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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 6주의 비밀과 귀주대첩의 진실
고려의 서희장군을 영웅으로 만든 강동6주나 강감찬장군을 영웅으로 만든 귀주대첩은 학교수업을 통하여 적지아니 배워왔습니다. 그리고 별 저항없이 그 장소가 평안북도의 의주 주변에 있었을것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어딘가 석연치않은 강동이라는 단어때문에 찝찝한 기분을 떨쳐버릴수가 없었던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던중 요즘 천추태후라는 역사드라마를 통해서 서희장군이 등장하고 강동6주가 다시 등장하여 민족의 아프던 추억을 되살려 준것입니다. 그런데 어쩐지 어색한점이 많이 보이는것입니다. 역사서를 쓰던 당시의 상황이 여의치못하여 불가피하게 바른말을 기록할수가 없었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촘촘히 따져보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되어 이 글을 씁니다.
만약 고려의 천리장성과 강동6주가 불가분의 관계라면 고려천리장성이 한반도의 북쪽으로 천여리나 멀리 있었다고 주장한만큼 당연히 강동6주의 위치도 요동반도에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하는것입니다. 그러나 지명을 옮기면서 일부는 확인이 어렵도록 가명을 썻기때문에 사료를 추적하는데 애로가 많았습니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같은 자국의 역사서를 믿지못하고 타국의 역사서에 의존해야하는 비극을 다시는 되풀이 해서는 안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당초에 강동6주는 이렇게 등장합니다.
서기959년 고려광종10년에 왕이 병을 빙자하여 요나라에 입조할수 없음을 사신을 통하여 통보하자 요나라 목종은 요하 동쪽의 강동6주의 성을 침공하도록 명한것입니다. 당시의 지명중 <<속,자치통감>>이 기록한 화주.용주.통주.철주등은 거란지리지도에서 확인할수 있으나 귀주와 곽주의 지명이 지도에 없어 사료들을 검토한 결과 귀주를 요양,곽주를 갈사관이 설치되었던 개주하 북변으로 보았습니다.
<<속자치통감>> 卷第三十 宋紀三十
己未(959),高麗王詢遣刑部侍郎田供之奉表於遼,稱病不能朝。遼主怒,命取興化、通州、龍州、鐵州、郭州、龜州六城。
기미, 고려왕 순(詢)이 형부시랑 전공을 시켜 요나라에 표를 보내, 병을 빙자하여 입조할 수 없다고 하자, 요주(遼主)가 노하여 화주, 통주, 용주, 철주, 곽주, 귀주 6성을 취하도록 명하였다. (고려 광종 10년)
거란지리지도에서 찾아본 고려강동6주(강동이란 요하의 동쪽을 이르는 말. 필자주) 크릭하면 확대됩니다
위치를 찾기 어려웠던 곽주에 대하여
<<대청일통지>>는 발해로부터 얻은 청나라의 경내에 있던 세곳의 지명, 즉 평양. 곽주. 모주 등이 있는데 곽주는 압록의 북에 있다고 하고, 모주는 압록의 서쪽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를 조선계의 현 압록으로 비정한다면 역시 의심스러운 기록이라고 하였습니다.
