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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서울 동기몇명이 경주 남산 산행을 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비가 솓아지는 바람에 포기 하나 했는데 다행히
날씨가 산행하기 아주 좋다
서울서는 박봉, 상갑, 춘태, 황재윤, 기수 이렇게 5명이 왔다
석근은 일본 출장땜에 못온다고 연락왔다 .
산행 맨 김석근은 이번코스가 작년에 다녀간 그 코스기에 덜 섭섭할꺼다.
부산서는 규화가 참여키로 했는데 갑자기 비상으로 못와서 애석하다
경주는" 김현지"가 붙으려고 했는데 날씨땜에 포기하고
종석, 운석, 호상, 내 , 이렇게 참석해서 합 9명이 산행을 했는데 - -
경조회장 태용이가 두치를 맛있게 삶아서 보내주었고 오후 하산 뒤에는
상권집(강산식당)에서 동기회장 종욱이 주축으로 영양탕에 소주파티를
준비해 주었다.
주섭이, 규종, 상권, 동철, 희경, 순득이가 합류해서 2차 노래방까지 갔다.
이번코스도 전번 상갑이나, 석근이 안양산죽회 처럼 문화재 답사코스다
답사 코스
내남 용장리 주차장 - 설잠교- 용장사지- 삼륜대좌불-마애여래좌상 -
삼층석탑-연화대-비파골-금오봉정상-상사바위-바둑바위
-마애석가여래(큰바위부처님)-상선암-삼릉계석불좌상-선각여래좌상
-선각 육존불- 마애관음보살상-냉골 석조여래좌상-삼릉-경애왕릉
-삼체석불-지마왕릉 - 포석정 (총 4시간)
서울서는 새벽 7시에 출발하여 용장에 도착하니 10:40분쯤된다
용장 주차장에서 잠시 신라의 성지라 할수있는 남산을 오르는 마음가짐에 대해
다짐을 좀 하고 - - - - -
남산에 오르려면 먼저 마음속에 있는 모든것을 내려놓아야한다
그래야만 천수백년전 신라인의 마음 불심 문화가 보인다.
왜냐하면 경주남산은 바위하나 돌조각하나에도 신라인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놓았기 때문이다
1000여년 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길.
1000년 전 신라 사람들이 불심으로 드나들던 그때의 마음으로 - -
설잠교
들머리에서 약20분 정도 올라가면 설잠교가 나온다
여기에서 설잠교위를 건너 좌측 미륵의 세계로 오를수있는 수미산( 불국토)
을 향한다
경주의 불국사나 황룡사, 석굴암 등이 지배층의 대작불사로 왕족과 지배층의 공간이었다면
남산은 백성들의 불심을 보듬은 곳이었다. 왕족들이 화려하고 우람하고 거대한 절집을 세웠다면,
백성들은 아예 남산을 통째로 불국토를 이루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삼국통일의 와중에 전쟁터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을 백성들의 신산한 삶과
그들이 닿고자 했던 이상세계를 남산에 그려내려 했던 것은 아닐까.
남산의 숲길에서 저절로 부처를 만나러 오갔을 신라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렇게 예쁜 버섯이 있나 ?
아름다움 뒤에는 독이 있다 !
설잠교부터 5.16도로까지는 제법 가파른 길이다
절터 까지는 술 담배 고수인 박봉이 좀 힘들어 하더니
토끼처럼 잘만 다니네, 좋은것 먹는가보다
기수가 오늘 영 힘을 못하는데 아마도 어제밤
수상한 짓을 했나보다
저어기 숲사이로 사람들이있는 저곳이 "용장사지" 이다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때 창건된 사찰로 고승인 대현스님의
고사가 전해내려오고 있으나 지금은 쓸쓸히 크고작은
돌축대 일부만 남아있다.
또한 이 절에는 조선초기 세조때 매월당 김시습이 기거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쓴 절이기도하니
약 800여 년에 걸친 긴세월 동안 용장사가 존재했음을 알수있다 .
매월당 선생은 용장사 뜨락에 북향화(목련)을 심어 영월에 귀양가 있는
단종 임금을 그리워 했다고 한다.
목련은 꽃봉오리가 펴질때면 항상 북쪽을 향해 피어나기때문에
북에 있는 임금을 그리는 꽃의 별칭으로 붙여졌다.
참고로 저 아래 설잠교는 매월선생의 법명이 "설잠"이라 설잠교이다.
