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흐름속에 사라지고 있는 흙돌담길은 현란하지 않게 주변 경관과 어울리도록 은은한 멋을 풍기게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켜켜이 쌓은 돌담 세월을 품다. 고향이 시골이 아닌 사람이라도 ‘고향’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먼저 한적한 시골 마을에 구불거리는 돌담길을 돌아 대문이 활짝 열린 옛집을 연상하곤 한다.
돌담 안에 있는 커다란 감나무는 담장 밖으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가지마다 주렁주렁 빨간 감을 매달고 있다. 돌담을 기어오르는 담쟁이 넝쿨, 시커먼 돌을 초록색으로 뒤덮는 이끼, 돌담 위로 고개를 쑥 내민 해바라기 등 정겨운 모습이 절로 상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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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 함라마을 돌담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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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절, 가로등이 켜지면서 개 짖는 소리와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렸었다. 시간이 흐르면 다듬이 소리, 통금시간을 알리는 딱딱이 소리도 들려왔다. 동네 아이들은 바로 이 흙돌담 골목길에서 한데 어울려서 놀았다. 혼자 놀기보다 여럿이 모여야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컴퓨터 게임도 장난감도 없었지만 주변에 널린 것들을 손쉽게 놀이 도구로 변신시켰다. 돌이나 깨진 벽돌을 동그랗게 다듬어 비석치기를 하고, 헌 공책을 뜯어 딱지를 접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산 구슬 몇 개만 있어도 세상을 다 얻은 듯 뿌듯했다. 이 모든 놀이가 돌담길에서 이루어졌다. 따로 놀이터가 없었지만 돌담길이 아이들에겐 놀이터보다 좋은 공간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놀다 보면 어느 새 하루 해가 저물었다. 돌담길 끝에서 저녁 먹으러 오라고 부르던 어머니의 음성이 지금도 귓가에 아련하다. 비스듬이 경사진 골목의 끝, 높다란 양쪽의 돌담길 끝. 서녘으로 비끼는 샛노란 햇살이 남은 물기를 털어내느라 분주한 빨래들을 이고 앉는다. 길 건너편 고층아파트가 들어선 지붕 낮은 집들의 애환이 골목길 들어서면 금방이라도 얼싸 손 잡아줄 듯 정겨웁다.
담은 집을 보호하는 울타리지만 이웃집과 소통하는 역할도 했다. 길 쪽으로는 담이 높지만 집과 집 사이의 돌담은 마당이 들여다보일 정도의 높이가 대부분이다. 떡을 하거나 부침개를 부친 날이면 돌담 위로 소쿠리가 오갔다. 그 안에 정이 오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햇빛을 받아 따뜻해진 돌담에 고사리나 취나물 혹은 깨끗하게 빤 운동화를 널어 말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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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 병영마을 돌담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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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는 고풍스러운 전통 가옥이 여러 채 있어 돌담과 잘 어우러진 풍경을 빚어 낸다. S자로 구부러진 마을 안길을 따라 거닐다 보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 느껴진다. 타임머신을 타고 1970년대로 돌아가 초저녁의 달동네 골목길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문화재청은 고가, 감나무, 담쟁이 넝쿨과 어우러진 옛 ‘돌담길’이 문화재로 등록, ‘고향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추억의 명소로 되살아나게 할 수 있도록 2006년부터 등록문화재로 지정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고성 학동마을 옛 담장 등 모두 18건의 마을 돌담길을 문화재로 등록함으로써 삶의 패턴이 현대화되면서 어쩌면 우리 대에서 사라져 버릴 수 있는 ‘돌담길’이 이젠 우리 아들, 딸에게도 놀이와 추억의 공간으로 보존되고 있다.