右見淸一統志 得渤海之地於我國境內者三 曰平壤曰郭州曰慕州 而謂郭州在鴨綠之北 慕州在鴨綠之西 則亦可疑也
이천 설봉공원에 있는 복천 서희선생 동상
***거란군의 일차침입당시 서희와 소손영과의 회담내용
고려사절요 제2권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계사 12년(993), 송 순화 4년ㆍ거란 통화 11년
煕曰,非也,我國,卽高勾麗之舊也,故號高麗,都平壤,若論地界,上國之東京,皆在我境,何得謂之侵蝕乎,且鴨綠江內外,亦我境內,今女眞,盜據其間,頑黠變詐,道途梗澁,甚於涉海,朝聘之不通,女眞之故也,若令逐女眞,還我舊地,築城堡,通道路,則敢不修聘,將軍如以臣言,達之天聰,豈不哀納,辭氣慷慨,遜寧,知不可强,遂具以聞,丹帝曰,高麗,旣請和,宜罷兵,煕,留丹營,七日而還,王,大喜,出迎江頭,卽遣侍中朴良柔,爲禮幣使,入覲,煕,復奏曰,臣,與遜寧約,盪平女眞,收復舊地,然後朝覲可通,今纔收江內,請俟得江外,修聘未晩,王曰,久不修聘,恐有後患,遂遣之。
서희가 말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바로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런 까닭으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만약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上國 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의 지경(地境)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침식했다고 이르느냐. 더구나 압록강 안팎 또한 우리나라의 경내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에 점거하여 교활하고 변덕스럽게 길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여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게 되었으니, 조빙이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쫓아 버리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 주어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한다면, 감히 조빙을 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신(臣)의 말을 귀국의 황제에게 알린다면 어찌 딱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
서희가 다시 아뢰기를, “신이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소탕하여 평정하고 옛 땅을 수복한 후에 조빙을 통하겠다.' 하였는데 이제 겨우 압록강 안쪽만 수복하였으니, 청컨대 강 바깥쪽까지 수복하기를 기다렸다가 조빙을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왕이 말하기를, “오래도록 조빙을 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다." 하고 마침내 박양유를 보내었다.
***당시 압록강은 요하로 추정됨 필자주
-국내 정설로 되어있는 강동 6주-
이 땅은 압록강 동쪽 280여 리, 곧 홍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천), 철주(철산), 귀주(구성), 곽주(곽산)이며, 이 강동 육주의 북쪽 국경에 쌓은 장성이 고려의 천리장성이다.
고려는 요나라(거란)의 1차 침입 때 서희가 담판하여 요나라과 통교할 것을 조건으로 요나라로부터 얻은 강동에서 여진족을 몰아낸 뒤 994년 장흥진(長興鎭, 태천), 귀화진(歸化鎭, 위치 미상), 귀주(구주), 곽주에 성을 쌓았고, 995년 다시 안의진(安義鎭, 안주), 흥화진에, 996년에는 선주(宣州, 선천)·맹주(孟州, 맹산)에 성을 쌓고, 요나라에 적의를 보였다.
그런데 그 뒤에도 고려가 송나라와 친선 관계를 이어가며 요나라와 교류하지 않자 요나라는 불만을 가졌다. 이에 요나라는 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1010년 요나라 성종(聖宗)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하였다. 이때 요나라 군대의 뒤에서 양규가 선전하자 퇴로가 끊길 수도 있음을 염려한 요나라 군대는 고려와 강화하고 퇴각하였다.
여러 차례 소규모 전투가 벌어지다가 1018년 요나라는 다시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였다. 개경 부근까지 진입한 요나라 군대는 도처에서 고려군의 저항을 받고 퇴각하던 도중 1019년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귀주에서 거의 전멸하였는데, 이를 귀주대첩이라 한다.<위키백과 에서>
이후 두 나라는 오랜 전란에 지쳐 화의를 도모하여, 고려는 요나라의 연호를 쓰기로 하고, 요나라는 강동 6주 반환의 요구를 철회함으로써 강동은 계속해서 고려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아울러 고려에서는 요나라와 여진족을 막으려고 흥화진 북쪽의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게 된다.
지도자료:엔싸이버백과 글머리에 강동6주가 압록강 동쪽 280리의 땅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도에 보이는 흥화진이 280리가 될까요? 너무도 수긍할수 없는 주장을 늘어놓고 이걸 믿으라고 합니다. 잘못된것이 분명하면 신속히 바로 고쳐야 합니다. 정작 일을 해야할사람들은 눈을감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고려는 천추태후의 아들 목종이 등극한 이후로 천추태후의 세상이 되었고, 조정에서는 하루도 정쟁이 없는 날이 없었습니다.하여 성질이 불같은 강조는 위정자들을 미워하여 반란을 이르키게 됩니다.