저- 위에 산 봉우리를 잘 보시면 하늘과 맞닿아있는 삼층석탑이 보이죠 - - ?
이 탑은 자연과 탑신이 일체가 되도록 두개의 기단으로 건축되었는데,
금오산 중앙 바위 봉우리를 하층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상층 기단을
다듬어 얹고 삼층석탑을 올렸는데,
이것은, 하층기단은 제석천을 지키는 수미산이고 탑위의 푸른하늘은
수미산정의 천상계로 서라벌 벌판을 미륵불이 굽어 살피는
불국토로 만들었다.
수미산 : 불교에서 말하는 미륵으로 가는산
사왕천 : 불교의 육욕중 첫번째 하늘로 사천왕이 다스리며 수미산의 중턱
도리천 : 수미산의 정상에 해당하며 제석천을 모시는 곳으로 석가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 환생한 곳이며
또한 선덕여왕이 도리천에 묻어달라한 그곳이다
이곳의 하루는 인간세계 100년에 해당하며 1,000세까지 머물수 있다(3,650만년)
제석천 : 불교의 수호신이며 수미산 꼭대기 도리천에 있는 하늘의 임금
야마천 : 공거천, 즉 천상을 말하며 이곳의 하루는 인간세 200년이고 2,000세까지 머문다(1억4천6백만년)
도솔천 : 인간세 에서 덕업을 많이 샇고 불심이 깊으면 도솔천에 태어나는데
미륵불이 계시고 천상인이 즐기는 곳이니 곧 불국이며 부처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곳은 용장사 터에 있는 삼륜대좌불로 보물 187호이다
자연바위의 기단위에 북 모양의 중대괴임을 하고 그 위에 원반석을
층으로 쌓은 이러한 양식은 우리나라에서 유래가 없는 특이한 형태다
삼륜의 대좌에 머리가 없는 좌불 이라 존명도 알수 없어 보는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기단부의 둥근 원반석 1층 2층은 보통모형이나 3층원반은 3겹 연꽃 방석 이다
윈쪽 어깨에 드리워진 가사끈의 수실이나 특이하게 흘러내린 가사의 자락들은
물결처럼 펄럭이며 무릎을 덮고 흘러내려 상현좌를 이루고 있는모습이 승상이란 말도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용장사에 대현스님이 계셨는데, 스님이 기도하면서 미륵장륙석상을
돌고 있으면 미륵 부처님 또한 스님을 따라 돌았다는 글이 있다.
삼국유사의 이야기처럼 이 석상이 미륵불이라 한다면,
기단석 위가 사왕천이 되고 처음의 둥근반석 위는 도리천,
두번째 반석 위는 야마천이 되며
마지막의 연화 원반대좌는 미륵보살이 계시는 도솔천이 된다.
이 엄청난 예술품, 천수백년전의 보물을 찬찬히 감상해 보시라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 보물 913호)
삼륜대좌불 옆에 아차 하면 못 보고 그냥 지나쳐버릴 바위벽 한켠에 숨이 막힐정도로
아름답게 부조된 부처님이 계신다.
오른쪽 어깨에서 내려오는 옷자락이 가슴부분의 옷깃 속으로 접혀들어간 점은 남산 미륵곡 보리사에 있는
석불좌상과 비슷하다. 그러나 옷 주름 표현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여러층단을 이루면서 부드러운 물결처럼
처리되어 섬세한 편이다. 왼쪽어깨 바깥부분에 글씨가 있는데 "태평 2년8월"에 무엇인가를 하였다는 내용인데
마멸이 심하다. 이 마애불은 당당한 자세의 불신표현이나 부드러운 옷 주름선의 흐름, 섬세한 조각기법등에서
통일신라 전성기 때 양식이 남아있으나 시대적으로는 8세기 중엽의 석굴암 조각보다 약간 후대로 보고있다.
(4층으로 착각 할수있다. 밑부분은 기단부 임 - 기단부는 갓이 없는것으로 알수있다)
자 - ! 여기가 아까 저 밑에서 올려보았던 용장사지 삼층석탑 (보물 186호 )
아까 이야기 했던 말을 다시한번 살펴 보며 공부해 보자
이 탑은 자연과 탑신이 일체가 되도록 두개의 기단으로 건축되었는데,
금오산 중앙 바위 봉우리를 하층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상층 기단을
다듬어 얹고 삼층석탑을 올렸다.
