伯)씨였는데 그는 연임하여 1년동안 이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1793년(조선조 정조 17년)에 편찬한 <읍지(邑誌) > <旌義縣(정의현) >조에는 중면(中面)에 속했던 <표선리(表先里) >는 "관문(官門) 남거(南距) 17리에 있으며 민호는 74호, 그중 남자의 수는 258명, 여자는 317명"으로 나타나 있다.
이 무렵 표선리 가까운 세화리(細花里)는 민호 77호에 남자 206명, 여자 242명이 살았었으며 토산리(兎山里)에는 88호에 남자 264명, 여자 346명이 살았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 지금의 가시리(加時里)로 보이는 가시악리(加時岳里)에는 민호 87호에 남자 213명, 여자 275명, 관문의 서쪽 13리에 있었던 안좌악리(安坐岳里)에는 민호 43호에 남자 100명, 여자 142명이 살았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무렵 부근의 유적으로는 독자봉(獨子峰)과 달산봉(達山峰), 토산봉(兎山峰)에 각각 봉수대가 있었으며 말등포(末等浦)와 천미(川尾), 소아로(所 路)에 연대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 남아있는 유적들도 당시부터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표선리는 조선시대의 옛지도에는 당포(唐浦)와 함께 <표선지촌(票先旨村) >이라고 표기된 예도 있어 그 무렵에는 <표선리(表先里) > 혹은 <표선지촌(票先旨村) >으로 불리워 왔음을 알아보게 한다. 일부 지도에는 지금 표선리의 위치에 <표립촌( 立村) >이라고 표기된 예도 있음을 덧붙여 둔다. 일제식민지시대가 되면서 표선리는 갑자기 인구와 호수가 불어나게 되는데 1930년 표선리는 285호에 1,388인으로 인구가 불었음을 볼 수 있다. 이 무렵 세화리는 250호에 1,048인, 토산리는 150호에 801인, 가시리는 341호에 1,582인이었으며 가까이 하천리가 생겨 155호에 776인이 살고 있었음도 나타나 있다.
이 마을의 연혁에 따르면 일제 말기인 1940년대 초(5대 송방식 이장 당시) 표선리의 전호수는 300호가 되어 이때 동상(東上), 동하(東下), 서상(西上), 서하(西下)등 5개 이사장제(理事長制)를 도입하여 25개 반을 관리하도록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마을의 한지동(漢池洞)까지를 포함하여 지금까지 5개동으로 다스려지는 시초가 이 시대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표선리 중심가에 상가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도 1914년 일주도로가 뚫리고 1917년 표선리에서 성읍 장터로 길이 연결된 무렵인 1910년대 초부터였다. 1925년에는 주재소가 지금의 표선면사무소 앞 노인정 자리로 옮겨오고 1934년에는 면사무소까지 지금의 제주은행 표선지점 자리로 옮겨왔다. 그후 1937년에는 당시 공립 정의보통학교(1909년 성읍에서 개교한, 제주시 제북교(濟北校) 다음으로 역사가 오랜 학교)가 현재의 표선초등학교 자리로 옮아 왔고, 그에 앞서 1927년에는 사설 우편소가 현 동하동(東下洞) 네거리 남쪽에 신설됐다.
1915년께부터 표선리는 새로운 인구의 유입과 당개포구를 근거지로 한 어장의 형성등으로 차츰 상가가 들어서기 시작했으며 1917년에는 현재의 네거리 일대에서 각 2일과 7일에 표선 오일장이 서기 시작했다.
대정(大靜)에서 온 윤정학(尹禎學)씨가 현재의 네거리 부근 현대여관 앞쪽에서 석유와 잡화를 파는 가게를 낸 것을 시초로 형성되기 시작한 상가는 일제 전성기에 애월읍 하귀리 출신의 송권은(宋權殷)씨와 일본인 우에니시(植西 藏)가게의 경쟁시대가 되면서 더욱 번창한다. 이 무렵 포목가게의 융성은 여기가 인근 마을들의 대표적 소비시장이었음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한편 이 무렵 지금의 신협 동쪽 50m 거리에 있던 송남명씨의 남명식당은 표선 돼지고기 맛을 전도에 알린 대표적 식당이었다.
표선리 본동의 서쪽 바닷가에 한참 떨어져 있는 한지동은 지금으로부터 250년 전에 박춘호(朴春好)씨가 지금의 장소(가마리(加麻里) 동쪽 경계)에 입주하면서 설촌이 되었고 지금은 넙치등 양식어업의 주요장소가 되어 있다. 한편 당포(堂浦)는 조선시대부터의 포구이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의 전복 채취선의 근거지가 되고 일본을 왕래하는 여객선 출입이 빈번해지면서 취락이 형성되었는데 지금도 1일 30∼50척 어선이 드나드는 좋은 포구이며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횟집 군락마저 형성되어 있다.
이 마을의 입향 성씨들을 다음에 정리하였으며 역대이장과 그의 행적들은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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