이후로 강동 6주는 강조가 반란을 이르켰기때문에 그를 치죄한다는 명목으로 거란의 침입을 받게 되는데 그해 기유년은 고려 7대 목종 12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해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1월 '강조(康兆)의 쿠데타'였습니다. 서북면 도순검사(都巡檢使) 강조는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서울로 들어와 목종을 몰아내고 현종을 새 왕으로 세운 일입니다. 그는 목종을 독살하고 정권을 잡았으며,그 와중에 한때 하늘을 찌르는 권세를 누렸던 45세의 천추태후(목종의 어머니)는 권좌에서 밀려났고,그의 정부(情夫) 김치양은 태후가 낳아준 6살짜리 아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때는 거란이 북쪽에서 발호하던 전란의 시절이었습니다. 요수의 동쪽 소위 '강동육주(江東六州)'를 요구하며 고려를 괴롭히던 거란은 이번에는 강조의 쿠데타를 처벌하겠다며 다시 강을 건너온것입니다. 바로 다음 해 1010년 11월 거란 임금 성종이 40만 군대를 끌고 고려를 침입합니다. 거란군을 여러 차례 물리쳤던 강조는 적을 깔보고 바둑을 두다가 그만 창졸간에 적군의 포로가 됐습니다.
거란군 포로가 된 고려군 총사령관은 양탄자에 둘둘 말려 거란 왕 앞에 던져졌고. 거란 성종은 그를 풀어 놓고 "네가 나의 신하가 되겠느냐?"고 묻자.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고 강조는 대꾸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바로 아래 부사(副使) 이현운은 "두 눈이 이미 새 세상을 보았으니 어찌 옛 산천을 그리워하겠소!"하며 신하가 될것을 애걸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두 사나이의 생과 사가 갈렸지요. 숭덕궁주라면 무모하리만큼 충성심을 보였던 강조도 결국은 이렇게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거란은 또다시 1018년 고려가 약속과 달리 조공도 않고 강동육주도 돌려주지 않는다며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이때 강감찬과 강민첨 등은 곳곳에서 거란군을 격파했고, 흥화진에서는 냇물을 막았다가 갑자기 터트려 거란군을 혼란에 빠트려 무찔렀습니다.그리고 패퇴하는 적군을 귀주에서 섬멸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10만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명이었습니다.
그의 승리는 역사에 '귀주대첩'이라 기록됐고,오늘날 그가 태어났던 자리에는 낙성대라는 사당이 세워져 있습니다. 서울의 전철 2호선 낙성대역에서 서울대 뒷문으로 가는 길목입니다. 이 시기를 오늘 우리 역사책은 '거란과의 30년 전쟁'(993~1019년)이라 표현합니다. 그리고 꼭 한 세기 뒤 이번에는 여진족의 금(金)이 거란족의 요(遼)를 물리치고 중국의 송나라를 제압해 남쪽으로 밀어붙인 다음,고려의 굴복을 요구합니다. 이때 거란군에는 항복하지 않았던 고려도 1126년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거란의 침략은 강조의 쿠테타를 부르고,여진족의 위협은 이자겸의 난(1126년)과 묘청의 난(1135년)으로 이어집니다. 국내의 분열은 외환을 부르고 외부의 위협은 국내의 긴장과 갈등을 고조시키는 기폭제가 됩니다. 따라서 요즘의 국회의 분열이 외환을 부를것이라는 국민들의 걱정을 마이동풍으로 흘린다면 나라가 공멸하는것은 순간일것이라는 예고도 헛된말이 아닐것입니다.
귀주 대첩 (제3차 고려-거란 전쟁의 일부) | |||
귀주 대첩의 주역인 강감찬 | |||
귀주 대첩(龜州大捷)은 1018년 고려 현종 때 요나라(거란) 침략군을 귀주에서 물리쳐 승리한 전투이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부터 거란과는 거리를 두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거란이 멸망시켰고,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고려는 북진 정책을 국시로 내걸었기 때문에 국경을 마주한 거란과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거란 입장에서는 이러한 고려의 정책과 더불어 송나라와 고려가 연합할 경우, 고려가 자신들의 뒤를 칠 것을 우려하여 사전에 고려를 완전히 자신들의 속국 정도로 제압하든지 최소한 송나라와 거리를 두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거란은 고려를 3차례 침공하였다.
993년(성종 12) 1차 침입에서는 소손녕이 이끈 거란군에게 승리한 뒤 서희가 담판을 벌여 강동 6주를 획득하였고, 1010년(현종 1) 2차 침입에서는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공해 왔으나 별 소득없이 돌아갔고, 1018년(현종 9년) 3차 침입에서 강감찬이 귀주대첩을 이루었다. 이때 거란은 고려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하며 소배압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게 하였다.