이것은, 하층기단은 제석천을 지키는 수미산이고 탑위의 푸른하늘은
수미산정의 천상계로 서라벌 벌판을 미륵불이 굽어 살피는
불국토로 만들었다.
잠깐 ! 위와 아래 사진을 자세히 보라 - ! 톱니같은 자국이 보이죠 ?
남산에는 이렇게 갈라진 바위들을 많이 볼수있다.
이것은 옛 장인들이 바위를 자를때 아래 사진처럼 구멍을 파서
콩을 채워넣어 물을 부으면 그 콩이 불어나서 바위를 갈랐다.
또는 마른나무를 박아서 물을부어 붙게하면 바위결대로 갈라진다
그리고 겨울에는 이 구멍에 물을 부어, 그 물이 얼게되면
부풀게 되어 바위를 갈랐다고하니, 이얼마나 기상천외한 방법인가 - !!
이렇게 갈라진 바위는 톱니처럼 보이겠죠 -
연화대
용장사 삼층탑을 지나 약5분정도 더 올라가면 순환도로(5.16도로)가
나온다. 여기서 통일전쪽으로 몇백미터만 더가면 좌측 봉우리에
연화대가 보인다.
경주 남산은 삼화령이 있다
삼화령은 금오산, 고위산과 이곳 연화대를 삼화령이라 하는데
남산은 정말 불국토로 생각했다는것이
남산은 미륵불과 연관이 깊다
충담선사가 해마다 3월삼짇날과 9월9일 중구절에는 꼭 차를 끓여 미륵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이 삼화령에 미륵불과 관련있는 세분 석불이 있었는데 지금 경주박물관에 옮겨져있다
명확치는 않으나 연화대를 미륵불이 있었던곳으로 생각을 한다
금오봉으로 가는길
12:30분경 5.16도로를 지나 비파골 능선에서 점심을 먹는다
태용이가 맛있고 졸깃 졸깃한 "두치"를 얼마나 많이 보냈는지
모두들 맛있다고 한다
산위에서 솔향기와 함께 마시는 "소맥", 카 - 시원타 !
위의 사진은 "비파골"이다
여기서 잠깐 ! 금오봉을 지척에두고 비파골이있다
32대 효소왕이 망덕사 준공식에 제지내러갔다가 남루한 차림의 노승이
비파암에서 왔다고 공양을 청하자
왕이 별로 달갑지않게 선심쓰듯 공양이나 하라고 말하며
"돌아 가거던 왕과 함께 공양 했다는말은 하지말라" 고 했다.
이 누추한 노승이 "예 -"" 왕께서도 대궐에 가시거든 진신석가와 공양했다는 말은 하지마시오"
하고 구름을 불러 날아가버렸다.
그제서야 왕이 후회를 하고 신하들께 찾으라했지만 비파골짜기 바위에
지팡이를 남겨놓고 사라져버렸기에 왕이 석가사를 짖고 공양을 올렸다는전설이 있다
금오산 정상에서 -
천년을 사는 거북의 머리(금오산)에서 한장
현곡 구미산이 거북의 꼬리고 장안 인 시내의 봉황대는 거북의 알이다
그 두부에 우리가 섰다
짖궂은 박봉이의 손모양이 아무래도 - -
아까 먹은 전복하고 관련이 있남 ?
상선암 윗쪽 상사바위
옛날 이 아랫마을 큰 부잣집에 머슴으로 있는 돌쇄와
이집 아씨에 얽힌 슬픈 이야기다.
돌쇄와 아씨는 서로 사랑하게 되었으나 이사랑은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이란것을
잘 아는 돌쇄는, 어느날 남산 이바위 아래서 종의 처지를 비관하며 목배달아 죽었다.
그날밤, 아씨의 꿈에 그리운 돌쇄가 나타나 이바위에 자기가 있다 하므로
다음날, 그곳에 가보니 돌쇄가 목매어 죽어 있었다.
그리운이의 죽은 모습을 보고 아씨또한 목매달아 버렸다.
그 뒤로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 이름했고 이 바위 아래서 바위 위의 움폭 파인곳에
돌을 던져 얹혀지면 소원이 이루어 졌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유효하다 ( ㅎ ㅎ - )
자 - 이 부처님은 삼릉계 마애석가여래좌상 ( 문화재 158호 ) 이다
상선암 바로위의 이 부처님은 높이가 7m로 삼릉게에서 가장 큰 부처님이시다
광배는 자연 암반을 깎아 삼았는데, 깎아내다가 만 듯 거칠게 보인다
머리는 광배로 삼은 바위와 떨어져 보일 만큼 돋을새김을 하였으나
어깨 부분은 광배 바위 면에서 조금 떨어지게, 나머지 몸은 바위 면에 그대로 붙여서 선으로 그리듯 새겼다.