학동마을 옛 담장(경남 고성군 하일면 학림리, 등록문화재 제258호), 황산마을 옛 담장(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등록문화재 제259호), 단계마을 옛 담장(경남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 등록문화재 제260호), 한개마을 옛 담장(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등록문화재 제261호), 지전마을 옛 담장(전북 무주군 설천면 길산리, 등록문화재 제262호), 함라마을 옛 담장(전북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등록문화재 제263호), 병영마을 옛 담장(전남 강진군 병영면 지로리, 등록문화재 제264호), 삼지천마을 옛 담장(전남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등록문화재 제265호), 옻골마을 옛 담장(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등록문화재 제266호), 상서마을 옛 담장(전남 완도군 청산면 상동리, 등록문화재 제279호), 반교마을 옛 담장(충남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 등록문화재 제280호), 남사마을 옛 담장(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등록문화재 제281호), 사리마을 옛 담장(전남 신안군 흑산면 사리, 등록문화재 제282호), 오운마을 옛 담장(경남 의령군 낙서면 전화리 601 외, 등록문화재 제365호), 상학마을 옛 담장(전북 정읍시 덕천면 상학리 633 외, 등록문화재 제366호), 사도, 추도 마을 옛 담장(전남 여수시 화정면 낭도리 180 외, 등록문화재 제367호), 죽정마을의 옛 담장(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188-6 외, 제368호)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지전마을 옛 담장은 담장과 외벽의 기능을 하는 담장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지전’이란 이름은 이 곳이 예전부터 지초(芝草)가 많이 나던 곳이라 하여 붙여졌다고 전해지며 마을의 형성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마을 옆을 흐르는 남대천가의 오래된 여러 구의 느티나무가 마을의 역사를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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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양 창평 삼지천마을 돌담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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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것은 약 320년 정도로 이러한 나무들이 제방 아래에 있다는 것은 남대천이 마을로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방을 쌓은 후 현재의 위치에 식재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마을 뒤로 소백산 줄기가 이어지고 있으며 마을 뒷산에서 발원하여 마을의 좌측을 지나가는 남대천은 여름철 관광지로서의 역할을 할 만큼 우수한 경관을 뽐내고 있다.
마을은 크게 4개의 군락으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마을의 공간구조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개량 기와집 형태의 가옥이 주종을 이루는 전형적인 농가 주택의 면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담장은 본래 기능인 주택의 경계 역할을 하는 담장과 외벽의 기능을 하는 담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담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토석담은 흙과 자연석을 혼용하여 평쌓기를 한 것으로 이어진 담장은 시각적 연속성을 주고 있으며, 담의 지붕은 한식기와가 아닌 시멘트 기와로 처리됐다.
전체적으로 전통 가옥, 남대천, 노거수와 더불어 마을 전체에 식재되어 있는 감나무는 한 폭의 풍경화를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이들과 어우러진 담장 또한 산골 마을의 전형적인 형식으로 아담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함라마을 옛 담장은 토석담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마을은 가운데를 흐르는 개천을 중심으로 천남과 천북으로 구분되었으나, 지금은 개천을 복개하여 예전의 모습은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마을주민들은 천남과 천북의 개념으로 마을을 인식하고 있다.
마을의 가옥은 1970년대의 건축물이 대부분이다. 다만 이런 가옥과 아울러 지정문화재로 되어있는 규모가 큰 와가가 4채가 있다. 문화재 자료인 조해영 가옥, 함열향교 대성전, 지방민속자료인 김안균 가옥, 익산시 향토유적인 이배원 가옥이 그것이다.
이들 가옥은 일제강점기 때 이 지방을 풍미하던 부호의 집으로서 한말과 일제시대 양식을 보여주는 민가들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민가를 중심으로 이 지역 대부호 가옥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담장도 그에 못지 않은 형태와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양옥에 비하여 한옥의 수가 많다.
대체적으로 토석담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막돌 담장이 2군데 정도 있다. 담장의 양식은 거의 흙다짐에 돌을 박은 형식으로 같은 시기에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높이는 1.6m 정도이며 담장의 지붕은 한식기와가 아닌 시멘트 기와를 써서 처리하였다. 일부 전돌을 막돌 대신 쓴 담장도 보인다. 담장의 형태는 기초를 두고 흙과 석재를 혼합해 쌓은 토석혼용 담장을 비롯하여 돌로만 쌓은 담장, 흙으로만 축조한 순수한 토석 담장 등이 있다. 높이는 1.3m에서 2.2m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전반적으로 농가의 담장이라는 점과 주택의 규모에 비해 높은 편이다.
세상엔 굽은 길이 있고, 곧게 뻗은 길도 있다. 멀리서도 또렷이 보이는 길이 있고, 길 옆에 가기 전까지 까마득히 보이지 않는 길이 있다. 화려한 문양의 극치를 달리는 꽃담을 향한 여정은 늘 이채롭고 더없는 유혹으로 손짓한다. /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