이에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로 봉하고,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소배압을 막도록 하였다. 고려군은 압록강 유역 흥화진의 삼교천(三橋川)에서 거란군과 맞서 싸워 대승하였으나, 거란군은 수도인 개경을 목표로 우회하여 계속 남하하였다. 남하하던 거란군은 자주(慈州)에서 다시 강민첨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큰 타격을 받았으나 계속 남하하여 개경 근방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병력의 손실이 크자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 신은에서 회군하여 가다가 청천강 유역의 귀주에서 매복하고 있던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패하여 달아났으며, 특히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마판관 김종현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하였다. 이것을 귀주에서 크게 이겼다고 해서 귀주대첩(龜州大捷)이라고 부른다고 한다.(출전: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에서)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6성 내용
●고려사절요 제2권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갑오 13년(994), 송 순화 5년ㆍ거란 통화 12년
命平章事徐煕,率兵攻逐女眞,城長興歸化二鎭,及郭龜二州。
평장사(平章事)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공격하여 쫓아내고, 장흥진(長興鎭)ㆍ귀화진(歸化鎭) 두 진과 곽주(郭州 )ㆍ귀주(龜州) 두 주에 성을 쌓았다.
●고려사절요 제2권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을미 14년(995), 송 지도(至道) 원년ㆍ거란 통화 13년
是歲,命平章事徐煕,帥兵,城安義興化二鎭。遣李知白,如契丹,貢方物。
이해에 평장사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안의진(安義鎭)ㆍ흥화진(興化鎭) 두 진에 성을 쌓게 하였다.
6주의 명칭 연혁
이제, ‘서희 수복 6주’의 위치를 찾아 봅니다. 6주의 위치를 찾는데 있어 다행스러운 것은 당이 고구려를 강점한 이후 붙인 지명을 고려도 그대로 사용하였고, 요나라, 원나라도 지명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고 원사에 기록되어 있는것입니다. 요사와 원사의 지리지에는 그 명칭과 관할하는 현(縣)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 요사, 원사 등에 기록된 지명과 관할하는 현의 지명은 원래 위치를 찾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먼저 ‘서희의 강동 6주’부터
* 흥화주(興化州)
<고려사절요> 권3 현종 원년(1010년)
11월 辛卯,契丹主,自將步騎四十萬,號義軍天兵,渡鴨綠江,圍興化鎭,巡檢使,刑部郞中楊規,與鎭使,戶部郞中鄭成,副使,將作注簿李守和,判官,廩犠令張顥,嬰城固守。○壬辰,崔士威等,分軍出龜州北,恧頓,湯井,曙星,三道,與契丹戰,敗績。
=> 이 기록으로 보면, 강동 6주중의 하나인 흥화진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쪽에 있습니다.
압록강을 건넜다는 것을 기준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당시 양국의 국경은 압록강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여기에도 군을 나누어 귀주 북쪽으로 보냈다는 말이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단정하기 어려운 대목이지만 일단 요하를 건넜고, 주변으로 용주.통주.귀주등이 나타나는 증세로 보아 그 중심인 화주로 추정키로 하였습니다.
** 용주(龍州)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龍州 <요사>/지/권38, 지제8 지리지2/동경도/용주
龍州,黃龍府.本渤海扶餘府.太祖平渤海還,至此崩,有黃龍見,更名.保寧七年,軍將燕頗叛,府廢.開泰九年,遷城于東北,以宗州、檀州漢戶一千復置.統州五、縣三:
黃龍縣.本渤海長平縣,併富利、佐慕、肅慎置.
遷民縣.本渤海永寧縣,併豐水、扶羅置.
永平縣.渤海置.
용주. 황룡부. 발해 부여부.(..) 황룡현, 천민현, 영평형 등 3개 현이 있다.
*黃龍府 本渤海扶余府,遼太祖平渤海,(..),即此,故城在今吉林農安縣,今遼寧省開原以北及吉林全境、內蒙古東境,皆其轄地(중국고대지명대사전)
황룡부 : 발해 부여부(..) 옛성이 현 길림 농안현에 있다. 현 요녕성 개원 이북 길림전역과 내몽골 동쪽이 모두 황룡부 관할이었다.