밑그림은 그냥 자연바위에 선각으로,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돋을 새김으로 윤곽도 뚜렸해지며
얼굴은 완전히 도드라져 깨끗하게 새겨졌다.
또한 옆에서 보면 바위에서 부처님이 서서히 앞으로 솟아나오고 있듯이 조각 되어있다.
이것은, "자연과 부처, 인간, 삼라만상 우주 전체가 하나" 라는
옛 신라 장인의 깊은 뜻이 담겨있다.
또 하나는, 법흥왕 이전 신라인의 고유신앙이 바위신이었다고 한다.
바위에서 부처님이 나타나고 있는 이 형상은
바위에향한 고유신앙을 부처로 바뀌게하는 바램도 여기에 묻어있다고 볼수있다.
풍만한 네모난 얼굴에 눈썹은 둥글고, 눈은 반쯤 뜨고 있다
코는 오뚝하고, 작은 입은 굳게 다물었고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큼직하다.
쉽게 범접하기 어려울 만큼 근엄해 보이는 얼굴이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대함에서 뿜어나오는 위엄뿐만 아니라
자비에 넘치는 얼굴 모습이다
나는 이 큰바위 부처님이 좋아 특별히 큰산을 가지 않으면 주말에 늘 이곳을 찾는다.
상선암에서 10분정도 내려가다 우측골에 우뚝 서있는 보물
삼릉계 석불좌상 ( 보물 666호)
순백화강암으로 조성된 여래상이 화려한 연화대석 위에 앉아 계신다.
연화대좌는 하대석 없이 땅에 있는 지대석 위에 직접 놓은 중대석 위에 얹혀 있다
8각 중대석엔 면마다 안상(眼象)을 새겼다
안상이란 귀인들이 앉는 평상을 말하는 것이니 중대석 위는 절대로 존엄한 세계라는 뜻이다
이렇게 존귀한 평상 위에 보상화(寶相華)로 장식된 화려한 둥근 연꽃송이를 얹어 놓았으니
이 연꽃은 수미산 위에 핀 하늘나라의 꽃송이인 것이다.
이 불상대좌에는 이렇게 찬란한 광채나는 꽃송이를 만들기 위해
애쓴 신라인들의 무한한 정성이 어려 있다.
광배의 가장자리에는 타오르는 불길을 새겼는데 불꽃들이 춤추는 듯 약동하는 모습이다.
이렇게 화려하고 생기에 넘치는 석불광배는 경주남산에서 뿐 아니라 전 신라시대 불상에서도 예가 드문 걸작이다
이 불상은 어느 방향에서 보나 아름답다.
곁에 있는 바위들이며 계곡의 여울 등에 잘 조화되도록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릉계 선각 여래좌상 ( 문화재 159호)
이 선각상 역시 유홍준 전 문화부장관이 입에 침이 마르듯 자랑하는 보물이다.
석불좌상에서 능선으로 조금 더 나아가면 약 10m 높이의 큰 바위에
선각으로 된 여래 좌상이 나온다.
큰 연꽃위에 앉아 얼굴만 돋을 새김으로
옆으로 떨어져서 보면 입체적이다.
암벽 중앙에 지름 2.5m 되는 큰 연꽃위에 앉아 설법인을 표시하고 있는 如來像(여래상)이 새겨져 있다.
몸체는 모두 선각으로 나타내었는데 얼굴만은 돋을 새김으로 표현되었다
눈썹과 눈은 아주 가깝고 코는 길고 입술은 두껍고 커서
균형잡힌 얼굴이라 할수 없으나 소박하여 위엄이 있다.
중요한 선은 굵게 그었고 옷주름같은 것은 가늘게 그어 變化(변화)를 주었다
全體(전체)에서 소박하고 구수한 맛이 풍긴다. 그러나 신라 불상들처럼 세련되지 못했다.
年代(연대)는 高麗時代(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고있다.
바위면의 중간쯤에 가로로 갈라진 홈이 파여 있는데,
위쪽에 불상을 조각하였으며, 연꽃대좌의 아랫단은 홈 아래에 걸쳐 있는것이 특이하다.
