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융, 만다라, 흰 소.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그리고 글쓰기
1. 정신의 그림자, 무의식의 지배
모든 인간은 태초부터, 어쩌면 태중에서부터 정신의 그림자를 안고 태어납니다. 이 그림자는 곧 우리가 무의식이라 부르는 영역이며, 존재의 위협을 느낀 모든 경험이 깊이 봉인되어 우리 삶의 궤적을 은밀히 지배합니다. 나는 이 무의식의 거대한 힘을 어린 시절 《알프스의 소녀》를 읽으며 처음 어렴풋이 느꼈습니다.
도시로 옮겨진 주인공 소녀 하이디가 알프스에 대한 향수병에 시달려 몽유병을 앓게 됩니다. 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주는 불안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무의식의 문을 열어 하이디를 밤마다 유령처럼 떠돌게 했던 것입니다. 이때, 하이디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나누었던 친구 클라라가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클라라와 주치의는 하이디의 병이 환경으로부터 온 내면의 혼란임을 깨닫고, 그녀를 알프스의 자연으로 돌려보냅니다. 하이디가 고향으로 돌아가 참된 자기(Self)를 되찾고 평안을 얻은 것처럼, 우리 모두는 무의식의 지배에서 벗어나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알프스'를 찾아야 합니다.
평생 안정된 삶을 살았고 지금도 넉넉하게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자를 향한 증오와 열등감에 시달리던 벗이 있었습니다. 그가 털어놓은 내면에는 '300억'이라는 숫자에 짓밟힌 젊은 날의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 숫자가 대한민국 상위 1% 속에 들어가는 기준이라는 말속에는, 300억이 이룰 수 없는 부의 상징으로 그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벗의 황당한 정신을 비판하지 않고 그의 과거 사가 남긴 무의식의 상처에 "재미있다"고 공감해 주면서 "지금 나와 대화 하듯이" 글로 써보라 권했습니다. 고통을 문장으로 옮기는 순간, 나의 벗이 그 숫자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2. 글쓰기는 혼돈을 질서로 엮어내는 창조의 행위
우리 내면, 즉 무의식의 심연은 슬픔, 불안, 해소되지 않은 갈등들로 복잡하게 얽힌 혼돈(카오스)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종일 말을 쏟아내지만, 정작 왜 말하는지, 무엇을 말하는지조차 모른 채 공허한 소리만 토해놓습니다.
그러나 글쓰기는 다릅니다. 이는 무의식에 갇힌 감정의 덩어리들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어 문장이라는 견고한 형식 속에 담아내는 치열한 작업입니다. 감정이 언어로 구체화하고 객관화되는 바로 그 순간, 마음속의 광풍은 정돈된 질서를 되찾습니다. 이처럼 혼돈을 질서의 장인 문장으로 엮어내는 행위는 그 자체가 창조의 행위이자 곧 마음의 평화를 일구어내는 연금술과 같습니다. 성경 창세기 천지창조의 장면을 읽어 보시면 거대한 혼돈의 장에서 질서의 장으로 들어오는 흐름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신앙을 떠나서 꼭 한번은 읽어 보시길 권유드립니다).
3. 흰 소를 찾아 떠나는 여정: 개성화와 만다라
이러한 내면의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은 칼 융이 정의한 '개성화(Individuation)'와 맞닿아 있습니다. 개성화는 우리가 사회생활을 위해 쓰는 가면, 즉 페르소나 뒤에 숨겨진 '진짜 나'(Self)를 발견하고 온전히 실현해 나가는 평생의 고독한 여정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잃어버린 흰 소를 찾아 나서는 선화(禪畫)인 심우도(尋牛圖)의 여정에 비유합니다.
융이 흩어진 정신을 하나의 중심으로 모아주는 상징으로 만다라를 연구했듯, 글쓰기 역시 무의식에 저장된 내 존재에 위협을 준 수많은 상처의 조각들을 한데 모아 핵심 주제라는 중심을 완성하는 내면 통합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이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면 예 아니면 아니오”하는 진솔함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쌓아 올린 사회적 외피를 벗어던지고, 내 안의 취약함과 갈등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용기입니다. 어느 수필에서 요양병원의 어떤 할머니가 평생의 억압인 “씹 해보고 싶다”는 말을 간호사에게 귓속말로 털어놓고 "쉑이 시원하다"고 표현한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독자 입장에서는 상당한 충격일 수 있는데) 글쓰기가 가식이 아닌 '참 나'의 목소리를 세상에 내보내는 통로라는 것을 이해하면 이 진실함 앞에서 감동하게 되고, 작가 자신은 비로소 겉과 속이 일치하는 자아 통합을 이루어내게 되어 무의식 세계가 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4. 문장으로 엮는 치유의 서사: 표현적 글쓰기
표현적 글쓰기(Expressive Writing)는 이러한 치유적 글쓰기를 구체화한 실천입니다. 이는 트라우마나 강렬한 감정 앞에서 맞춤법이나 논리를 잠시 내려놓고, 15분 남짓 오직 솔직함만을 무기 삼아 자기 내면을 쏟아내는 행위입니다. 만일 여기에 거짓을 섞는다면 무의식의 감옥에 자신을 다시 가두는 것이 되니 마음을 비워내기가(무의식의 영역을 청소하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진실로 자신을 털어내는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억압된 감정을 해소하는 카타르시스를 얻습니다. 더 나아가, 고통스러웠던 사건을 객관적인 '서사(Story)'로 재구성하며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에 대한 통찰과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서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이 더 이상 나를 파괴하는 파편이 아니라, 그 고통스러웠던 내 이야기가 인생이라는 거대한 이야기의 한 장(章)으로 편입되면서 비로써 진정한 치유와 성장이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무의식에 갇힌 "한과 앙금"은 영혼의 날개를 묶는 시지프스의 바위입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네"라는 평온의 노래도, 이 내면의 청소 작업 없이는 거짓에 불과합니다. 털어내지 못한 무게 때문에 영혼은 자유로이 날 수 없으며, 타인이 설정한 좁은 문과 허상(虛像)의 지옥에 스스로를 가두고 끊임없이 그 바위를 굴려 올리게 됩니다. 글쓰기는 바로 그 짐을 덜어내는 해방의 기록입니다. 내가 겪은 고통의 가감없는 진솔한 기록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억압된 자신을 직시하고, 나를 지배하고 있는 무의식 세계의 혼돈을 질서로 엮어냅니다.
진실로 자신을 털어낸 자만이 겉과 속이 일치하는 자아 통합을 이룹니다. 그 통합이 일어나는 순간, 우리 영혼은 세상의 모든 짐을 덜어내고, '조나단 리빙스턴 갈매기'처럼 창공을 훨훨 날아오르는 절대적인 자유를 얻습니다. 그리고 백석 시인이 노래했듯이 "눈이 푹푹 내리는 마가리로 가서", 세상의 가식이 한터럭도 없는 순수와 마주하여 "응애 응애 울게 되는" 진정한 자아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산꼭대기에 놓인 바위도 더 이상 굴러떨어지지 않고 거기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