*永平縣 遼置,金省,今遼宁省鐵岭縣地(중국고대지명대사전)
영평현 요나라 설치. 현 요녕성 철령현이다.
즉, 용주는 현 길림성 농안현에 치소를 두고 요녕성 개원 이북 길림전역, 내몽골 동쪽을 관할한 것으로 보인다.
***통주(通州)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通州 (요사/지, 권38, 지 제8 지리지2/동경도/통주)
通州,安遠軍,節度.本扶餘國王城,渤海號扶餘城.太祖改龍州,聖宗更今名.保寧七年,以黃龍府叛人燕頗餘黨千餘戶置,升節度.[二一]統縣四:
通遠縣.本渤海扶餘縣,併布多縣置.
安遠縣.本渤海顯義縣,併鵲川縣置.
歸仁縣,本渤海強帥縣,[二二]併新安縣置.
漁谷縣.本渤海縣.
통주 : 안원군, 절도, 본래 부여국 왕성. 발해시대 부여성이라 부름. 태조가 용주로 개명, 통원현, 안원현, 귀인현, 어곡현 등 4개현이 있다.
*즉, 통주는 현 요녕성 개원현에 치소를 두고 개원 일대를 다스린 것으로 보인다.
**** 철주(鐵州)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鐵州 (요사, 지. 권38, 지제8, 지리지2/동경도 철주)
鐵州,建武軍,刺史.本漢安市縣,高麗為安市城.唐太宗攻之不下,薛仁貴白衣登城,即此.渤海置州,故縣四:位城、河端、蒼山、龍珍,[八]皆廢.戶一千.在京西南六十里.統縣一:湯池縣.
철주, 건안군, 자사, 본래 한의 안시현, 고구려 안시성, (..) 탕지현을 관할
*营口市基本概况 : 唐末,北方先后有契丹、女真、蒙古3个民族政权更迭,并在营口市境内设置地方 政权。辽将渤海国的一些州县迁到营口地域内,在今熊岳镇设卢州领熊岳县,在今汤池镇置 铁州领汤池县,耀州领岩渊县,归州领归胜县,另设曷苏馆大王府和辰州领建安县。(영구시 홈페이지)
영구시 기본개황 : 당말, 북방의 거란, 여진 몽고 등 3개 민족정권이 번갈아 일어날 때, 요나라는 발해의 주현을 영구시 경내에 옮겼다. 현 웅악진에 노주를 설치하여 웅악진을 거느리고, 현재의 탕지진에 철주를 설치하여 탕지현을 거느리고, 요주는 암연현을 거느리고, 귀주는 귀승현을 관할하고, 그 외에 갈소관대왕부와 진주(건안현을 관할)를 설치하였다.
http://www.runsky.com/homepage/dl/spec/2004/forum/cities/userobject1ai449765.html
즉, 철주는 현재 요녕성 남부 영구시 탕지진에 치소를 두고 영구시 일대를 관할한 것으로 보인다.
***** 귀주(龜州)
귀주는 강감찬 장군이 거란을 상대로 대첩을 이룬 전적지이므로 특별히 유의하여 찾아 보았다.
● 高麗史58卷-志12-地理3-058(고려사 58권 지제12 지리3)
龜州本高麗萬年郡成宗十三年命平章事徐熙率兵攻逐女眞城龜州顯宗九年爲防禦使. 高宗三年丹兵來寇州人拒戰斬獲甚多至十八年蒙兵來侵兵馬使朴犀盡力禦之力屈猶不降以功陞爲定遠大都護府. 後爲都護府又改定州牧.
귀주: 본래 고려 만년군, 성종13년 평장사 서희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여진을 축출하고 귀주성을 쌓다, 현종 9년 방어사. 고종3년 거란병이 침입해 항전하여 적을 베고 노획한 것이 많았다. 18년에 이르기까지 몽고병이 내침하여 병마사 박서(朴犀)가 진력하여 싸우고 항복하지 아니한 공로로 정원대도호부로 승격. 뒤에 도호부를 정주목(定州牧)으로 고치다.