삼릉계 선각육존불 ( 문화재 21호)
성각여래상에서 조금만 더 아래로 내려가면 또 보물이 있다
그림으로 그려서 쪼아낸듯한 이런 작품은 보기 드문일로 선각 마애불 로는
어뜸가는 작품으로 평가 되고있다.
신라때의 그림은 거의 없기때문에 이 그림의 가치가 높다고 한다
앞쪽 삼존불은 좌우 협시불이 웃옷을 벗고 꽃쟁반을 들고 꿇어 앉아있는
모습은 보기가 드물다
냉골 석조여래좌상
이렇게 등산로로 내려오면 길옆 바위 위에 머리 없는 석불좌상(石佛坐像)이 앉아 계신다.
근년까지도 계곡에 묻혀 있던 것을 파내어 지금 장소에 앉혀 놓은 것이기 때문에 마멸이 없고 옷주름들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다만 머리가 없어지고 두 무릎이 파괴되어 손 모양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편안히 앉은 자세며 기백이 넘치는 가슴이며 넓은 어깨는 8세기 중엽 신라 전성기의 위풍당당한 불상이다.
특히 왼쪽 어깨에서 가사 끈을 매듭지어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영총(纓總)수실은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우리 나라의 특색 있는 장식품인 매듭은 먼 신라 때부터 전해 왔다는 것을 이 가사 끈이 말해 주고 있다
부처님의 아래옷(裙衣)을 동여맨 끈도 예쁜 매듭으로 매어져 있다
이 불상은 용장사(茸長寺) 삼륜대좌불(三輪臺座佛)처럼 가사끈이 있기때문에
존명을 정하긴 어려우나 여래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두상이 없지만 인근 계곡을 잘 찾으면 두상을 찾아낼수도 있다. 그렇게만되면
어디에도 뒤지지않는 예술작품이라고 한다
석조여래 좌상에서 10여m 떨어진곳에
삼릉계 마애관음보살상이 있다 ( 유형문화재 19호)
기둥모형에 돋을 새김으로 새겨진 부처님으로 머리에 보관을 쓰고 정병을 들고있고
이마에 미륵불이 새겨져 있어 자비로운 중생을 구제 해주는 관음보살 임을 알수있다
돋을 새김으로한 뒷 바위 자체를 광배로 이용하여 자연과 인공이 조화된
통일 신라시대의 작품이다.
오랜세파에 깍이고 바래졌지만
황색 화강암에 부조된 이 불상은, 일몰때 보면 황색 암에서 풍겨나오는
붉은색과 일몰의 기운과함께 이 골 전체가 붉은 광명으로
마치 하늘에서 관음보살님이 내려 오시는듯 황홀하다
삼릉 (사적 219호)
8대 아달라.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이 능을 설명 하기전에 지증왕릉 천마총을 한번 생각해 보자
천마총은 엄청난 숫자의 보물들이 출토되었다
천마총은 돌무지 덧무덤이라고 해서 땅에 목곽과 부장품을 놓고 위에 호박돌을 쌓은 후 다시 봉분을 쌓는 형태로
3세기에서 6세기 초반 경주지역에서만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무덤 양식으로 대표적인 예가 천마총이다.
이 형태의 무덤은 세월이 흘러도 봉분이 무너져 내리지 않기에 경주 지역에 남아 있는 대형 고분들은 대부분
돌무지덧널무덤이라 보셔도 무방하며 도굴도 쉽지 않기에 발굴을 하면 삐까번쩍 보물들이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지난 5월인가 ? 여기 쪽샘지구를 정비하다 또 여기 무덤에서 금관부터 금붙이가 대량으로
니와 현재 발굴 중이다
삼릉의 이 능 들은 도굴로 파혜쳐 졌을때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 돌방 무덤 형식이다
이 봉분둘레에 김유신 묘처럼 석을 둘렀던 것으로 다 없어지고 흙무덤만 남았다
돌방무덤은 말 그대로 돌로 석실을 만들고 한쪽에 입구를 내 출입문을 만든 후 돌방에 시신을 안치 후
입구를 막고 그 위에 봉분을 쌓은 형식이다.
돌무지덧널무덤에 비해 봉분의 크기가 작아졌으나 추가 매장이 가능한 형태였습니다
안타갑게도 도굴이 용이해 경주의 상당수의 돌방무덤은 도굴을 당했습니다.
다음은 이 릉 주인에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신라말기 52대 효공왕(김씨)이 아들이 없어 백관들께 왕의 추천을 요구한바
추천 된 사람이 바로 전 박씨왕조, 여기 3릉중 가운대 릉의 주인 53대 신덕왕이다.
박씨의 전 왕조인 8대 아달라왕릉 아래 뭍혀있다
맨 아래능은 54대 경명왕릉, 신덕왕의 아들로 박씨 이다.
또 하나의 릉, 3릉 인근에 있는 비운의 왕 55대 경애왕
경애왕은 신덕왕의 둘째 아들 (경명왕 동생)로서 릉 위치는 3릉 남쪽에 쓸쓸히 누워있다.(박씨 마지막 왕)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왕비와 궁중 시녀들과 함께 백제의 견훤에게 잡혔다.
경애왕이 보는 앞에서 왕비가 능욕을 당하고 시녀들이 참살당하자 스스로 자결한 비운의 왕이다.
견훤은 왕이죽자 이전 왕조의(김씨 왕조) 족친들중에 한명을 골라 우선 신라통치를 맏겼다.
그왕이 신라의 마지막왕 56대 경순왕(김씨)이다.
경순왕은 백제의 침탈과 겁탈 신라백성들의 핍박을 보다못해
당시 힘이 대단했던 고려에 정권을 내어주려한다.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는
죽음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으나 경순왕은 우리가 죽는것은 두렵지 않으나 백성들의
핍박은 더 볼수가 없다 하고 고려 왕건에게 백성을 구제하는 조건부로 나라를 맏긴다.
마의태자는 홀로 금강산으로 떠나 풀뿌리 약초로 연명하다가 쓸쓸하게 죽게되고
천년사직의 신라는 그렇게 문을 닫게 됩니다.
경순왕의 릉은 경주에 이장하지도 못하고 지금 경기도에 홀로 계십니다.
이렇게 삼릉까지 내려오니 시간이 3시30분정도 되었다
우리가 11시에 산에 올랐으니 식사시간 쉬는시간 모두합해
4시간 반정도 솔냄새를 맡았다는 이야기다.
아직 삼채석불과 지마왕릉 포석으로가는 산책길이 남아 있지만
건천서 기다리는 친구들도 있고 여기서 종료 하기로했다
서울서 이렇게 오기가 쉬운일이 아닌데, 오늘 신라 문화재 답사
안내가 좀 부족해서 미안하다. 다음 언젠가 서남산 칠불암코스는
경치도 좋고 남산 유일의 국보에, 서출지에 헌강왕릉 정강왕릉
도 볼수있으니 그때는 좀더 열심히 안내하겠다.
삼릉이라 택시를 불러 용장주차장에 있는 차를 가져오려하니 "재윤"이가
뛰어 갔다 온단다. 농담인줄 생각했는데 정말 뛰어 가버렸다.
삼릉서 용장이 어딘데 이더위에 -
한 20분쯤 좀 안되었나 ? 정말 차를 가지고 왔다. 저거 인간 아이다.
오후4시쯤 친구들 기다리는 건천에 도착해서 정말 잘 먹고 잘놀았다
건천 동기들 고맙고 서울 친구들 조심해서 잘올라가고
늘 행복하기 바란다.
- 자칭 남산 가이드 죽전 -
첫댓글 자칭 가이드가 아니라 진짜 공인 가이드이구나 ..
入處는 언제 하지- - ?
경주인 서동기 고맙소이다 못 가서 아쉽지만 산죽회 때 생각난다. 기회되면 또 봅시다
반갑다. 해외출장 잘 갔다왔나
오랫만에 카페 들럿는데 수고 많았네.산행사진도 즐감했지만" 같이 산행한 것같은 산행 후기 역시!, 竹田대단하셔..
놀러온너라
竹田박사님!경주시 홍보대사 및 박물관장 하실 생각 없으신지요? 정말 대단 하십니다. 다음 기회 주어지면 참석 할께요^^^
언제 동남산으로 함올라가 보자
남산에 남아 있는 님의 숨결들 새롭네~~
서박사님 한양 촌놈들 내려간다고 꿈틀거리는 조갑지로부터 여러가지 신경 많이 썼더만~~
태용이도 안주거리 준비하느라 그라고 건천에 많은 동기들 먹거리 마련해주고 함께 놀아주고 눈물겹드래이~~
산과 반가운 사람들 한바탕 잔치 ~ 정말 좋은 추억이었네~~
모두모두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
수고했다. 서울 잘 올라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