귀주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는 귀주가 정원대호부와 정주목이 되었다는 내용이 입니다. 즉, 귀주가 정주(定州)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高麗史58卷-志12-地理3-020(고려사 58권, 지12 지리3)
定州古稱巴只[一云宣威.]靖宗七年爲定州防禦使置關門恭愍王五年陞都護府
정주, 옛 이름은 파지(일명 선위) 정종7년 정주방어사를 두고 관문 설치. 공민왕5년 도호부로 승격,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定州 (요사 지 권38, 지제8, 지리지2/동경도/정주)
定州,保寧軍.高麗置州,故縣一,曰定東.聖宗統和十三年升軍,遷遼西民實之.隸東京留守司.統縣一: 定東縣.高麗所置,遼徙遼西民居之.戶八百.
정주, 보령군, 고려때 주를 설치, 정동현이 있다. 요서 주민을 옮겨서 튼튼히 하였다. 동경유수사에 속하다. 호수는 팔백이다.
즉 요서주민을 옮겨서 튼튼히 한 것으로 보아 정주는 요서군과도 가까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정주의 위치는 아래의 요사 지리지 동경도 보주를 보면 정주와 보주와 연접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保州 (요사 지 권38, 지제8, 지리지2/동경도/보주)
保州,宣義軍,節度.高麗置州,故縣一,曰來遠.聖宗以高麗王詢擅立,問罪不服,統和末,高麗降,[七]開泰三年取其保、定二州,於此置搉場.隸東京統軍司.統州、軍二,縣一:
來遠縣.初徙遼西諸縣民實之,又徙奚、漢兵七百防戍焉.戶一千.
보주, 선의군, 절도, 고려때 주를 설치. 래원현이 있다.(..)통화말 고려가 항복하여 개태3년 보주 정주 두 개주를 취하여 이곳에 각장을 설치하다. 동경통군사에 속하게 하다. 래원현이 있다.
래원현, 요서 주민을 옮겨서 튼튼히 하다. 또 해(奚)의 한인 병사 칠백을 옮겨 방어하게 하다. 호수는 일천이다.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六 志第六 兵志下/五京鄉丁/東京 (요사 지 권36 지제6 병지 하 5경향정/동경)
東京,本渤海,以其地建南京遼陽府.統縣六,轄軍、府、州、城二十六,[五]有丁四萬一千四百.天顯十三年,太宗改為東京.
遼陽府: 定州定東縣丁一千六百. 保州來遠縣丁二千.
동경, 원래 발해영토. 그 땅에 남경 요양부를 설치. 6개현을 관할. (...) 태종때 동경이 되다.
요양부 : 정주 정동현 장정 일천 육백명, 보주 래원현 장정 이천명
귀주가 정주가 되고, 정원대호부(定遠大都護府)가 되었다는 기록에서 추정되는 것은 정주(定州)의 정동현(定東縣)과 보주(保州) 의 래원현(來遠縣)의 합성지명(定+遠)으로 보여 집니다.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은 바로 현재의 남경 요양부를 요 태종이 동경으로 고친 요양 관활인것으로 추정됩니다. 거란지리지도에서 래원과 보주는 압록강의 바로 북쪽에 위치하지만 배경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요양임을 설명하고있어 이를 택하였습니다. 적어도 귀주대첩이 이루어질만한 장소로는 요양정도가 적합한 위치이고 이곳으로 요나라는 자국의 백성들을 옮겨와 도시를 경영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곽주(郭州)
●高麗史58卷-志12-地理3-058(고려사 58권, 지12, 지리3)
郭州本高麗長利縣成宗十三年命平章事徐熙率兵攻逐女眞城郭州顯宗九年爲防禦使高宗八年以叛逆降稱定襄. 十八年避蒙兵入于海島元宗二年出陸隸隋州恭愍王二十年復郡號.
곽주. 본래 고려 장리현. 성종13년 평장사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여진을 축출하고 곽주성을 쌓음. 현종9년 방어사가 되고, 고종8년 반역하여 정양(定襄)으로 강등하여 부르고, 18년 몽고병을 피하여 해도(海島)에 들어갔다가. 원종2년 육지로 나온 뒤 수주(隋州)에 속하게 하고 공민왕 20년 다시 옛 군 이름을 되찾다.
***西至望平海口三百六十里, 東西南三面抱海. 舊志, 海在蓋州衛西十里, 又西十里爲歸洲,
<<구지>>에 의하면 봉천에서 서쪽으로 360리에 망평해구가 있고,동,서,남 삼면을 바다를 끼고 있는데, 개주위의 서쪽 10리에 바다가 있고, 또 그 바다에서 서쪽으로 10리에 귀주라는 섬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 귀주가 개주의 남쪽 뭍으로 옮겨젔습니다.)<<요사 지리지>>이곳이 몽고병을 피하여 해도로 들어갔다가 원종2년에 육지로 나왔다는 귀주(歸洲)로 봅니다.이후 수주로 바뀌고 후에 다시 원 이름인 곽주로 되찾았다는것입니다.
●新校本遼史/本紀/卷十五 聖宗六/開泰二年 (요사 본기 권15 성종6/개태2년)
丙寅,詳穩張馬留獻女直人知高麗事者.上問之,曰:「臣三年前為高麗所虜,為郎官,故知之.自開京東馬行七日,有大砦,廣如開京,旁州所貢珍異,皆積于此.勝、羅等州之南,亦有二大砦,所積如之.若大軍行由前路,取曷蘇館女直北,直渡鴨淥江,並大河而上,至郭州與大路會,高麗可取而有也.」上納之
병인, 장마류가 고려사정을 아는 여직인(주1)을 바쳤다. 왕(요의 성종)이 묻자 대답하기를 “신이 3년전 고려의 포로가 되어 낭관이 되었던 고로 압니다. 개경 동쪽에서 말을 타고 7일을 가면 대채가 있는데 크기가 개경정도 되고 여러 주에서 보낸 진귀한 공물로 쌓여 있으며, 승주, 나주 등의 남쪽에 또한 두 개의 대채가 있는데 공물의 쌓인 바가 그와 같습니다. 만약 대군이 전로를 따라가서 갈소관여직(주2)의 북쪽을 얻고, 압록강을 곧바로 건너서 대하(大河)(주3)를 거슬러 올라가면 곽주와 대로(大路)(주4)를 만납니다. 고려를 가히 취할 수 있습니다.” 왕이 받아 들이다.
*필자 주 : 주(1) 여직(女直)은 여진(女眞)과 같다. (2)갈소관여직은 현 요녕성 남부 영구지구 개현 남부와 복현, 영연윤 이북에 있었었다고 한다.(갈소관로치소고 : 동만군, 북경문물, 1992년 제1기).
* 曷苏馆路治所考 董万军 《北方文物》1992年第1期(갈소관로치소고, 동만군)
辽代曷苏馆女真,金曷苏馆路治所,确在营口地区盖县南部和复县永宁澗以北地域内设置
요대의 갈소관여진, 금대 갈소관로 치소는 영구지구 개현 남부와 복현 영영윤 이북지역에 설치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http://www.bjkg.com/wenxzl-sub1.asp?id=812
●金史 卷024志第五 地理上(금사 권24 지5 지리 상)
盖州,奉国军节度使,下。本高丽盖葛牟城,辽辰州。明昌四年,罢曷苏馆,
개주, 봉국군절도사, 하. 본래 고려 개모성, 요나라 진주. 명창4년 갈소관을 폐하다.
맺는 말
지금 이나라는 위기에 처해있다고 봅니다. 그것도 외부의 사정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분열된 국론때문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어줍지않은 시론을 펴자는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다보니 사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역사는 반면교사라는 철학을 미량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하여 필자도 이나라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여 한평생을 보내는 같은 동포의 일원의 자격으로 호소하고자 합니다. 당리당략을 위한 소인배들의 정쟁을 당장 걷우시기 바랍니다.가정의 불화는 행복을 파괴할것이고 국정의 내분은 너와내가 같이 망하는 공멸을 가져올것입니다. 글을 펼치는 과정에서 혹 잘못된 판단이 있을수도 있습니다.요하의 동쪽을 기준으로 한 지명이라는 범위를 넘지않도록 고려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